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희망을 주는 그 이름[김연아의눈물과우승효과,자유평등]/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 09:38

2009 4 5 주일예배

희망을 주는 그 이름

( 12:9-21)

9.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 들어가시니

10.  한쪽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마리가 있어 안식일 구덩이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3. 이에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고치시고

 

 

 

  1.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2. 이는 선지자 이사야 통하여 말씀하신
  3. 보라 내가 택한 마음에 기뻐하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그에게 터이니 그가 심판 이방에 알게 하리라
  4.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5. 상한 갈대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피겨여왕 `김연아'의 눈물을 보셨습니까? 그토록 여러 번 도전하고 실패한 끝에 피겨스케이팅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 시상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표현해내는 고난도의 기술을 보면 `,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또 꿈의 점수라고 하는 심사점수 200점도 넘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연아 선수가 일년에 점프를 9천 번을 하는데 그 중에 천이백 번은 엉덩방아를 찧는다고 합니다. 우승은 엄청난 연습과 훈련의 결과이죠. 늘 부상에 시달려서 이번에는 다행히 부상당하지 않고 좋은 컨디션을 유지해서 우승할 수 있었다고 얘기합니다.

   그 우승의 효과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1조원이라고 합니다. 또 국민 모두가 희망을 갖게 되는 거죠. 광고 문구도 `당신이 대한민국의 희망입니다' 그렇게 썼더라고요.

   그러나 이런저런 뒷얘기들을 읽어보니 생각할 게 하나 있더라고요. 본인이 이렇게 고백했어요.“내년에 동계올림픽에서 우승을 하면 은퇴하고 싶다.”이제 나이 열아홉인데 내년에 은퇴하고 싶대요.“만약에 나중에 딸을 낳으면 피겨스케이팅을 시키겠느냐?”는 물음에 단호하게“절대 시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성공신화의 허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등과 최고를 쫓아가는 한국인의 하나의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등이 나름의 가치가 있지만 과연 그렇게까지 우상화할 이유가 있는가 생각해요. 모든 사람이 할 수도 없을 뿐더러 `내년에 우승하면 그만 두겠다.' 그때까지 견디고 참겠다는 거예요. 경제적 이득과 우승의 명예를 생각하고 오늘의 연단과 고난을 버티겠다는 것이죠. 모든 사람이 그렇게 버틸 수도 없을 뿐더러 과연 그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델이고 목표이겠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죠.

   소위 미국의 명문대학이라고 하는 Ivy League에 진학하는 한국인 학생들의 퍼센트는 다른 나라 학생들을 월등히 넘어서죠. 그러나 빛에는 그림자가 있듯이 중도 탈락하는 학생들도 월등히 높아요. 열심히 일하는 것, 중요하죠. 그러나 지혜롭게 일하는 것만 못하다. 지혜롭게 일하는 것, 잘하는 거죠. 그러나 즐겁게 일하는 것만 못하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짧아요. 일등 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돼요.

   성경에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 세상 만물과 사람을 지으시고 나서 `보시기에 참 좋았다.' 만물을 만드실 때마다 `좋았다' 하시더니 마지막 날 한 남자와 한 여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나서 말씀하시기를 `참 좋았다.' 그러고 나서는 안식하셨다. 여기서 안식이라는 의미는 일차적으로 쉰다는 뜻이지만 그저 넋 놓고 쉬는 게 아니죠. 지으신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이죠. 그 아름다운 질서와 조화를 누리면서 기뻐하셨다는 거죠. 우리는 흔히 내일 일하기 위해서 쉰다. 기능적으로만 이해해요. `내일 또 일해야 되니까 오늘 빨리 쉬어.' 그런 게 아니고 반대예요. 안식은 완성이에요. 오히려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일하는 거예요. 우리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누리면서 살아야 돼요.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안식을 누리는 법을 배워야 하는 거죠.

   , 하나님이 이 안식을 선물로 주시면서 `안식을 지켜라' 명령하셨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온전히 지키려고 여러 가지 규례를 만들어서 철저하게 지켰던 것입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 목록을 만들었어요. 39가지 이런 일들은 해서는 안 된다. 노동을 해서는 안 돼요. 짐을 옮기거나 해서는 안 되요. `그럼, 어느 정도를 짐이라고 얘기해야 되느냐?' 학자들이 연구해서 내놓은 결론은 마른 무화과 열매 두 개 이상을 옮기면 짐이다.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얘기예요. 일을 해서는 안 되고 일을 계획해서도 안 되고 여행은 말도 안 되고 여행을 생각해서도 안 된다. 여러분, 생각해서도 안 된다니.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게 바로 완벽주의죠. 강박관념이죠.

