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데살로니가전서 강해(29) 주 재림, 대망의 교회 생활③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8. 13. 21:24

"교리적 교훈 - 그리스도의 재림"
- 주 재림, 대망의 교회 생활③-
대신(對神)관계의 생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석원태 원로목사


2.교회를 향한 교훈(살전 4:1-5:28)

Ⅰ. 실천적 성화생활-더욱 많이 힘쓰라(살전 4:1-12)
Ⅱ. 교리적 교훈-그리스도의 재림(살전 4:13-5:11)
1. 예수 재림과 부활(살전 4:13-18)
2. 예수 재림의 시기와 대망(살전 5:1-11)
3. 주 재림, 대망의 교회 생활(살전 5:12-22)

 

첫째, 대인관계(對人關係)의 생활(살전 5:12-15)

1) 교역자 대 교인 간의 생활이다(살전 5:12).
2) 신자 대 신자 간의 생활이다(살전 5:13b-14).
3) 신자 대 불신자의 생활이다(살전 5:14b-15).

 

둘째, 대신관계(對神關係)의 생활(살전 5:16-18)

이는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범사에 나타내는 3대 생활 규범이다.
대신관계(對神關係)에 있어서는 먼저 본문에 있는 세 가지 명령, 곧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실로 신자들에게 있어서 아주 소중하게 받아들여야 할 내용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해도 괜찮고 안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행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기독신자들이 따라야 할 필수적 문제라고 하였다. 이 세 가지 명령은 상호 밀접한 관계가 있는, 높은 신앙생활의 미덕이 된다.

기도 없는 기쁨이 있을 수 없고, 감사 없는 기도가 진정 되지 못하고, 기쁨이 없는 감사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미덕은 다 같이 밀접한 관계성을 가지고 일관성 있게 작용하는 것들이다. 일종의 3대 실천강령처럼 느껴지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1)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고 하였다.

‘항상’이라고 하는 말은 쉼 없는 매순간 순간마다의 기쁨을 뜻하고 있다.
여기 ‘항상’이란 말은 ‘어느 경우나’, ‘어떤 형편에든지’, ‘언제나’ 등의 의미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1) 거듭난 중생의 씨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시 16:11). 시편 119편 105절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하였다.

(2) 구원의 감격이 항상 기쁨을 일으킨다.
베드로전서 1장 6-9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하였다.

(3) 성령으로 기뻐하는 기쁨이다.
신자들에게는 보혜사의 은총이 내주한다(요 14:16). 그리고 신자들에게는 「진리의 성령」이 내재하고 있다(요 15:26). 로마서 17장 17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였다.

(4) 사죄와 용서가 계속되기 때문에 항상 기뻐한다.
누가복음 15장의 세 가지 비유, 즉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어버린 탕자의 비유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기 자녀, 자기 백성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그를 기뻐 받으시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기쁨이요, 사자들의 기쁨이요, 이웃과 동료들의 기쁨이라고 하였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마 18:22)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이 우리 기쁨의 근원이다.

(5) 주를 위해 고난을 받을 때 기뻐하게 된다.
마태복음 5장 11-12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였다.

(6) 복음이 전파될 때 기뻐하게 된다.
주님이 파송하셨던 칠십 인의 전도대가 기뻐 돌아와서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라고 전도의 결과를 보고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고 하셨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눅 10:21)라고 감사하였다. 사도행전은 이러한 복음전파로 인한 기쁨이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의 기쁨이다.
쇼펜하우어(Schopenhauer) 같은 염세주의 철학자는 사람을 보기 싫어하고 의심하였다. 그래서 자기 머리와 수염을 깎아주고 면도해 주는 이발사에게 불안과 공포를 느꼈다. 심지어 자기 어머니가 마련한 음식물도 믿지 못하고 의심하며 불안해 했다. 이런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을 수 없다.

(7) 내세의 즐거움이 우리로 하여금 항상 기뻐하게 한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신자들은 영원한 불사의 몸, 영화로운 부활의 몸을 받게 된다. 그리고 무죄세계에서 의로운 주님의 통치를 받게 된다. 영생하게 된다.
그래서 베드로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4)고 하였다. 바울 역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라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을 합치면 「주 안에서의 기쁨」이다(빌 4:4, 1:4, 18, 2:17-18, 3:1, 4:4, 10).
‘항상 기뻐함’은 그리스도 교회의 공동체가 그 생명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이 기쁨은 사실상 성령의 열매인 것이다(갈 5:22). 그래서 항상 감사가 넘치는 교회는 언제나 무슨 일, 어떤 일에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한다. 저들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가 주 안에서 형통할 줄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자들(교회)의 감사의 발로이다.

2)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하였다.

