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다 이루었다[십자가 사건의 역사성,영지주의,은총의 신비]/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 09:54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25-30)

2009 3 22

 

25. 예수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글로바아내 마리아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1.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3.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4.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5.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이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지난 20세기 경영의 모델로 주목받았던 전 제네럴 일렉트릭 회장‘잭 웰치’가 최근에 기고문에서 자기가 주창한‘주주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기업경영의 목표다 라고 했던 것은 잘못이었다.’이렇게 자아비판을 했습니다.‘오늘날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에 책임이 있다.’이렇게 비판을 했어요.‘중성자탄 잭’이라는 별명이었잖아요. 세계에서 1, 2등을 하는 기업 외에는 문을 닫든지 팔아 치우든지 하는 것이 그의 경영 방식이었죠. 회사와 종업원, 그 관계를 다시 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새는 두 날개로 난다’는 유명한 명제가 있습니다. 보수, 진보가 같이 있어야 돼요. 자유, 평등이 같이 가야 돼요. 양적 성장과 질적 성숙도 같이 있어야 돼요. 열정적인 신앙과 이성적 이해가 같이 가야 되는 거죠.

   이런 우스개가 있어요. 어떤 거지가 신사를 만났습니다.“선생님, 내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재작년에는 저에게 만원을 주시더니, 작년에는 오천 원으로 그리고 급기야 올해 들어서는 천원밖에 안 주시는데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멋있는 신사가 말합니다.“그거야 재작년에는 내가 총각이었으니까 여유가 있었지. 그런데 작년에 결혼했고 올해 애를 낳았으니 그럴 수밖에.”그러자 거지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말합니다.“아니, 그럼 내 돈을 가지고 당신 가족부양을 한단 말입니까?

   이게 자기중심적, 극단적 사고의 표본이에요. 그런데 이 거지만 그런 거 아니에요. 우리의 한계예요. 우리도 보고 들은 것 밖에는 생각하지 못해요. 그래서 넓은 세상을 본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저는 이곳에 나와 살게 되면서 한국에 있을 때 보다 생각과 경험의 폭을 넓힐 수 있었어요. 보는 게 다르잖아요. 이들의 종교와 문화를 봄으로써 신앙과 문화에 대한 균형감각을 찾을 수 있잖아요. 이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흔히 신앙의 구원문제를 논하면서 예전에 이런 논쟁을 많이 했어요. 구원을 받는 조건이 믿음이냐, 행함이냐? 그러면서 성경구절을 들어서 얘기합니다. 에베소서 2 8-9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구원은 믿음의 산물이다, 이렇게 얘기해요.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야고보서 2 26절에 있는 말씀을 들어서 말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래서 행위가 중요하다, 이렇게 얘기해요.

   여러분, 이것은 다 함께 있는 거예요. 다만 우리의 인식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 수준에 맞게 설명하는 거예요. 공부를 열심히 하는 자녀에게는“좀 쉬어 가며 해라”부모가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그러나 밤낮 노는 애한테“쉬어 가며 공부해라”고 얘기 할 수 있어요? 매를 들고 쳐서라도 공부하라고 해야지. , 내 사랑하는 자식이니까. 저를 사랑하고 저를 기르고 저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놓을 준비가 돼 있어요. 다만 자식의 상황이 다양하니까 거기에 맞추어서 이렇게도 얘기하고 저렇게도 얘기하는 거예요. 항상 성경은 양면성을 얘기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 중심을 들여다보면 거기에 사랑이 있어요.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다 이루었다.’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루어진 게 뭐가 있어요? 잘 생각해야 되는 거예요. 흔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하신 말씀이 일곱 마디라고 해서 그것을‘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말해요.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마디 말씀이다.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그 말씀들을 찾아서 엮어 보니까 일곱 마디 말씀이 되고‘이렇게 말씀하셨겠지’라고 하는 순서를 정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이 못 박히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첫째,‘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지금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둘째,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가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아‘주님,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말씀하니까 그 강도에게‘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마지막 순간에 강도를 구원하셨어요.

   셋째, 오늘 본문에 나와 있듯이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이 함께 서있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에게 말합니다.‘어머니, 그 옆에 있는 요한을 보십시오. 이제는 당신의 아들입니다.’또 요한에게 말합니다.‘네 어머니다. 네가 모셔라.’그래서 요한이 그 말씀을 듣고 평생 마리아를 자기 어머니로 모셨다고 합니다.

