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혁명가 예수[토인비의창조적소수자,남미신부순교,로마인이야기]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 09:18

2009 4 19 주일예배

혁명가 예수

( 22:24-34)

24.  그들 사이에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1.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3.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자들인즉
  4. 아버지께서 나라 내게 맡기신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5. 너희로 나라 있어 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1. 시몬, 시몬, 보라 사탄 너희를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믿음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라
  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4. 이르시되 베드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로메로'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중남미 엘살바도르에 1970년대 후반에 군사독재 정권이 들어서서 많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탄압할 때 이에 저항했던 한 신부의 이야기입니다. 학구적이고 보수적이었던 그가 주교가 되면서 비로소 현실에 눈뜨기 시작합니다. 그는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서 연약한 자들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게 되고 죽음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결국 그는 1980년 미사를 드리던 중에 암살당합니다. 죽음의 위협을 느끼면서 행한 강론 가운데 이런 말을 남깁니다. `내가 죽는 그날 나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나의 죽음은 자유의 씨앗이 되고 희망의 징조가 될 것입니다. 사제는 죽어도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 영화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다가 미사를 드리던 중에 암살을 당하여 쓰러지는 그 장면을 다시는 못보겠더라구요. 안타까운 것은 중남미 많은 나라가 그러하듯이 그런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혼돈 가운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이 마침 `4.19' 49주년입니다. 4.19를 의거로 부를 것이냐, 혁명으로 부를 것이냐, 보는 시각에 따라서 다르겠습니다마는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대로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에도 많은 사람들의 피흘림이 있었습니다. 하나하나 다 고귀하고 소중한 희생이었어요. 그나마 감사한 것은 우리나라의 산업화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빨랐던 것 같이 민주화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 굉장히 빠르게 진행되어 오늘 이만한 자유를 누리게 되고 선진 국가를 얘기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성이 잘 말해주듯이 `한 번 잘 살아보자'는 의지와 또 자식을 위해서는 희생을 마다 않는 교육열과 그리고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절묘하게 긴장 속에서도 발전을 이루게 된 것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이만큼 이루었습니다마는 우리 앞에 또 하나의 과제가 있어요. 혁명의 변질이에요. 여러분, 이런 말 아세요? `혁명가는 요절해야 된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혁명을 이루어 현실에서 권력을 쥐고 지내다 보면 그 혁명이 변질 된다는 거예요.

  `아놀드 토인비'<역사의 연구>에서 문명의 발전에 있어서 `창조적 소수자'라는 표현을 씁니다. 시대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의 무기는 창조성이에요. 대중들이 그것을 모방하는 거죠. 사회적 학습을 통해서 모방해요. `미메시스'라고 해요. 성공을 이룹니다.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자그마한 성취에 스스로 도취돼요. 자만에 빠져요. 오만해져요. 헬라어로 `휴브리스' 라고 합니다. 성취한 권력을 가지고 대중을 누르기 시작해요. 창조성을 잃어 버려요. 지배적 소수자가 돼요. 기득권을 지키려고 해요. 그러면서 문명은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살았던 사회는 로마가 지배하는 사회였어요. 로마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세계를 무려 천 년간 다스렸어요. 어떻게 그 극심한 역사의 혼란 속에 천 년을 이어갈 수 있었는가. 로마가 갖는 강점이 있다는 거예요.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의 강점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관용, 적장이라도 항복하면 그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그를 우리 편의 장수로 내세우는 놀라운 관용. 둘째, 개방성. 그리고 또 하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라고 말하는 `가진 자들의 의무', 지도자들의 의무, 이런 정신이 살아있었다고 하는 거죠. 오늘 마침 예수님이 세상의 권력자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임금들은 백성들을 다스리고 그보다 나은 권력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는다. 여기 `은인'이라는 표현이 바로 로마의 지도자들의 덕목이었어요.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 그 사람이 첫 번째 황제가 되거든요. 그에게 부쳐진 이름이 `거룩한 자, 존엄한 자, 아우구스투스'라고 했어요.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지도자들이 사유재산을 대중의 이익을 위하여 기부하고 활용하도록 법제화 했어요. 그리고 솔선수범했어요. 자기의 재산을 다 털어서 공공건축물을 세웠어요. 그래서 당시의 로마에서는 고속도로라고 할 수 있는 `아피아가도'가 있었어요. 이것은 아피우스 가문에서 지은 거예요. `콜로세움', 그 경기장도 플라비우스 가문에서 지은 거예요. 이것들을 지으면서 다 그 집안의 이름을 붙여 줬어요. 그런 이름이 붙지 않은 것이 없어요. 로마사람들이 얼마나 실용적인지. 인간이 거룩한 체하는 위선을 거부하고 인간이 가진 명예욕과 허영심과 또는 정치적으로 출세하고자 하는 현실적인 동기를 그대로 다 인정해서 건축물이든지 도로든지 무엇이든지 다 기부하게 하고 그들의 이름을 붙여주었어요. 그러나 이렇게 해서 천 년을 유지한 로마이지만 이것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한정된 복지요, 자유였던 거죠. 절대다수 노예들은 이러한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됩니다.

