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너희도 온전하라[용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10. 22. 21:11

060423 너희도 온전하라                                          설교집 Ⅱ<마음을 시원하게> 3-21

성경본문                                                                                                           / 장영수 목사

41.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43-48)

 

<인디언의 복음, The Gospel of the Redman>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백인으로서 인디언과 함께 살았던 에네스트 탐슨 시튼 (Ernest Thompson Seton)’ 이라고 하는 사람이 1937년에 펴낸 책입니다. 이 책에 양파 파는 노인이라고 하는 글이 있습니다. 멕시코 시티의 넓은 시장 한 구석에 한 노인이 양파를 팔고 있습니다. 양파를 스무 줄 걸어놓고 그늘 가에 햇볕을 피해 서서 양파를 팔고 있습니다. 멀리 미국 시카고에서 온 사람이 와서 그에게 묻습니다. “이 양파 한 줄에 얼마입니까?” “10센트입니다.” “그럼 두 줄은 얼마입니까?” “20센트입니다.” “세 줄은 얼마입니까?” “30센트입니다.” “, 하나도 깎아 주지 않으시는군요. 그렇다면 스무 줄 모두는 얼마입니까?” “전부는 안 팝니다.” “아니, 왜요? 이 양파를 팔려고 나오신 것 아닙니까?” “물론 양파를 팔려고 나왔지요. 그러나 양파만 팔러 나온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인생을 살려고 시장에 나온 것입니다. 이 시장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시장에 내리쬐는 따사로운 햇볕도 사랑합니다. 양파를 사러 오는 베드로를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의 가정 이야기를 듣는 것을 나는 좋아합니다. 만약에 내가 이 양파를 모두 한 순간에 당신에게 팔아버린다면 나의 오늘은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시튼이라고 하는 사람은 인디언과의 생활경험을 통해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 백인들의 문명은 분명 물질적이다. 그리고 우리의 성공기준은 내가 얼마나 돈을 모았는가 하는데 있다. 그러나 인디언 문화는 다르다. 이들은 보다 영적이다. 그리고 이들의 성공기준은 내가 오늘 이웃들에게 얼마나 봉사했는가 하는데 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디에 속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돈의 위력을 실감하는 사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가치관은 자본주의 가치관에 오도되고 말 것입니다.

미국의 17세기 한 청교도의 묘비에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나는 주님이 내 손에 붙이신 98명의 인디언을 죽였노라. 그리고 주님이 나를 그 품으로 부르시기 전까지 100명을 죽이는 것이 내 꿈이었노라.’ 청교도가 누굽니까? 하나님을 깨끗한 마음으로 철저하게 그 말씀을 지키며 믿는다고 자랑하던 사람들이 청교도가 아닙니까? 그러나 인디언이 우리와 다른 종족, 다른 문화의 사람이라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를 살해하는데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죠. 한 사람의 인디언은 한 마리 사슴 가죽보다도 못한 존재였던 것이죠.

그렇다면 이것은 나치 독일의 한 지도자의 생각과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는 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사람이에요. 유대인을 바라볼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 한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비누 7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지방과 중간치 못 하나를 만들 수 있는 철분과 성냥 2,000개비를 만들 수 있는 인과 몸에서 벼룩을 퇴치할 수 있는 정도의 황을 얻을 수 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사람을 화학적 성분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용가치를 가지고 그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비극이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의미는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거룩한 삶을 소원합니다. 비록 우리의 노력이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온전하고 거룩하게 살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거룩한 이유는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라는 점에서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기에 거기에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죠. 더 나아가서 그것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죠. 그러기에 그 사람이 얼마나 올바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느냐, 그 사람이 얼마나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사랑이 진정한 것인가, 그리고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고 있는가 하는데 있는 것이죠. 얼마나 오랫동안 교회를 나왔는가? 그것도 중요하겠습니다마는 그가 예수를 믿은 년 수만큼 그의 사랑이 과연 풍성해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흔히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경에 대해서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말씀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세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말이죠.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

오늘 마태복음 5장은 흔히 산상수훈이라고 말합니다. 천국의 윤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그 모든 것들 것 말씀하시면서 계명은 이렇게 말했지만 율법은 이렇게 말했지만 전통은 이렇게 말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역설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원수를 사랑하라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입니까?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라고 하는 옛 율법의 말씀조차도 우리는 감당하기 어렵지요. 이웃조차도 원수로 대하는 우리가 아닙니까?