   넷째, 오늘 본문에 보니‘내가 목마르다.’고통을 토로하셨어요. 다섯째,‘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돌아가시기 직전에 외치셨어요. 이 뜻은‘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말이에요. 여섯째,‘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마지막 일곱째,‘다 이루었다’하고 영혼이 돌아가셨다. 이게 가상칠언입니다.

   그런데 이게 한 복음서에 다 나와 있는 게 아니에요. 네 복음서에 흩어져 있어요. 거기에는 의도가 있어요. 복음서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마는 예수님의 남긴 말씀을 기록한 게 다 달라요. 그렇게 다르다고 하는 이야기는 오히려 그것이 분명한 사실이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주는 거예요. 다양한 관찰과 해석과 입장은 십자가 사건의 역사성을 우리들에게 증명해 주는 거예요.

   마태, 마가복음에는 이 일곱 마디 말씀 중에 딱 한마디만 기록되어 있어요.‘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원래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복음서 중에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쓰여졌고 가장 순수한 형태의 복음이다, 이렇게 설명해요. 십자가의 고통 속에 있는데 어찌 부르짖음이 없었겠어요? 그 부르짖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너나 할 것 없이 다 들었던 거예요. 마가복음에서는‘예수님이 우리 죄를 해결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울부짖으셨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려주려고‘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기록한 거죠. 그러나 마태복음은 똑같은 말씀을 기록했습니다마는 어떤 생각에서 기록했느냐 하면, 이것은 시편 22 1절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외치신 것은 구약성경의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 예수님에게 성취되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 말씀을 기록했다는 거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 그려진 예수님의 이미지가 사람마다 달라요. 다 예수 이름을 부르고 있어요. 그러나 자기 이해, 자기 경험, 자기 상황이 다 달라요.  개인만 그런 게 아니에요. 교회도 다른 거예요. 교회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서 다 다른 거예요.

   그렇다면 교회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를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무엇을 붙들어야 되는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잘 설명해 주고 있어요. 누가복음에 기록된 말씀은 두 가지예요.‘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저들이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또 하나는‘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강도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구원을 베푸신 사건이 기록돼 있어요.

   그러면 누가복음이 기록된 당시의 교회는 어떤 상황이었느냐, 교회가 성령의 역사로 사도행전에 보는 것과 같이 왕성하게 일어났어요. 그리고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전역에 펴져나갔어요. 교회가 많이 생겨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어요. 그러면서 자연히 교회 안에 조직이 만들어진 거예요. 리더들을 세우게 된 거예요. 집사들을 세우게 된 거예요. 일꾼들을 세우게 된 거예요. 교회가 조직화 되면서 질서가 필요하고 규범이 만들어 지는 거예요. 이렇게 교회가 조직화될 때 잃어버리기 쉬운 게 있어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질서가 성경말씀 보다 더 중요해지는 역전현상이 일어나요. ? 하나님의 역사는 아무래도 눈에 잘 보이지 않으니까. 눈에 보이는 규범을 질서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바른 신앙이라고 평가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즉 자유로운 성령의 역사를 자꾸 망각하는 거예요. 놓치는 거죠.

   그러니까 오늘 이 말씀은 뭐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께서 마지막 순간에 자기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강도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죄 사함과 구원의 사건은 교회가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거예요. 그러려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주시는 감동을 순간이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여기 전통과 경험, 이 두 가지 사이에 갈등이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이제까지 체계화된 신학과 그리고 내가 예수를 믿는 상황 속에서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균형 있게 잘 따라야 되는 거죠.

   미국의 유명한 ‘필립 얀시’라고 하는 기독교 저술가가 미국 남부의 보수적인 교회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어요. 그는 그 시절을 회고하면서‘천국을 맛보려고 교회에 갔다가 지옥을 경험했다’고 얘기해요. 교회 나온 사람들에게 아주 엄격한 규범을 적용했어요. 여자들은 바지를 입어서는 안 된다. 귀걸이를 해서는 안 된다. 루즈를 발라서는 안 된다. 주일날 신문을 읽어서는 안 된다. 운동해서는 안 된다. 이런 많은 규범들을 만들어 놓고 서로에게 점수를 매기고 판단을 했던 거예요. 그게 바로 율법주의예요. 율법은 우리의 신앙의 건강을 위한 것이지만 놓쳐는 안 될 게 있어요. 그것은 사랑을 담아내기 위한 그릇일 뿐이에요. 사랑이 비어있다면 그 율법은 다른 사람을 죽이는 살인무기가 되는 거예요.

