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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에서 21세기 대한민국을 보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19. 11. 1. 17:23

프랑스 대혁명에서 21세기 대한민국을 보다

등록 :2019-11-01 05:00수정 :2019-11-01 09:23

 

주명철 교수, 1차사료 바탕으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완간…초고부터 10년 걸린 역작
“혁명은 ‘휘묻이’처럼 일시적으로 사라진 듯해도 언제 어디서 불쑥 싹을 틔울지 모른다”

공포정으로 가는 길-구국위원회와 헌정의 유보(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9)

반동의 시대-공포정의 끝인가, 출구인가 (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10)

주명철 지음/여문책·각 권 2만원

1794년 7월28일 로베스피에르 처형 장면. 자코뱅 지도자였던 로베스피에르는 루이 16세 처형을 주도하며 권력의 실세가 되지만 “공포정을 실시하는 사람도 공포를 느”끼는 상황에서 공포정의 출구를 찾으려다 단두대에 서고 만다. 여문책 제공
1794년 7월28일 로베스피에르 처형 장면. 자코뱅 지도자였던 로베스피에르는 루이 16세 처형을 주도하며 권력의 실세가 되지만 “공포정을 실시하는 사람도 공포를 느”끼는 상황에서 공포정의 출구를 찾으려다 단두대에 서고 만다. 여문책 제공

휘묻이. 식물의 줄기를 휘어 땅에 묻어 뿌리를 내는 번식 방법. 노학자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을 문화의 ‘휘묻이 현상’으로 설명했다. “일시적으로 사라진 것 같아도,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불쑥 싹을 틔우고 생장할”지 모른다는 뜻이다. 옆으로 옮겨 심어도, 뿌리가 없어도 식물은 태양을 향해 자란다. 부풀어 올랐다 사그라지고 때로 돌이키기(반동)도 하지만 결국 터져 나오고 마는 혁명이 그와 같다.

우리 저자가 쓴 첫 장편 프랑스 혁명사

주명철(69)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이 최근 9, 10권 동시 출간을 끝으로 완간됐다. 2010년 무렵 초고 집필로부터 거의 10년이 걸린 대장정이었다. 지난 30일 충북 청주시 한국교원대 교정에서 만난 주 교수는 프랑스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한 장면으로 전국신분회 소집을, 가장 중요한 인물로 로베스피에르를 꼽았다. 공교롭게도 10권의 책은 1789년 루이 16세의 전국신분회 소집부터 1794년 로베스피에르 처형까지 5년의 격동기를 다룬다. 전국신분회는 우리가 학교에서 삼부회(三部會)라고 배웠던 프랑스의 신분제 의회를 말한다. 제1신분(성직자), 제2신분(귀족), 제3신분(평민) 등 세가지 신분으로 이뤄졌다고 해서 일본 학자들이 삼부회라고 번역했고, 우리 학계가 이를 수용해 지금껏 사용하고 있다. 주 교수는 명확하지 않은 개념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고 있다며 전국신분회로 바꿔 부른다. 일본 학자들이 ‘심성사’로 번역한 망탈리테의 역사를 ‘집단정신자세의 역사’로 고치고, ‘면죄부’를 ‘면벌부’로, ‘민사기본법’을 ‘시민헌법’으로, ‘박애’를 ‘우애’로, ‘공안위원회’를 ‘구국위원회’로 바꿔 부르는 이유도 이와 같다.

바스티유 정복. 여문책 제공
바스티유 정복. 여문책 제공

아이러니로 시작한 혁명

바스티유 정복(함락이나 피습이 아니다!)이나 루이 16세 처형이 아니라 전국신분회를 가장 중요한 장면으로 꼽은 이유는 여기서 혁명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전국신분회는 루이 9세의 손자 미남왕 필립 4세가 교황과 싸우는 과정에서 1302년 처음 소집했으나 절대 왕정이 확립되면서 1614년 폐쇄됐었다. 루이 16세는 심각한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175년 만에 이를 다시 소집했다.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했는데, 빚이 눈덩이처럼 늘어나 파탄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증세였는데, 최고의 귀족이자 자산가들이 모여 있던 파리고등법원이 ‘과세를 하려면 전국신분회를 소집해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세를 피하려는 꼼수였다. “왕이 사표를 던지는 기분으로 전국신분회를 소집했다”고 한다.

루이 16세
루이 16세

그런데 이렇게 모인 전국신분회에서 제3신분인 평민이 절반을 차지하게 되고 제1신분인 성직자 중에서도 다수를 차지한 하위직들이 평민 편을 들면서 왕과 귀족들의 의도와는 다른 역사가 펼쳐진다. 왕의 거수기 노릇을 거부하고 국회를 선언한 것이다. “1789년 5월이 출발점이다. 전국신분회가 모인 뒤 제3신분이 주도권을 쥐고 국회를 선포하고 나서 바스티유 정복과 도시와 농촌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국회는 더욱 힘을 얻었다. 루이 16세는 입법권을 잃고 그저 행정부의 우두머리로 남아 거부권을 행사하다가 10월 초 파리에서 베르사유로 쳐들어간 여성 시위대에게 끌려 베르사유 궁을 영원히 떠난다.” 왕의 과세 의도와 귀족들의 조세 저항이 역설적으로 프랑스 혁명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된 것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민중들의 지독한 가난과 계몽주의를 비롯한 개인주의 및 자유주의 사상이 존재한다.

