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904 후회없는 근심 설교집 Ⅱ<마음을 시원하게> 1부-2
성경본문 / 장영수 목사
6.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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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고린도후서 7:8-12) |
얼마 전에 어느 선교사님과 첫 대면을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까 그분이 제 고향 자그마한 도시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신 그런 경험이 있으시더라고요. 아, 그래가지고 서로 “그 교회를 아느냐?” “아, 알지요.” 하고 얘기가 이루어졌는데요,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제가 신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섬겼던 그 교회는 제가 평생 잊을 수 없을 겁니다. 그 교회에서 2년을 딱 섬겼는데 너무 몸이 아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병원에 갔어요. 의사선생님이 진찰을 하시더니 뭐 하시는 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하시는 일을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골병이 든 거죠.” 제가 잘 알아요.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그래서 그 교회 목사님하고 전도사님이 동시에 그만뒀대요.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시더라고요. “제가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런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오는 사람을 시험에 빠뜨리고 고통을 주는 이런 교회라면 문을 닫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까지 얘기했답니다. 그런데 마침 제 고향 소도시의 교회를 제가 아니까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왜 이렇게 악해졌을까요?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방향을 잘못 잡고 가다 보면 그렇게까지 되는 거예요.
제가 얼마 전에 또 희한한 얘기를 들었어요. 어떤 분이 꿈을 꾸었대나, 관상을 봤대나, 자기교회 목사님은 안되고 한마음교회 목사님 그분이 이제 교회를 부흥시킬 것이다 그런 얘기를 했답니다. 그건 잘못이죠. 첫째는 자기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이고, 두 번째는 우리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뭘 본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혹시 내 교회에 그런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마음에 담고 기도하는 것이지 대책 없이 동네방네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게 하나님의 방법도 아니고요. 일찍이 한경직 목사님이 말씀하셨어요. ‘교회는 싸우지만 않으면 부흥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발 더 나아가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힘을 모은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겠지요.
사도 바울이 지금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씁니다. 고린도교회가 싸우는 교회였거든요. 물론 고린도의 상황이 그러합니다. 대도시였고요, 다양한 인종, 다양한 문화, 다양한 언어, 그리고 복음이 증거되면서 다양한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 안에 밀려들어왔어요. 당시에 공용어라고 할 수 있는 헬라어를 같이 쓰고 있기에 예배는 같이 드리지만 그들의 배경은 서로 다르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지적합니다. “내가 소문을 들으니 너희 안에 분쟁이 있구나. 어떤 사람들은 나는 바울파라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나는 게바파, 즉 베드로파라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들은 아볼로파라고 주장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사람을 따르는 게 아니라 아예 그리스도를 따른다. 그리스도파라고 주장하는구나. 그러면 그 네 그룹 중에 어느 그룹이 맞느냐? 다 틀렸다.”
고린도교회를 사도 바울이 세우고 거기서 목회를 하다가 떠나갔거든요. 그 이후에 베드로가 지나갔어요. 그 다음에는 젊은 목회자 아볼로가 지나갔어요. 그러면서 교회는 자기들의 취향과 자기들의 문화와 자기들의 생각에 따라서 이렇게 그룹이 나누어지기 시작한 거죠. 소위 바울파는 뭐냐? 바울이 말한 복음, 그리스도 예수 안의 생명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다고 하는 그것만 딱 듣고는 이제 우리는 구원받았으니 무엇이든지 거리낄 것이 없다. 이렇게 된 거죠. 그로 인해 막 나가는 거예요. 자유방임주의자가 된 것이요, 더 나아가서는 도덕폐기론자가 된 것이고 세속주의자가 된 거예요. 우리는 구원받았으니 이제 아무것도 우리의 구원을 깨뜨릴 것이 없다고 옛 습관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죠.
