장영수 목사 설교집

기둥이 되리라[하나님은 인격이심, 십자가와부활사건이신앙핵심]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9. 19. 10:08

기둥이 되리라 (3:7-13)    설교집Ⅰ<아침마다 새로우니> 1 No.4

성경본문[개역개정]

6.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7.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러분, 개미와 베짱이이솝우화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는 버전(version)을 바꾸어서 이렇게들 말합니다. 쉬지 않고 일만 하던 개미는 드디어 허리디스크가 걸려서 평생 고생하게 되었고 쉬지 않고 노래하던 베짱이는 그 노래가 히트를 쳐서 대박을 터뜨려 큰 돈을 벌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세상의 젊은이들의 의식구조지요. 그러면 이 이야기에 대한 또 다른 버전은 없을까? 저는 이렇게 해보고 싶습니다. 개미는 역시 착실하게 일을 하더니만 돈을 벌고 또 그것을 가지고 좋은 일에 두루두루 쓰면서, 친구였던 베짱이가 노래를 해보려고 애를 쓰며 무명시절의 서러움을 겪고 있을 때 개미가 묵묵히 밀어주고 도와주다가 어느 날 드디어 베짱이의 노래가 히트를 쳐서 인기를 얻게 되고 돈을 벌게 되고 그러면서 개미가 이제까지 해오던 구제와 선행 이런 것들을 베짱이가 참여해서 무료 자선공연도 하고 이렇게 좋은 일들을 도모하면서 한평생 아주 사이 좋은 친구로 살았다. 재미가 없나보죠?

여러분, 신앙에도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개미형이 있고 베짱이형이 있습니다. 개미형은 좀 보수적 신앙입니다. 반면 베짱이형은 좀 진보적 신앙이에요. 개미형인 사람은 교회를 중심으로 열심히 참석하고 교회에서 하는 모든 봉사에도 열심히 참석하는 형인데 비해, 베짱이형은 상대적으로 사회 중심적이에요. 교회 일에 사사건건 참여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사회에서 해야 할 그런 역할과 책임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입니다. 개미형은 교회 일에 전통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성경 구절을 외우기도 하고 성경공부를 하기도 하고 그렇게 애를 씁니다. 베짱이는 밖의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교회 안에서는 정작 교회의 책임을 강조하며 핏대를 올리면서도 안 믿는 사람들 앞에서는 제법 교회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 개미형과 베짱이형은 다 장점이 있습니다. 반면 약점도 있습니다. 이 개미형 스타일이 방향을 잘못 잡으면 율법주의로 깊이 빠집니다. 그래서 도덕과 윤리를 강조합니다. 도덕과 윤리가 왜 나쁘겠습니까마는 이제 그것이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필립 얀시라고 하는 미국의 유명한 크리스챤 저술가인 그는 이런 개미형 스타일이 잘못되는 경우 사다리 오르기 식 신앙으로 변질된다.’ 이렇게 지적합니다. 이 분은 미국 남부의 보수적인 교회에서 신앙생활 했던 자기의 젊은 날을 회상하면서 미국 남부의 보수적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의 척도는 놀랍게도 이런 것이 기준이었다.’ 라고 하면서 그 기억을 더듬는데 첫째는 술을 마시느냐 안 마시느냐, 담배를 피우느냐 안 피우느냐, 금기라는 것이죠. 두 번째는 영화를 보지 말아야 된다.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찔릴 겁니다. 세 번째는 화장하지 말고 보석 같은 걸로 꾸미지 말아야 한다. 네 번째는 특별히 주일에는 일요일 자 신문을 봐서는 안 된다. 안식일을 깨뜨리는 것이므로. 다섯 번째는 운동을 하거나 또는 운동경기를 관람해서는 안 된다. 여섯 번째는 남녀가 함께 수영을 해서는 안 된다. 일곱 번째는 여자들의 치맛자락이 너무 짧으면 안 되고 남자들의 머리카락이 너무 길면 안 된다. 저 사람이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근거로 이런 것들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다루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필립 얀시는 통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은혜는 어디로 다 메말라 버리고 기껏 도덕과 윤리를 강조한다는 것이, 이렇게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가지고 서로를 비교하고 따지는 잘못되고 빗나간 율법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자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신앙의 기쁨은 사라지고 겉만 꾸미다가 결국에는 자기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외식하는 자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반면 베짱이형은 자유방임주의입니다.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세상에 나가 어울리다가 오히려 그들과 똑같이 아무런 차이를 발견할 수 없이 세속화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들과 호흡하겠다고 나아가다가 신앙의 본질을 똑같이 잃어버리게 됩니다.

