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에는 목적(촛점)이 명확해야 한다
예배는 종교 의식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감이 있는 시간이다.
경배와 찬양이 있는 시간이다. 목적이 있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주님은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기 원하신다.
예배를 통해서 치유하기 원하시고, 위로하기 원하시고, 역사하기 원하신다.
그분의 가장 큰 기쁨이시자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통로가 예배인 것이다.
우리의 욕심, 우리의 선택권, 이기심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 예배인 것이다. 예배는 절대 우리의 요구를, 우리의 말을 하나님께 전하는 시간이 아니다. 하나님의 요구를, 하나님의 목적을, 하나님의 마음을 듣는 시간인 것이다.
이 예배에는 목적(촛점)이 명확히 있어야 한다! 예배의 촛점은 예수님이다.
예배의 목적은 그를 높이고 찬양하는 데 있다. 예배의 목적, 원함이 예수님께 있고, 성령께 있고,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예배의 때에는 간절함의 시간이다.
만남의 시간이다.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원하고, 그분의 영광에 대한 열망이 있는 시간이다. 이러한 열망 속에 성령과의 만남이 있는 시간이 예배인 것이다. 주님과의 영적 교감이 없는 예배는 죽은 예배이다. 성령을 느낄 수 없고,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예배는 빛을 잃은 예배인 것이다.
예배는 속죄, 회개의 시간이다.
우리는 예배 속에 임재하시는 완전하신 예수님의 성품, 그 하나님과, 성령의 성품 앞에서..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는 시간이다. 그분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워지고, 느끼지 못하고 꽁꽁 숨겨두었던 우리의 죄가 밝히 보이게 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회개함 없이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할 부끄러움을 느끼는 때이다. 그런 회개함 속에 그리스도의 피를 바라보게 되고, 그 피가 우리를 용서하심을 보는 시간이 예배이다. 그 보혈의 구원과, 그 은혜, 그 사랑을 체험하는 시간이 예배이다.
예배는 기쁨의 시간이다
하나님과의 대화, 교감속에서 그 놀라운 사랑때문에 기뻐뛰게 되는 시간이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맘이 설레이게 되는 놀라운 기쁨의 시간이다. 그 큰 사랑, 그 놀라운 은혜를 생각하면 어쩔줄 모르게 되는 시간이 예배의 시간인 것이다.
예배는 순복, 드림, 헌신의 시간이다.
하나님은 예배가운데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 가운데 우리의 결정권, 우리의 지성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순종하는 것이다.
"하라"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순복하고 순종하는 시간인 것이다. 나의 귀중한 것을 드리는 시간이 예배의 시간이다. 나의 의지를 주님께 내려놓는 시간이 예배의 시간이다. 내게 너무나도 귀한 것, 내게 소중한 것, 그것을 기쁨으로 아버지께 드리는 시간이 예배의 시간이다. 가끔 예물, 이 드림의 시간이 소외될 때도, 잘못 인식될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소중한 것들을 기쁨으로 드리는 이 시간도 예배의 소중하고 귀한 부분이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우리 주 예수님을 찬양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지으심, 그 신실하심 공의로우심, 그 자비하심을 찬양하는 시간이다.
예수님의 죽음에서 승리하심, 대적들을 멸하시고 우상들을 파하심, 그 보혈의 사랑을 찬양하는 시간이다. 우리는 찬양하기 위해 지음 받았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장 큰 축복이고 의무인 예배도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를 높이는데, 그를 찬양하는데, 그의 승리를 선포하고, 그의 성품을 찬양할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도 그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예배의 목적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빠진 예배는 껍데기뿐인 예배인것이다.
자신의 만족과 자기 안도를 위해, 습관처럼 예배를 보고 있지는 않은가?/자료ⓒ창골산 봉서방
믿음이 법칙들 |
1.바라봄의 법칙을 따라 사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기 전에 먼저 바라보게 하십니다. 원하는 그것을 바라보십시오.
당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그것을 바라보십시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 13:14~15).
바라보는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2. 언어의 법칙을 따라 사십시오.
믿음으로 먼저 고백함으로써 환경을 초월하는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말에는 신비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말의 노예가 되지 말고, 당신의 말씀을 따라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소원을 고백하십시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11).
