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아비의 훈계를 들으라[최고의선물은하나님을온전히사랑하는삶을보여주는것]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10. 23. 11:44

060507 아비의 훈계를 들으라                                     설교집 Ⅱ<마음을 시원하게> 3-22

성경본문                                                                                                            / 장영수 목사

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6.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7.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잠언 1:1-9)

 

지난 주에 제가 예고한 대로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라는 프로그램을 어제 확인해봤습니다. 4살짜리 말썽꾸러기 막무가내 남자아이가 어떻게 변했는가 하는 것이죠. 변했더라고요. 전 아주 놀랐습니다. 어떻게? 그 가족이 처음으로 가족여행을 갔습니다.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어갔어요. 지리산 청학동에는 TV에 자주 나오는 그 유명한 젊은 훈장이 있지 않습니까? 그 가족이 거기에 머물면서 훈장의 교육을 통해서 아이를 고치는 거죠. 이 아이의 눈으로 볼 때는 엄마 아빠보다도 더 강한 권위를 가진 훈장이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는 거예요. 도포를 입고 망건을 쓰고 수염을 기른 아주 낯선 사람을 만났는데 엄마 아빠가 그분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는 거죠. 아이가 땡 깡을 피우고 고집을 부려봐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 아이는 훈장의 새로운 권위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모의 권위도 배우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훈장이 말합니다. 자녀의 문제는 부모로부터 시작합니다. 부모가 일관성 있는 원칙을 가지고 아이를 대해야 합니다.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도 있지만 들어주어선 안 되는 것은 끝까지 들어주지 않는 원칙을 일관성 있게 지켜야 하는 것이죠.’ 이런 원칙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그 가족이 모처럼 함께 하면서 놀이를 통하여 아이들에게 이제까지 부족했던 사랑을 채워줍니다. 널뛰기를 같이 하고, 연도 만들어 날리고, 나뭇잎 배도 띄우면서 또 감자도 구워먹으면서 가족이 함께 지내는 동안 이 아이는 이제까지 수십 병의 요구르트를 마시며 채워야 했던 사랑의 결핍을 이제 엄마 아빠로부터 충분히 채움을 받으면서 아이는 더 이상 요구르트가 필요 없게 된 것이죠. 이제까지 갈급했던 아이는 엄마 아빠와 벽을 허물고 화해하게 된 거죠. 훈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형체요, 자녀는 부모의 그림자라.’ 부모에게 열쇠가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놀이를 통하여 아이를 고쳤다라고 하는 것이죠.

세계적인 사회비평가 제러미 리프킨 <소유의 종말>이라고 하는 책에서 그는 말하기를 ‘21세기 경제는 거대한 공장에서 거대한 극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라고 말합니다. 즉 이제까지의 자본주의는 제조업 중심이었는데 21세기에 들어서면 문화중심의 자본주의 사회가 된다고 하는 거예요. 이제까지는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하면 충분했는데 이제부터는 기계가 대신하게 되고 이제 인간에게 더 필요한 것은 창조성이라고 하는 것이죠. 일도 중요하지만 이제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놀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순수한 놀이는 인간의 자유로움을 표현하는 가장 수준 높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놀이도 두 가지 종류가 있지요. 혼자서 하는 수동적인 오락이 있어요. PC방에 간다든지 또는 성인오락실에 드나든다든지 또는 친구들과 어울려 약물을 한다든지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점점 빠져들게 되죠. 그 쾌락은 더 큰 강도로 맛볼 때만이 만족이 가능한 것이죠. 헤어나기 어려운 중독입니다. 결국은 그의 삶과 영혼을 파멸시킵니다.

여러분, 에스키모인들이 어떻게 늑대를 잡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칼을 예리하게 갈아가지고 거기에 피를 흠뻑 적셔서 꽁꽁 얼린 다음에 얼음에 세워놓습니다. 박아 놓습니다. 그렇게 되면 피 냄새를 맡은 늑대가 다가와서 칼에 묻은 피를 핥게 됩니다. 이렇게 핥다 보면 혀가 얼어서 감각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예리한 칼끝을 혀로 건드리게 되고 드디어 혀가 갈라지게 되고 혀에서 피가 쏟아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만 늑대는 그것이 자기의 피인 줄 알지 못하고 그 피를 핥는데 온 힘을 쏟다 보면 결국 피를 다 쏟고 죽게 된다고 하는 거죠. 홀로 방에 갇혀서 컴퓨터에 매여서 빠져드는 오락이 바로 이러한 결과를 낳는 거죠.