개미형이냐 베짱이형이냐. 그것의 장점을 가지되 이 두 가지 신앙이 빗나가지 않도록 중심에서 우리를 붙들어줄 수 있는 신앙의 본질, 신앙의 핵심이 무엇이냐?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죠. 이게 바로 생명이죠.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에게 날마다 감격이 있고 고백이 있을 때에 그의 기질이 개미형이든 베짱이형이든지 그 때부터는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과 은헤를 가지고,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이 약해지거나 놓치면 우리는 줄 끊어진 돌멩이같이 튀어나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개미형이 더 왜곡되어 나가버리면 율법주의가 되고 더 나아가 버리면 고행주의가 됩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대 속에는 나는 못하지만 목사님은 이렇게 해주었으면하는 그런 기대가 있습니다. 그게 어느 정도는 바람직하지만 오버하면 안 되는 거죠. 성경에도 보니까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들의 신앙은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라고 하는, 온통 금기로 차있는 신앙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니까 신부, 수녀라고 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그가 마음에 감동이 있고 서원이 있어서 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그것을 제도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죠. 그건 뭘 말합니까? 이렇게 영과 육을 함께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혼인을 금하라.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이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 속에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결혼하지 말라는 교인들의 요구가 강했기 때문에 교회는 신부제도를 만들고 수녀제도를 만들고 또 그 사람들을 세상과 격리하기 위해 수도원을 만들고 거기에 가두어두고 나오지 말라고 했던 것이죠. 그것은 율법주의의 한 정형적인 모습이죠.

또 반대로 카톨릭이 갖는 또 하나의 약점은 뭐냐? 어느 나라에 들어가든지 그 나라의 문화와 쉽게 결합합니다. 제사를 인정합니다. 받아들입니다. 카톨릭이 가지고 있는 교리는 카톨릭은 구원의 큰 고속도로요, 개신교는 옆에 있는 국도요 그리고 기타 세계의 많은 종교들은 다 구원에 이르는 희미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흔히 우리가 말하는 대로 한라산에 올라가는데 동서남북 여러 방향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듯이 그렇게 결국에는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 이게 바로 종교다원주의라고 하는 것이죠.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감격과 체험이 약해지면 이쪽으로 가도 변질하고 저 쪽으로 가도 변질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예수를 믿어야 합니까? 이 물음에 대해서만큼은 정확히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왜 예수를 믿어야 합니까? 제가 예전에 전도를 다니다가 40대 후반의 여자 무당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와 오랜 시간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이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마음을 열고 자기의 삶의 스토리를 쭉 털어놓고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이렇게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내 안에 몸주신이 있어서 나를 누르고 또 이것이 이번에는 내 자식 놈에게까지 가서, 우리는 벌써 말하지 않아도 내 아들과 나는 느낌으로도 통하고 눈빛으로도 통하고 벌써 이러한 영이 역사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죽지 못해 사는 것입니다.’ 굿하고 점치고 사주팔자, 택일, 운세, 부적, 수많은 미신과 수많은 잘못된 것들로 우리들의 삶이 가득 차 있습니다.

혹시 어떤 분들은 나는 그런 거 관계 없다.’ 할는지 모르지만 또 하나의 변형된 형태로,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이 주신 만물이 있지만 우리의 생각은 어둡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욕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땅히 살아야 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안다 할지라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지만 정작 나 자신은 늘 불행의 씨앗을 뿌리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그가 어느 날 부자의 초대를 받아서 새로 마련한 큰 집에 찾아갔습니다. 평소에 철학을 한답시고 가난하게 사는 소크라테스를 경멸하던 부자는 자기 집을 자랑합니다. 방을 다 보여주고 돌아다니면서 자랑을 합니다. 한참 쫓아다니면서 구경하던 소크라테스가 갑자기 하더니 부자의 얼굴에 가래침을 하고 뱉었습니다. 부자가 놀라가지고 아니 이게 무슨 짓이냐?’ 소크라테스가 말합니다. ‘, 미안합니다. 이 집이 얼마나 깨끗한지 침 뱉을 곳이 그 얼굴밖에 없더라고요.’