   뒷말 하면 안돼요. 성경적으로 말하면 그건 아주 악한 거예요. 성경의 비밀을 모르는 거예요.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강도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사랑이 바로 나에게 부어진 거예요. 그리고 이제 저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거예요. 우리의 신앙은 오직 그것 뿐이에요. 그 사랑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도와주고 기다려주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 그게 성령의 역사예요. 그것을 넘어선 사건은 다 자기 고집이에요. 내가 교회에서 이만큼 일한다 라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신앙이 지금 빗나가고 있다는 싸인이에요. 우리의 신앙은 스스로가 잘 알 수 있어요. 자신에게 솔직하다면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드러낼 수 없어요.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우리들이기에 오직 시시때때로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십자가의 사랑에 주목하는 것, 그것 외에는 우리가 할 일이 없어요.

   예배 속에서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얻지 못하고 십자가 사건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발견하지 못한다면 자칫 내가 일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부딪히고 판단하고 다른 사람을 억누르는 방편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오늘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서 말합니다.‘어머니, 그 옆에 있는 요한이 당신의 아들입니다.’요한에게 말합니다.‘이제 네가 이 분을 어머니로 모셔라.’그리고‘타오르는 이 갈증을 이기지 못해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또 왜 이런 걸 기록했을까요? 교회가 성장하면서 소위 신령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당시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이원론적인 주장을 가지고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영지주의라는 거예요. 영지靈智라는 말은 영적 지식이라는 말이에요. 원래 헬라철학은‘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고 눈에 보이는 육체와 만물들은 다 변하는 것이고 없어질 것이고 썩을 것이다’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진리라고 하는 것은 완전하고 순수한 것을 붙드는 것이다. 이 눈에 보이는 것은 무가치한 것이다.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을 더 깨끗하게 만나기 위해서 우리 영을 억누르고 있는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영을 자유케 하기 위해서는 육체에 고통을 주어야 된다 라고 생각했어요. 금식하고 고행을 하고 도를 닦고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의 영이 더 순수해 진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고 선언해요. 인간의 몸을 입고 모든 것을 몸소 겪으셨다고 말해요. 그 몸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심으로써 구원을 이루셨다고 선언해요. 그것을 강조하려고 목마름의 고통과 어머니 마리아와의 마지막 대화를 기록한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을 결혼잔치에 비유하셨어요. 먹고 마시는 것을 정죄하지 않으셨어요. 아주 중요한 인생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셨어요.‘떡만 먹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도 받아라’그랬어요. 어느 하나를 포기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두 가지를 다 같이 이야기하셨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돼요.

   교회에는 신앙을 위한 여러 가지 훈련이 있습니다. 훈련에는 유익이 있어요. 그러나 훈련만능주의가 되면 안돼요. 훈련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일상을 붙들어 주기 위한 하나의 버팀목일 뿐이에요. 마치 다리가 부러진 사람이 수술하고 치료를 받았으니까 목발을 집고 다니는 거예요. 다리가 다 나았는데도 계속 목발을 집고 다니려고 하면 우습잖아요. 다 나았으면 목발은 내던지고 고침 받은 다리를 가지고 걷고 뛰고 날고 해야 되는 거예요. 일상이 중요한 거예요.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는 눈이 필요해요. 자칫 신앙을 이원화시켜서 교회 안에서 하는 일은 거룩한 것이고 우리 집에서 하는 일은 보잘것없는 일이다. 이건 잘못된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받은바 은혜를 가지고 우리의 가정, 우리의 일터,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거예요. 지금 서있는 자리를 소중하게 여겨야 돼요. 정말 이 자리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더 깊이 파고 들어가야 돼요.