또 게바파는 정통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이에요. 율법을 아는 사람들이에요. 유대인의 규례를 지키고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이제 고린도교회에 들어온 거예요. 그 사람들은 어떤 눈으로 신앙을 보고 있느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것이다. 계명을 준수하는 거예요. 교회의 룰과 그 여러 가지 의식과 모든 규례를 잘 지켜야 되는 거죠. 그러나 그것만을 지키는 것은 신앙이 아니죠. 하나의 도덕적이고 윤리적 관점만 본 거예요. 생명의 은혜를 잃어버린 거예요. 자,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높은 기준을 두고 이것을 지켜야 된다.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그 기준은 자기도 못 지켜요. 그래서 사람이 이중적으로 되는 거예요. 자기가 어그러뜨리는 것에는 모두 이유가 있어요. 그러나 남이 어그러뜨리는 것에는 일체 용서가 안 되죠.
또 아볼로파는 당시 헬라철학을 기독신앙과 융합시키려고 했던 철학적인 사조였어요. 그러니까 지식주의자들이에요. 어떤 사람은 신앙을 공부하면 신학을 해야 되는 것으로 생각해요. 성경을 많이 읽고 공부하고 외우고, 특별히 한국교회가 요한계시록 때문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요한계시록을 내가 송두리째 연구했노라 하면서 지구의 멸망을 얘기하고 종말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된 것이죠. 성경공부가 필요하죠. 그러나 자기의 만족을 얻는 것으로 그치면 그것은 교만이죠.
또 이제 그리스도파가 나와요. 그리스도파라는 것은 신비주의자들이에요. 그 주위에 있는 이방종교들이 아주 신비한 체험들을 많이 겪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단계를 두어서 깊이 들어온 사람들끼리만 뭔가 독특한 의식들을 가지게 되죠. 그런 영향을 받아서 내가 뭘 들었다, 내가 뭘 보았다 하는 것을 가지고 자기 신앙을 과시하는 거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거죠.
서로 다르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자기생각 자기체험을 절대화하고 이것을 자기의 무기로 삼는 거죠.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모두 다 틀렸다는 것이죠.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에 눈멀었다.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말씀하는 거죠. 그래서요 사실 고린도교회는 뜨거운 교회요, 은사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마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2000년 전 고린도교회나 오늘 우리의 교회나 근본에 있어서는 다를 바 없어요. 많은 문화의 변동은 있지만 사람이라고 하는 점에선 우리 역시 그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지요. 정말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새벽기도 할 때에 날마다 기도하는 단골 메뉴가 있어요. 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 건강한 교회가 되게 인도해 주십시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기뻐하실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는 거죠.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주보에 보면 거기 한마음교회라고 표지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로고로 만들었어요. 한마음 그 위에 새가 한 마리 날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 독수리나 매라고 생각하시면 착각이에요. 그것은 비둘기입니다. 성령을 뜻하는 거예요. 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 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사람의 계획이 앞서고 사람의 주장이 앞서는 교회가 아니라 성령께서 이끄시고 한마음으로 따라가는 교회. 그리고 교회의 아래에는 일부러 물고기 두 마리, 까만 물고기하고 하얀 물고기하고. 서로 다른 우리들이, 물고기의 의미가 있죠. ‘익투스’ 라고 하는 헬라어는 ‘예수스 크리스투스 휘우스 데우 소테르’ 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라고 하는 초대 교인들의 신앙고백의 머리글자를 모아가지고 ‘익투스’ 물고기라는 단어가 되기에 물고기 표시로 구별했던 것이죠. 그래서 공동체예요, 교회라는 것은 신앙고백을 담은 공동체예요. 그런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께서 이끄시고 인도하시는 교회가 되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몇 년 전에 우리교단에서 통일에 관한 세미나를 한다고 소망교회에 많은 목사님들이 모였어요. 그리고 점심을 먹고 오후 첫 강의에 곽선희 목사님이 강의를 맡으셨어요. 그래서 제가 궁금했어요. 사실 통일 그러면 다 통일이 돼야 된다고 이야기하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복잡합니다. 뭐라고 말씀하시나? 이 밥 먹고 졸린 시간에 어찌 보면 너무나 심각한 주제를 가지고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막 눈이 풀리려고 하는 그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실까? 제가 유심히 들었는데 제가 무릎을 쳤어요. 첫 마디에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와서 ‘목사님 우리나라가 언제 통일되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하기 나름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모아서 그 일을 준비해 나아가면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서로의 차이를 작게 보고 서로의 공통점을 크게 볼 때, 통일의 문은 열립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모두 다 달라요. 사실은 닮은 데가 하나도 없을 만큼 다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가 자기들의 문화, 자기들의 생각, 자기들의 경험을 가지고 깃발을 들고 갈라졌던 것 같이 얼마든지 갈라질 수 있지요. 그러나 이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한마음 한뜻으로 주목할 때, 이제 우리의 차이는 오히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다양한 은사가 되는 것이죠.
