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지독한 사랑[마틴 루터가 말한 대로 '율법 없는 은혜' 는 없는 것입니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10. 25. 10:14

060414 지독한 사랑                 설교집 Ⅱ<마음을 시원하게> 3-19

성경본문                                                / 장영수 목사

6.    예루살렘 딸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여자들 가운데에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내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많은 사람 가운데에 뛰어나구나

 

 

 

11. 머리는 순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 같이 검구나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우유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는구나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하구나 다리는 순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생김새는 레바논 같으며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16. 입은 심히 달콤하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딸들아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로다 (아가 5:8-16)

 

여러분 <잃어버린 너>라고 하는 소설을 읽어 보셨습니까? 오래 전 얘기입니다. 제가 이 책을 저녁에 붙들었다가 그날 밤을 새웠어요. 실화소설이거든요. 운명적인 사랑이야기입니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납니다. 그리고 누구나 그렇듯이 사랑에 빠집니다. 아주 뜨겁게 사랑합니다. 이제 그가 없이는 나 역시 없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미국으로 공부를 떠납니다. 부득이 떨어져 있게 되었습니다. 그 남자는 공부하러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그녀는 그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습니다. 그가 죽었다고 하는 것이죠. 그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하는 것이죠. 그녀는 좌절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이제 살았으나 죽은 자로 살아갑니다. 그를 잊지 못합니다. 나중에 부모의 성화를 못 이겨서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그 결혼생활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남자가 죽은 것이 아니고 불구가 된 거죠. 하반신 불구가 된 거죠. 그래서 그는 극적으로 살았습니다마는 자기의 그러한 몸을 가지고는 더 이상 그녀 앞에 나설 수 없기에 친구를 통해서 자기를 잊을 수 있도록 죽었다고 얘기했던 것이죠. 그리고 그는 한국에 조용히 돌아와서 어느 시골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녀는 쫓아갑니다. 그리고 그의 무너진 모습을 보면서 그를 부둥켜안고 그 상황을 다 받아들이고 일편단심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그 벽을 넘기가 어려웠던지 그 여자에게 짐이 되기 원치 않아서 고민 끝에 자살을 합니다. 그 소설은 마지막 그 남자의 죽음과 죽은 자를 떠나 보내고 눈으로 확인하고도 잊어버리지 못하는 한 여인의 감상으로 끝이 납니다. 제가 그걸 읽고 , 세상에 이런 사랑도 있구나.’ 지독한 사랑이죠.

그런데 사실 그런 사랑이 또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죠. 성경은 바로 하나님의 그 불붙는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연애편지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찾았습니다. 그때 그들은 애굽의 노예였습니다. 사실은 애굽의 노예로 붙들린 백성이 꼭 이스라엘 백성만은 아니었어요. 애굽은 그 당시에 최고 강국이었기 때문에 잘 사는 나라에 온갖 나라에서 이민 오듯이 여러 민족이 막 섞여 들어와서 불법취업을 하고 밑바닥에서 살듯이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거죠. 일방적인 사랑이에요. 일방적인 구원이에요.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일으킨 사건이 바로 유월절 사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애굽을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건지시려고 그들에게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심판하는 그날 밤에 너희는 집에 모여서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에 바르고 그 양의 고기를 먹고 옷에 허리띠를 띠고 준비하라. 그날은 심판의 밤이지만 동시에 내 백성에게는 구원의 밤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날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집집마다 들어가서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모든 자들을 진멸하시는 거죠. 그런데 피 바른 집은 천사가 들어가지 아니하고 넘어간다는 겁니다. ‘유월이라는 말은 넘어간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이게 출애굽이죠.

그리고 광야로 이끌어내셨습니다. 문명을 등지고 별밖에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 삼으시고 더 나아가서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으로 삼으신 거죠. 이제 광야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사랑이 이루어진 것이죠. 하나님은 이 사랑이 계속되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날마다 그날의 양식을 주심으로 사람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하셨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사막에서도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셨죠.