하늘 언어를 사용하십시오.
하늘언어 속에 풀어져 있는 놀라운 능력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역사 하실 것입니다.
3.강청하는 기도의 법칙을 따라 사십시오.
강렬한 소원, 강렬한 감정. 강렬한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며 우리로 그 소원에 집중하게 합니다.
집중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 환경도 사람도 바꿀 수 있습니다. 강청하는 자에게는 사람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7).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창 25:21).
응답 될때까지 강청하십시오.
기도는 응답입니다. 이 기도의 법칙은 과거나 현재에도 변함없이 사용되어져 왔습니다.
4.행동하는 법칙을 따라 사십시오.
곡식의 씨앗은 파종의 시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뿌려야 영적인 씨앗은 지금 뿌릴 때입니다. 적절한 시기는 지금입니다.
기도의 씨를 뿌릴 때입니다. 씨앗만 가지고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심어야 합니다. 심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구체적인 계획과 전략을 세운 후에 구체적으로 행동하십시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창 26:12).
요단강에 발을 잠길 때에 물이 갈라졌습니다. 움직여야 합니다. 행동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역사 하십니다./자료ⓒ창골산 봉서방
죄 |
죄는 영혼과 육체에 무서운 독이 된다.
죄는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막2:1-12)
육신(flesh)은 우리의 생명을 죄의 세력 밑으로 끌어들이는 경향이다. 타락된 인간 본성이다. 모든 고통의 원인이다.
영과 성령을 대적한다.(죄를 범함으로, 선을 행함으로)
육신은 율법을 따라서 살려고 한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생명과 가치이다. 육신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노력한다.
악은 영이 추구하는 방향이 문제이지, 본성 자체의 구조의 문제는 아니다.
죄는 무엇이든지 믿음에 의하지 않은 것이다.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롬14:23)이 죄다.
죄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는 인격(마귀, 저주받을 원수)이다. 사단의 뜻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린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게 만든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Separation from God) : 하나님과의 단절, 영적 죽음, 영혼의 파멸, 비참
죄는 언제나 혼란과 불화와 불행과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한다.
교만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다. 자신을 높이는 것, 자고하는 것이다. 지적인 교만
교만은 자신의 지위, 권세, 부귀, 명예, 건강, 행복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교만은 모든 죄의 근본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든다. 패망의 선봉(잠16:18)이다.
교만은 자신의 염려를 홀로 해결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영적인 교만은 자기 자신을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 영적 상태가 남보다 많이 진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해답이 있다고 주장한다. 성결의 교만
재물은 구원을 가로막는 사단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죄는 돈을 사랑하는 것, 돈을 신뢰하는 것이다.
부를 추구하는 것은 죄다. 부를 향한 끊임없고 쉼 없는 추구는 하나님께 입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잊어버리게 만든다.
돈이 악한 것이 아니고,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한 것이다.
물질에 집착하는 것, 돈을 섬기는 우상숭배, 배금주의, 물질주의, 물질에 대한 탐욕, 부하게 되기를 원하는 것, 돈에 대한 예속, 돈을 벌기 위해 노동하는 것
돈이면 모든 것이 다 된다. 더 많이 가질수록 더 성공한 것이다 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마6:19-24, 말3:10, 창28:22, 히7:4, 왕상 18:21, 출 32:1-4,28)
죄는 즐길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재미가 있다.
세상의 즐거움, 향락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쾌락주의(Hedonism)는 자기 기뻐하는 대로 사는 것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며 더 깊은 허무에 빠지게 한다.
허무주의(Nihilism)는 진리에 대한 모든 객관적 근거를 부정한다. 신은 죽었고 인간도 죽었고 의미도 죽었다고 말한다.
의심은 하나님보다 마귀를 믿는 행위이다.
배교(배도)는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붙드는 것이다.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일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영적 간음(음행)이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방황하는 것,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반역, 거역하는 것,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이다.
염려, 근심, 걱정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다. 불신앙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를 믿는 것(벧전5:7)이다.
불안은 죄악된 삶의 주요한 특징(사57:20)이다.(공포)
자기 중심주의 : 자기 추구, 자기 실현
두려움은 마귀의 역사이다. 모든 실패와 모든 불행의 궁극적이고 실제적인 원인이다.