사도 바울이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을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며 근심하며 편지를 씁니다. 그 편지를 몇 번 썼어요. 그게 고린도전서요 고린도후서예요. 여러분, 그 편지에는 강한 책망이 있어요. 그런 자를 당장 내쫓아라. 이렇게까지 얘기해요. 그러나 어떤 대목에서는 내가 눈물을 흘리며 고뇌한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오늘 본문을 보니까 이 사도 바울의 편지를 들려 보냈던 사람이 되돌아와서 말합니다. 저들이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고 회개하고 온 교회가 마음을 같이하고 하나님 앞에 하나되기 시작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사도 바울이 너무나 기뻐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응답에 기뻐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과 함께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여기 목회자의 큰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말합니다. 근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근심이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세상근심이 뭐예요? 우리 고3 입시생들을 둔 가정에선 지금 한국에 엄마들이 같이 나갔죠. 얼마나 그 마음에 간절함이 있겠습니까? 역시 저도 겪어보니까 내 자녀의 입시문제에 부딪히면 기도가 간단해져요. 하나님 살려주세요. 그것밖에 없죠. 뭐 장황한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간절함이 있죠. 세상근심이라고 하는 것은 내 생각, 내 방법, 내 수단을 동원해서 다 걱정하는 거죠. 그것은 부모로서 또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로서 피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선한 근심으로 바꾸는 방법이 있어요. 성경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떡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떡은 꼭 있어야 돼요. 떡이 없으면 죽어요. 밥을 먹고, 입고, 쓰고, 자녀를 기르고 공부시키고 하는 이 모든 것 다 필요한 거예요. 오늘 살아가면서 우리가 누리는 것은 알고 보면 다 필요한 것들이에요. 문제는 거기에만 매몰되면 안 된다. 이제는 그런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 사건들을 비추어보는 것이죠. 제아무리 어려운 일일지라도 혹 어떤 죄악에 빠졌을지라도 하나님이 살아계시기에 거기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고 하나님의 이끄심이 있고 구원이 있는 거예요. 두 가지가 함께 가는 거예요. 떡과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가야 되는 거예요.
두 번째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여러분 우선순위예요. 두 가지가 다 중요하지만 우선순위를 바꾸면 안돼요. 내가 진학을 해야 된다고 합시다. 제 적성이 뭔지도 알아야 되고 성적도 알아야 되고 다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거기에 딱 더도 말고 하나만 더 기도하세요. 3학년이 되어서 진학시험을 치르는 것은 그 아이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자기 문제를 놓고 기도하게 하시는 첫 번째 관문이에요. 공부를 잘하고 똑똑해가지고 기도 안하고 일류대학에 딱 붙었다. 세상기준으로 보면 잘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그것은 실패예요. 그런 문제를 놓고 기도하면서 일을 계획하고 추진해야 하는 거예요. 그렇게 했는데도 떨어졌다. 그럼 노력이 부족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또 다른 길을 큰 유익이 되는 길을 열어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이 내놓은 해결책은 이겁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유대인이 바라보니까 나무에 매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하는 유대인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저건 너무나 미련한 짓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리고 지혜를 자랑하고 지혜를 사모했던 헬라인들이 볼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가치한 사건인데 놀랍게도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사람을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고 또 안다 한들 이룰 수 없었던 일을 하나님이 이루셨다. 그리고 그것을 내게 선물로 주셨다. 이게 바로 은혜라는 것이죠.