여러분, 살만한 조건 그만하면 다 이루어졌습니다만 마지막 남은 내 마음, 정말로 행복을 날마다 물 긷듯 길어야 할 터인데 내 마음이 어떠합니까? 바로 이것을 해결하시고 이것을 고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요, 부활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일으켜놓으시고 우리의 삶 속에 늘 그 은혜로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말씀으로 들려주십니다. 우리 삶의 여러 가지 사건으로 우리에게 싸인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에 귀신과 같이 싫다고 하는 사람을 강제로 영혼 속에 들어가서 그를 억누르고 깨뜨리고 짓밟지 않습니다. 그는 인격이십니다. 우리를 대우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늘 말씀하십니다. 깨닫게 하십니다. 생각나게 하십니다.

이제 성경은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메시야, 그리고 그 분이 바로 나를 위하여 천국 문을 활짝 열어놨으니 그 누구도 이 문을 닫을 자 없도다.’ 이것이 바로 무지하고 무능하고 날마다 불순종하던 나를 위하여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시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총입니다. 교회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 은총에 새롭게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우리의 무릎을 꿇고 다시 한 번 우리의 더러워진 마음을 이 피로써 새롭게 씻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영화 보셨습니까?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란 영화. 참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그 영화의 배경은 공산혁명이 일어나던 20세기 초, 러시아에 살던 유대인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부부와 장성한 세 딸이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가난에 시달린 부모는 딸들이 좀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이 부잣집에 시집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큰 딸이 그 동네에서 지지리도 가난한 양복쟁이하고 눈이 맞아서 그와 결혼하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너는 가난을 벗을 수 없고 평생 고생하게 된다.’ 라고 아무리 만류해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하나하나 시집보낼 때마다 설득하다 못해, 결국은 사랑하는 딸들을 보내줄 때마다 노래를 부릅니다. ‘Tradition, Tradition’ ‘전통을 지켜라. 우리의 신앙전통을 지키자.’ 라고. 첫째 딸은 가장 가난한 사람과 결혼하고 떠나갑니다. 둘째 딸은 놀랍게도 공산주의 운동하는 청년과 만나가지고 그와 사랑에 빠지더니, 멀리 떠난 그를 좇아 집을 떠나게 됩니다. 마지막 셋째 딸마저 유대인들을 그토록 괴롭히던 러시아 청년과 사랑에 빠져 그를 따라 떠나가게 됩니다. 가난도, 이념도, 인종도 사랑 앞에서는 결국 장벽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딸들을 사랑하기에 그 딸들을 묶어둘 수 없었던 아버지는 눈물과 함께 내일의 소망을 가지고 그 딸들을 보냅니다.

사람끼리의 사랑도 이렇게 무섭습니다. 하물며 하나 밖에 없는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눈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문을 열어놓으시고 아무도 그 문을 닫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날마다 호흡같이 느끼고 받아들일 때, 그 때 우리의 삶은 비로소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적은 능력으로 내 말을 지키고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구나.’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찾지 아니하십니다.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한 발 나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내가 네게 면류관을 주고 너를 하나님 나라의 기둥이 되게 하리라.’ 여러분 가정의 기둥으로, 우리 일터의 기둥으로, 복음을 통하여 날마다 확장되어 나갈 하나님 나라의 기둥으로,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연약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만 듣지도 못했고 하나님이 날마다 손짓으로 숨결로 사건으로 우리에게 계속 싸인을 보내시지만 고집스럽게도 듣지 않고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했던 우리의 불신앙을 용서하시고 오늘도 인내하며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하시고 그 사랑을 좇아 은총 속에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