   정통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엘리베이터도 자동으로 층마다 서게 만들었어요. 누르면 안 되니까. 저절로 층마다 열리고 닫히게. 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어요. 사람이 스스로 만든 올무에 갇히는 거예요. 그 똑똑하던 유대인들이 이렇게 몇 천 년을 내려오는 거예요.

   오늘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치는지 주목하고 있어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병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막는 것 까지는 허용하지만 회복을 위한 치료는 안 된다고 본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걷는 것 이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규제하기 시작한다면 온전해 질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안식일 규례를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우리는 완벽하게 지키고 있다.'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고 있는 거예요. 정통 유대인들은 이것을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어요. BC 180년경에 유대가 시리아 안티오쿠스 왕에게 지배를 당할 때 그들에게 대항해서 독립전쟁을 일으켰어요. 유다 마카비 시대였어요. 그런데 적이 언제 쳐들어왔느냐 하면 안식일에 쳐들어 왔어요. 동굴에 숨어있는데 안식일에 쳐들어 왔어요. `어떻게 할 것이냐? 죽더라도 안식일을 범할 수는 없다.' 그래서 1천명이 다 살해당했어요.

   가장 현대적인 도시 뉴욕 한복판에도 정통유대인들이 있어요. 그들의 거주구역이 있어요. 그 사람들은 지금도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켜서 안식일 시작되기 전에 등을 켜는데 이걸 밤에 스스로 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샤베스 고이'라고 해서 품행이 단정한 이방인을 선택해서 열쇠를 맡겨서 자기들이 잠들어 있는 한밤중에 들어와서 불을 끄고 가도록 한다는 것이죠.

   오늘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셔요. `양이 구덩이에 빠졌을 때 건져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느냐? 하물며 사람은 양보다 몇 배나 더 귀한 존재인데 어찌 이토록 병으로 고통 하는 사람을 고치지 않을 수 있느냐' 말씀하시고 손이 말라 오그라진 사람을 고쳐 주셨어요. 그러자 그걸 지켜보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분노했어요. 몇 천 년 동안 지켜오던 자기들의 신앙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안식일 규례를 눈앞에서 어그러뜨리는 것을 보고 분노하면서 본격적으로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까?' 의논했어요. 이 얼마나 기가 막혀요. 그런데 이거 유대인들만 이러는 거 아니에요. 알고 보면 우리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르네상스 종교개혁 이후에 근대사회가 열리면서 사람들이 계몽주의 시대를 맞아요.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를 가지게 됐어요. 어떻게 해야 인간이 정말 행복할 것인가? `인간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자.' 그게 프랑스 혁명이잖아요. 개인의 자유를 확장해 주었는데 인간이 그 자유를 자기중심적으로만 주장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발달과 함께 빈부격차가 심하게 돼요. 나라들 사이의 식민지 경쟁에서 갈등이 일어나죠. 결국 나중에 어떻게 돼요? 그 대표적인 예가 극단적 자유를 주장하는 `나치즘'이 일어나는 거잖아요. 아리안 종족만이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흑인이라든지 유대인은 다 죽어야 될 무가치한 존재라는 거예요. 결국 전쟁을 일으켜서 2차 세계대전에서만 6천만 명이 죽었어요. 6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면서도 양심이 무뎌져서 그 죄악상을 미처 알지 못했어요. 무서운 거예요.

   반대로 극단적 자유에 대한 폐단을 알고 빈부격차를 줄이려고 내놓은 또 하나의 가치가 평등이에요. `모든 사람이 똑같이 평등하게 살자.' 사회주의가 등장했고 사회주의의 극단적인 형태가 공산주의잖아요. 공산주의 실험 70년 만에 어떻게 됐습니까? 모두 다 가난해 지고 거짓말쟁이가 되고 무책임하게 되어서 실패로 돌아갔어요. 자유와 평등은 아주 소중한 가치예요. 인간 행복에 있어서 꼭 있어야 할 가치예요. 그것이 있어야 진정한 삶의 안식을 누릴 수 있어요. 그러나 인간들끼리의 실험은 처절한 실패로 끝났어요. 근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오늘 하신 말씀과 행동 속에 자유와 평등이 오롯이 살아있어요. 그것을 우리들에게 펼쳐 보이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안식을 어떻게 이해하셨는가? ,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째, `너희가 다윗과 그 일행이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을 먹은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도망 다닐 때의 일입니다. 너무 배가 고팠어요. 먹을 것이 없었어요. 제사장을 찾아 갔어요.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십시오.' 그런데 딱하게도 줄 게 없어요. 딱 하나 있는데 그건 어떤 떡이냐 하면 일주일에 한번씩 하나님께 새 떡을 올려드리고 한 주 무른 떡을 물려내는데 이 물려 낸 떡은 반드시 제사장들만 먹는 거예요.

