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文化); 책과 생각; 건강

풍족한 핀란드인들은 왜 중고 옷을 사 입을까

성령충만땅에천국 2019. 11. 23. 03:05

풍족한 핀란드인들은 왜 중고 옷을 사 입을까

등록 :2019-11-22 06:01수정 :2019-11-22 15:26

 

핀란드 중고가게·벼룩시장에서 찾은 시민들의 놀라운 소비 습관
자연 앞에 평등한 만인의 권리, 지속가능성에 대한 책임감에서 비롯

핀란드 사람들은 왜 중고 가게에 갈까?
박현선 지음/헤이북스·1만6800원

핀란드는 핀란드어로 ‘수오미’(Suomi)라고 한다. ‘호수의 나라’라는 뜻이다. 핀란드인이 가진 18만여개의 호수는 단순한 물 웅덩이 이상의 의미. 안정, 휴식 같은 정신적 활동과 직결돼있기 때문이란다. 인구밀도가 낮은 환경에서 사람들은 자발적 고립을 즐긴다.

이 나라엔 ‘명품’이라 일컫는 고가 럭셔리 브랜드는 없지만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모던한 디자인의 생활용품이 있다. 벌이는 다르지만 벌금의 무게는 같아야 하기에 차등적 과태료를 부과하고, 소득이 달라도 육아의 짐은 비슷하게 져야 한다며 어린이집 이용료도 다르게 매긴다. 출산 100일 전 모든 산모에게 국가가 주는 갓난아이 용품 상자는 무려 8㎏. 내용물은 시대의 흐름과 사회적 인식을 반영해 때때로 재검토한다. 18살까지 치과 치료는 무상. 이 위대한 ‘보통 사람들의 나라’에 사는 ‘복지로운’ 국민들에게는 이런 사회 제도와 맞물린 특정의 소비 습관이 있었다. 아름다운 환경과 더불어 만인이 함께 살아가는 일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된 생활 실천이다.

중고 판매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햇빛과 바람이 어우러진 완벽한 핀란드의 여름을 즐기는 좋은 방법이다. 사진 박현선
중고 판매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햇빛과 바람이 어우러진 완벽한 핀란드의 여름을 즐기는 좋은 방법이다. 사진 박현선

<핀란드 사람들은 왜 중고 가게에 갈까?>는 핀란드에서 가구디자인을 공부하고 제품디자인회사를 운영하던 산업디자이너 박현선(37)씨가 2005년부터 14년 동안 그곳의 중고 문화를 접하고 물들면서 취재하고 탐구한 결과다. ‘나무를 좋아한다면서 왜 나무를 죽여 물건을 만드느냐’는 언니의 농담 섞인, 그러나 ‘팩트 폭격’이기도 한 질문에서 시작된 지은이의 고민은 점점 커져만 갔다. 북유럽 디자인이란 말을 좇아 찾아온 조용한 도시 헬싱키에서 그는 보통 사람들과 보통 물건, 보통의 일상에 매혹되었다. ‘신상’에 빠삭한 소비 주체가 아니라 오래된 물건이 지닌 가치를 재발견하고 그 가치를 공유하는 ‘특별한 보통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지은이는 도대체 왜 핀란드인들이 중고 물품에 ‘꽂히게’ 되었는지, 왜 이런 재사용 소비 실천을 하게 되었는지 집요하게 묻고 또 묻는다. 이는 자신을 향한 질문이기도 했다. 핀란드에서 현지 제작자들과 함께 공책, 가구 등을 만들어 여러 나라에 납품하던 그는 ‘세상에 이렇게 많은 물건이 있는데 내가 무엇을 만드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자문했기 때문이다.