그러면 성숙한 놀이란 어떤 것입니까? 더불어 노는 것이죠. 공동체를 이루며 노는 것이죠. 지난 주간에 저희 교단 인도네시아 선교사들이 뿐짝에 함께 모여서 선교전략회의를 가졌습니다. 대부분은 10, 15, 어떤 분은 20년 가까이 이곳에서 선교사역을 했습니다. 각자의 경험이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터득한 노하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서 발제를 하고 논찬을 하고 서로 토의를 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얼마나 유익했는지 모릅니다. 먼저 와서 수고하고 애쓴 사람들의 그 소중한 경험을 나누는 시간이었지요.

2일 동안 꼬박 이렇게 지적인 탐구의 시간을 가진 다음, 마지막 날 저녁 식사 후에 하이라이트 시간을 가졌어요. 그것은 놀이였어요. 마치 어린 아이들이 노는 것 같이 둥그렇게 둘러앉아서 간단한 몇 가지 놀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주 쉽고도 단순한 놀이를 함께 하면서 우리의 마음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되고 열리게 되고 서로를 유쾌하고 소중하게 바라보게 되고 서로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끼게 된 거죠.

 그 중에 이런 놀이도 있었습니다. 30여 명 모인 사람들을 4그룹으로 나누어 짝짓기 하는 놀이였는데요, 각자에게 종이를 한 장씩 줍니다. 거기에는 노래제목이 적혀 있어요. 4가지 노래였어요. 그것을 허밍으로 부르면서 다른 사람의 허밍을 들으며 누가 내 팀인가 찾아가는 아주 단순한 놀이였는데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 가운데 이제까지 서로 경쟁하며 일에 빠졌던 우리들이 이 단순한 놀이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다 하나라고 하는 것을 회복하게 된 것이죠.

최근에 영화 한편을 보았습니다. <엘리자베스타운>이라고 하는 영화예요. 한 젊은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신발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어요. 8년 동안 몰두해서 새롭게 디자인해서 만들어낸 그 제품이 시장에 나가는데 반응을 얻지 못해요. 참담한 실패를 겪습니다. 다 반품됩니다. 회사에 어마어마한 손실을 끼치게 돼요. 분명 이것은 디자이너로서 자기 눈으로 볼 때는 작품성이 있고 참으로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했지만 시장에서 실패하게 되니까 성공을 우선시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이 사회 속에서는 아주 냉정하게 그는 해고당합니다. 단순히 해고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송두리째 쏟아 부었던 그 모든 것이 다 허사가 되었다라고 하는 좌절감 때문에 그는 자살을 기도하게 됩니다.

그가 막 죽으려고 하는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려요. 마지못해 그 전화를 받습니다. 전화에서 자기 누이동생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가족과 떨어져서 고향에 돌아가서 사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 가서 그 모든 장례와 절차를 마치고 화장을 해서 이것을 수습할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 빨리 오빠가 가서 이 일을 처리해달라는 거예요. 그는 이런 요청을 받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켄터키 시골의 아버지 고향으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 고향에서 아버지의 고향마을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 고향마을에서는 다른 사람의 죽음으로 그치는 게 아니에요. 모두의 일이었어요. 함께 이야기합니다. 함께 서로를 위로합니다. 그리고 함께 장례식을 준비합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장례식 시간에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나와서 고인을 추모합니다. 고인과 지난 날 나누었던 아름다웠던 추억을 서로 이야기합니다. 심지어는 고인에게 잘못했던 일을 고백하며 죽은 자에게 용서를 빌기도 합니다. 특별히 아버지와 어머니는 고향사람들과 큰 갈등을 일으킨 사건이 있습니다. 원래 두 사람은 각각 약혼자가 있었는데 외지에서 만나 그만 서로의 약혼자들을 버리고 그곳에서 결혼해서 살았기에 동네사람들을 분노하게 했거든요. 특별히 어머니는 아버지를 유혹한 자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 고향동네에는 거의 오지 못했던 것이죠. 그런데 그 마지막 장례식 자리에 뒤늦게 어머니가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단상에 올라서 자기의 죽은 남편을 추모합니다. 남편과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마지막에는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가 준비한 춤을 춥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마을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던 갈등의 실마리가 하나하나 풀리게 됩니다. 추모하고 고백하고 또는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람들의 마음의 응어리가 풀어지게 됩니다.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용서하는 화해의 자리가 만들어집니다.