여러분, 굳이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비교한다면 결정적인 차이점은 은혜라는 거예요. 다른 종교는 모두 다 인간의 극한적인 노력을 요구해요. 기도를 요구해요. 헌신을 요구해요.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야 구원이 있다고 얘기해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속사람을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시고 그 구원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시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거예요. 은혜예요. 여기에 해방이 있는 거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랑하고 싶은 자는 오직 주를 자랑하라. 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지혜가 되고 의가 되고 거룩함이 되고 구원이 되셨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신앙의 기준입니다. 여기에 비추어서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되는 거죠. 이 고백이 분명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죠. 이 사실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 자존감이 있는 사람이죠.
흔히 자기 자랑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사실 목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했습니다마는 사람 앞에서는 기분으로 사는 거예요. 서로 세워주고,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이런 기분으로 신나게 사는 거예요. 자랑을 죄악시하면 안돼요. 문제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내 안에 비어있을 때가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의 칭찬과 달콤한 말 한마디에 기대어 사는 삶이 되는 것이죠. 어리석은 것이죠.
어느 고등학생이 자위를 했어요. 엄마가 그것을 발견하고 펄쩍 뛰는 거예요. 못할 짓을 한 것같이. 그래서 오히려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특히,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큰 억눌림이 있어요. 그것은 우리의 몸이 자라나면서 나타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에요. ‘미우라 아야꼬’ 의 책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어떤 지혜로운 어머니가 학교에 간 아들의 침대를 보니까 거기에 흔적이 있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아들이 돌아올 때를 기다렸다가 꽃을 한 송이 사가지고 아들이 왔을 때, 아들에게 꽃을 주면서 얘기해요. “야, 내가 오늘 아침 보니 네가 이제 어른이 됐더구나. 축하할 일이다.” 그 나이에 나타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 그것을 죄악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거예요. 현실을 인정해줘야 돼요. 그러고 나서 그러한 변화를 긍정적으로 창조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어줘야 되는 것이죠.
알고 보면 우리 신앙에도 무지로 인해서 이런 잘못된 양심의 가책을 겪는 경우가 아주 많이 있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깨끗한 은혜로 말미암아 건강한 자존심으로 살아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하고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양심의 가책에 눌리게 되면 사람이 무엇을 의지하느냐, 공부 많이 한 것을 의지하고, 지위를 의지하고, 내 남편 사업이 큰 것을 의지하고, 얼굴을 자랑하고 허세에 빠지는 거예요. 허세를 부린다는 것은 자기비하에요. 사실은 지나친 자기자랑은 자기 속이 비었음을 감추려고 하는 처절한 몸부림이에요. 그리스도인의 놀라운 신앙은 이토록 연약하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물 붓듯 부으시는 놀라운 은혜가 여기 있다고 하는 것을 아는데 있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누가 칭찬하면 “아이, 아닙니다.” 그러지 마시고 받으세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받으세요. 사실 칭찬을 못 받는 것도 병이에요. ‘이 사람이 한마디 칭찬하고 또 뭘 바라고 그러나.’ 의심하는 거지요. 칭찬하면 기쁨으로 받고 감사함으로 응답하고 그게 건강한 거죠.
또 하나 교인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는 이상주의예요. 지나치게 높은 기준을 자기에게 요구하는 거예요. 사실은 우리가 교회에서 말씀을 읽다 보면 땅 끝까지 나아가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세계복음화를 위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늘 세계복음화의 시작은 내 발 밑에서부터 시작해요. 내가 건강한 신앙의 생각을 가지고 건강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 이미 나는 지구 한 귀퉁이를 환하게 밝히는 거예요. 어느 청소부가 바닥을 쓸어요. 지나가는 사람이 물었어요. 뭐하고 있냐고. 그랬더니 “지구의 한 모서리를 청소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내 일터, 내 가정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기쁨을 가지고 살아갈 때, 그 사람은 아주 훌륭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거지요. 그리고 이제 우리의 다양한 은사와 생각을 하나로 묶어서 방향을 같이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이죠. 성경은 말합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기도
하나님, 연약한 우리들을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하시고, 자녀 삼으시고,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소원이 있습니다. 건강한 교회,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가기를 소망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고 기쁨과 평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바르게 알지 못하여 어그러진 우리의 신앙생활을 바르게 고쳐주시옵소서. 말씀을 통하여 올바로 깨닫고 올바로 순종하고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응답을 올바로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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