   , 오늘 예수님께서 세속의 권력자들의 정치를 이야기하시면서 자신의 새로운 윤리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펼치시는 또 하나의 혁명이에요.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 왔다.' 성만찬을 나누면서 `이 떡을 받아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찢는 내 몸이다.' 포도주 잔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다.'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날 미리 제자들에게 교육시키기 위하여 성만찬을 베풀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서 기도하시다가 그들에게 붙들리게 되는, 아주 긴박하고 숨가쁜 시간에 예수님이 주신 말씀이에요. 왜 십자가에 몸을 찢기고 피를 흘려야 하는가, 그 사건의 의미를 말씀하셔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그런데 이 나라의 권력구조가 이상합니다. `큰 자는 가장 어린 자와 같이 되고 지배자는 섬기는 자와 같이 되리라.'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가진 자는 누구냐, `섬기는 자가 왕권을 가졌다.' 예수님이 제시한 새로운 혁명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요, 그 하나님 나라의 무기는 칼이 아니고 사랑이다.

   며칠 전에 `타이타닉' 호와 관련된 따뜻한 이야기가 전해졌어요. 왜냐하면 바로 지난 주간 414일이 1912년 타이타닉호 호화유람선이 첫 출항길에서 빙산과 부딪혀서 파산되어 무려 1500명이 죽는 대참사가 일어난 날이죠. 거기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아더 웨스트'라고 하는 당시 서른여섯의 가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새로운 꿈을 펼치기 위해서 아내와 다섯 살, 한 살 난 두 딸과 더불어 바로 그 배에 타고 있었어요. 그러다 그 배가 충돌했어요. 난리가 났어요. 그런데 구명보트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요. 노약자만 타게 돼있어요. 가까스로 아내와 어린 딸들을 구명보트에 옮겨 놓고 잠깐 사라졌어요. 그리고 다시 나타났어요. 추위에 떠는 어린 딸들을 위하여 객실에 가서 보온병에 따뜻한 우유를 담아서 줄로 묶어서 아내에게 내려준 거예요. 그리고는 배로부터 멀어지는 그들을 지켜보았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서 그가 탄 배는 침몰합니다.

   여러분, 사람은 이기적이지만 자식을 위해서는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을 펼치는 거죠. 아빠의 마지막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사랑만이 헛된 명예욕과 권력과 욕심을 내려놓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무기라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예수님은 혁명가예요. 혁명은 교활해야 돼요. 그렇게 소리 질러서 되는 혁명이 없어요. 진정 그 혁명이 변화를 일으키려면 일어났는지도 모르게 일어나야 돼요. 교활해야 돼요. 은밀해야 돼요. 예수님 보세요. 지금 제자들에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그 나라를 주셨다.' 하나님의 약속과 음성을 분명히 듣고 있어요.

