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빌립보서 강해(11) 바울의 고백적 간증③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8. 13. 21:38

" 2. 생사(生死)의 의의(빌 1:19-26) "
-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존귀 -
빌립보서 1장 19~26절
석원태 목사

전도자 사도 바울은 고백적 간증을 통해 그의 투옥이 복음의 진보를 가져왔다고 했다(빌 1:12-14). 그리고 복음전파의 방법들에 약간의 문제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빌 1:15-18)라고 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고 하였다. 택자 구원을 목적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바울의 고백적 간증이었다.

이제 바울의 고백적 간증은 더 깊어지고 높아지고 넓어짐을 보게 된다. 그것은 그가 삶과 죽음 사이에 끼여 있는 존재라고 한 사실이다. 그는 금세와 내세 사이에 끼여 있다고 하였다(빌 1:23). 더 좁게 말하면 그가 빌립보 감옥에서 착한 뜻으로 전도하는 무리와 외모로(투기와 분쟁) 전도하는 무리 사이에 끼여 있다고 했다(빌 1:12-17). 그럼에도 바울은 전파되는 그리스도 때문에 기뻐한다고 함으로 이 모든 것을 초월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환영과 배척도 초월하고, 죽고 사는 것도 초월하고 있다고 하였다.

왜 그럴까?
그것은 바울 자신이, 자기가 살고 죽는 생사관에 있어 너무나도 분명하고, 뚜렷하고,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본문 1장 19절에서 26절에서는 바울 자신의 생사(生死)의 의의를 고백적으로 간증하고 있다.

첫째는, 그가 겪고 있는 모든 것들이 바울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할 줄을 확신하고 있는 삶 때문이라고 하였다.

빌립보서 1장 19절에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라고 하였다.
여기에 ‘이것’이란 그가 복음 때문에 겪고 있는 모든 사정들과 환경들을 가리킨다. 본문의 경우는 ‘투옥’이란 그의 매임이다. 그리고 그 매임 가운데서도 자기를 알아주고 환영하는 무리들, 또한 외모(투기, 분쟁)로 전도하는 것으로 실상은 자기를 괴롭게 하고 아프게 하는 것들을 말한다. 그리고 자기 때문에 염려하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이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기뻐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이것’이 자신(나)을 구원에 이르게 할 줄로 알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기 ‘구원’(σωτηρ?α)은 ‘죄와 사망에서의 자유’라는 본질적인 뜻이 있으나, 본문의 경우는 ‘안전’ 혹은 ‘해방’, ‘하늘에로의 옮김’ 등의 의미가 담겨 있다. 더 자세히 생각해 보면 바울 자신의 옥중에서의 석방과 자유까지도 포함되어 있는지 모른다.
‘구원’이란 헬라어 소테리아(σωτηρ?α)는 정치적 압제에서의 해방, 사상적 압제나 질병의 고통이나 재난과 기타 위협이나 굶주림의 가난이나 전쟁 등의 위험에서 해방되고, 행복해지는 것들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본문에서 두 가지로 밝히고 있다.
하나는 바울을 향한 빌립보 교인들의 기도(간구)가 있다는 것이다.
빌립보서 1장 19절에 「이것이 너희 간구와」라고 하였다.
바울은 빌립보서의 경우뿐 아니라 다른 서신에서도 자기를 위한 성도들의 기도를 계속 말하고 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2절에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이라고 하면서 전도자가 전한 말씀이 영광스럽게 되고, 또 전도자들을 악인의 무서운 소행에서 건져 달라고 기도하기를 부탁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1장 11절에는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빌레몬서에는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몬 1:22)고 하였다.
에베소서에는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엡 6:19)라고 하였다.
바울은 그가 예루살렘에로의 위험한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롬 15:30)라고 자기를 위한 기도를 부탁한 일도 있다.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1장 19절이 또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란 문자적으로 이곳에만 나타나고 있다. 로마서 8장 9절, 베드로전서 1장 11절에는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라고 함은 성령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에게 보내신바 되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하였다. 또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자신이 성도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요 14:20). 성령은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임재와 내재를 입증하는 산 증인이시다.
지금 바울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이것’이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할 줄을 안다고 하였다. 그것은 빌립보 교인들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움’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기 ‘안다’ (ο?δα)는 말은 ‘경험적 앎’(γιν?σκω)이 아니라 초경험적인 직관적, 절대적 지식(앎)을 가리키는 말이다. 말하자면 영으로 확신되는 지식이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는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을 기뻐한다’고 한 것이다. 전도자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는 아무런 변동이나 이상이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둘째, 절대적인 그리스도 중심의 목적적 삶 때문이라고 하였다.