예전에 시골 노인들을 불러다가 서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코미디 프로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거기에서 사회자가 물음을 던졌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부부로 만나서 살아가는 것을 네 글자로 뭐라고 말하지요?’ 할머니가 한참 생각을 하다가 말합니다. 사실은 그 정답은 천생연분이죠. 그러나 말합니다. ‘평생웬수진정 천생연분으로 만나 살아야 할 사람조차도 그 마음 속에 평생 웬수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또한 우리의 현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계명으로 새롭게 붙들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죠. 오늘 말씀에 보니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게 하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신다. 해와 비를 악인이건 선인이건 의인이건 불의한 자이건 하나님의 은혜로 베풀어주신다. 일반 은총을 말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사랑하고 더 나아가서 용서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죠.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너 자신을 위하여 용서하라고 하는 것이죠. 그 유명한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그리고 그의 아내 소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귀족이었습니다. 대지주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젊은 시절에 허랑방탕하게 인생을 낭비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제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을 때 그는 새로운 인생을 살기 원해서 새 신부에게 자기가 이제까지 기록했던 그 일기를 내보이면서 자기의 지난 날의 많은 허물과 여인들과의 관계들까지도 숨기지 않고 다 내보였습니다. 적어도 결혼생활만큼은 새롭게 시작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그들의 사랑을 깊이하고 돈독히 하는데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결혼생활을 고통으로 빠뜨리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톨스토이의 지난날의 많은 방탕과 실패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죠.

톨스토이의 아내였던 소냐도 일기를 기록합니다. 소냐의 일기에 이런 글들이 나옵니다. ‘내 남편이 젊어서 수많은 잘못과 죄와 실수를 저지른 것을 용서할 수 있다. 그것은 참아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부리던 많은 소작농 중에 악시냐라고 하는 한 여자와의 관계는 용납할 수 없다. 지금도 소작농으로 살고 있으며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톨스토이를 영락없이 닮은 그 세 살짜리 아이를 볼 때마다 나는 남편을 죽이고 싶은 질투와 충동을 이기기 어렵다. 만약에 내가 남편을 죽이고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내가 저를 죽이고 싶다.’ 라고 그의 감정을 솔직히 토로합니다. 그러한 일기는 계속됩니다. 어느 날은 이렇게 씁니다. ‘아직도 내 남편은 그녀의 탄탄한 몸매와 그을린 검은 다리를 훔쳐보고 있다. 그리고 그녀도 내 남편 앞에서 아직도 당당하게 행세하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일기가 쓰여졌을 때, 그 소작농 악시냐라고 하는 사람은 이미 80이 넘은 쪼그랑 할머니였던 것이죠. 질투와 분노에 눈이 멀어 소냐는 반평생, 결국 톨스토이가 죽을 때까지 그 분노와 원한을 풀지 못했던 것이죠. 여러분, 용서는 이만큼이나 어렵습니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서 구사일생 목숨을 건져서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인이 말합니다.  내가 새 나라 새 땅에 와서 새롭게 살기 위해서라도 나는 나치를 향한 마음을 버려야만 했다.” 라고 말합니다. 내가 새롭게 살기 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죠. 용서는 상대방을 위해서 용서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먼저 영혼의 자유로움을 위해서 용서해야만 하는 것이죠.

어떻게 용서해야 되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네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라.’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다니요? 이것은 저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요, 저의 잘못을 위해 오히려 하나님 앞에 고소하는 것이 아니라 변호하라고 하는 것이죠. 참으로 사람으로서는 택하기 어려운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는 거죠.

