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밥값을 못하는 날에는 밥을 먹지 않는다. 남들이 밥을 왜 안 먹냐고 물으면 밥에게 미안해서 밥을 먹지 못한다고 대답한다. 그래서 굶는 날도 많다. 높으신 양반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밥값을 못하면 밥을 안 먹었으면 좋겠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편하면 아이들이 그만큼 고생을 한다. 반대로 선생님이 힘들게 고생을 하면 그만큼 아이들이 웃는 법이다. 이 땅의 공직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발이 부르트도록 고생을 해야 국민이 행복한 법이다.
밥값을 하는 공직자들이 이 땅에 많아야 하는 까닭이다.
이렇게 우리나라 곳곳에서 일자리를 못 찾고, 실직을 하고, 벌이가 적고, 가정이 파탄 나고, 병이 들고, 월세가 밀리고, 학원비가 밀린 사람들이 집에서 산에서 공원에서 다리 위에서 날마다 죽고 있다.
직업을 잃는 실업치고 힘들지 않은 실업이 있을까 만은 젊은이의 실직보다 더 무서운 것이 가장의 실직이다. 가장이 생계를 유지할 능력을 상실하면 그 가족 또한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이다.
국가는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국가를 선진화하느라 겨를이 없고, 사회는 무서운 정글로 변해서 누구도 이들을 돌보지 않는다. 나는 내 새끼들 먹여 살리느라 정신이 없고. 그렇지만 누군가 죽을 만큼 힘이 들 때 기댈 곳이 없다는 것은 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몇 년 전에 내 친구가 자살을 했다. 좋은 친구였다. 친구는 열심히 사업을 하다가 원청업체로부터 받은 어음이 부도가 났다. 친구는 그에 따른 자금 압박을 받다가 결국 사채까지 빌려서 돌려막기를 하다가 빚 독촉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했다.
친구는 최저가 입찰로 받은 원청업체에서 다시 하청에 재하청으로 내려온 일을 하다가 부도가 났다. 어느 날 친구는 소주 한 잔에 취해서 우리 사회가 이러면 안 되는 것이라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대기업이 관행으로 저지르는 이러한 짓은 중소기업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사람까지도 죽이는 짓이라 했다. 그러면서 문제점을 조목조목 얘기하는데 이 친구를 중소기업청장 시키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친구는 죽기 하루 전에 아이의 밀린 우유 값을 갚고, 앞집 구멍가게에 밀린 담뱃값과 소주값을 갚고, 정신지체인 큰 아이의 볼을 하염없이 어루만지고 나서 그날 저녁에 욕실에서 목을 맸다.
이제는 자살과 사회적 살인을 구분해야 할 때가 됐다. 여기저기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혹시 이들을 연쇄 살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할 때가 됐다. 우리 사회가 날마다 저지르고 있는 일종의 청부살인 말이다.
신문에 누가 죽었다고 나오면 남의 일처럼 혀만 찰 일이 아니다. 나만 생각하고 내 입만 생각하는 우리 모두가 그 사람들을 죽인 범인일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먹는 한 숟가락의 밥, 하루 중에 단 몇 분, 내가 번 돈과 내 노동의 일부라도 세상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죽음의 행진을 막을 수 없다.
우리는 쉽게 생각한다.
‘누군가 하겠지’
하지만 내가 돈과 시간을 내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도 내지 못한다.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할 사정이 있다면 다른 사람도 그러한 사정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내 호주머니에 있는 단돈 천원이라도 누군가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우리였으면 좋겠다.
그것이 우리가 밥값을 하며 사는 일이 아닐까 싶다.
by 괜찮은 사람들
박완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