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하나님의 계산법[여러분,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에요]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10. 22. 12:02

060728 하나님의 계산법                                          설교집 Ⅱ<마음을 시원하게> 3-27

성경본문                                                                                                           / 장영수 목사

6.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마태복음 20:8-16)

 

캐나다의 리차드 링클레이터라고 하는 신인감독을 한순간에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감독으로 만든 그의 작품이 있습니다. <Before Sunrise> ‘해뜨기 전에 그리고 또 짝을 이루는 영화가 있어요. <Before Sunset> ‘해지기 전에

<Before Sunrise>는 어떤 영화냐 하면 유럽을 여행하던 한 미국청년이 열차 안에서 프랑스 처녀를 만납니다. 그리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제네바에서 같이 내립니다. 시간을 만들어서 제네바에서 하루 여행을 하며 연애를 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제 시간은 그 청년이 내일 아침 이른 시간에 기차를 탈 때까지 주어진 그 시간뿐입니다. 그러니까 before sunrise. 해뜨기 전까지가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에요. 그 영화를 보면 연애하는 젊은 남녀의 그 미묘한 감정 그것을 아주 평범하고 사실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룻밤 사랑을 나누고는 아침에 남자가 기차를 타고 떠나갑니다. 그러면서 약속을 합니다. 6개월 후에 서로를 향한 마음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우리가 어젯밤에 만났던 제네바공원에서 다시 만나자 약속을 하고는 떠나갑니다. 그게 영화의 끝이에요.

그리고 <Before Sunset> 이 영화는 9년 만에 다시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앞 영화에 이어서 진행됩니다. 6개월 후에 만나자던 약속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서로 간에 착오가 생겨가지고 불발됩니다. 만나지 못했어요. 9년 세월이 흐르면서 이 남자는 결혼했고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가씨와의 그 하룻밤 사랑을 잊지 못해서 그것을 글로 써서 책으로 펴냅니다. 이것이 화제가 되었어요. 구래서 그가 프랑스 파리에서 독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그런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 파리에 오는 것이죠. 그러다가 신문을 통해서 그런 내용을 접하고 찾아온 그 아가씨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독자와의 행사가 다 끝난 다음에야 두 사람은 다시 만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또 마찬가지로 뉴욕행 비행기를 저녁에 타야만 하기 때문에 이제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단 두 시간뿐인 거죠. 그 짧은 두 시간 동안에 지난날의 이야기들과 9년 동안 그들이 각자 살았던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첫 번째 영화의 남녀 주인공을 그대로 9년 만에 다시 불러내가지고 다시 주인공으로 세워서 영화를 찍은 것이죠. 그러므로 시청자들은 9년 세월 동안 남녀 배우가 어떻게 변했는가 하는 것을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20대였다가 이제 30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얼굴이 여전히 예쁜데 남자는 많이 늙었더라고요. 내용인 즉은 남자는 연기를 하면서 감독 일을 겸하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9년 만에 얼굴이 팍 삭았어요. 그것을 보면서 저 자신도 이마를 한번 짚어 보게 되더라고요. 나는 어떻게 변했는가.

그 영화가 주는 효과는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추억을 다시 한번 더듬게 하는 것입니다. 10년 세월에 나는 어떻게 변했는가? 또한 그들의 대화 속에 이제 30대밖에 안되었습니다만 서로 헤어져서 지냈던 10년 세월은 결혼을 했건 아직 결혼하지 않았건 무슨 일을 하던 벌써 삶에 지쳐있는, 아무런 삶의 기대를 가지지 못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10년 전에 여러분은 어땠습니까? 10년이면 외모도 변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속 사람은 어떤 변화를 가졌는가. 10년 세월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앞으로의 10년 또한 뭘 기대하겠습니까?

임종을 앞둔 어떤 분의 글입니다.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의 한계가 없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하는 꿈을 가졌었다네. 좀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네. 그래서 나는 내 시야를 약간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지.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에게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다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지.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 누운 나는 문득 깨닫는다네. 만약 내가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다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걸세.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꾸어놓았을 걸세.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지….’

여러분, 변화의 순서는 나부터 시작입니다. 내 남편이 아니고 내 아내가 아니에요. 내 마음 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내가 남의 마음을 고치려고 합니까. 그거 판단 잘못한 거죠. 그건 내버려두세요.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 손에 맡겨두세요. 다 하나님의 때가 있는 거예요. 그러나 오늘 이 시간 당장 시작할 수 있는 변화는 바로 나의 변화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거예요.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고 그것을 새 출발의 디딤돌로 삼을 수 있는 그것은 내게 주신 거예요. 내 과거가 어떠했던 간에 오늘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새날과 함께 선물로 주신 거예요. 변화는 나로부터 내 마음으로부터 내 생각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을 느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시간이요, 하나님의 때입니다.

