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골산 봉서방(제11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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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으신후 댓글은 사랑의 표현 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한 번 하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고난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당하는 고통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아니지만 그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원망하기 이전에 그 속에서 피어나는 고난의 뜻을 찾아야 한다. 그 뜻 중의 하나가 '사랑의 완성'이다. 고난은 우리를 참 사람으로, 참 사랑으로 태어나게 한다. 작은 것의 의미를 깨닫고 소중이 여기게 하고, 현재의 살아 있음에 감사하게 한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은 의를 위하여 싸우다 박해를 당하는 고난을 말한다. 고난은 죄의 결과가 아니며,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삶의 방식이다. 이 고난은 수동적으로 감수해야 될 운명적인 요소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들의 적극적인 삶으로 말미암은 당연한 결과다. 이 고난은 그 고난 자체로 의미가 있다. 고난은 우리 영성을 정제하고 단련시킨다. 우리는 의를 위해 고난을 많이 당해본 사람들의 얼굴과 삶 속에서 깊은 영성을 발견하게 된다. 고난의 영성을 지닌 사람은 남의 고통과 고난을 지나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당하는 고난과 함께 하고
고통을 나누어 가지려 한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잘못이나 악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 큰 뜻을 품고 옳은 일을 할 때 고난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의(義)를 위해 힘쓰다 감옥에 갇힌 수많은 사람을 알고 있다. 그들은 모두 우리가 당해야 할 고난을 대신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의 삶에서 고난이 가져온 생명력 있는 영성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우리 또한 우리의 삶 속에서 의를 위해 힘쓸 때 닥쳐오는 고난을 의연하게 맞이해야 한다.
- 김 진, <팔복의 영성>/자료ⓒ창골산 봉서방
자신의 죄를 인식하는 사람은
결국 의미는 종교의 모든 것이다. 레오나드 스위트가 주장했듯이, 자유주의의 몰락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다.
신앙이 의미하는 바를 계속 축소하고,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축소 수정하며, 지배적인 문화적 추세를 따라잡기 위해 요령 있게 변화하고 움직여 나감으로써 자유주의는 가장 기본적인 측면들에 대해 말할 능력을 상실했던 것이다. 그래서 곧 “좋은 교회란 믿음이 있는 교회가 아니라 많은 업무 팀과 특히 많은 위원회를 가지고 일하는 교회, 끊임없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교회가 되었다.” 교회가 일을 수행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교회의 신실함은 교회가 정해 놓은 활동에 따라 측정되었다.
그러나 이런 활동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점점 멀어지고 이웃 사랑에 점점 가까워져서 급기야 이웃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집어삼키게 되었다. 그 다음에 이 이웃 사랑은 변모를 거듭해, 믿음이란 것이 세상에서의 정의 추구를 의미하게 되었다. 정의 추구라는 것은 기독교적인 관심사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독특하게 기독교적인 것은 아니다.
이전의 자유주의자들이 따랐던 이 길이 지금은 복음주의 안에서 아마도 거의 전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 데이비드 웰스, <신학실종>/자료ⓒ창골산 봉서방
톰킨스는 아주 솔직하게 교사인 그녀가 갖고 있는 강박증을 고백한다. 그녀는 자신이 학생들이 알아야 하고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음 세 가지에 더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첫째, 학생들에게 내가 얼마나 똑똑한 교사인지를 보여주는 것, 둘째, 학생들에게 내가 얼마나 지식이 많은지를 보여주는 것, 셋째, 학생들에게 내가 얼마나 수업준비를 충실히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 나는 이처럼 교실에서 세 가지의 연기를 해왔는데, 그 진정한 목적은 학생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나를 훌륭하다고 생각하도록 유도하려는 것이었다.”
이어 그녀는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하다가 우리 학자들은 그만 연기자가 되어버린 것일까?”
그녀는 그 대답은 공포라고 말한다. “사기, 우둔, 무지, 어색함, 바보, 비겁자 등 당신의 본질이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 그것이 이런 연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 제인 톰킨스 ‘Pedagogy of the Distressed’ 파커 팔머 <가르칠 수 있는 용기>에서 재인용/자료ⓒ창골산 봉서방
분명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자발성을 기르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심이 틀림없다. 이런 저런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지시보다는 성품의 개발이야말로 하늘 아버지의 기본 목표임이 분명하다. 그분은 우리를 인도하시지만 우리의 자리까지 침범하시지는 않는다.
그 사실을 알진대, 연필과 빈 종이를 들고 앉아 그분이 불러주시는 대로 하루 일과를 받아 적는 식의 태도는 삼가야 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그 날 해야 할 일을 소소하게 다 불러준다고 생각해보라. 아이는 그런 체제에서 제대로 발육되지 않을 것이다. 부모는 자녀 스스로 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자율성을 길러 주는 방식으로, 그 정도까지 지도해야 한다.
하나님도 이와 똑같이 하신다. - 스탠리 존스/자료ⓒ창골산 봉서방
교회는 우리가 만든 창조물이 아니다.
능숙한 선장은 폭풍을 만났을 때 폭풍에 반항하지 않으며 절망하지도 않는다. 항상 확고한 승산을 가지고 최후의 순간까지 전력을 다해서 활로를 열려고 한다. 여기에 인생의 고난을 돌파하는 비결이 있다.
'지혜의 바다에서 건져올린 행복한 소금' 중에서
곤경에서 쉽게 벗어나는 방법은 없다. 곤경은 저돌적으로 정면 돌파해서 뚫어야만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
아무리 힘든 시기라도 지나고 나면 그 고통을 잊게 된다. 하루, 한 주, 한 달, 이렇게 시간이 가는 동안 어떻게든 크고 작은 곤경을 뚫고 헤쳐 나왔고, 지금 이렇게 살아 남았있는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아무리 힘든 날도 '참 힌든 시기였어. 하지만 잘 견뎌냈어'하며 웃을 날이 찾아온다는 것을.
고난 돌파에 힘이 되어 줄 명언 7선
빠져나가는 최상의 방법은 뚫고 나가는 것이다. - 로버트 프로스트
역경에 부딪쳐서 고난을 극복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참된 능력을 알지 못한다. - 벤 존슨
낙관론자는 고난속에서 기회를 엿보고, 비관론자는 기회속에서 고난을 본다. - 처칠
용기 있게 행동하라. 불운하다면 불행에 맞서라. - 롬멜
마음은 극히 주관적인 장소이므로, 그 안에서는 지옥도 천국이 될 수 있고 천국이 지옥으로 될 수도 있다. - 존 밀턴
신이 말하기를,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져도 좋다. 단 대가를 지불하라. - 에스파냐 격언
사람은 운명의 포로가 아니라 자기 마음의 포로일 뿐이다. 내일 우리가 실현하고자 하는 것을 막는 것은 오늘 우리가 가진 의구심일 뿐이다. - 프랭클린 루즈벨트/자료ⓒ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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