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빌립보서 강해(3) -서론- 빌립보서의 발신자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8. 13. 21:33

"빌립보서의 발신자"
빌립보서 1장 1절
석원태 목사

본 론

본서의 원명은 ‘사도 바울의 빌립보인들에게 보낸 편지’(Pau/loj tou apostolou h pro.j Filipphsuj epistolh)라고 되어 있다.

 

Ⅰ. 서론(빌 1:1-11)

1. 인사(문안, 빌 1:1-2)

1) 발신자-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과 디모데

빌립보서 1장 1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디모데를 언급한 것은 그가 빌립보 서신을 쓴 사람이란 의미가 아니다. 그는 2차, 3차 선교 원정 시에 바울을 수행하여 빌립보를 방문한 자이다(행 16:1-3, 19:22, 20:1-6). 이때는 바울이 디모데를 또 다시 빌립보로 파송하려던 때이므로(빌 2:19-23) 그의 이름을 언급한 듯하다. 디모데는 빌립보서 외에도 바울과 함께 서신서의 공동 송신자로 나타나고 있다(고린도후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빌레몬서 등).
우리는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서신의 첫 인사에서 다른 서신에서 볼 수 없는 표현을 볼 수 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서나 에베소서 서신 등에는 자신의 공적 신분과 자격을 나타내는 ‘사도’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는데, 본서에는 그 말이 빠지고, 단순히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말한 사실이다.
그가 다른 서신들에서 「사도」라고 하는 직함을 사용한 것은 수신자들에 대한 자신의 신임장이었다. 그리고 공인으로서 보내는 그의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에게 그의 말을 경청하고, 신뢰해야 함을 인식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본서에는 이 말이 빠져 있다. 그것은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이러한 그의 「사도」 직함 사용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사도직의 권위나 신임장으로서 바울 자신의 입장을 밝힐 필요가 없었다.
그 이유는 빌립보 교인들이야말로 바울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빌립보 교회는 바로 바울의 유럽 첫 교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빌립보 교회에 편지할 때 사도라고 하는 신분 소개가 아닌 한 사람의 친구로서 이 서신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명칭으로 발신자의 신분을 밝히고 있다. 물론 여기 ‘종’(dou/loj)은 특수 교직에 대한 명칭이라기보다는 일반신자들에게도 사용한 이름이었다(고전 7:22, 엡 6:6, 벧전 2:16, 계 1:1, 2:20, 7:3).
그럼에도 바울 자신에게는 이 말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종(servant) 이상의 노예(slave)적 개념이 있었다. 일반적인 종들은 오고가는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이 자신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종」(slave)이라고 부른 데에는 적어도 몇 가지 더 깊은 의미의 내용이 있었다.

하나는 자신은 그리스도의 절대 소유라고 하는 의미이다.

구약에 모세(수 1:2, 신 34:5)나 여호수아(삿 2:8), 다윗(시 35:27) 등을 위시하여 여러 선지자들에게 「여호와의 종」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런 경우 그 직함은 실로 존엄하고 명예로운 의미였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할 때는 구속론적 의미가 숨어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랑하사, 그를 위하여 대속의 값을 지불하고 샀다는 의미로 쓰여졌다. 값으로 산 것이 된 자신이라는 것이다(고전 6:20). 이런 의미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절대 소유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의미의 내용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다 적용시켰다(고전 3:23). 바울은 또 자신을 일꾼(dia,konoj; 고전 3:5, 고후 3:6, 엡 3:7) 또는 집사라고도 생각했다.
또 하나의 의미는, 자신에게는 그리스도에게 절대 복종해야 될 지사충성의 책무가 있다는 의미였다.
노예(slave)는 자기 자신의 의지가 없다. 주인의 의지가 자신의 의지요, 주인의 결정이 자기의 결정이 되는 것이다. 주인의 목적이 자신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노예에게는 그 주인의 생명이 자기의 전 삶을 주장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의 전 인생은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할 수밖에 없었다. 있다고 하면, 주인의 의지와 목적에 절대복종만이 있을 따름이다. 주인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편지할 때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고 했다. 그는 갈라디아서 1장 24절에서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고 했다.
로마 교회를 향하여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고 했다.
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거듭 말하기는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하였다.
그는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도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절대 복종하는 지사충성의 의무가 있다는 의미이다.
그 세 번째의 의미는 종으로서의 그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
그는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죄의 종이요, 불의의 종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 안에서 의의 종, 진리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불의의 병기가 아닌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고 했다(롬 6:11-22). 이제는 율법의 종, 불순종의 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복음의 종으로, 의의 종으로 산다고 하였다. 실로 영예로운 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부름받은 주의 사역자들이나, 구원에로 초청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외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은 결코 불명예나, 비열이나, 비굴이나, 굴종이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고후 5:17). 새로운 삶의 신분이다.
라틴어에 ‘일리 세드위레 에스트 레그나레’(Illi servire estregnare)란 말은 멋진 말이다. ‘주의 노예가 되는 것은 왕자가 되는 것이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빌립보서를 보내는 발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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