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시작된 계기나 취지에 비추어 일이 기대하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동안 적지 않은 사회적인 관심과 파장을 낳고 있는 미투 운동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지난 1월 서지현 검사의 용기 있는 폭로로 촉발된 이 운동이 목표로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알게 모르게 일상화된 성폭력, 특히 그중에서도 사회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는 남성들에 의해 저질러진 성 폭력의 실상을 고발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양성평등을 구현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서 검사의 폭로 이후 사회 각 분야에서 그야말로 들불처럼 터져 나온 미투 운동에 대해 많은 시민들이 호응하고 응원을 보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대와 달리 한쪽에서는 미투 운동을 두고 의외의 논쟁이 전개되고 있어 안타까움을 준다. 여성 대 남성이 반목하는 이른바 성 대결로 치닫고 있는 현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미투 운동의 본질 미투 운동을 성 대결 양상으로 오도하는 이러한 움직임은 당사자인 여성은 물론 남성에게도 결코 득이 되지 않는다. 익히 지적된 대로, 미투 운동의 도화선이 된 성폭력은 본질적으로 성 문제를 넘어 권력의 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권력의 문제는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가 있는 자가 자기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그 지위를 이용해 억압하고, 또 그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 이래로 시대와 공간을 불문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어 온 현상이다.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와 장소는 없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은 이런 억압의 구조가 ‘성’을 대상으로, 특히 그 가운데 ‘여성의 성’을 대상으로 작동해 온 것을 고발하는 외침이다. 따라서 이런 억압의 일상화된 구조가 혁파되지 않는 한 그 일탈된 권력의 비열한 칼끝은 수시로 옷을 갈아입으며 남성들에게도 겨눠질 것이고, 또 실제 겨눠져 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점에서 미투 운동을 여성 이기주의로 몰아붙여 진영논리로 환치시키는 남성들은 이것이 단순히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는 차원을 넘어 결국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일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문제의 본질이 이러함에도 미투 운동을 성 대결로 오도하는 일부 남성들의 일탈된 의식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듯하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의 영화화와 관련된 논란도 그중 하나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갈파했던 보봐르의 주장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집요하게 실현되어 왔는가를 보여주는 이 소설은 진즉부터 페미니즘을 못마땅해 하는 남성들의 공격 대상이 되어 왔다는 것은 익히 들어온 대로이다.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여배우를 공격하고 아직 촬영에도 들어가지 않은 영화에 대해 평점 1점을 매기는 이른바 ‘평점 테러’가 벌어지고, 급기야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이 소설의 영화화를 막아달라는 청원까지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 배척과 증오의 뿌리 깊은 근원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른 이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면 기다렸다는 듯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질문 하나가 있다. 사람은 다른 이의 삶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나를 포함한 한국의 남성들은 같은 시대를 산 여성들의 삶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을까? 딸아이들과 페미니즘이나 미투 운동에 대해 이야기 할 기회가 이따금 있다. 그럴 때면 날을 세우며 현실을 진단하고 비판하는 쪽은 당연히 딸아이들이고, 나는 ‘그래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성을 적으로 여기거나 남성문화에 대한 증오를 앞세우면 안 되고 함께 가는 방향을 모색해야 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냐?’며, 아이들 귀에는 딱 교장 선생님 훈화로 들릴 말만 되풀이 하곤 한다. 이건 결코 가식이 아니다. 증오가 남아있으면 혁명도 부질없다는 것을 믿는 까닭이다. 그러나 나의 이 ‘먹물’로서의 신념은 토론의 막바지에 어김없이 터져 나오는 딸아이들의 한 마디에 무력하게, 아주 무력하게 무장해제당하고 만다. “아빠가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봤어요?”
무엇이 아직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아본,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한 것도 아닌 젊은 여자아이들로 하여금 이런 ‘한’을 갖게 했을까? 죽었다 깨도 내가 그 ‘한’을 이해할 수 있을까? 82년생 김지영 씨가 살아오면서 품었던 의문들 - 왜 어릴 때 할머니는 맛있는 것이 생기면 꼭 남동생부터 먹였고 손이라도 댈라치면 등짝을 후려치며 눈을 흘겼는지, 왜 거의 폭력에 가까웠던 짝꿍 남자아이의 거친 행동에 대해 선생님은 항상 걔가 널 좋아하기 때문이니 참으라고 했는지, 왜 집 앞 정류장까지 쫓아온 남학생 때문에 겁에 질렸을 때 아빠는 이게 다 네 평소 행동과 옷매무새 때문이라며 오히려 자신을 혼냈는지, 왜 가족을 위해 꿈을 접는 쪽은 오빠나 남동생이 아니라 누이여야 했는지, 왜 공부는 내가 더 잘했는데 취직은 동기 남학생이 더 잘되었고 일도 내가 더 야무졌는데 승진은 남자 후배가 더 먼저 했는지, 왜 주민등록번호는 남자가 1번으로 시작하고 여자는 2번으로 시작하는지, 하는 등등의 의문들을 나는 살아오면서 거의 품어본 적이 없다. 82년생 김지영 씨보다 얼추 한 세대는 먼저 태어났으니 성차별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던 시대를 살아왔으면서도 이런 것들에 대해 나는 고개를 갸웃한 적이 없다. 당연히, 원래 그랬고 그때도 그랬고 앞으로 그럴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이해보다 먼저 공감을 이런 내가 딸아이들의 ‘한’을 ‘이해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해했고 또 이해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면, 그것은 아마 마치 이사할 때 좁은 상자에 얼기설기 쑤셔 넣어지는 잡동사니들처럼 ‘내 삶의 틀’ 속에 딸아이들의 ‘한’을 구겨 넣는 데 성공했음을 의미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이것이 이해일까? 이해는 고사하고 상대방 입장에서는 ‘이해당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그러니 자기식으로 이해하고, 또 그를 통해 일방적으로 손을 내밀거나 거두지 말 일이다. 대신 고개를 끄덕일 일이다. 상대의 삶을 자기 삶의 틀 속으로 무단히 끌고 들어와 세팅하려 하지 말고, 그의 눈을 응시하면서 그의 삶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공감의 자세가 그에게 더 위로가 되고 힘이 될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이것이 미투 운동에 대해 ‘대한민국에서 남성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무엇보다 먼저 가져야 할 태도요 최선의 예의라고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