이제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시 새로운 문명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유월절 사건을 잊어버리지 말고 기억하고 기념하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을 그들의 명절로 지키며 한 주간 축제를 벌이는 것입니다. 다 흩어져 있다가도 유월절 때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다 모여서 예배 드리고 또 함께 삶을 나누고 교제하는 것이죠.

그 예배의 핵심은 양을 잡아 양의 피를 뿌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는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쓴 나물을 먹습니다. 애굽의 노예로 살았던 그 부자유한 억압의 고통을 기억하기 위해서 쓴 나물을 먹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 피를 기억하고 그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죠. 그리고 발효되지 않은 빵 무교병을 먹습니다. 맛 없는 그 빵을 먹는 거죠. 그토록 그날 밤의 구원은 아주 긴박했어요. 빵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기다릴 틈이 없었어요. 하나님의 손길을 따라서 그날 밤으로 애굽을 탈출하고 노예생활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축제를 지키는데도 사람들은 얼마나 잊어버리기를 잘하는지 이런 예배가 점점 세속화됩니다. 형식화됩니다. 사실 한국에도 66일이 있지 않습니까. ‘현충일이잖아요. 그러나 아마 6.25때 아버님을 잃었다든지 가족을 잃은 사람 외에는 66일은 그저 공휴일이죠. 모처럼 가족이 나들이하는 날이죠. 나와는 아무 관계없는 사건이니까. 세속화되는 거에요. 이 나라에 와서 좋은 것은 성금요일을 공휴일로 정해 놓았기에 이렇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거예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어떤 사람이 미식축구 결승전을 보러 갔습니다. 겨우겨우 어렵게 표를 마련해서 가보니까 그 어마어마한 스타디움 꼭대기 천장 밑 귀퉁이에 겨우 자리를 하나 잡았어요. 그나마 들어와서 다행이라고 쳐다보고 있는데 놀랍게도 자기 바로 아래 빈 자리가 보이더라는 거예요. ‘이게 웬일이냐하고 내려갔어요. 내려갔더니 정말 자리가 하나 비어있어요. 그러면서 그 옆에 앉아 계신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이 자리가 누구 자리입니까?” “괜찮습니다. 앉으세요. 우리 아내 자리입니다. 오늘 못 왔습니다.” “아니 왜 이 비싼 자리를 비워두셨습니까? 대신 누구라도 좀 오라고 하시지요.” “, 우리 식구들은 모두 다 마누라 장례식에 갔습니다.” 얼마나 미식축구에 미쳤는지 마누라 장례식에도 안 갔다는 얘기예요.

우리 주위에 스포츠에 미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정작 내 인생과 영혼에는 얼마나 무관심하고 무지합니까? 주님의 십자가 그 사건은 바로 나를 위한 사건이에요. 그걸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 신앙은 온전치 못한 것이죠. 저는 가끔 꿈을 꾸는데 제일 두렵고 무서운 꿈이 어떤 꿈이냐 하면 예배에 늦는 꿈이에요. 두 번 꾸어봤어요. 정말 등에 땀이 나게 고생하다가 번쩍 눈을 뜨고 화들짝 놀라가지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어요. 목사가 예배에 늦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 그 사건은 바로 나를 위한 사건이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이나 우리나 똑같았던 것 같아요. 유대인들도 이걸 자꾸 잊어버리니까 고민이 되었어요.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유월절에 모이게 되면 예배를 드리고 또 유월절 식사를 같이 나누는데 그 전에 성경말씀을 낭송합니다. 그 말씀을 듣습니다. 유월절에 읽었던 말씀이 바로 구약의 아가서였습니다. 첫째는 길지 않으니까, 몇 장 되지 않는 말씀이니까 단숨에 읽어버릴 수 있었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가서는 어떤 말씀이에요? 두 사람의 뜨거운 사랑이에요. 솔로몬 왕과 슬람미 여인의 사랑 이야기예요. 왜 그러면 유월절 사건에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읽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 라고 하는 거창한 그 구원의 사건을 우리는 자꾸 잊어버려요. 내가 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마는 나를 위한 사건으로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가서를 읽었던 거예요. 사랑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사람으로 태어나서 짝사랑이 됐든 불륜이 되었든 사랑은 다 경험해 보았고 느껴 보았기에 이제 그 사랑의 경험을 가지고 하나님의 그 사랑을 다시 한번 새롭게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 구원의 사건은 바로 나를 위한 사건이에요. 사실 솔로몬 왕과 슬람미 여인의 사랑. 이건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에요. 계급을 넘어선 사랑이에요. 인종을 넘어선 사랑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비유인 것이죠.

