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받아 먹으라[주일을 기다리도록,주일을 좋아하도록 만든 부친의숨겨진전략]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10. 18. 20:56

070325 받아 먹으라                                            설교집 Ⅲ<너는 행복자로다> 3-17

성경본문                                                                                                      / 장영수 목사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마태복음 26:26-30)

 

우리나라 상장 제조업체는 2005년도에 매출을 1,000원 올렸을 경우 이익이 80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데 2006년 상반기에는 그 이익이 66원으로 떨어졌답니다. 매출은 6.9% 증가했지만 순이익은 감소한 것이죠. 그 걸과 상장 제조업체의 35.4%는 적자랍니다. 공장을 안 돌릴 수도 없고 돌리면 적자고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이 문제를 타결하려고 택하는 방식이 가격파괴라고 하는 것인데 가격을 파괴하는 이러한 방식은 시장점유율을 확대하고 매출을 증대하는 것이지만 이미 꽉 들어찬 시장에서는 비용만 더 들어가지 이익은 생각한 것만큼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것은 독약과 같은 것이어서 함께 망하는 지름길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그것을 한 단계 넘어서는 방식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차별화해서 평화로운 경쟁 블루오션’, 그래서 수익을 창출해야 된다.

우리가 잘 아는 잭 웰치가 주장하던 크기와 효율, 전 세계에서 1위나 2위를 차지하지 않는 사업부서는 고치든지 팔아 치우든지 해버린다는 잭 웰치 방식은 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 방법이었다. 오늘날의 변화된 디지털방식에는 적합하지 않다.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 기업 중에 레인콤이 있죠. MP3를 만드는 기업인데요, ‘아이리버라는 제품을 만들었습니다. 기술과 디자인에서 아주 탁월했습니다. 그러나 애플에서 아이팟이라고 하는 것을 만들었는데 거기서는 그것만 만든 게 아니라 그 기계를 가지고 쓸 수 있는 아이튠이라고 하는 음악 서비스를 함께 제공했다는 거죠. 그래서 매달 1,000만 곡이 팔려나간다는 거예요. 전세계 디지털 음악시장을 70% 장악했다는 거예요. 기술도 중요하고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으로는 과연 그걸 가지고 뭘 할 것이냐 하는 내용까지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죠. 하나 더 생각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죠. 이것은 열심히 일한다고 나오는 생각이 아니죠. 창조적 사고는 쉼 속에서 묵상과 명상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죠. 이제 우리의 신앙도 날마다 반복하는 습관적 신앙을 넘어서서 가치를 창조하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병이어즉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란 뜻이죠.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온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하루 종일 말씀을 전하셨어요. 해가 저물어요. 말씀을 듣다 보니 너무나 배가 고파요. 그렇지 않아도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떡이 꼭 필요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사람을 먹였어요. 이적(異蹟)이지요. , 이걸 발견한 사람들의 눈이 뒤집혔어요. 그들의 판단은 이러했어요. ‘저 사람을 우리의 왕으로 삼으면 더 이상 굶주림의 문제는 없겠구나.’ 그래서 그 다믕부터는 예수님 가는 대로 쫓아다니면서 몰려오는 것입니다. 그들을 만난 예수님이 말씀하셔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구나. 썩는 양식만 구하지 말고 영원한 양식을 찾아라.’ 무슨 말이에요? 우리가 교회를 나올 때는 다 자기 나름대로의 동기를 가지고 나와요. 몸이 아파서 어떻게 하면 이것을 고칠까 하다가 교회에 가면 낫는다는 얘기를 듣고 나오시는 분도 있어요. 또 사업에 실패해서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재기한 사람이 이끄는 손길을 따라 나올 수도 있어요. 사람이기 때문에 다 자기 동기를 가지고 교회에 나오고 하나님 앞에 나와요. 시작은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이제는 썩는 양식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영원한 양식을 찾아야 되는 거죠.

주님이 엄청난 도전을 하셨어요. ‘내가 바로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 나를 먹는 자는 영원히 주리지 아니하리라.’ 그래서 오병이어의 사건은 그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단순한 이적이 아니라 거기에는 목적이 있단 말이에요. 의도가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성경에서는 표적(表蹟)이라고 말합니다. 뭘 가리키고 있단 말이죠. 그 사건이 뭘 가리키느냐? 예수님이야말로 삶의 영원한 양식이 되시는 분이시다.