조소, 비웃음, 조롱에 대한 두려움, 사람에 대한 두려움, 세상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고난, 고통, 핍박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결과에 대한 두려움, 변화, 도전에 대한 두려움, 원망, 불평은 자기 연민이다.
자기연민과 자기 중심성은 성령님을 슬프시게 한다. 자기 연민의 치료법은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불평하며 감사하지 않는 것이 죄다. 감사의 결핍은 성령의 일을 소멸시킨다.
죄는 스스로가 판단의 기준이요 판단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이기주의(이기심)는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을 유익만을 추구한다. 자기 일에만 몰두한다.
지나친 개인주의, 가족 이기주의, 자기애는 자기를 사랑하는 모든 형태의 생각, 말, 행동이다.
자기 주장은 나 자신을 길을 고집하는 것(독선, 오만, 거만)이다.
자기 기만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다. 알면서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다. 입술로만 신앙을 고백한다.
부패는 상호 돕는 작용을 멈추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의 결핍은 무관심, 냉담함, 부주의, 상대방의 불행에 대해 은근히 만족하는 정신 자세이다.
명예에 대한 탐욕은 권력, 명성을 쫓는 것이다.
게으름은 모든 부패와 무능력의 원천(안일, 편안, 나태, 안락)이다.
자기 신뢰(자기 의존)는 육신을 신뢰하는 것이다. 자기부정이 없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자기 노력(자기 공로)으로 자기 의를 추구한다. 율법주의, 공로 의식
외식, 가식, 위선, 허영은 가장된 거룩함이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거짓 겸손이다.
편안하고 배부르게 되자 종교화되고 형식화되었다.
형식주의(Formalism)는 간절함이 없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다. 냉랭하고 생명력이 없다.
따분하다. 성령의 능력과 생명과 자유의 가장 큰 적이다. 형식적인 기도, 형식적인 예배, 형식적인 봉사
세속주의(Secularism)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다. 세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사고가 세상의 지성과 견해에 지배당하는 상태이다. 항상 이익(돈)에 관심이 있다.(딤전 9:7-9, 6:10-12)
세속화된 사고방식에서는 신적인 개입이 불가능하다. 경험적인 방법과 이성적인 사고에 의해 진리에 도달하려고 한다.
이단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가 보다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고난, 희생 그 자체에 구원적이고 속죄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이단의 정신은 진리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이고, 배교는 진리에서 무엇을 감하는 것이다.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과시한다.
육신이 지배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의 자의식은 증가된다. 자의식이 일어나면 영은 지배권을 상실한다.
자기 충족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욕구이다.
불순종은 사망과 파멸로 이끈다.
불의, 부정, 더러운 말, 불순한 생각
술취함(알코올 중독)은 불경건, 방종, 방탕이다.
살인, 증오, 미워하는 것, 용서하지 않는 것(마6:14-15), 분노, 혈기
용서하지 않는 정신에 악령이 역사한다.(복수심)
자살은 사단의 역사이다. 자기 파괴적인 도피이다.
간음, 음란, 호색, 색욕, 포르노, 부도덕한 행위, 도덕적 부패
기도하지 않는 것(삼상12:23)이 죄다. 기도 없이 설교하는 것, 기도를 쉬는 것이 죄다.
실망, 낙심, 절망, 자포자기
무기력(lethargy) : 혼수 상태, 활발치 못함
탐식, 폭식하는 것은 죄다.
탐심은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이다. 악의 근원이다.
자만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낙심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다.
미신의 기초는 두려움, 기복이다. 미신, 점, 부적, 주문, 기복주의(샤머니즘)
지체, 연기는 즉각적으로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우상 숭배하면 모든 생활에 죄와 사망의 열매를 맺게 된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대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치를 대신하는 것이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어떤 것이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다.(직업, 가족, 책, 친구, 여가시간, 휴가 기간, TV프로그램, 스포
츠, 야망, 부, 재물, 성공, 지위, 명성, 인기, 권력, 일, 취미, 음악, 영화, 인터넷, 운동, 남편, 아내, 자녀)
두 마음을 품는 것은 부분적인 헌신, 얄팍한 헌신, 나뉘어진 마음이다.
