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강권하시는 사랑[신앙 안에서 성숙하는 일은 서서히 이루어지는 거예요]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10. 20. 00:12

050918 강권하시는 사랑                                          설교집 Ⅱ<마음을 시원하게> 1-3

성경본문                                                                                                        / 장영수 목사

11.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3-17)

 

얼마 전에 <! 에베레스트>라고 하는 다큐멘터리 필름을 보았습니다. 산악인 엄홍길씨의 에베르스트 원정 80여 일의 기록입니다. 지난 5월에 끝을 맺은 원정입니다. 그런데 그 원정대에는 휴먼원정대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에베레스트 정상을 올라가는데 목적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조직되었기 때문입니다. 작년 2004 5월에 계명대 산악부원들이 에베레스트 꼭대기에 등정하고 하산하다가 세 사람이 실종되고, 그 중에 한사람, 박무택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 등정로 옆에 로프에 매달린 채 숨져가지고 1년 동안 얼어있는 채로 누워있는 것이 발견된 것이죠. 그런데 이 엄홍길은 박무택과는 독특한 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후배로서 에베르스트로 이끌어간 사람도 자신이었고 그리고 지난 2000년에는 에베르스트 고봉 중에 칸첸중가봉을 등정하고 하산하다가 비박을 했답니다. 텐트도 없이 로프를 몸에 걸고 그 눈 덩어리 위에 엉덩이에 장갑 한 짝 깔고 밤을 세우는 것이지요. 두 사람이 그렇게 밤을 세우면서 서로를 끝없이 깨우면서, 졸면 죽으니까 자기 인생의 가장 큰 고비였으며 자기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밤을 함께 지냈던 그 후배. ‘졸지마라. 졸면 죽는다.’ 라고 끝없이 얘기했지만 그것은 그 후배에게 얘기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신에게 얘기한 거죠. 그렇게 사선을 함께 넘었던 후배였기에 그가 그 산에 매달려 죽은 채로 있는 것을 내버려둘 수가 없었어요. 팀을 조직하고 원정을 하게 된 것이죠.

에베레스트로 올라갑니다. 이미 3,000m를 넘어서면서부터 고소증세들이 나타났어요. 훈련하고 준비한 대원들 중에서도 그런 증세가 나타나는 사람은 당장 하산시켜요. 심지어는 베이스캠프가 5,200m 고지였는데 거기에 격려차 왔던 한 후원 산악인은 고소증세를 나타내고 아래 병원으로 내려가다가 그대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 안타까운 일도 있었습니다. 박무택의 시신은 정상 바로 아래 8,750m 고지에 매달려 있습니다. 이제 원정팀이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1캠프, 2캠프, 3캠프까지 악전고투 끝에 설치하고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등반대장인 자신의 몸 컨디션이 최악이에요. ‘히말라야의 작은 탱크라고 하는 별명을 가지고 누구보다도 앞서가는 사람이었는데 정작 마지막 순간에 기침과 호흡곤란과 허리가 아파서 자기 몸으론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어요. 나중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냥 산을 올라가는 것이었다면 나는 아마 다음 기회를 기약하고 내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후배와 내 마음 속에 맺은 약속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조난 사망 1주기를 맞기 전에 내가 반드시 너를 끌어내려서 안장해주겠다 라고 하는 약속이 있었기에 강행을 했던 것이죠. 그리고 5월말이면 벌써 몬순이 오기 때문에 기후가 변해서 등정을 할 수가 없다. 이제 시간에 쫓기고 최악의 컨디션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8명이 올라가서 그 시체를 끌어내립니다. 얼어붙어 가지고 100kg가 되어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그 시체를 쩔쩔매면서 끌어내려서 양지바른 바위틈에 돌무덤을 만들어 묻어주고 내려옵니다. 오직 그에게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죠. 생사를 함께 넘었던 그 후배를 아끼는 마음, 그 한 가지 스스로 맺은 약속을 지키려고 자기 목숨을 걸었던 것이죠.

여기 사도 바울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삶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미친 사람같이 보이느냐?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미친 것이다. 내가 온전한 사람으로 보이느냐? 그렇다면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온전한 것이다. 이렇게 보이든 저렇게 보이든 내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오늘도 이끌어가고 있다.’ 그는 이 한마디에 자기의 매 맞음과 숱하게 감옥에 들어가 고초를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온갖 수고를 하고 잠을 자지 못하고, 굶주리고 한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는 그 사랑에 이끌려 능히 감당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는 새로 지어지게 되고 새사람을 입게 된다. 그리스도가 우리 모두를 위해 죽었다고 한다면 알고 보면 우리 모두는 다 죽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이제 우리를 살리셨다. 그 목적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생명을 얻은 우리가 더 이상은 나 자신의 욕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리신 그리스도를 따라 살기 위한 것이죠.

