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왜 십자가인가[대속의십자가,칭의의 개념 정의,양자의법적권리]/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 09:31

2007 4 10일 성금요예배

 

왜 십자가인가?

 ( 19:31-37)

  1.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안식일 이므로 안식일 시체들을 십자가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2.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박힌 첫째 사람과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4. 군인이 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나오더라
  5. 이를 자가 증언하였으니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1. 일이 일어난 것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2. 다른 성경에 그들이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소련이 해체되기 전 한국인으로 가장 먼저 선교사로 러시아에 들어가신 황상호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이 <러시아에 내 뼈를 묻게 하소서>라는 선교수기를 쓰셨는데 그 책을 읽어보면 참 감동이 큽니다. 그 분이 믿지 않는 불신가정에서 형과 더불어 예수를 믿고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신학교를 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그 기도 제목이 참 특이했어요. `하나님, 고생을 제일 많이 하는 목사가 되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셨더라고요. 저도 목사가 됐지만 그렇게 기도해 본 적은 한번도 없어요. 참 대단하신 분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기도를 하셨을까 했는데 아무튼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셨어요. 그분이 스페인 마드리드에 가서 한인교회를 개척하셨어요. 고생 엄청나게 하셨어요. 추석 때 네 딸과 함께 온 가족이 둘러앉았는데 이국에서 추석을 맞으니 얼마나 쓸쓸하겠어요. `우리가 지금 한국에 있었다면 고깃국도 먹고 떡도 먹고 포도도 먹었을 텐데.' 가족들이 모여서 한마디씩 하다가 대성통곡을 했다고 해요.

   그 고생도 부족해서 하나님께서 그분을 연방이 해체되기 전에 소련으로 보내셨어요. 누구도 감히 들어갈 수도 없는데 하나님이 사람들의 눈을 가리우셔서 성경책을 가방 하나 가득 담아가지고 들어가셨어요. 그렇게 해서 러시아 선교가 시작되었어요. 그 분이 올해로 은퇴하시게 됩니다. 참 대단하신 분이에요. 그런데 그 책 마지막에 보면 러시아의 많은 박물관 가운데 온갖 고문기구들을 전시한 곳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러시아 정교가 부패하고 타락할 때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잖아요. 공산주의자들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거든요. 상상을 초월하는 거예요. 그 고문도구 중에 사람을 묶어놓고 아예 몸을 둘로 가르는 톱이 있고 사람을 찔러 꿰는 깎아 놓은 나무들도 있어요. 그걸 보고 그분이 그랬어요. `하나님, 나는 고생은 좀 할지라도 순교는 절대 못합니다.' 이분 고생도 정말 끔찍한 고생이지만 `차라리 내가 고생을 더할지라도 저렇게 끔찍하게 순교할 용기는 없다'고 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역사 속에 신앙 때문에 순교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또 그런 사람들이 있었고 그 피 흘림이 있었기에 그 다음 세대가 은혜를 입고 사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의 신앙 환경 가운데서는 순교를 찾아보기 어렵고 피 흘림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환경이 좋아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다면 주님 앞에 나와 마음껏 예배할 수 있는 이 시대에는 이 시대 나름의 사명이 있는 거죠. 그게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올바로 분별하고 예수를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세대뿐 아니라 철없이 자라나고 있는 다음 세대의 신앙을 하나님이 오늘 우리 손에 맡겨 주셨기 때문이죠.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말씀의 증언대로 다시 따라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시대에 있었던 십자가 형벌은 고통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에요. 그냥 목을 베면 간단할 터인데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끝까지 겪도록 하는 아주 잔혹한 형벌이에요. 그래서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십자가 형벌에 처하지 않았대요. 너무 잔인하기 때문에. 먼저 십자가형에 처하는 사람에게 매를 칩니다. 채찍질을 해요. 끝에 쇠갈고리가 붙어 있는 채찍이에요. 아니면 동물의 뼈가 붙어있는 채찍이에요. 그것으로 등을 맞으면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데, 그런 채찍질로 서른아홉 대의 매를 맞는 거예요. 온 몸이 다 터지고 피바다가 되는 거죠. 죽기 일보직전이 되는 거죠. 그러고 나서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짊어지고 형장으로 올라가는 겁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이미 기진했기 때문에 그만 도중에 쓰러진 거죠. 그래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그것을 짊어지고 갔던 것이죠.