혁명 웅변가들의 명연설

혁명의 시작이 전국신분회 소집이었다면 마지막은 로베스피에르 처형이다. 이번에 나온 9권 <공화정으로 가는 길-구국위원회와 헌정의 유보>와 10권 <반동의 시대-공포정의 끝인가, 출구인가>에는 영국을 비롯한 적대 세력의 개입과 전쟁, 상퀼로트(의식화된 민중)의 압박, 반혁명파

들의 반란과 식량 가격 폭등, 화폐가치 하락 등 안팎의 도전에 맞서 혁명을 안착시키려 했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

던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협회의 노력과 좌절이 담겨 있다. 주 교수는 로베스피에르와 당통 등 주요 인물의 명연설을 공들여 소개한다.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공화정 수립 이후의 국회) 안팎의 공세에 맞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한결같이 1789년의 자코뱅이며, 8월10일(상퀼로트에 의한 2차 혁명)의 자코뱅이며, 그에 못지않게 신성한 날의 자코뱅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폭군을 심판하고 죽여 공화국을 탄생시켰습니다. 만일 의심이 든다면 부디 오셔서 자코뱅협회 회원들과 적들을 관찰하시기 바랍니다. 오시면 기꺼이 형제로 안아드리겠습니다. 우리 함께 새로운 맹세로써 폭군과 모사꾼들에 맞섭시다. 자유의 적이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연맹군인 척했지만, 막상 진정한 연맹군 앞에서 사색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 앞에서도 사색이 될 것입니다.”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자코뱅협회 회원들은 상퀼로트와 연대해 우파인 지롱드파를 처단하고 권력을 장악하지만 얼마 뒤 독재를 획책한다는 혐의를 받고 단두대에 선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역사의 법칙을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주 교수는 “공포정을 실시하는 사람도 공포를 느”끼는 상황에서 공포정의 출구를 찾으려 했지만 결국 공포정의 희생양이 된 로베스피에르의 인간적 고뇌를 되새기며 “비록 사관이 다른 독자라 할지라도 오늘날 제도적으로 집단광기를 막을 장치가 많은 시대에 태어난 것

로베스피에르
로베스피에르

이 다행이라는 데 공감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19세기 프랑스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얘기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은 연도별로 주요 사건을 정리한 편년체 서술이지만, 지은이의 사관에 입각해 프랑스 혁명 당시와 21세기 대한민국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춘추필법, 주요 인물에 대한 상세한 소개를 곁들인 열전의 형식까지 갖춰 마치 에세이처럼 읽힌다. “19세기 프랑스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을 돌아보며 손주에게 들려주는 혁명 이야기”로 가볍게 시작했지만 출간을 거듭할수록 “너무 많은 분량을 덜어내느라 도리어 (마음이) 무거워졌다”고 주 교수는 말했다. 프랑스 혁명을 직접 겪은 것처럼 쓸 수 있었던 것은 주 교수가 프랑스 파리 유학 시절부터 모아둔 1차 사료 덕분이다. <1789년부터 1860년까지의 의회기록>은 전국신분회 소집 전의 프랑스 역사와 1789년 5월부터 국회가 탄생하는 과정, 국회의원들의 헌법과 법률 제정 과정에서 오간 발의·제안·투표 과정을 자세히 보여준다. 권당 약 800쪽씩 1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다. 이밖에 <프랑스 혁명기 의회의 역사>와 <혁명기 파리 코뮌의 의사록>, 파리대학교 프랑스 혁명사 강좌를 처음 개설하고 첫 강좌 주임교수가 된 프랑수아 올라르의 <자코뱅 클럽의 역사를 위한 자료 모음> 등도 활용했다.

주명철 한국교원대 명예교수가 30일 충북 청주시 한국교원대 미래도서관에서 이번에 나온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9·10권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이재성 기자
주명철 한국교원대 명예교수가 30일 충북 청주시 한국교원대 미래도서관에서 이번에 나온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9·10권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이재성 기자

“파도에 흔들릴지라도 가라앉게 놔두지 말아야 한다”

주 교수는 각 권 서문을 통해 당시 책을 쓰는 심정을 일일이 기록했다. 마침 박근혜 탄핵 촛불이 타올랐고 정권 교체, 적폐 청산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특히 마지막 권인 10권 머리말과 마무리 글에서 그는 ‘프랑스 파리의 문장(紋章)’인 “파도에 흔들려도 가라앉지 않는다”를 상기하며 이렇게 말한다. “여전히 일제강점기를 찬미하고 그리워하는 세력 때문에 격랑에 휩쓸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주의가 흔들릴지라도 가라앉게 놔두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10부작을 쓰면서 프랑스 혁명을 우리의 현실과 끊임없이 비교하려던 의도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이 피를 먹고 자란 민주주의 나무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이 책에서 찾는다면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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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15400.html?_fr=mt0#csidx111ca2c337580fd9ad8655deebdc3d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