강퍅함은 회개하지 않는 것이다. 마음의 굳어짐(완악함, 패역함)이다. 냉랭하고 사랑이 없는 상태이다. 무감각
어두움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이다. 곤고함, 고통
죄의식(죄책감)은 우리를 억압하고, 우울하게 하고,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자기 비하, 열등감, 침체
후회는 세상적인 근심이다.
자만심은 자아가 우주의 중심, 우월감
권태, 허무, 공허, 무의미
남을 판단하는 것(경쟁, 비교)은 죄다. 비판, 정죄, 비난 마7:1-2, 눅6:37, 롬2:1
다툼, 불화, 분열, 분쟁, 분리, 당 짓는 것
참소는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것이다.
폭력(잔인함)은 본질적으로 파괴적이다.
집회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죄다.
죄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짓밟는 것이다. 손해를 입힘으로 괴로움을 끼치는 일이다.
책임 회피(무책임)는 변명하는 것이다.
명목상의 신앙(거짓 믿음)은 회개도 순종도 없다. 형식적인 신앙 생활을 한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은 죄다.
그리스도의 피를 밟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성령 훼방죄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행동이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엡4:30), 성령을 거스리는 것(행7:51), 성령을 소멸시키는 것(살전5:19)
하나님의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것
수동적인 태도는 성령을 소멸하고 저항하는 것이다.
수동적, 피동적, 소극적, 부정적, 비관적, 염세적, 냉소적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은 성과 속을 분리한다. 하나님의 일과 내 일을 구분한다. 교회생활과 실제생활을 분리한다.
평신도와 성직자라는 개념은 로마 카톨릭 전통이 만들어 낸 것이다.
모든 비성경적인 철학과 종교는 근본적으로 이원론적이다.
주지주의, 지식주의, 객관주의, 신앙주의, 지성주의 : 머리로만 믿는 믿음, 열기 없는 빛, 행동이 결여, 감정이 없는 진리, 생기없는 전통
마귀는 지적으로만 진리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주정주의, 광신주의, 열정주의, 감정주의 : 열광적인 이단, 빛 없는 열기, 육신적인 흥분, 지나친 열광, 나르시시즘(자기 도취), 혼란, 혼돈, 무질서, 직접적으로 감정을 자극하려는 시도들, 진리가 없는 감정, 열광만을 자극
죄는 교활하게 감정에만 역사하여 이지와 생각을 약화시킨다.
활동주의, 행동주의 :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계속 의뢰하는 데서 나오지 아니하는 활동, 자신감이 넘쳐서 바쁘게 설치는 것, 분주함, 열정 없음, 지식이 없는 열심(롬10:2), 생각이 없이 하는 행동
정숙주의, 정적주의: 조용한 수동주의, 미지근함, 성령의 강권함이 없이는 영적인 어느 것도 시도해서는 안 된다.(모라비아 교도)
열정이 없는 고요함은 영적 무감각(Apathy), 무책임, 무관심에 이르게 한다.
경건주의는 기독교를 매우 편협한 영적 생활 영역으로 폐쇄해 버린다. 결국 교만과 율법주의에 이르게 한다.
합리주의는 하나님의 계시를 부인한다. 초자연적인 것을 반대한다. 이성이 진리의 원천이다.
신비주의는 느낌이나 직관 또는 다른 내적인 감각들을 통해 진리를 추구한다. 성경 이외의 계시를 추구한다. 성령의 역사를 지성과는 상반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반지성주의, 주관주의, 감정주의, 체험주의
영지주의는 자신을 열어 직접적인 직관적 계시를 받으라고 주장한다. 육신적 성향(flesh)을 육체(body)와 동일시한다.
불교는 육신적 성향을 정체성과 동일시한다. 잘못된 인식으로 인하여 고통이 발생한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금욕주의는 귀신의 가르침이다. 혼인과 식물을 금한다. 성과 음식을 버리려고 하는 시도이다.
혼합주의는 서로 다른 종교와 철학들로부터 모든 사상들을 따다 한데 섞는 것(통합주의)이다. 세상과 타협, 거짓 영의 승리, 하나님도 섬기며 우상도 섬기는 것
인본주의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부인한다. 성화 과정에서의 성령사역을 경시한다.