이사야 55 6절에 보니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나아오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요.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고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에요. 믿음이라는 건 뭐 그냥 막 뜨거워가지고 열심을 낸다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보시는 그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해요.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그 눈으로 나를 보고 상대를 보고 내 상황을 보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고 그래요. 믿음은 생각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나님의 생각을 내 마음에 받아들이는 그 시간부터 하나님의 나라는 내 안에 임하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유명한 포도원 일꾼의 비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올라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해 올라가십니다. ? 드디어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선포했던 천국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깨닫게 하고 나누도록 하기 위해서 올라가시는 거죠. 우리는 변화를 희망합니다. 변화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천국이에요. 우리 육신이 죽어도 다시 사는 천국이지만 더 중요한 천국은 예수 그분을 내 마음에 모시면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세계예요. 생각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거죠.

그러데 오늘 본문 말씀을 꼼꼼히 읽어보면 사실은 갈등이 일어나요. 이런 내용이죠.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 수확 철이 되가지고 일손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른 아침 6시 동틀 때, 인력시장에 나간 거예요. 새벽에 나와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포도원에 다 부른 거예요. “당신들에게 오늘 하루 품삯 1데나리온을 주겠다. 빨리 가서 일하라.” 이 사람들은 일자리가 없어서 애를 먹고 있던 사람들인데 주인이 와서 자기들을 부르니까 신이 나서 가서 일한 거예요. 주인이 아침 9시에 가보니까 여전히 사람들이 있어요. “당신들도 빨리 들어가라.” 12시에 나갔더니 아직도 일자리를 못 구한 사람들이 있어요. “당신들도 들어가라.” 오후 3시에 나갔더니 아직도 일을 못 구한 사람들이 있어요. “당신들도 들어가라.” 그리고 혹시나 해서 오후 6시면 일이 끝나는데 오후 5시에 나가보니까 그때까지도 일자를 못 구한 사람들이 있어요. “아니 왜 이러고 서 있느냐?” “우리를 써주는 사람이 없어서 이러고 있습니다.” “얼른 들어가서 일하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온 사람들이 1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벌써 하루 해가 저물고 일이 끝났어요.

그래서 주인이 계산하는 거예요. 사람을 시켜서 품삯을 주라고 말합니다.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주라는 거예요. 그런데 맨 나중에 온 사람들에게 1데나리온을 주니까 그보다 일찍 온 사람들이 , 우리는 좀더 받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거죠. 그런데 아참 이른 새벽에 온 사람까지 모두 다 그날 일한 사람은 1데나리온 씩 준 거예요. , 그러니 어떻게 되겠어요. 당장 사람들이 수군수군하더니 불평합니다. 가장 일찍 온 사람이 말하는 거예요. 이거 너무 불공평하다. 저 사람들은 1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오늘 하루 온 종일 12시간을 수고하고 땀 흘리고 일한 우리와 어떻게 똑같이 줄 수 있느냐 그랬더니 주인이 말합니다. “여보시오, 내가 당신하고 얼마를 약속했소? 하루 품삯 1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하지 않았소. 그러니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소. 당신은 당신 품삯이나 받아가지고 가시오.” 그러면서 말합니다.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처음 온 사람과 똑같이 주는 것이 원래 내 뜻이고 내 생각이요. 내 돈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단 말이오? 내가 저 사람에게 좀 후하게 한 것이 어떻게 당신 보기에 악항 일이라고 하시오?”

설명을 여기까지 했습니다만 여러분 얼굴을 보니까 갈등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나라도 불평하겠다. 당연하지요. 저라도 그렇게 하겠어요.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어요. 이런 갈등이 일어나니까 유대인 학자들 가운데 이 대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면, 마지막에 와서 1시간밖에 일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감사해서 열심히 일했다는 거예요 그것을 보고 주인이 감동을 받아서 조금 주려고 하다가 그래 당신도 1데나리온 받아라 이렇게 했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그건 성경적인 해석은 아니에요.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기에 우리 인간의 이성에 우리 사고방식에 맞추어서 말씀을 왜곡하는 거예요. 그건 아니에요. 바로 지금 우리가 갈등을 느끼는 그 부분이야말로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인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상식적으로 볼 때 오후 5시까지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 혹시 특별한 사정이 있었을는지는 몰라도 제가 보기엔 일할 많은 사람들 중에 제일 시원찮은 사람들이죠. 오후 5시까지 일을 못 구했다. 게으른 사람들이거나 힘이 약한 사람들이거나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죠. 또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 한들 1시간 일한 사람들하고 12시간 일한 사람들의 양을 비교할 수는 없죠.