우리교회에서 일을 하시고 수고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하는데 이제 이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니라.” 저는요, 예전에 전도하다가 무당을 만나서 쭉 얘기를 나눠보고 그의 신세, 그 눈물 섞인 인생살이를 듣다가 깜짝 놀랐어요. 교회 집사님이었대요. 그것도 아주 열심인. 제가 그날 아주 충격 받았어요. 하나님의 일이 뭡니까. 어떤 일을 하든지 결국은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깊이 발견하고 그를 붙드는 것. 그게 하나님의 일의 목적이고 알고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죠.

C.S.Lewis <나니아 연대기>라는 우화가 있잖아요. 거기에 보면 집에 낡은 옷장이 있어요. 그런데 그 옷장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거기에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들어오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발견해야 되는 거죠.

이제 곧 다음 주면 벌써 고난주간이 시작되지 않습니까. 다음 주 금요일은 성금요일이잖아요. 인도네시아에 와서 참 독특한 점은 성금요일도 공휴일로 정해가지고 우리가 모처럼 그날 같이 모여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성찬을 베풀죠. 성찬, 떡을 받고 잔을 받는 이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압축시켜 그것을 먹고 마심으로 내 안에서 그 사건을 다시 한번 체험하는 것이죠. 주님이 명령하셨어요.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교회는 성례라는 게 있습니다. 원래 카톨릭에서는 7가지가 있잖아요. 세례, 견신례, 성찬, 고해성사, 혼배성사, 서품, 종부성사.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모든 순서가 교회의 예식으로 정해져 있는 거죠.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유수(流囚)>라고 하는 책에서 이것을 비판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로마교회에 포로 되어 버렸다고 비판해요. 7가지 성사 자체가 나쁘다기보다는 문제는 맹목적 신앙이라는 거죠. 사실 잘 생각해보면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교회가 다 관장하잖아요. 교회 손 안에 있는 거잖아요. 어찌 보면 포로 되어 있는 거잖아요. 맹목적 습관에 빠져 있는 것을 경고하는 거예요.

루터는 성례를 두 가지만 택합니다. 그게 바로 세례요, 성찬이에요. 그것은 첫째는 하나님 말씀에 분명한 근거가 있어야 된다. 두 번째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나타내는 상징이 있어야 된다. 세례는 물을 사용하고 성찬은 떡과 포도주가 있으니까 상징을 통해서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어야 된다. 이렇게 얘기한 거예요.

종교개혁시대에 이 성찬의 문제는 굉장히 심각했어요. 들어보시겠어요? 카톨릭에서는 화체설(化體說)’을 주장해요. 떡과 포도주가 겉보기에는 떡과 포도주지만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순간에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피가 된다고 생각해요. 이것을 화체설이라고 그래요. 그 주장을 더 들여다보면 남자와 관계하지 않고도 동정녀의 몸에서 사람이 태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데 그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면 문제도 아니다. 그래도 우리가 이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도대체 그게 무슨 변화가 일어나는 거냐, 뭐 화학적 변화냐, 물리적 변화냐, 무슨 변화냐, 궁금해 하니까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 이성에 만족할 수 있도록. 그래서 그 순간에 그렇게 변한다. 루터는 달리 얘기합니다. 그게 아니고, 떡과 포도주를 받는 그 순간 그 자리에 주님이 함께 하시는 거다. 이것을 공재설(共在設)’이라고 그래요. 공재, 함께 있다 이거죠. 그러면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하는 그 신앙적, 신비적인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또 다른 종교개혁자 쯔빙글리는 달리 얘기합니다. 그것은 성경에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했으니까 그것은 그저 기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왕이 여왕에게 금반지를 주었어요. 금반지야 몇 돈짜리인지 당장 시세가격이 나오겠죠. 그러나 왕이 준 반지요, 여왕이 낀 반지가 될 때 반지의 가격은 달라지는 거죠. 일류 스타가 입었던 속옷은 가격이 달라지는 거잖아요. 물리적 가격이 아니잖아요. 그와 같이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신 사건을 기념하는 떡과 포도주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중요하다.

이게 바로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하는 말에 대한 종교개혁 당시 카톨릭과 종교개혁자들의 다양한 신학적인 견해였어요. 왜 그럴까요? 만약에 떡이 정말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는 것이라면 그거 매번 나와서 떡 받아먹어야지 그것을 거르면 큰일 나지요. 떡에다가 강조점을 두는 것은 교회에 좇아 나오도록 하는 의도가 있는 거죠.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의 의미는 그것을 부정한다기보다 맹목적으로 받아먹는 행위보다는 그 사건에 담겨있는 십자가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는 자각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중심점을 떡에다 두는 게 아니라 신자의 고백에 두겠다고 하는 거죠. 그게 다른 거예요.