사실 아가서는 어떤 면으로는 아주 에로틱한 연애편지에요. 그 시작은 이렇습니다. 현대어 성경으로 보면 내게 입맞춰주세요. 숨막힐 듯한 임의 입술로. 임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달콤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은 청춘남녀가 사랑할 때 느끼는 그 긴박하고 숨 막히는 그것보다 더하다고 말하는 것이죠.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냐? 이 여인의 표현을 빌어서 내가 너를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라고 말하고 있죠. 내 사랑을 얻으려고 하나님이 병이 나셨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다시 이 유월절 사건을 우리한테 새롭게 펼쳐놓으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자기를 유월절 어린양으로 말씀하셔요. 의도적으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오셔서 성전을 소란케 하셨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에게 비난을 받고 의도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시도록 자기를 내어 던지셨어요. 그러므로 그 유월절의 참 의미가 하나님의 구원에 있고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오셨다고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죠. 예수님이 바로 유월절에 사람들이 잡아먹었던 그 유월절 어린양인 것입니다. 그의 피를 주고 그의 몸을 주신 것이죠.

우리가 부화주일에는 세례식을 거행합니다. 세례의 핵심은 두 가지에요.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죠. 물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거예요. 나온다는 건 새롭게 산다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보혈로 인하여 내 죄가 용서함 받고 나는  옛사람에 대해서 죽었다고 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또한 성찬식을 행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피와 찢긴 살을 기념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 그리스도의 사건을 예언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다 담당시키셨다.’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 양인데 양같이 그릇 행한 우리를 대신하여 한 양을 잡으사 그에게 모든 죄를 대신하셨다. 이제 이것을 어떻게 기억할 것입니까? 은혜로 받아야지요.

제가 중국에 가서 보니까 중국남자들은 꼭 한국의 여자들 같이 팔꿈치에 가방들을 하나씩 들고 다니더라고요. 우리같이 이렇게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스타일보다는 그들의 독특한 문화가 있습니다. 들어보면 중국의 남자들은 집안의 음식준비를 스스로 한답니다. 물론 그걸 즐기기도 하죠. 그러나 13억 인구가 다 즐기기만 하겠습니까? 그러나 해야죠. 그러고 보면 묘한 조합이 생각납니다. 중국남자와 한국여자가 결혼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구나. 둘이 결혼해보니 어때요? 남자가 부지런히 일어나서 요리를 해요. 시장도 다 보거든요. 그리고는 여자가 먹고 타박도 해요, 뭐 이렇게 했느냐. 그렇다면 한국여자들이 음식을 준비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중국남자는 간혹 부인이 해주는 것을 받을 때 얼마나 감사하겠어요? 이거 원래 내가 다 해야 되는 건데 이렇게 하는구나. 얼마나 기쁘겠어요. 또 한국여자 분은 어떻겠어요? 한국 같았으면 이건 내가 다 할 일인데 남자가 장도 다 봐오고 다 해가지고 왕비마마 대접하듯이 다 준비해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은혜지요. 내가 할 일인데 저가 다 해주고 있구나. 그러니 반대로 가장 불행한 조합이 한국남자와 중국여자가 만나는 경우겠지요? 참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겠구나.