   십자가를 세우고 저를 못 박을 때 옷을 다 벗기는 거예요. 그림으로 보면 옷을 걸친 것 같지만 아니에요. 다 벗기는 거예요. 말씀을 보면 겉옷도 다 나눠가지고 속옷은 통으로 짠 옷이기 때문에 나눠가질 수 없어서 제비 뽑았다고 했어요. 다 벗기는 거예요. 죽음을 눈앞에 둔 그 고통 속에다가 옷을 벗겨 수치를 느끼도록 하는 거죠.

   그리고 못을 박습니다. 손바닥에 못을 박으면 몸무게를 못 이겨서 손바닥이 찢어지기 때문에 손목에다가 못을 박는 거예요. 또 그 몸이 쳐지지 않도록 엉덩이 받침대를 중간 기둥에 박아 놓는 거예요. 몸을 의지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극심한 고통 속에 기운이 다 빠져서 죽도록 하는 거죠.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유대인들이 안식일에는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두지 않는 관습에 따라, 저녁이 되면 안식일이 시작되니까 그 전에 빨리 끝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오히려 다행이에요. 그냥 내버려 두면 그 고통은 계속될 텐데. 마침 안식일이 눈앞에 다가왔기 때문에 오히려 자비를 베푸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하느냐, 다리를 꺾는 거예요. 다리를 꺾으면 몸의 중심이 아래로 쳐지게 되고 그 무게를 가슴이 다 떠안게 되니까 폐가 눌려서 곧 죽게 되는 거죠. 예수님 옆에 있는 두 강도는 다리를 꺾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니까 이미 죽었어요. 다리를 꺾을 필요가 없어요. 그 옆구리에 창을 찔러 넣었더니 이미 벌써 피와 물이 분리되어서 쏟아졌다. 사람이 죽어서 피가 응고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확실히 죽었다고 하는 것을 성경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 이것이 십자가의 고통이죠.

   여기 십자가의 역사적 현장이 있고, 구체적 사실이 있어요. 그러나 이제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그 십자가가 무슨 의미냐 하는 걸 알아야 되죠.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이 예수님만이 아니잖아요.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반란' 일어났을 때 로마에서 두 번 다시 노예반란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본보기로 포로 6천 명을 로마로 들어가는 아피아가도 양 옆에 다 매달아 죽였어요.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 많았어요. 그렇다면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무슨 의미냐,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죽으셨다.

   우리의 죄는 뭡니까? 죄는 얼마나 구체적이고 현실적입니까?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도덕적인 죄, 비행, 잘못, 이런 것만을 죄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더 파고 들어가면 죄의 뿌리는 우리의 생각 속에 있습니다. 죄의식으로부터 죄가 비롯돼요. 불안이 있고 염려가 있고 근심이 있어요. 세상 사는데 그런 게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렇죠. 한 차원 더 깊이 들어가서 본다면 그것은 죄의식으로부터 비롯되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므로 인해서 일어나는 인간의 고립된 생각이에요. 사람이 올바르게 살고 싶어도 그게 불가능한 것은 죄가 우리를 가두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빗나가게 하기 때문이에요. 죄는 우리를 얽어매는 감옥이에요. 우리는 그 죄에 갇힌 죄수와 같아요. 해결할 능력이 없어요.