, 그러나 우리는 말이죠, 그걸 넘어서서 오늘 이 말씀대로만 이해합시다. 오늘 말씀하십니다. ‘성찬의 본질은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사죄의 은총이 있어요. 오늘 그 떡을 받고 잔을 받는 사람에게 사죄의 은총이 임하는 것이죠. 바로 나를 위한 사건이에요.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셔요. 이것은 단순한 언약이 아니라 유언이에요. 이 언약을 주시고 죽으셨어요. 죽음으로 효력을 발휘하는 언약이에요. 여기에 의미가 있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성찬식이 중요해요. 이 성찬을 확대하면 우리의 평범한 식사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있어요. 원래 초대교회는 성찬식도 자주 했지만 예배를 드리고 나면 애찬이라고 서로 공동식사를 했어요, 성경을 꼼꼼히 읽어보면 원래는요 예배만 드리고 훌쩍 가는 거 아니에요. 성경을 보니까 같이 식사를 나눴어요. 이것은 확대된 성찬이에요.

오늘 주님이 말씀하셔요. ‘받아 먹으라.’ 그 안에 담겨있는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그것을 우리가 받아먹는 거예요. 주님이 주시는 것으로 받아먹는 거예요. 애찬이라고 그랬어요. 주님을 찾던 백성들이 이렇게 묻잖아요.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만나를 먹었는데 당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만나’, 여러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었던 만나라고 하는 그 히브리말의 원래 의미는 이것은 뭐냐라는 뜻이에요. 재밌잖아요. 만나, ‘이것은 뭐냐.’ 하나님의 의도가 있어요. 이름을 그렇게 지은 의도가 있어요. ‘이것이 뭐냐라고 물을 때에 이렇게 답하라. ‘이것은 너희를 위해 하나님이 베푸시는 놀라운 은혜다.’ 주일의 공동식사는 참 의미가 깊어요.

저는 제 신앙이 언제 뿌리를 내렸을까 생각해보면, 아주 어렸을 때 할머니 등에 업혀가지고 들은 찬송이 뼈가 되고 살이 됐겠죠. 그러나 제가 정작 주일을 좋아하게 됐던 것은 초등학생 때, 저희 아버님이 좀 신식이셨나 봐요. 예배를 마치고 오면 우리 꼬맹이 4남매를 다 데리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갑니다. 그때 짜장면 한 그릇에도 숨넘어가는 그런 아이들이었는데 돈까스를 시켜줬다고요. 제 기억에 그때 짜장면은 15원이었는데 돈까스는 90원이었어요. 최고 좋은 것을 사주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주일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그런데 거기에는 우리 아버님의 숨겨진 전략이 있었어요. 주일을 기다리도록, 주일을 좋아하도록. 그런데 알고 보니 원래 하나님이 그렇게 명하셨어요. 함께 예배 드리고 함께 식사를 나눔으로 우리가 한 형제임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실천하도록 기회를 주신 거예요.

우리는 주일 저녁에 따로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의도가 있어요. 피곤하신 분은 가서 좀 주무시고 쉬시라고. 아무리 거룩하고 좋아도 피곤하면 다 귀찮거든요. 너무 피곤한 가운데 예배드리는 게 은혜가 안되기 때문에 집에 가서 쉬시라고. 또 가족끼리 모처럼 함께 모여서 식사도 하고 좋은 시간을 가지시도록, 특별히 주중에 대할 수 없었던 자녀들에게 그날만큼은 좀 잘못이 있어도 용서해주고 맛있는 것을 먹여주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아이들에게 말이죠, 주일은 참 좋은 날이다, 이렇게 주일을 주신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다, 이런 이미지를 심어주라는 것이죠. 또 오후에 운동하시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에요. 왜 그러냐. 주일은 내일 일하기 위해서 쉬는 날이 아니에요. 그건 아주 자본주의적 논리에요. ‘오늘 좀 쉬어, 그래야 내일 또 일하지.’ 그게 아니에요.