주인공은 말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이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었군요.” 그러나 마지막 아버지와 화해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주인공입니다. 그는 이제 아버지를 화장하고 그것을 유골함에 담아가지고 자기 차에 싣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가면서 이제는 한줌의 재로 남은 아버지와 대화를 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와 가졌던 자기 삶 속의 기억들을 다시 한번 되살려봅니다. 자기가 지극히 어렸을 때, 자기와 더불어 놀면서 이야기하던 그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그 사랑을 추억 속에서 끄집어냅니다. 그 아름다웠던 시간들을 마음 가득히 채웁니다. 아버지와의 사랑을 새롭게 확인합니다. 놀이를 통해서 느끼고 깨달았던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들을 기억해냅니다. 거기엔 아주 훌륭한 교훈이 있습니다. ‘현실을 직면하는 용기를 가져라. 진정한 실패에는 새로운 출발이 뒤따르는 것이다. 오늘의 고난 속에 내일의 생명이 숨겨져 있다.’ 그는 이제 죽은 아버지와 화해하며 아버지의 훈계를 마음에 되새기면서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새 출발하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잠언이라고 하는 것은 훈계를 위한 짤막한 말입니다. 특별히 여기 아비의 훈계를 들으라고 말합니다. 이 아비의 훈계는 어떤 것입니까? 아비의 훈계를 한마디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곧 아버지가 살면서 경험했던 많은 인생의 진리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인데 그것은 뭐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참된 지식의 첫걸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 인생을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라고 하는 것이죠.

우리가 부모님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그 품안에서 자랐습니다.우리가 자라날 때 어려서 또는 청소년기에 또는 이미 장년이 되어서 우리 부모님을 생각할 때 부족하고 모자라는 부분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섭섭한 것들도 많았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자녀는 부모에게 섭섭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거예요. 완벽한 부모는 없는 거예요. 다 불완전한 거예요. 허물뿐인 거예요. 그렇다면 이렇게 연약하고 부족한 인생을 살았던 그 부모님을 통해서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나를 자라나게 하셨던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면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도 있는 것이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주목해야 하는 것이죠.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완벽한 자기의 모습이 아니라 허물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은혜를 주시고 내 인생을 이끌어주시는 그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도 부모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그들의 삶 속에 역사하셨던 그 은혜를 주목해야 하는 것이죠.

은혜가 뭘까요? 그것은 마치 놀이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 아이들과 또 부모님과 같이 놀이하는 순간만큼은 비판이 없습니다. 책망이 없습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나누는 것뿐이죠.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의 부족함을 아시면서도 그것을 탓하지 않고 우리를 감싸시고 지키시고 붙들어주시는 이 놀라운 사건이 바로 우리의 삶의 비밀이요, 은총이지요.

21세기 경제가 놀이에 주목하는 경제라고 말했어요. 문화산업이라고 말했어요. 21세기 신학, 새롭게 대두하고 있는 신학은 어떤 신학이야?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놀이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신학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더불어 새롭게 시작합시다. 우리의 성공과 실패, 우리의 기쁨과 슬픔, 우리의 웃음과 눈물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품으시고 우리를 안으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인생에 들어오셔서 노래하시고 춤추시며 놀이하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런 은혜로 내 가정을 하나님의 놀이터로 가꾸어가는 그런 지혜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연약하고 허물 많은 부모님도 은혜로 지켜주시고 또 우리에게도 함께 하사 이제 우리의 지혜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이 소중한 자녀들을 기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서로 원망하고 불평하고 비판하고 판단하는 가정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와 함께 사시며 노래하시며 춤추시며 놀이하시는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