주인의 숨은 의도가 있어요. 주인은 그들을 부를 때부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려고 처음부터 작정한 거예요. 여기 주인의 뜻이 있어요. 포도원 주인은 가진 자예요. 능력이 있는 자예요. 그리고 베푸는 자예요. 사람들의 필요에 주목합니다. 그러니까 1시간밖에 일하지 못한 자일지라도 집으로 돌아갈 때는 그를 애타게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하루 먹을 양식은 가져가야 하기 때문에 1데나리온이 필요하다고 보신 거예요. 하루 종일 일한 사람에게도 그는 하루 품삯 1데나리온이 필요하죠. 그러나 1시간밖에 일하지 못한 자에게도 1데나리온의 품삯이 필요한 거예요. 나를 중심으로 본 것이 아니라 저의 필요를 보신 거죠. 여기 하루 품삯의 의미는 우리가 주 기도문으로 기도하듯이 일용할 양식 그리고 그 안에 담겨있는 그를 위한 깊은 배려, 하루의 은혜를 가리키는 것이죠.

, 먼저 온 자들이 왜 불평합니까? 자기들은 수고를 많이 했는데 저 사람들은 거저 가져간다고 불평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세요. 먼저 온 자들 그들은 아침에 일찍 일을 잡았기에 근심걱정 없이 하루 일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하루 일하면 나중에 틀림없이 품삯을 받을 거예요. 그러나 오후 5시까지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그 길모퉁이에서 서성인 사람들의 그 마음을 한번 헤아려보세요. 얼마나 근심하고 얼마나 탄식하면서, 기다리는 가족들을 생각할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을 택하시겠어요? 하루 건강히 아침부터 일하는 것을 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일자리를 얻지 못해서 고통 가운데 있다가 이렇게 마지막에 기회를 얻겠습니까? 그러니까 먼저 온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에요. 그날의 양식, 필요한 1데나리온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해요. 더 얻으려고 해요. 사실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더 욕심을 내는 거예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더 욕심을 내는 거예요. 여기에 잘못이 있습니다. 그리고 알고 보면 내일이면 또 다시 시작이에요. 내일이면 또 다시 일터에 나와서 이 주인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가야 할 사람이에요. 자기의 처지나 뒤늦게 온 사람이나 알고 보면 오십보백보에요. 다 그날그날의 은혜를 구할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자그마한 것을 가지고 시시비비를 가리고 우열을 가리고 품삯을 나누려고 하는 것이죠.

우리가 이렇게 낮에 지내면서 여러 가지 소리를 듣습니다. 밤이 되면 세상이 조용해지니까 모기 날아다니는 소리도 들려요. 그렇지만 인간의 귀가 들을 수 있는 소리에는 한계가 있어요. 이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는 아무도 못 들어요. 그 소리를 듣는다면 귀가 터질 테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은 인간의 감각으로는 감지할 수 없도록 하신 거예요. 너무 큰 소리도 못 듣고, 너무 작은 소리도 못 들어요. 여기에 하나님의 신비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과 내가 일한 양을 가지고 하나님 이건 억울합니다. 저 사람은 조금만 일했는데 나는 저 사람보다 두 배를 더 주십시오.’ 이렇게 따지는 데는 익숙하지만 이걸 넘어서서 생명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은 우린 낯설어요. 그건 어색해요. 여기에 우리의 한계가 있는 것이죠. 여러분, 주님의 의도를 아셔야 돼요.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따지는 사람들은 뒤늦게 온 사람들과 자기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서있습니까? 이 비유에서 결정적인 문제는 이 비유를 읽는 사람들이 자기를 먼저 온 사람들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거예요. 성경이 말하고 주님이 말하는 것은 너희야말로 가장 나중에 온 사람들임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있습니까.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약점이 이런 거예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나왔는데 그게 자기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거예요. 흔히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별명이 못해잖아요. ‘이것도 못해, 저것도 못해.’ 교회에는 익숙합니다. 다 아는 것 같아요. 그러나 오늘 간절함이 없습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늦게 온 사람인데 은혜 받았다고 그러는 게 영 마음에 달갑지 않아요. 어디에 문제가 있습니까?