지금 추석 명절이에요. 유대인의 명절과 우리 명절은 그대로 일치해요. 여기 추석 아닙니까? 그 사람들은 지금 초막절이에요.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월력을 쓰기 때문에 지금 그들도 명절이에요. 다 예루살렘에 모여들어요. 예물을 바쳐요. 한 주간의 절기를 지키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에 보니 명절 마지막 날 하나님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이제 자기 고향으로 다 흩어져 가는데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저희 아버님은 이북에서 19살에 단신 월남하시고 사셨기 때문에 사실 저희 집안은 추석이니 구정이니 하는 것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갈 데가 없으니, 그저 우리 집안 식구들끼리 지내는 것뿐이죠. 그렇게 되다 보니 예전에 어렸을 때, 추석 명절에 사람들이 새까맣게 기차에 매달려서 고향을 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왜 저러나했습니다. 고향을 찾는 것은 뭔가 자기의 뿌리를 찾아가는 것이죠. 거기서 삶의 위로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죠.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명절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 명절로도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목마름, 내게로 와서 생수를 마셔라.”

예전에 <축제>라는 영화를 보면서 조상들의 지혜가 놀라웠습니다. 장례마저도 우리 삶의 축제로 만들어서 하나의 매듭을 만드는 그 지혜를 엿볼 수 있었어요. 고인을 슬퍼하지만 그러나 승화시켜서 삶의 원동력을 얻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 각자가 인간이기에 벗어버릴 수 없는 죄의 문제,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죽음의 문제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해결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말은 죽어야 할 존재, 죄와 저주와 사망과 이러한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보다 더 많이 먹는다고, 잘 산다고, 많이 배웠다고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깨뜨리신 사건이죠.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끌려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질적으로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이제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신다. 나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모두를 강권하신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기회가 주어져 있는 겁니다. 사실 한 세대 전에 우리 부모님들의 신앙에 비해서 성경지식으로 말한다면 더 많이 안다고 얘기하겠죠. 아는 것은 많은데 삶의 모습은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분명히 듣고 보는 것은 많은데 왜 삶은 더 나빠집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세례를 줍니다. 그런데 세례 받은 분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요. 그래서 이젠 가도 됩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말합니다. “제 발을 밟고 계시는데요.” 발을 밟고 있으니 움직일 수가 있나요. 그래서 깜짝 놀라 발을 빼면서 아니 그럼 진작 말씀하시지요.” 그랬더니 그것도 세례의식의 일부인 줄 알았습니다.” 우리 신앙이 자칫 이럴 수 있어요. 집례하는 사람은 실수였어요. 그러나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것도 의식의 일부인 줄 알았던 거지요. 예전에 제가 어느 큰 교회에서 새신자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의 일입니다. “지난 주에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얘기를 나누는데 한 분이 그러더라고요. “아니, 주일 밤에도 예배를 나오는 건가요?” 그 교회는 주일 저녁에도 예배가 있었거든요. 그것조차도 몰랐던 거지요. 저는 그분보다 더 놀랐습니다. ‘참 몰라도 이렇게까지 모르는구나.’ 하긴 그렇지요. 모르는 분들은 아예 아무것도 모르죠. 인도하시는 분이 아마 주일 낮에만 나오시는 분이었나 봐요. 그러니까 주일 저녁에 예배 드린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죠.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I’m the way, the truth, the life.’ 그러데 이 길, way라고 하는 말은 또한 방법이라고 하는 말이죠. 예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진리를 발견하며 예수님이 약속하신 생명을 누린다고 하는 것이지요.

미국의 영성신학자이며 오늘날 미국을 일깨우는 예언자라는 별명을 가진 유진 피터슨목사님이 이런 지적을 합니다. 오늘날 미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올바른 일을 하고 있지만, 잘못된 방법으로 가고 있다. 예수님의 진리를 말하고 있지만 잘못된 방법으로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삶의 모든 모습들이 미국을 따라가는 형편입니다. 미국교회를 뒤따라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우리의 삶이 더 여유로워지고 더 풍성해진다면 지금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이 내일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한번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뭘 잘못하고 있느냐?

첫째로 모여든 회중들의 자기정체성이에요.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부름 받은 성도라. 하나님의 백성의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함께 모여서 자기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듣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마음과 뜻을 모아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미국교회 분위기는 소비자가 왕이라고 하는 자본주의 논리, 자본주의 생각이 교회 안에 그대로 들어왔어요. 교인들을 즐겁게 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얻게 하려고 부추기는. 교회가 분위기도 중요하죠. 그러나 여러분 내가 하나님을 만나는 그 분명한 임재 체험이 없다면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거죠. 서울 후암교회 의료선교팀이 들어와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여전도회 식구들을 중심으로 통역봉사를 하고 있어요. 어제 토요일 뿐짝에 가서 하루 온종일 수고하고 오셨어요. 바로 그렇게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의 일에 함께 드려야 하는 거죠. 그럴 때 우리에게, 주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죠.