또한 용서에 관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라. 모든 사람의 상황과 그 마음, 중심을 헤아리시는 하나님께 맡겨라. 그럴 때 하나님이 가장 공정하게 그리고 협력하여 선이 되도록 이루어주신다고 약속하시는 거죠. 그러나 용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흔히들 상처를 입었을 때, 내가 저를 용서할 수는 있지만 저가 내게 와서 잘못을 인정하고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할 때, 나는 용서하겠다고 말합니다. 결국 용서할 준비는 되어 있으나 정작 용서하지 않는 거죠. 저 사람이 정말로 회개하고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는지 우리는 주시하지 그에게 무조건적인 용서를 펴지 않죠. 그러기에는 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사람이 용서하려고 노력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하지만 계속 실패하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 초점이 나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실패, 나의 열심, 나의 후회, 온통 초점이 나에게 맞춰져 있는 이상은 결코 온전한 용서, 온전한 사랑은 불가능한 것이죠. 왜냐? 내 사랑은 항상 부족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이 내 것이 되기 전에는 진정한 변화는 없다고 하는 것이죠.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 하나님께 맡겨라. 무조건 용서하라. 참으로 성경적인 용서의 방법입니다만 이것을 가능케 하는 그 힘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였다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수 같은 나를 한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할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마지막 황제>라고 하는 영화가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보면 부의라고 하는 아주 어린아이가 자금성에 들어가서 황제가 됩니다. 그래서 그는 가족과 생이별을 합니다. 그가 왕이 되어서 그 혼자만 왕궁에 들어가 살게 되었기 때문이죠. 그러다 세월이 훌쩍 지나서 그가 10대가 되었습니다. 모처럼 왕궁을 찾아온 자기의 친동생을 만나게 됩니다. 동생이 보고 깜짝 놀랍니다. 왕이 된 형의 모습은 너무나 멋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신하들이 그 앞에서 꼼짝 못하고 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을 보면서 왕궁의 이런 저런 많은 것들을 묻습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서 묻습니다. “만약에 왕이 잘못하면 어떻게 되죠?”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왕인 형이 말합니다. “그래, 내가 한번 보여줄까그러더니 옆에 놓여 있는 커다란 화분을 번쩍 들어서 땅에 내던집니다. 화분이 깨졌습니다. 그러자 내시장이 그 옆에 있는 종을 앞으로 끌어냅니다. 그리고는 그 종에게 채찍질을 합니다. 그걸 보면서 왕인 형이 말합니다. “내가 잘못하면 종이 매를 맞는 거야.” 여러분, 이게 바로 세상의 권력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것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습니다. 종 같은 우리가 잘못했는데 왕이신 하나님이 십자가에 그 몸을 내어놓아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셨다고 하는 사실, 이것을 발견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바로 죄인의 괴수다.”

여러분,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있다고 하는 것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죠. 참으로 우리에게는 선물로 주어진 은혜입니다마는 그것은 값싼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의 생명을 내어놓으시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야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이 사랑과 이 용서를 계속 체험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의 용서를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주 기도문은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하나님이 우리를 벌써 용서하셨습니다마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자 할 때,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의 그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의 용서를 다시 한번 체험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필립 얀시는 말합니다. “우리의 은혜는 용서로 시작해서 용서로 끝난다.” 성경은 말합니다.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여기에 신앙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산상수훈’, 천국의 윤리를 우리에게 말씀해주셨는데 우리의 노력, 우리의 판단, 우리의 가치로는 이해할 수도 없고 더 나아가 지킬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하늘의 윤리를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원수 같은 우리를 위하여 그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받은 바 이 큰 사랑, 이 은혜를 가지고 오늘 우리가 부딪히는 많은 사람들을 이해하며 더 나아가 용서하며 사랑할 수 있는 믿음의 실천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