빌립보서 1장 20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하였다.
바울에게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다고 하였다. 이 말은 헬라어 ‘아포카라도키아’(?ποκ?ραδοκ?α)이다. 이 단어는 ‘απο’(빼내어)+κ?ρα(목을)+‘바라봄’(δοκε?ν)의 합성어이다. 목을 쭉 뽑아내어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마치 학이 목을 길게 빼어 멀리 바라보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아포카라도키아’는 하나의 열망하는 바에 집중하기 위하여 다른 모든 것에서 떠나서 한 목적만을 대망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19절에는 ‘고대’라고 번역하였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라고 하였다.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 그 ‘아포카라도키아’가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함」(빌 1:20b)이라고 하였다.
여기 ‘존귀’라는 말 ‘메갈룬데세타이’(μεγαλυνθ?σεται)는 ‘위대한’(μ?γαρ?)이란 말에서 유래한 말로 ‘위대하게 만들다’라는 고대 동사 ‘메갈루노’(μεγαλ?νω)의 미래 수동형 직설법이다.
사도행전 19장 17절에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라고 한 경우이다.
그렇다면 바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더 크게 하고, 높이고, 위대하게 하고픈 것이 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도 뚜렷하고 확실한 그의 목적적 그리스도관 때문에 그는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 때문에 부끄러움을 몰랐다고 하였다. ‘아무 일’, 곧 자기를 모략중상하는 악의의 전도자나, 자기의 몸을 결박하고 있는 로마의 관권이나, 아니면 여러 종류의 모욕과 학대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했다. 이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 적극적으로 「온전히 담대하여」라고 하였다.
여기 ‘담대’는 특히 ‘언론의 자유’를 말한다. ‘온전히 담대했다’는 것은 ‘모든 확신에서의 거리낌 없는 언론의 자유’를 말한다. 그래서 그 어디, 그 누구도 바울의 복음전도를 꺾은 자가 없었다. 사도행전 28장 31절에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고 하였다.
「살든지 죽든지」라고 함은 몸으로 ‘산 제물’(롬 12:1)이 되든지, 아니면 순교하든지 간에 오직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히 되게’ 하고 싶었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곧 아포카라도키아(?ποκ?ραδοκ?α)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학수고대하는 미래란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히 하는 데’에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라이트훗(J. B. Lightfoot)은 ‘자유로이 말하는 권리는 그리스도의 종의 표시요 특권이다.’라고 하였다. 엘리코트(Ellicott)는 ‘바울의 몸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연출하는 극장이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저렇게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존귀가 그의 삶의 절대적 목적이 되어 버렸다. 살든지 죽든지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만이 존귀히 되게 하려 하였다.

왜 그런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빌립보서 1장 21절은 「이는」, 즉 이유접속사 ‘갈’(γ?ρ; for)로 시작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하였다.
여기 ‘내게’(?μο?)라는 말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는 확실하다’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자신의 존재적 생사관(生死觀)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살든지 죽든지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고 싶었다. 그 큰 이유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생사에 대한 그의 존재적 의의와 내용과 목적이 오직 그리스도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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