   여러분, 자카르타 북부 항구 근처에 가면 `스타시온 꼬따', 옛날 서울역 같은 역이 있구요, 그 근처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지배할 때 세워놓은 `바타비아' 시청이 있어요. 지금은 역사 박물관이 됐어요. 그 건축물이 벌써 근 380년 정도 됐어요. 우리나라의 조선총독부와 같은 건물인데 2층에 올라가 보면 `솔로몬의 재판'이 그려져 있어요. 그게 무슨 의미예요. 솔로몬의 지혜를 가지고 이 나라를 다스리겠다 그런 말이잖아요. 솔로몬이 왕이 됐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합니다.“하나님, 저는 참 어립니다. 많은 왕자 중에서 저를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에게 이 백성을 올바로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하나님이 너무나 기뻐하셨어요. `네가 왕으로서 구할 것이 많이 있을 터인데 부도 구하지 아니하고 장수도 구하지 아니하고 지혜로운 마음을 구하였으니 내가 이 세상 어떤 왕보다 뛰어난 지혜를 주겠노라. 더하여 부와 장수도 주겠노라. 모든 것을 다 주겠노라.' 거기에 `지혜로운 마음' 그랬는데요. 히브리어로는 `듣는 마음' 이란 뜻이에요. 하나님의 음성을 깨끗하게 듣는 마음, 그 사람이 지혜자예요.

  `이슬람'이란 순종이라는 말이에요. `무슬림'은 순종하는 사람들이란 뜻이에요. 이 순종이란 말은 헬라어로 `휘파쿠오'라고 말하는데 `낮은 자리에서 듣는다'는 뜻이에요. 올바로 들을 때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는데 어떻게 순종하겠어요. 오늘 제자들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이 나라를 주노라'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이 잘못 이해했어요. 예수님의 이적만 보고서 예수님께서 지금 혁명을 일으키셔서 질서를 뒤집어엎고 나라를 세우시리라고 생각했어요. 무지했어요. 주님의 뜻을 몰랐어요. 과한 욕심을 부려요. 오늘도 첫 자리에 누가 앉아야 하느냐. 주님이 왕이 되시면 그 옆에 좌의정, 우의정은 누구냐를 가지고 다투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욕심에 눈이 멀어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감옥에도 죽는 데라도 주님을 모시고 따라가겠습니다.' `아니다. 네가 오늘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셨는데도 귀에 들리지 않았어요. `결단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이 얼마나 맹목적이에요.

   어떤 아가씨가 늦은 밤에 총알택시를 탔습니다. 너무 무섭게 달리는 거예요. 그래서 겁이 나서“아저씨”하고 불렀어요. 그런데 기사가 뒤돌아보지도 않습니다.“왜 그러세요”“너무 빠른 것 같은데 속도 좀 줄여주세요.”“이 차는 브레이크가 고장 나서 속도를 줄일 수 없어요.”“아니, 그러면 무서워서 어떡해요?”“그러면 나같이 눈을 꼭 감고 있어요.

   오늘 주님께서 베드로의 배신을 내다보시고 미리 말씀하셔요. `사단이 너를 까부르려고 너를 요구하고 있구나. 내가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였노라. 네가 회개하고 돌아온 후에 연약한 형제들을 붙들어줘라.' 베드로가 다시 돌아올 것을 멀리 내다보세요. 마지막 기대를 버리지 않아요. 기다리며 기도해 주는 거예요.

   예레미야 5 1절에 보면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게 되었을 때 예레미야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 재난을 피하겠습니까?' 그럴 때 하나님이 말씀하셔요. `그러냐. 너는 이 넓은 예루살렘을 한 번 다 둘러보아라. 구석구석 다 찾아 다녀 보아라. 정말로 진실히 살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사람 하나만 찾아내어라. 그렇다면 그를 인하여 내가 이 성을 용서하리라.'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찾으셔요.