두 번째는 성경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 미국에는 성경을 공부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경을 대하는 자세가 교인으로서 해야 할 마땅한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성경을 대할 때에 하나님이 그 안에서 내게 말씀하신다고 하는 인격적인 자세로가 아니라 뭔가 더 효과적인 방식을 도입해서 많은 것을 알려 하고 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늘 권하는 게 있어요. 사실 고린도후서 5장만 하더라도 이게 편지거든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은 편지를 한 중간까지 읽고 또 내일 읽어야지 이렇게 접어두는 사람은 미친 사람밖에 없습니다. 한숨에 인사말부터 시작해가지고 쫙 읽는 거죠. 그러면서 그 안에 나를 사랑하고 나를 받아주는 그 마음을 읽는 것 아닙니까. 편지예요. 그런데 그렇게 읽지를 않거든요. 시작부터 틀려요. 여기서는 책을 구하기 어려운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한국에 가시면 꼭 현대어로 번역된 쉽게 풀어 쓴 성경을 하나 사세요. 그래서 한번 고린도후서, 고린도전서, 로마서 이게 다 편지니까 편지를 읽는 마음으로 내쳐서 한번 읽어보세요. 그 안에 우리에게 주시는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중에 부활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인간의 경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어요.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저를 믿는 자에게 주신 부활만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 거예요. 우리가 할 일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다 만들어 놓으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 아기가 자기 생명을 위해서 노력한 적이 없어요. 부모를 통해서 그 생명이 언젠가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세상에 태어났어요. 이제 그 생명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신앙에는 신비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거룩함이 있는 거예요. 그 거룩함 앞에 우리는 경외함을 가지고 엎드려야 합니다. 성경을 공부할 때 우리에게 하나님이 이성을 주셨기에 당연히 의문이 있습니다. 갈등도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게 아니에요. 지극히 정상이에요. 한번 공부하세요. 들여다보세요. 그러나 여러분의 생각으로 공부하고 공부하다 드디어 막히는 자리를 넘어서는 그 부분은 이제는 하나님의 영역으로 여기고 믿음으로 받아들이세요.

우리가 이렇게 피가 끓고 살아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생명의 신비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학자나 과학자들이 지극히 일부분밖에 밝혀내지 못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오늘도 활기차게 살아가고 있어요.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이루신 그 사건에 마음을 열고 전폭적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까지도 내가 이해하고 파악하고 통제하려고 하는 집요한 인간의 부질없는 욕심이 오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삶 속에 들어오는 통로를 막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인내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신앙 안에서 성숙하는 일은 참으로 양보할 수 없는 긴급한 일입니다. 그러나 서둘러서는 안돼요. 서서히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부득이 세례 받으시는 분들을 위해서 세례교육이 필요하고 성경공부를 원하시는 분들이 있으니까 성경공부도 하고 또 여러분들이 열심히 모이시니 다 좋습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그날까지 한걸음 한걸음 디디고 올라가는 거예요.

산악인 엄홍길씨가 분개하는 일이 있더라고요. 히말라야 정상을 올라가는 일도 요즘은 상업화 되어 1인당 5만 불, 6만 불씩 받고 실력이 모자란 사람을 막 붙들어 정상에 올려서 만세 부르고 사진 찍고 내려오고. 이게 상업화 된 거죠. 물론 거기까지 올라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죠. 거기 가서 만세를 부르면 또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지극히 자기만족적인 그러한 것은 참된 것이 아니에요. 정말로 거기에서 삶을 배워야 한다고 하는 것이죠.

며칠 전에 프로야구팀 한화의 장종훈 선수가 은퇴했어요. 그러네 그 사람은 처음에 연봉 3백만 원짜리 훈련생이었어요. 그러던 사람이 홈런왕이 되고 19년 성실한 선수로 모범이 됩니다. 그리고 프로야구 6개 부문에 최고기록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야구를 하면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야구는 내 인생의 전부입니다. 내가 19년 야구 인생 속에서 기억 남는 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등학교 때 , 잘한다고 건방을 떨다가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연습생으로 연습구장에 들어가게 되었던 그 때를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처절한 실패를 통해 겸손을 배운 거죠. 그리고 한걸음 한걸음 디디고 올라서서 1999년에 우리 팀이 시리즈에서 우승한 그 일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정상에 올라본 사람입니다마는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그가 뼈아픈 실패를 후회하거나 지워버리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발판으로 겸손을 배운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가난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항상 흐르는 것입니다. 오늘 내게 은혜가 메말랐다면 그 은혜의 통로를 막고 있는 나의 불신앙, 불순종, 어리석음이 있는 것이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이끌어 가신다. 바로 그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명절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떡을 나누고 기쁨을 나누고 삶을 나누면서 쉼을 얻는 이 귀한 시간, 마침 오늘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명절의 기쁨보다 더한 선물, 죄 사함과 영생과 그리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끌려 살아가는 이 놀라운 삶을 선물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아름다운 선물을 잘 간직하고 이 안에서 내 삶의 모든 응답을 얻는 지혜로운 신앙인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