(1) 그 뜻이 무엇인가?
여기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말에 유의해야 한다. 이 말을 잘못 생각하여 엿새 동안의 모든 활동을 아예 중지하고, 기도만 하고 있으라는 말로 이해하면 안 된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교회나 개인(가정)이 전혀 기도에만 전무하고 힘써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① 규칙적인 기도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마치 다니엘이 왕의 어인이 찍힌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을 열고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한 경우와 같다(단 6:10). 오늘 우리 교회가 주일 밤, 수요일 밤, 금요일 밤, 매일 새벽에 정해 놓고 계속하는 기도류들이다.
② 비정규적인 기도, 이른 바 성령 안에서 행하는 무시기도의 계속이다.
언제 무슨 일에든지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을 뜻한다.

(2) 그 이유가 무엇인가?
① 항상 기도하는 것은 주님 자신의 명령이기 때문이다(살전 5:17).
마태복음 7장 7-8절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였다.
② 항상 기도하는 것은 그 자체가 복이 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로 ‘기도’는 ‘바락’(?????)인데, 그것은 무릎을 꿇는 것, 곧 기도를 뜻했다.
왜 기도함이 복이 되는가? 그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전적 무능력과 무지한 상태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와 축복을 받게 되는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만들거나 섬기지 아니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③ 항상 기도해야 사탄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벙어리 귀신 들려 고생하는 어린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 아비가 말하기를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고 파리하여 가며, 귀신이 자주 불과 물에도 던진다고 하면서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소서.”라고 하였다. 그때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고 하시며 귀신을 명하여 그 아이에게서 나오게 하였다. 아이는 회복되어 아버지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있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막 9:28)라고 질문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하셨다.
그래서 종말의 날에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 곧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을 이기는 비결이 기도(깨어, 각성)라고 하였다(계 16:15).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할 때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엡 6:18)고 하였다. 그것은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고 이기는 무기 중에 하나라고 하였다(엡 6:11).
④ 항상 하는 기도는 성령의 능력을 받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였다. 제자들은 그렇게 순종하고 기도하던 중에 오순절의 성령역사를 체험하였다. 그 결과 하나님의 하신 큰일을 설교함으로 처음 교회가 탄생하였다(행 1:5-2:13).
⑤ 항상 기도해야 할 이유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무수한 사건과 일들을 기도를 통해 승리로 처리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실로 다양하고 다변적인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미개했다고 하던 고대 원시생활에 비해 현대는 너무 복잡하다. 유형, 무형의 사건들을 날마다 당하고 겪으며 살아간다.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다.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교육적, 그리고 이른바 종교적 문제들이 그러하다. 이것은 사실상 종말의 현상이다.
바깥문제는 고사하고, 우리 가정이나 나 자신들의 문제들은 정말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자신의 무능과 죄 문제로 허덕이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부모의 힘으로 자녀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가장의 힘으로 가정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가 없다. 정말 ‘일’이 많고, ‘사건’이 많은 세대이다. 그 결과 우리 신자들은 이렇게 바쁘고 복잡한 세상에 끌려가기도 학고 또 밀려가기도 한다. 그래서 예배 생활까지도 위협을 받게 되는 위험수위에 이르렀다.
일이 바빠서 예배도, 기도도 모조리 빼앗겨 버리는 시대이다. 이럴 때 우리는 ‘기도함으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곧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을 빌려 일을 처리해야 한다. 바쁜 일에 기도를 빼앗기지 말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힘을 얻어 바쁜 일들을 처리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깨어라’, ‘기도하라’고 계속해서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마 24:37-44). 그러므로 항상 기도함은 세상을 이기는 비결이 된다.
교회가 받은 공동체의 사명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힘으로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셨다. 전 성경의 위대한 사건은 예외 없이 하나님이 명하신 기도를 통하여 응답되고 성취되었다.
홍해 앞에서의 모세의 기도, 여리고 성 밖에서의 여호수아와 그 백성들의 7일간의 기도행진,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고 하던 엘리야의 기도, 죽음의 위기를 앞에 두고 올린 다니엘의 기도는 예외 없이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큰 일이 나타나게 되는 비결이었다. 베드로가 옥에 갇힌 일로 인하여 교회는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간절히 기도하였다(빌었다). 그 결과 저들은 베드로를 다시 보는 기적을 체험했다(행 12:5-19).
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위대한 힘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항상 기도하는’ 것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살아남는 결정적인 비결이고, 또 승리하는 무기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2000년 기독교의 역사는 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로 이루어졌다.
⑥ 항상 기도함은 바로 예수 재림을 대망하는 각성의 생활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전서 4장 7절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이 다시 오실 종말에 대한 교훈을 마치는 순간마다 ‘깨어 있으라’ , ‘깨어 있는 종이 복이 있다’고 하였다(마 24:42, 46).
⑦ 항상 기도함은 낙심을 이기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셨다. 그것을 억울한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는 재판관에다 비유했다. “불의한 재판관도 그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었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한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고 하셨다(눅 18:1-8).
그래서 바울의 영감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령하였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자는 살아 있는 자이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가정은 살아 있는 가정이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다. 복 있는 교회다. 승리하는 교회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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