   여기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떡이 있었어요. 그러나 사람들이 지금 굶주리고 있어요. 규례로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내어주었어요. 그걸 먹었어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셔요. `그 어떤 규례라도 인간의 필요를 우선할 수는 없다'는 거죠. 굶어 죽는 사람을 살리고 나서야 규례가 있는 거예요. 인간이 있고 나서야 법이 있는 거예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안식을 지켜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한번 생각해 봐라. 오히려 성전에서는 안식일에 더 많은 제사를 드리지 않느냐.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더 땀을 흘리며 일하지 않느냐. 안식일은 결코 절대적 규범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오히려 안식일의 생명은 예배에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시간을 지켜 예배하되 예배의 생명을 누리지 못한다면 괜히 헛수고한 거잖아요. 예수님이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합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자비란 사랑을 말해요. 제사란 예배를 말하는 거예요. 예배 그 자체가 소중하지만 예배의 생명을 놓쳐서는 안 되는데 예배의 생명은 뭐냐, 사랑이다.

   그 사랑이란 뭡니까? 예수님이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라. 나의 택한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 내가 너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이게 바로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반드시 기억하고 들어야 되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한국에 가서 눈을 치료하고 또 치과에 갔습니다.“잇몸이 조금 욱신거리는데요.”그 분이 보시더니 그러더라고요.“이제는 할 수 없습니다. 적당히 달래가면서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그러더라고요. 하긴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제까지 써 온 내 몸이 오작동하고 흔들리는 것은 이제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이젠 끌어안고 사는 거예요. 이것까지도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나이가 50, 60인데 20대 젊은이 같이 힘이 솟구치겠어요? 그럴 수 없죠. 그것도 다 때가 있는 거잖아요. 나이 들어가면서 기력이 떨어지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총이에요. 나이 들어서 서글퍼야 천당을 바라보게 돼 있어요. 나이 들어서도 패기가 만만하고 돈을 쌓아놓고 그러면 하늘나라 갈 생각이 있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정 떼게 세상에서 섭섭한 일을 많이 당하게 하는 거예요. 억울하다, 분하다 하지 말고 이것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한 거죠.

   오늘 예수님이 `구덩이에 빠진 양'이라는 비유를 들었습니다마는 예수님이 보실 때 우리 인생 모두가 구덩이에 빠져 있어요. 자기 지혜와 열심으로 자기를 구원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구원 받는 길을 열어 보이시는 거예요.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이죠.

   이제 예수님께서 자기가 누리는 안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병자를 고치셨어요. 많은 사람들이 병자를 고치시는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따라왔어요.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다 고치셨어요. 그러나 다 고치시고 나서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가서 떠들지 말아라' 얘기하셨어요. 우리는 작은 일만 있어도 얼마나 드러내기를 원합니까? 그러나 오늘 말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은 다투지도 아니하고 들레지도 아니한다.' `들렌다'는 말은 소리 높여 떠든다는 말이에요. 오늘 병자를 고치는 일에 대해서 논쟁이 벌어질 뻔 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능히 저들을 논박해서 이기실 수 있었지만 뒤로 물러 가셨다. 다투지 아니하셨다. 그리고 병자를 고치셨지만 동네방네 가서 `알려라' 하지 않으셨어요.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시간표를 본 거예요. 지금 조용히 있어야 할 때인가 아니면 저들의 유익을 위하여 알려야 할 때인가 하는 것을 헤아려 보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서 죽어야 하셨기에 십자가 사건이 어그러지지 않도록 시시각각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그 음성을 들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제 보십시오.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신다.' 연약한 인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붙들어 주신다. 언제까지?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다른 번역으로 말하면 정의가 승리할 때까지. 상한 갈대 같고 꺼져가는 심지 같은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을 만나 새 삶을 발견하고 기쁨과 감격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까지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장기려' 박사의 글을 읽어 보니 원래 그 분이 평양 병원에서 일 하셨거든요. 그러다가 6.25전쟁 통에 나오셨어요. 해방되고 나서 전쟁 나기 전까지는 평양에서 굉장히 촉망 받는 인물이었어요. 김일성을 몇 번 고쳤잖아요. 국군이 들어와서 평양이 해방되었다가 다시 중공군에 밀려서 내려 올 때 그만 가족과 헤어지게 됐어요. 둘째 아들만 데리고 내려왔어요. 세월이 흘러서 40년 만에 미국에 있는 사람들이 다리를 놓아서 북쪽에 있는 아내로부터 편지를 받게 돼요. 그 편지를 받고 답장을 썼습니다. 그게 신문에 소개가 됐어요. 굉장히 감동적인 명문장이었어요. 신문에 실려 있는 장기려 박사의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고 사람들이 `, 우리의 고난의 반세기는 이 따뜻한 사랑의 편지 한 장을 위한 것이었던가.' 많은 지식인들이 그 편지를 보고 감동을 받아 얘기했는데 나중에 세월이 흘러서 진실이 밝혀졌는데 정작 이분은 딱 네 줄밖에 안 썼대요. `나 잘 있다. 근데 당뇨병 있다.' 하긴 가만히 생각하니 40년 만에 만난 부인에게 명문장을 쓸 수도 있지만 한국의 남자들 같으면 별로 할 말도 없을 것 같아요. 말이라는 것도 자주 대하고 얘기를 나눠야 말이 되지, 그리움도 그리움이지만 말로 표현하지 않은 40년 그리움은 글쎄 글 쓰는 탁월한 재주가 있으면 쓸까 막상 말하려니 아무 할 말 없어요. 그런데 기자가 이걸 받아 놓고 보니 하도 기가 막혀서 신문에 실으려다 보니 창작한 거예요. 그런데 그만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은 거예요. 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어요.