헬싱키 뀔라사리에 위치한 가장 오래된 재사용센터. 사진 박현선, 헤이북스 제공
헬싱키 뀔라사리에 위치한 가장 오래된 재사용센터. 사진 박현선, 헤이북스 제공

핀란드 도심에서 ‘끼르뿌또리’ ‘끼르삐스’라 불리는 중고샵은 두세 블록마다 하나씩, 동네마다 서너개씩 있다. 중고가게는 ‘순환 경제’의 현장으로, 생산, 유통, 소비, 수거가 원형을 이뤄 돌아가는 구조다. ‘재활용’이 재처리 과정을 통해 제품을 다시 새로운 제품의 원료로 만드는 것이라면, ‘재사용’은 제품의 전부 혹은 일부를 다시 사용하는 것을 일컫는다. 중고 문화의 핵심은 재사용 문화다. 물건의 수명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소비자는 선순환을 담당하는 환경 주체, 경제 주체가 된다.

중고가게는 여러 종류인데 가장 저렴한 기부형 중고가게와 판매 대행 중고가게 ‘잇세빨베루’, 그리고 오래되어 값어치가 있는 디자인 제품을 파는 빈티지 상점, 가장 고가의 골동품을 파는 앤티크 상점 등으로 나뉜다. 최근엔 매년 5월과 8월 각 하루씩 헬싱키 전체가 거대한 중고 장터로 변신하는 날이 있는데, 그것을 ‘시보우스 빠이바’, 곧 ‘청소의 날’이라 부른다. 헬싱키의 시민, 이민자, 유학생들이 허락받지 않은 사유지를 제외하곤 모든 공원, 공터, 골목 등에 자기 물건을 펴놓고 판매하며 축제처럼 즐기는 날이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조직된 이 행사를 처음 시작할 때 시 당국은 난색을 표했지만 시민들이 힘을 합쳐 행사를 밀어붙였다. 그 결과 행사는 이제 관광처에서 홍보하는 핀란드의 명물이 되었다.

핀란드 중고 행사와 중고 가게는 보통 사람들이 만드는 평범한 일상의 물건들로 가득하다. 사진 박현선
핀란드 중고 행사와 중고 가게는 보통 사람들이 만드는 평범한 일상의 물건들로 가득하다. 사진 박현선

진열장 대여 중고가게 ‘잇세빨베루’는 특히 수줍음 많고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즐기지 않는 핀란드인들에게 가장 적합한 판매방식이라고 한다. 자릿세를 받고 진열장을 빌려주는 판매 대행 시스템으로, 판매자는 자기 물건을 가져다 놓고 값을 매긴 뒤 총판매액에서 대여료를 뺀 나머지를 돌려받는다. 핀란드의 이런 중고 문화는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이어진 경제 대공황 때 널리 퍼졌다. 1980년대 고속 성장기에 생긴 거품이 꺼지고 주요 무역국이던 소련이 붕괴하면서 이 시기 국민들이 큰 경제적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잇세빨베루 또한 특수한 시대적 배경과 핀란드인들의 천성이 빚은 결실이라고 지은이는 분석한다. 당시 부모나 조부모의 손을 잡고 중고가게에 드나들던 아이들은 자신만의 개성을 보여줄 다양한 색상의 옷과 액세서리들을 걸쳐보며 패션을 익혔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옷을 입는 자신감과 감각을 가지게 됐다. 헬싱키 패션 스타일을 다룬 누리집 ‘헬룩스’는 거리의 멋쟁이들을 인터뷰와 함께 싣는데, 이들은 종종 “엄마 코트” “할머니 가방” “중고가게에서 고른 바지”를 자랑하며 그날 선택한 옷의 출처를 밝힌다.

옷을 대부분 중고 가게에서 구입한다고 밝힌 핀란드의 멋쟁이들. 출처 헬룩스 ⓒLiisa Jokinen
옷을 대부분 중고 가게에서 구입한다고 밝힌 핀란드의 멋쟁이들. 출처 헬룩스 ⓒLiisa Jokinen