성경적으로는 천지창조 그 모든 것이 끝난 마지막에 안식일이 있었어요. 그것은 끝났으니까 쉬었다는 게 아니에요. 안식이 목적이었어요. 그 목적을 향해서 하나하나 준비해가지고 마무리하고 드디어 이루어진 것을 마음껏 누리는 날이 됐어요. 그러므로 마르바 던이라고 하는 사람은 <안식>이라고 하는 책에서 우리의 인사말을 바꿔야 된다. 우리가 인사할 때 옛날 배고픈 시절에는 식사 하셨습니까, 진지 드셨습니까그 인사말에 시대의 상황이 담겨있는 거죠. ‘무슨 일을 하십니까사람의 성취와 업적을 가지고 인간을 평가하는 자본주의 논리가 인사말에 스며들어 있는 거죠. 그러데 보세요. 오늘날 아이들 공부하는 것도 그래요. 이게 도대체 즐거움 때문에 공부하는 게 아니에요. 경쟁을 위해서 공부해요. 세상에 이런 비극이 어디 있어요. 이런 수레바퀴를 멈추라. 그리고 주일에는 .주일성수, 문을 닫아걸고 하던 일을 내려놓고 받아먹으라.’ 주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먹는 거예요. 믿음으로 받아먹는 거예요. 오늘은 쉬는 거예요. 그리고 기억하는 거예요. 이렇게 허물 많고 연약하고 불순종하는 나를 끝까지 책임져주시는 하나님의 그 성품, 우리의 신앙의 근거는 하나님의 성품에 있는 겁니다. 내 노력에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여러분은 운도 좋으셔요. 왜 그러냐 하면, 이단 종파일수록 인간의 한없는 노력과 수고를 구원과 결부시켜요. 열심히 해야 구원받는다고 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 구원이 결정되는데 그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오늘 쉼 없이 일해요. 반듯하게 살아요. 그러나 내면에는 말할 수 없는 억압이 있고 불안이 있는 거예요. 그것은 마치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의 의식이잖아요. 언제 잘릴는지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열심히 해야 되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에요. 하나님 안에서 태어났어요.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 태어난 거예요. 그러므로 못났어도 내 자녀에요.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져주시는 거예요. 이제는 자유로운 마음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거죠.

또 말합니다. ‘받아 먹으라.’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덩어리 가지고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먹겠어요. 그러나 거기 이적이 나타났는데 먹어도 먹어도, 마르지 않도록 풍성하게 넘쳐났어요. 나누어 먹으라. 그래서 주일의 좋은 시간을 활용해서 모처럼 서로 만나서 식사도 하시고 얘기도 하시고 그러시길 바래요.

이철환 작가의 <곰보빵>이라고 하는 책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한 여자아이가 자그마한 남동생, 여동생 들을 데리고 중국집에 들어왔어요. 그리고는 주방 가까이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어요. ‘아저씨, 우리 짜장면 두 그릇 주세요.’ 남동생이 말합니다, ‘, 인혜 누나는 안 먹어?’ ‘, 나는 배가 좀 아파서. 너희들만 먹어.’ 또 여동생이 말합니다. 저쪽 편에 가족이 더불어 먹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엄마, 아빠가 살아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 주방에서 아줌마가 쑥 나와요. 나오더니 애들을 이렇게 둘러보더니 , 너 인혜 아니냐? 너 인혜 맞지? 너 나 모르겠니? 나 모를 꺼야, 너희들이 너무 어렸으니까. 나 너희 엄마 친구야. 그래 너희들 엄마, 아빠 없이 어떻게 지내니? 그 동안 어떻게 지냈니?” 그러면서 아이들의 얼굴을 쓰다듬어주는 거예요. 애들이 처음에 어리둥절하다가 엄마 친구라니까 그런가보다 했지요. “배고팠구나. 그래 내가 금방 만들어줄게.” 그리고는 들어가서 짜장면 세 그릇에다가 탕수육까지. 그래서 애들이 맛있게 먹었어요. 그리고는 다 먹은 다음에 애들이 돌아갑니다. 좇아나가서 잘 가라. 다음에 먹고 싶으면 또 와라. 아줌마가 또 해줄게.’ 그리고는 애들을 보냈어요. 그 남편이 묻습니다. “누구야, 나는 못 보던 애들인데.” “사실은 나도 모르는 애들이에요. 그런데 주방에서 들어보니까 엄마, 아빠가 없는 애들인 것 같은데 엄마, 아빠가 없다고 불쑥 음식을 주면 애들이 자존심 상해할까 봐, 내가 애들 얘기하는 걸 듣고 한 아이 이름이 인혜라고 하길래 그렇게 얘기한 거예요.” 여러분, 상처를 주지 않고 사랑하는 지혜, 소리 없이 감싸주는 지혜. 오늘 예수님께서 성찬을 통해 많은 얘기하지 않으셨어요. ‘받아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다.’ 이런 은혜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날마다 귀한 양식을 받으면서도 기쁨으로 대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욕심에 감사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어리석음을 용서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과 안식을 날마다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