   히브리서 2 15절에

 

죽기를 두려워하므로

일생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사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

 

사람이 죽기를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기뻐하는데 죽을 때는 눈물을 흘려요. 왜 그러냐,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까. 정말 저들이 천국으로 간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물론 그 동안 쌓인 정이 있으니까 눈물을 흘릴지라도 소망과 더불어 눈물을 흘리겠죠. 태어날 때 인생을 기뻐하듯이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을 알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는 사람이라면 죽음마저도 슬픔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죄 까닭이죠.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죄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죠.

   마치 음주 운전과 같아요. 술 좋아하시는 분들은 `한잔 마시고 운전 잠깐 한 것인데' 하지만 여러분, 그건 참 짧은 생각이에요. 이미 과학적 조사를 통해서 다 나왔잖아요. 술을 마시고 운전할 때 운전이 제대로 되지 않잖아요. 그렇게 나는 사고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습니까? 자기만 죽는 게 아니라 동행한 많은 사람들과 애꿎게 부딪히는 많은 사람의 생명을 죽이지 않습니까? 음주운전은 면허 취소 정도가 아니라 더 엄한 벌로 막아야 하는 거죠. ? 생명을 빼앗아 가니까. 죄라고 하는 것은 음주운전과 같은 것이죠. 내 삶에도 고통을 주고 더불어 사는 사람과 우리 사회에 큰 고통을 안기는 거죠.

   죄의 대가가 이렇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야 할 만큼 무거운 것인가? 죄라고 하는 것은 그저 나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만물의 질서를 깨뜨리는 거예요. 더구나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 받아서 만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게 해야 할 인간이 죄를 범하므로 말미암아 모든 만물이 함께 고통에 빠졌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어제 뉴스를 보니까 북극과 남극의 얼음이 엄청나게 녹아가고 있대요. 전 지구적인 위기와 재앙을 경고하고 있어요. 근데 우리는 당장 북극과 남극을 가보지 않았고 녹아내리는 얼음을 보지 못했다고 나 하나 먹고 사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과 똑같아요. 수많은 도시들이 물에 잠길 수 있는 위기를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선진국의 리더들이 계속해서 경고 하는 거죠. 지금 손쓰지 않으면 그때는 이미 늦었다고 얘기하는 것이죠.

   십자가 사건은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죄를 그냥 무조건 용서한다고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공의와 사랑으로 세상을 세우셨다. 그러하기에 죄 값을 치러야 했고 그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는 것이죠.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 라고 말합니다. `대속代贖'이란 대신 몸값을 치른다는 말이에요. 

   여러분이 잘 아는 신지애 선수가 있습니다. 이제 나이가 스물 둘이에요. 2006년 프로로 데뷔한 이후 국내외에서 24번이나 우승을 했어요. 지난번에는 미국 LPGA에 출전해서 우승하지 않았습니까. 박세리 이후에 주목 받는 골프선수가 됐는데 얼마 전에 방송에 출연해서 집안 이야기를 했어요. 알고 보니 가난한 집이었어요. 골프에 재능이 보이니까 어려운 집안인데도 밀어준 거예요. 3때 그만 엄마와 동생들이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엄마가 죽었어요. 보상금을 받았어요. 그걸로 그 동안 빚진 거 갚고 나니 남은 돈이 천칠백만 원이에요. 아버지가 맏딸 지애를 불러놓고 말합니다.“자, 이 돈은 엄마 목숨과 맞바꾼 돈이다. 내가 이 돈으로 어렵지만 너를 계속해서 골프를 시키겠다. 그러니 열심히 해라.”그래서 그때 그전까지는 골프를 하다가 실수를 해도 `다음에 잘하면 되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날 생각을 바꿨대요. `엄마 목숨과 맞바꾼 돈으로 골프를 하는데 하나라도 잘못하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 이를 악물고 해야 되겠다.' 했다는 거예요. 그가 그 뜻을 살려 오늘 좋은 결과를 가져 온 거죠.

