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준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
사실 우리의 ‘정치경제학’은 일본에서 빌려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본에서는 이미 오래전 이 명칭의 잘못을 논증하고 두 원어를 모두 똑같이 ‘경제학’으로 번역하고 있다. 일본에서 발간된 마르크스 <자본론>은 ‘정치경제학 비판’이 아니라 ‘경제학 비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을 소개하는 대중강연에서 자주 받는 질문이 하나 있다. 경제학의 명칭을 둘러싼 혼란과 관련된 것인데 ‘정치경제학’이라는 용어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 용어는 고유의 우리말이 아니다. 폴리티컬 이코노미(political economy)라는 영어를 번역한 말인데 이 번역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경제학’으로 번역해야 한다.
물론 외국어의 번역은 다양할 수 있고 어떤 것이 반드시 맞고 다른 것은 틀렸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모든 언어는 고유의 ‘낱말 밭’을 가지고 있고 두 밭의 낱말이 곧바로 일치하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술어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그것은 논의의 대상을 정확히 구획지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정치경제학’이 잘못된 번역어인 것은 먼저 그 원어의 형성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용어는 원래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하는 이코노미(economy)에서 출발하였다. 그것은 그리스의 경제 단위인 가족농장(노예농장)의 관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개인을 단위로 한 이 용어는 국가가 경제 단위로 등장하는 절대주의 시대에 폴리티컬(political)이라는 용어와 결합하였다. 그래서 폴리티컬 이코노미는 가족(사적)경제에 대비되는 국가(공적)경제의 관리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때 폴리티컬이란 말은 ‘정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가리킨다. 따라서 ‘정치경제학’은 잘못된 번역이고 굳이 직역한다면 ‘국가경제학’으로 번역할 수는 있을 것이다.
원래 ‘경제의 관리’라는 의미를 갖던 이 말은 애덤 스미스 이후 학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국부론> 제4편에 정의된 그 학문의 정의는 “국민과 국가를 모두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가족경제와 국가경제의 결합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정치경제학’과 별개로 ‘경제학’이라는 학문 명칭이 따로 존재하는 혼란이 발생한다.
우리나라에서 경제학으로 번역되는 원어는 이코노믹스(economics)이다. 이 말은 원래 위의 이코노미와 같은 의미로 혼용되던 것을 1890년 앨프리드 마셜이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것을 앞의 원어와 구분하여 별개의 학문 명칭으로 지칭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둘은 모두 동일한 학문을 가리키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그 학문의 명칭을 무엇으로 할지와는 별개로 이 둘에 서로 다른 학문의 명칭을 부여하는 것은 사실상 틀린 것이다.
사실 경제학은 이 둘 외에도 많은 다른 명칭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폴리티컬 이코노미와 함께, 직역하면 ‘경제과학’과 ‘국가경제학’이란 용어를 주로 사용한다. 하지만 이들 나라에서 이코노믹스는 사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만일 ‘정치경제학’과 ‘경제학’을 별개의 명칭으로 번역한다면 이들 나라에는 우리가 ‘경제학’으로 번역할 수 있는 학문이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더구나 마셜 이전에는 후자가 학문의 명칭으로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경제학의 역사도 애덤 스미스가 말했듯이 15세기의 중상주의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19세기 말 마셜에서 시작된다. 이전의 학문은 경제학이 아닌 다른 학문이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1980년대에 마르크스 경제학을 ‘정치경제학’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당시의 출판 검열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사실 틀린 용어이다. 마셜과 함께 신고전파 경제학을 만든 제번스, 발라가 모두 자신의 저서 제목에 폴리티컬 이코노미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들 두 원어는 경제학의 여러 명칭 가운데 일부일 뿐이며 전자가 가장 오래 널리 사용되는 것인 반면 후자는 최근 그것도 미국과 영국 일부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명칭인 것이다. 이들 둘을 별개의 명칭으로 부르는 것은 경제학이라는 학문을 왜곡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정치경제학’은 일본에서 빌려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본에서는 이미 오래전 이 명칭의 잘못을 논증하고 두 원어를 모두 똑같이 ‘경제학’으로 번역하고 있다. 일본에서 발간된 마르크스 <자본론>은 ‘정치경제학 비판’이 아니라 ‘경제학 비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혹시 이 용어 문제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는 이헌창의 <경제·경제학>과 제임스 스튜어트의 <경제의 원리> 일본어판 옮긴이 해설(다케모토 히로시)을 추천해 드리고자 한다. 한국어가 학술어로 발돋움하기 위해 이제 우리도 용어의 과학화에 조금 신경을 써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