책에는 그밖에도 새 물건을 사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생활용품 대부분을 중고가게에서 찾는 멜리사, 골동품 수집 취미를 가진 부모님을 보고 자라나 ‘퇴근 뒤 중고가게 사장’이 된 야따, 백화점에 입점한 중고가게 ‘베스티스’의 창업자 사라, 철거 현장 검증을 통해 가치 있는 물건을 수거해 판매하는 인테리어 전문 디자인 회사 ‘웨이스트’의 요한네스와 유하나 형제 등이 등장한다. ‘디자인 강국’ 핀란드인들의 탁월한 안목은 더군다나 중고 문화의 견인차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알바 알토와 카이 프랑크로 대변되는 핀란드 모더니즘 디자인은 직설적이고 과감한 정취가 특징. 평가절하된 옛 물건 찾기를 어려서부터 즐겼다는 중고 제품 판매상 빠시는 “아이러니하게도 요즘 만들어진 물건보다 옛날 물건이 튼튼하고 정교한 경우가 많다”며 “감식 없이 버려지고 잊히는 옛 물건들이 너무나도 많다”며 울분을 터트렸다. 그는 최근 국제 경매에서 최고가를 갱신하는 핀란드 제품을 두고 “구매력이 있는 특정한 사람들만이 이 물건을 누리게 되는 현상이 과연 올바른가” 묻기도 했다.

달라펜 공원을 가득 메운 벼룩시장 인파가 보이면 여름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민 주체 벼룩시장에 참여를 위해서는 기본적인 책임감과 시민의식이 요구될 뿐, 까다롭고 어려운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 박현선
달라펜 공원을 가득 메운 벼룩시장 인파가 보이면 여름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민 주체 벼룩시장에 참여를 위해서는 기본적인 책임감과 시민의식이 요구될 뿐, 까다롭고 어려운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 박현선

그러나 개인의 각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법, 제도 같은 정책이다. 1980년대 핀란드 환경부는 당시 돈 40억 마르까(우리 돈 6억~7억원)에 달하는 예산으로 재사용 운동을 지원했다. 핀란드의 재사용 센터는 사회적 기업으로서 장기간 실업급여를 받아온 사람이나 외국인을 고용해 직업 교육을 한다. 1992년부터는 기업과 학교를 대상으로 환경 강의를 한다. 핀란드의 공공기관과 학교는 의무적으로 직원과 학생에게 환경 강의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실천의 뿌리에는 핀란드인이 자랑스러워하는 ‘요까미에헨 오이께우뎃’(모든 이의 권리)이라는 법 정신이 있다. 누구나 호수, 폭포, 바다, 숲 같은 자연을 맘껏 누릴 권리를 보장하되 그에 대한 책임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쾌적한 여름날 햇볕 가득한 공원에서 시민들이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아무데서나 소소한 살림살이를 늘어놓으며 행사를 벌이는 모습에선 ‘모든 이의 권리’라는 법의 실체가 보인다. 자연을 누리기에 앞서 책임을 고민하는 이들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역시나 패스트패션. 이 ‘시즌’ 산업이 낳은 거대한 옷더미는 가치 있는 제품을 발견하는 중고 시장의 질을 저해하고 옷더미를 받는 제3세계의 산업까지 망가뜨리고 있다. 중요한 건 이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행동과 세상을 바꾸려는 제도적 움직임이다. 이것이 정치로 번졌을 때 그야말로 파급력을 얻을 것이다.

헬싱키 세컨드핸드의 내부. 사진 박현선
헬싱키 세컨드핸드의 내부. 사진 박현선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지은이 박현선씨는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소비와 환경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알리고 싶어 책을 기획하고 쓰게 되었다”고 말했다. “흰 캔버스 천으로 만든 가방이 에코백이 아니고, 이미 우리가 가진 가방을 오래도록 쓰는 것이야말로 에코백”이라며 그는 “전문가가 아니고 직접 행동을 할 깜냥도 없지만 이 책을 쓰면서 비슷한 고민을 하고 노력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야외에서 벌어진 중고 시장. 저가 브랜드의 옷이 진열 물품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은 핀란드 중고 가게의 고민이기도 하다. 사진 박현선
야외에서 벌어진 중고 시장. 저가 브랜드의 옷이 진열 물품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은 핀란드 중고 가게의 고민이기도 하다. 사진 박현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18058.html?_fr=mt2#csidx283b4d83b52c313902b593239343e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