   얼마 전에 글을 하나 읽었어요. <하나님이 중요한 일을 하시려 할 때> 하나님이 중요하고 위대한 일을 하시려 할 때는 전쟁이나 천둥이나 번개를 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한 여인에게 심어 주십니다. 그 여인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 여인에게 한 아기를 주십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나라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아기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자기 마음에 심어주신 하나님의 뜻을 아기가 자랄 때에 다시 그에게 가르쳐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생활을 하고 고통 가운데 부르짖고 외칠 때에 하나님의 해결방법을 보세요. 레위족속의 한 남녀가 결혼해요. 하나님을 깨끗한 마음으로 섬기는 레위족속 한 남녀를 통해서 한 아기를 예비하셔요. 그게 모세예요. 모세가 자라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는 80년이 걸렸어요. 하나님은 서두르지 않으셔요. 깨닫는 한 사람이 자라나서 성장해서 하나님 앞에 그 삶을 드릴 때까지 그 고통은 그대로 있는 거예요.

   여러분, 제가 얼마 전에 어떤 분을 만났다가 너무 큰 도전을 받았어요. 이 분이 70이 다 되신 분인데 사업을 하시는 분이더라구요. 예수를 믿은 지 2년 밖에 안됐대요.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라고 하는데“제가 성경도 모르는데 어떻게 세례를 받겠습니까? 제가 성경 두 번 읽고 세례 받겠습니다.”목사님이 그 분은 좀 진실한 것 같아서 기다리셨대요. 그랬더니 이 분이 새벽 2시 반 에 일어나서 한 시간 반씩 성경을 읽고 과연 반 년 후에 세례를 받으셨대요. 70이 다 된 분이 스스로 자기의 정신건강연령은 30이래요. 싱싱해요. 너무나 싱싱해요. 

   그분이 새해 첫 주일을 맞이하기 전날 기도하면서 올 한 해를 어떻게 이겨나갈까? 그러다가 이런 찬양을 불렀답니다.

 

주 품에 품으소서. 능력의 팔로 덮으소서.

주님 안에 나 거하리. 주 능력 나 잠잠히 믿네.

거친 파도 날 향해 와도 주와 함께 날아오르리.

폭풍 가운데 나의 영혼 잠잠하게 주를 보리라.

한참 동안 이 찬양을 불렀더니 마음이 뜨거워졌어요. 감사한 마음으로 사업을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물건을 잘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요. 품질이 중요하잖아요. 사람의 품질이 좋아야 물건도 좋은 거예요. 만드는 사람의 품질이 나쁘다면 그 다음은 얘기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온전하지 못해요.

   오늘 예수님은 제자 한 사람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나라를 붙들고 오히려 제자를 위해 기도하고 기다리고 그가 돌이켜서 다른 형제들을 붙들어 주리라고 하는 기대를 끝까지 놓지 않고 묵묵히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는 거예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거예요. 우리가 꼭 타이타닉호와 같은 사고를 당해서 자녀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만이 사랑이라고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과연 평범합니까? 풍랑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먹고 마시고 그럴듯하게 지내는지 몰라도 늘 우리는 죽음과 대면하고 있는 거예요. 만만하고 쉬운 게 없는 거예요. 순간순간 주님을 바라보고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저들이 피를 흘려서 오늘 우리 사회가 이만큼 되었다면 이제 우리의 책임은 이 혁명을 낙태시키지 아니하고 진정 혁명의 가치를 우리 삶 속에 이루어 가는 거예요. 여기에 예수님을 올바로 따라가는 믿음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우리 앞선 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의 자유와 평등과 인권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고 피를 흘려서 오늘이 있음을 기억하고 감사함을 드립니다. 뒤에 살아남은 자의 책임을 깨닫게 하시고 오늘 내게 주신 가정과 일터와 건강과 모든 것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깨어있게 하시고 생각이 열려있게 하시고 하나님이 찾는 바로 그 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활의 소망을 붙들고 환란 풍파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 날아오르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