실용주의는 초점이 하나님의 영광(하나님 중심)에서부터 인간의 유익(인간 중심)으로 옮겨진 것이다. 의미나 가치가 실용적인 결과에 따라 결정된다.
실존주의는 주관적(마음이 진리의 원천)이다. 반지성적(이성을 거부), 비합리적(체험을 중시)
신정통주의는 실존주의적 기독교이다. 진리의 객관성을 부인한다.(의미가 중요) 성경 이상의 계시를 추구한다.
극단적 칼빈주의는 숙명론적인 신앙이다.
사회주의는 불공정한 사회구조와 부의 잘못된 분배가 이 세상의 악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해결은 사회구조의 변혁이다.
결정론에서는 인간의 의지 행위가 무엇인가의 원인에 의하여 규정되고 제한되고 만다.
이신론은 기적이나 계시를 부정하는 계몽주의 시대의 신관이다.
계몽주의는 모든 초자연적 종교에 반대한다. 인간 이성의 완전한 충족성을 강조한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앙을 와해시켰다.
상대주의는 절대적 진리는 없고 모든 진리는 각 상황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주장한다.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부인한다.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다.
카톨릭에서는 믿음 위에 선행까지 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선행이 칭의의 근거)
반율법주의는 선행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나 율법은 필요없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율법 아래도 있지 않다고 말한다.(방종)
율법주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일을 해야 한다는 묶임(속박)이다. 도덕과 율법의 준수를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구원을 얻을 방편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행위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려고 한다. 사람이 만든 규칙이나 종교의식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여 어떤 이를 정죄하는 것이다. 은혜와 진리를 알지 못한다. 도덕주의, 행위 구원론(이슬람교, 유대교, 유교)
자유주의는 기존의 종교적, 사회적 권위를 일체 거부하고 이성과 문화가 인간을 진보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 성경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한다.
생활 가운데 죄에 대한 애통이 없다면 그의 신앙고백은 거짓이다.
심리학, 최면술, 심리 요법들
성공 복음 : 성공 지향적 철학, 세상적인 야망
자아 존중의 복음 : 자아 성취, 자기 실현, 자신에 대해 좋게 생각하는 것
자아를 중심으로 하는 복음은 인간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개인적인 성취를 추구하며, 잠재력을 최대한 개발하는 것을 강조한다. 십자가가 없다.
실용주의적 복음주의는 자기개발 프로그램, 건강, 부, 행복, 성공, 능력, 즐기는 것, 행복하게 사는 것을 강조한다.
원한, 악독, 쓴뿌리는 원수를 맺는 것(히12:15)이다. 원한을 품는 것은 영과 혼과 몸을 파괴시킨다.
죄는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무감각한 상태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사망을 잉태한다.(롬6:23, 히9:27)
죄는 성령의 사역을 방해하고 부흥을 막는다.(시66:18)
죄는 우리를 영적으로 무감각하게 만든다.
죄는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자신의 재능과 경험을 의지하게 한다.
사람이 죄 가운데 살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 없게 된다.
죄는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고 살아가는데 익숙해지게 만든다.
죄는 예배 자체를 하나의 일상적인 프로그램으로 여기며 사역하게 만든다.
죄는 법이며, 사람의 의지로 극복할 수 없다.
성령의 법이 죄의 법을 이기고 만다.(롬 8:2)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전적으로 살지 못하는 것이다.
피곤은 하나님께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징조이다. 피로는 영적인 열정의 상실이다.
삶 속에서 고백하지 않은 죄와 마음속에 숨겨진 죄는 사탄의 드나드는 통로가 된다.
죄의 결과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의 기쁨을 상실된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거역과 불순종이다. 우리 속에서 냉담과 무관심을 일으킨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 아래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죄를 이기는 방법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과 우리의 몸이 그의 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죄를 알게 되는 것은 은혜와 용서의 선포에서부터이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나 자신의 길을 고집하는 것이다.(사53:6)
생존 욕구는 자유와 기쁨을 약화시킨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을 방해한다.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빼앗기게 된다.