여러분, 오늘 내가 누구냐? 내가 먼저 온 자냐, 나중 온 자냐. 거기에 있는 거예요. 주님의 눈으로 볼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다 막차 타고 온 인생이에요. 그러니 주인과 먼저 온 사람이 지금 시비가 붙었을 때, 한 시간 일하고 품삯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송구스럽고 미안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변호하고 감싸는 그 주인을 향하여 감사와 감격할 것밖에 없는 것이죠. 오늘 이 비유에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너는 어디에 서 있느냐?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다. 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 부르심을 받은 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끗하게 간직하고 오늘을 감격 가운데 사는 사람은 누구냐?

데이빗 그레고리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한 저녁식사> 라는 자그마한 책을 냈는데요, 아주 세계적으로 대히트를 쳤습니다. 이분은 경영학을 공부하고 10년 사업을 하다가 뒤늦게 신학을 공부하고 종교학을 공부하고 커뮤니케이션학을 공부하고 어떻게 하면 복음을 현대인들에게 잘 전할 수 있을까 하다가 이 책을 썼는데 아주 대박이 터진 책이에요. 읽어보면 그 참, 아이디어가 신선합니다.

이라고 하는 사람이 30대 중반의 회사원인데 일에 매어가지고 삶의 낙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편물을 뒤져보니까 거기에 초대장이 있어요. 아주 근사한 이태리식당으로 자기를 초대한다는 초대장이에요. 그런데 보낸 사람을 보니까 나사렛 예수이렇게 쓰여 있는 거예요. 그래서 회사의 친구, 동료들이 자기를 하도 짓궂게 장난했었기 때문에 이 친구들이 또 나를 골탕 먹이려고 장난을 하는구나 생각하고 뭘 어떻게 하나 보자며 나간 겁니다. 나가보니까 거기서 멀쑥한 신사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누군가 골탕 먹이려는 사람이지하고 가서는 누구십니까그랬더니 , 저는 예수입니다.” 아 이러면서 시작이 되는 거예요.

저는 사실 우리 식구들을 부지런히 심방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원하시고 또 필요할 때는 언제라도 여러분을 만날 용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뭘 원하느냐 하면 전통적인 방식으로 모여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다 은혜가 있고 좋다고 생각하지만 할 수만 있으면 그 가족끼리만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누면 훨씬 더 진솔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가 있거든요. 그리고 서로가 가지고 있는 신앙에 대한 물음이나 이런 것들도 좀 나눌 수가 있죠. 소박한 밥상에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기회가 저는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마는 아직 마음에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만 지식에 머물고 있는 이 사람이 예수님과 만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 사람이 짓궂게 이럽니다. “내가 성경에 보니까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당신은 지금 이 와인을 물로 바꿀 수 있소?” 그랬더니 그 예수라는 사람이 , 그럼요. 애드릴 수 있죠.” 그러더니 웨이터를 불러서 이거 물로 좀 바꿔주게.” 당장 바꿨어요. 그러니 , 이 사람 참 장난하네.’ 이러면서도 그가 가지고 있던 많은 물음들을 다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하나 신앙을 짚어가는 거죠.

그가 묻습니다. “아니, 당신이 오늘 날 이렇게 만났다면, 왜 하나님은 이렇게 직접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가지고 자기를 드러내 보이지 않소?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다 믿을 텐데.”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사람들에게 충분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만물을 지으신 이 창조,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그리고 그것을 기록한 성경, 그리고 성경을 대할 때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오셔서 깨닫게 하시는 성령 등과 같은 증거를 주셨습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방법대로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다면 그 즉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그 증거를 보여주실 터인데 사람들은 다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나에게 보여달라고 요청하니 증거를 눈 앞에 두고서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참으로 천국은 인간의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죠.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생을 선물로 받는 자들이 천국을 가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시간과 공간의 의미라기보다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이 딕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룻밤 예수와의 저녁식사를 통해 마음이 푸근해졌어요. 녹았어요. 다시 또 만나고 싶어서 혹시 명함 하나 주시겠소?” 그랬더니 예수님이 명함을 하나 주는 거예요. 어두운 데서 명함 하나 받아가지고 왔습니다. 집에 와서 명함을 펼쳤습니다. 그랬더니 그 카드에 뭐라고 써 있느냐? 요한계시록 3 20. 그것만 딱 쓰여 있어요. 얼른 성경을 찾아봤어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여러분,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마음을 열고 말씀을 대하는 그 순간 주님은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 먹고 마시고 대화하고 나의 문제를 들으시고 응답을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어둡고 깨어지고 답답해져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므로 스스로 고통스러워하고 스스로 낙망하였던 우리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이 시간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와 더불어 먹고 마시며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나누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감사 드립니다. 이런 믿음으로 오늘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