   여러분, 왕십리의 유래를 아세요? 고려왕조는 개성이 중심이잖아요. 조선왕조를 건국한‘이성계’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서 수도를 옮기려 했어요. 그래서 무학대사에게 한번 찾아보라고 부탁을 한 거예요. 무학대사가 저 계룡산에 갔다가 과천을 거쳐 강남으로 해서 한강을 건너서 뚝섬을 거쳐 와보니까 평지가 쫙 펼쳐져 있는 거예요.‘야, 여기 들판이 있고 강이 있으니 여기야말로 명당이구나’하는데, 옆에 농사를 짓는 한 노인이 소를 몰면서“이 놈의 소가 왜 이렇게 말을 못 알아들어? 무학 같으니라구. 똑바로 가지 않고 어디로 가는 거야.”무학대사가 깜짝 놀라서‘이 사람이 뭔가 도통한 사람이구나’해서“어르신, 제가 바로 무학입니다. 그 무슨 말씀입니까?”그랬더니 한마디 툭 던지고 가는 거예요.“거기 그러고 있지 말고 서북쪽으로 십 리만 더 가시오.”그래서 그 말을 듣고 십 리를 더 갔더니 거기가 바로 오늘 경복궁이 자리한 곳이죠. 뒤로는 삼각산이 있고 인왕산이 있고 낙산이 있고 앞에 남산이 있고 한강이 펼쳐져 있고 새로운 도읍의 중심이 되고 든든한 나라의 기초가 되었다라고 하는 이야기죠. 그래서 그 자리가 왕십리往十里가 된 거예요. 십 리를 더 가라는 거죠.

   여러분, 우리의 일상을 조금 더 들여다보세요.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요. 전쟁과 재난과 기근과 피 흘림에 가득 찬 역사예요. 그런데 이렇게 자유롭게 시간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은 거예요.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어요.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셔요.‘다 이루었다.’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했어요. 수 없는 실패 끝에 발명했어요. 내가 또 발명하려 할 필요가 없어요. 그것을 받아들여서 스위치만 켜면 되는 거예요.‘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셨다’이거죠.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그만 만화에 빠졌어요. 그 바람에 초등학교 4학년까지 만화에 인생을 쏟아 부었더니 성적이 완전히 바닥을 쳤어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도저히 안 되겠다.’전학을 시켰어요. 학교를 옮기면서 부러 호랑이 선생님을 찾았어요. 그 선생님에게“이 애를 부탁합니다.”제가 호랑이 선생님 밑에서 2년을 배웠는데 제 평생 그때같이 많이 맞은 적이 없어요.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그러나 생각해 보면 너무 감사해요. 그때 제가 인생의 길을 바로 잡은 거예요. 중학교도 선생님이“너는 예수 믿는 애니까 미션학교를 가라.”그렇게 결정해준 학교는 저에게 아름다운 경험을 듬뿍 맛보는 그런 기회가 됐어요. 애들이 선생님만 잘 만나도 문제는 해결돼요.

   우리 주님이‘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면서 한 가지 얘기하시는 거예요.‘내가 십자가에 죽은 것 같이 너도 너의 옛 사람, 옛 경험에 대하여 죽고 내가 부활한 것 같이 너도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라.’그러면서 나를 도와주시는 선생님으로 성령을 보내주신 것이죠. 성경은 인생 교과서 같은 것이고, 성령은 그것을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이신 거죠. 완벽한 준비가 이루어져 있는 거죠. 그러므로 마음을 활짝 열고 이 놀라운 주님의 구원을 누리면서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를 보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이야기잖아요. 드디어 연합군이 승리했어요. 그러나 그 승리가 있기까지 많은 병사들이 죽었어요. 그들은 먼저 죽었지만 그들의 피 흘림이 있으므로 승리가 있었어요. 저는 간혹 그런 생각을 해요. 마지막 고지에 승리의 깃발을 꽂는 것도 감격이지만 오늘 먼저 총을 맞고 여기서 쓰러져 죽는다 할지라도 내 삶과 고난 속에 영원한 승리가 함께 담겨져 있다는 것을 멀리 내다보면서 가야 하리라. 오늘 하나님이‘너는 거기까지만 가라’하고 중간에 부르셔도‘알았습니다’하고 내려놓고 갈수 있는 믿음, 어찌 우리가 인생에서 화려한 영광만을 맛보겠어요.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마세요. 하나님께 맡기세요. 순간순간 하루하루를 주님이 주시는 음성을 들으며 살아가는 사람, 인생을 몸부림치면서 해결해야 될 문제로만 보지 마세요. 하나님의 은총으로 보세요. 은총의 신비가 우리의 일상 속에 가득히 담겨 있는 것을 순간순간 확인하세요. 그게 바로‘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 속에 담겨있는 놀라운 생명이요, 선물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