여러분 이게 바로 율법과 은혜입니다. 내가 해야 되는 것이죠, 율법은. 마땅히 내가 해야 하는 거죠. 그런데 내게 그럴만한 능력이 없어요. 얼마 전엔가 TV 뉴스에서 중국이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서 교통질서를 유난히 강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그러다보니까 국민계몽하기 위해서 교통사고 나는 장면을 방영한 것을 또 한국에서 받아가지고 방영한 것을 제가 뉴스를 보다가 봤는데, 아이고 무단횡단이 보통 심한 게 아니고 과속질주가 보통 심한 게 아니에요.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말 사람이 튕겨나가요. 나를 위해서 횡단보도를 만들었습니다. 없을 때는 불편하다고 그러더니 만들어놓으니까 이용을 안 해요. 이게 인간의 묘한 양면성이에요. 모든 것을 자기 편리하고 자기 유리한대로 해석하는 그 인간의 교묘한 꾀요 악함이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것을 지킴으로 네가 살 것이라고 율법을 주셨습니다마는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요.

오늘 <라뮤즈> 합창단을 모시고 노래를 듣게 돼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다 그렇게 생각하시겠지만 혹 제가 조금이라도 더 그런 마음이 있다면 거기엔 이유가 있어요. 제가 예전에 중창단에 있을 때, 유럽 연주여행을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가 비용을 마련해야 되니까 맹연습을 해서 우리 노래를 테잎으로 녹음, 취입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 온종일 강남의 한 스튜디오를 빌려가지고 아침부터 모여서 밤늦은 시간까지 그 노래를 부르고 녹음하고 또 부르고 녹음하고 했습니다. 그날은 너무 긴장해서 잘 몰랐는데 그 다음날 아침에 피곤한 몸으로 잠들었다가 일어나니까 목소리가 말이죠, 죽었어요. 목이 쉬었다는 말이 아니에요. 목소리에 탄력이 없어요. 윤기가 없어졌어요. 그런 경험은 또 처음이에요. 말이 다른 사람 귀에 들리려면 살아있는 그 어떤 생동감이 더불어서 전해지는 것인데 그 생기가 없어진 거예요. 알고 보면 남의 귀에 들려주는 그 노래 하나를 준비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가 있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어찌 찬양만 그렇겠습니까. 시험에 떨어져 보면 다른 사람이 떨어진 것을 비판하지 않게 되죠.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죠. 내가 한번 사업을 들어먹고 큰 고통을 당했다면 오늘 사업으로 인하여 어려움 당하는 사람을 결코 얕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게 사람의 능력으로만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마틴 루터가 말한 대로 율법 없는 은혜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그대로 두고는 못 보시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 제멋대로 살았던 우리의 실상을 하나님 앞에서 비추어 보면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이에요. 오늘 우리가 이만큼 살았습니다만 누구 한번 나만큼 열심히 부지런히 최선을 다해서 살아본 사람 있으면 나아 보라고 해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또 사람끼리는 그렇게 얘기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적인 타락이죠. 그렇다면 그 결과는 전적인 심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사망을 덮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거죠.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이죠. 그래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을 믿으려 하는데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런 불행이 어디 있겠습니까?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는 그 은혜, 그거야말로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을 것이다. 이토록 끝까지 너희를 사랑했으니 너희도 사랑하라.” 그것이 방법이에요. 정말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려고 해보십시오.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려고 해보십시오.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때 우리의 약함을 다시 한번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의 허물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악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우리가 사랑하려고 애쓸 때, 우리는 벽에 부딪힙니다. 이제 주님의 그 사랑을 힘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다시 내게 감격이 회복될 때, 그것이 내게 은혜로 다시 한번 회복될 때에만 나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으로 매달려 계시고 죽어가고 계시는 것이죠. 그러나 십자가에서 하셨던 말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이것은 죄인의 마지막 모습이에요. 하나님께 외면당하는 자의 마지막 부르짖음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동시에 그는 마지막 말씀에서 다 이루었다.” 인간의 입으로 나올 수 있는 모든 절망과 희망이 그 안에 다 담겨있는 것이죠. 그것을 끌어안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에게 소망이 되시기 위해서. 그 소망을 가지고 십자가의 사건을 묵상함으로 우리의 신앙이 다시 한번 새로워지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감각이 있고 이성이 있고 의지가 있건만 내 손톱 밑에 박힌 가시는 그렇게 아파하고 상처받은 내 이름을 인하여 수치를 느끼면서도 주님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통이 나를 위한 고난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무지와 불신앙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눈을 여사 십자가를 은혜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새로운 마음과 자세로 오늘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