   장기려 박사는 자기 삶에 세 가지 교훈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기려 박사의 호가 `성산聖山'이기 때문에 이름하여 `성산삼훈' 이라 했습니다. 첫째는 `사랑의 동기가 없이 말하는 것을 조심하라' 했어요. 우리는 흔히 명분을 가지고 말해요. 내 마음을 숨기고 명분을 가지고 비판하고 싸우지만 정말 내가 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는 거예요.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라고 말하라. 그리고 `모든 일의 잘못은 내 책임'이라는 생각을 가져라. 이게 그의 평생에 스스로에게 주는 교훈이었다고 합니다.

   <톰 소여의 모험>으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은 아주 독설가였다고 해요. 당시 그가 어느 한 국회의원을 맹렬하게 비난을 했어요. `아무개는 개 자식이다.' 그만 이게 기사화 돼서 난리가 났어요. `실제 그런 증거가 어디 있느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어요. 그래서 사과하라는 요청을 받고 신문에 다시 정정 보도를 하게 됐습니다. 기자들을 불러놓고 `내가 정확하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잘못했기에 오늘 이 시간 정정하고자 합니다. 국회의원 아무개는 결코 개 자식이 아닙니다' 그랬다는 거예요.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라. 그렇죠.

   장기려 박사는 많은 믿지 않은 사람들, 병든 사람들을 대하면서 저들에게 하나님, 예수님, 성령이라고 얘기한다면 과연 저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것을 이렇게 한번 바꿔서 표현하자. `진실과 사랑과 성실' 나의 사명은 무엇인가? `진실과 사랑과 성실이 살아 숨쉬는 공동체를 이루어 가자.' 안 믿는 사람을 위한 깊은 배려죠. 소리치지 아니하고 다투지 아니하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고 내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그로부터 누리는 자유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 저들의 부족함을 채우자. 이게 예수님의 방법이에요.

   오늘 마지막 말씀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방사람들이 그 이름을 간절히 바랄 것이다.' 여러분, 정말 내 속 사람이 바라고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 뭐겠어요? 요란한 교회 의식이 아니에요. 교회 자랑도 아니에요. 하나님이 주시는 온전한 자유, 은밀한 위로의 말 한마디, 붙들어 주는 손과 따뜻한 눈길로 나누어 주는 사랑, 그것이 바로 날마다 누려야 할 삶의 은혜인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일등을 지향하는 경쟁사회 속에 살다 보니 그만 상대비교에 빠져 남보다 많이 가지면 행복하고 남보다 가진 바 없으면 불행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인생들로 살아왔습니다. 주님이 보여주셨듯이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 내가 너에게 성령으로 함께 하며 너를 인도하리라' 그 음성을 들을 때에 세상이 흔들 수 없는 절대 자유, 절대 행복, 절대 은혜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소리치지 아니하고 다투지 아니하고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이웃들을 살리는 이것이 내 삶의 목적이 되고 소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