   여러분, 십자가를 `대속의 십자가'라고 말해요. 우리의 죄건만 스스로 죄인인 것도 알지 못하고 그것을 해결할 수도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사람이 되셔서 모든 고통을 다 겪게 하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죄가 없으신 분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자기의 몸을 제물로 내놓으셨다. 대속의 십자가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사야 53 5절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예언하면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게 하나님의 십자가 사건이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사는 것을 너무 예사롭게 생각하지 마세요. 약육강식과 처절한 생존경쟁 속에 그나마 우리가 주권을 가지고 대한민국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이미 한 세대 전에 독립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내놓은 많은 사람들의 피 흘림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우리나라를 되찾아 사는 것이죠.

   , 그러면 이 십자가 사건을 우리가 믿을 때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송대관' 이라는 가수를 잘 아시잖아요. 그가 한때 미국뉴욕에 음식점을 냈었다고 하네요. 그의 어머니가 나이가 많으신 분인데 아들 덕택에 미국에 오셨대요. 그런데 동행하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 오셨대요. 만나기가 무섭게“아이구, 밥 좀 내놔라. 배고파 죽겠다.”그러더래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내가 비행기를 타고 오는 데 스튜어디스인가 뭔가 하는 예쁜 아가씨들이 자꾸 나한테 주스도 가져오고 밥도 가져오면서 먹으라고 하는데 내가 속을 줄 아나 그 비싼 걸 사먹게. 일체 주스도 안마시고 버티고 오느라고 목말라 죽겠다. 미리 김밥을 사가지고 몰래 조금씩 먹고 왔다.”그러더랍니다.

   여러분,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사건이고 우리를 위하여 아들을 내놓으신 사건이었다면 그 십자가 사건을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믿을 때에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영적인 변화들이 있어요.

   첫 번째가 `칭의'예요. 그 사건을 믿을 때에 의롭다고 하신다는 거예요. 뭐가 의로우냐, 내가 도덕적으로 의롭다는 말이 아니에요.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십자가 속죄의 사건은 정말 옳으신 방법입니다 라고 내가 인정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옳습니다 하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렇게 받아들였더니 이번에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냐 하면 `내가 너를 위해서 베푼 십자가 은총을 네가 믿으니 잘하였도다.' 이렇게 칭찬하신단 말이에요.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내가 `정말 잘하셨습니다. 나를 위한 사건인 것을 내가 믿습니다' 라고 고백했을 때 하나님 역시 그 믿음을 보시고 `네가 올바르게 판단했다' 인정하신다는 거예요. 이게 칭의예요.

   ,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화해가 이루어져요. 하나님의 용서를 내가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놀랍게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거예요. 딸이 되는 거예요. 양자가 되는 거예요. 부잣집에 친자거나 양자거나 법적으로는 똑 같은 거예요. 법적으로 상속을 받게 되어있어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어요. 그래서 모든 권리를 다 누리게 되었어요. 예수님이 이 세상 사시면서 승리하셨던 그 모든 권세를 우리가 다 받게 되어있어요. 예수 이름을 부르면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갈 때 고난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지혜롭고 능력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양자되므로 법적인 권리를 누리게 된 거죠. 티켓이 있는 사람은 당연히 야구장에 들어갈 수도 있는 거고 영화관에 들어갈 수도 있는 거죠. 티켓이 있는 사람은 그 티켓이 약속한 것을 누릴 권리가 있어요. 몸이 아파도 누릴 권리가 있어요. 못 배웠어도 누릴 권리가 있는 거예요. 못생겼어도 누릴 권리가 있는 거예요. 이거는 법적인 권리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법적인 권리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으므로 생각을 고치는 것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치유가 일어나는 거예요. 예수 믿는다 함은 우리의 인생관, 세계관이 완전히 바뀌는 거예요. 먹고 마시는 축복 이전에 생각이 바뀌는 거예요. 예수님이 설명해 주셨던 하늘나라가 그대로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된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그 의미를 깊이 깨닫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베푸신 이 십자가 대속의 놀라운 은총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부활을 기다리는 귀한 절기가 되게 하시고 또 다시 한번 우리의 삶을 하나님 말씀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결단하는 기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