죄는 자신의 삶을 제멋대로 하려는 것이다.
죄는 다른 사람의 삶을 지배하려드는 것이다.
죄는 인간의 나쁜 행동을 가리키는 도덕 용어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거부와 신인양 행세하는 것을 가리키는 영성 용어이다.
죄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지나치게 슬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용서의 능력은 당신의 죄의 권세보다 크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치 않고 그분을 경외하지 않는 것이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로부터 단절시켜 버린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인 민감성까지 둔화시킨다.
자신의 죄성을 철저하게 느낄 때 비로소 진정으로 겸손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를 중단할 수 있다. /자료ⓒ창골산 봉서방
1) 세월을 아끼라
고속버스도 휴게소에서 쉰다. 날으는 비행기도 쉰다. 흐르는 물도 댐이 쉬도록 한다. 그러나 세월은 멈추지 아니한다. 세월은 아끼는 만큼 우리에게 보답을 해준다. 돈을 아끼지 아니하는 사람의 주머니가 비는 것처럼 세월을 아끼지 아니한 사람의 인생도 비게 된다.
2)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어떤 기계든지 제동장치가 중요하다. 제동장치에 문제가 생기면 대형사고가 일어난다. 인간이라는 기계에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재해는 육체의 정욕이라는 바이러스이다.
3) 드리기에 힘쓰라
드리는 것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드려서도 안되고 좋은 것이라도 성의 없이 드려서도 안된다. 드리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4) 바라보라
내일을 바라보고 살면 오늘을 참을 수가 있다. 군인이 제대 날을 기다림같이, 부모는 자식을 바라보며 힘든 일도 참는다. 진정으로 바라보아야 할 분은 예수님이시다.
5) 맡겨 버려라
사람은 대체로 문제를 만나면 그 문제와 정면대결을 한다. 그러나 이리 깨지고 저리 깨진다. 왜냐하면 문제는 언제나 나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문제가 나보다 약하다면 문제가 아니다. 시련을 만나면 시련과 싸우고 질병을 만나면 질병과 싸우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 버려라
6) 마음에 품으라
닭이 계란을 품으면 병아리가 태어나고 옥토가 씨앗을 품으면 새싹이 돋는다. 구름이 비를 품고 있으면 비가 내리게 된다. 어떤 것이든 품고 있는 것들이 열매로 나타나게 된다. 욕심을 품으면 끌어 모으기만 바쁘다. 미움을 품으면 눈빛으로 나타나다가 입으로 나타나게 되고 끝내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사랑을 품으면 사랑이 나오고 관용을 품으면 이해와 용서가 나타난다.
7) 믿음의 자세를 바꾸라
환경을 바꾸려 말고 믿음의 자세를 바꾸어야 한다. 물맷돌 다섯 개로 골리앗을 죽이겠다는 다윗처럼 말이다. 제일 빠르고 쉬운 인생길은 순종인데 반해 타협은 제일 먼길이다.
8) 붙들려 살아야 한다.
성령 충만함으로 살아야 무기력하지 않다. 환경, 토양이 문제가 아니다. 한 사람만 하나님께 붙들리면 가정, 교회, 직장, 나라가 산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라. 삼갈의 막대기, 삼손의 나귀턱뼈, 예수의 제자들, 우리가 누구냐보다 누구에게 붙들려 사느냐가 더중요하다./자료ⓒ창골산 봉서방
회개 |
회개는 깨달은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것에서 돌아서겠다고 결단하는 것이다.
회개는 죄로부터 돌이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회개는 사람의 일이 아니다.
회개는 십자가의 길을 향해 출발하는 것이다.
회개는 궁극적으로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다.
회개는 마음을 항상 하나님께 두는 것이다.
회개는 본질적으로 결단이며, 성령의 역사에 대한 반응이다.
회개는 자신이 교만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회개는 참되고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깊고 내적인 변환이다.
회개는 의식의 변화와 의지적 반응이 합쳐진 내적 혁명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뜻과의 조화로 되돌아가는 길이다.
회개는 하나님이 세상을 보시는 대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견해를 인정하는 것이다.
회개는 악을 싫어하고 악을 버리는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의한 것이다.
회개는 전인격적인 변화이다. 생각, 감정, 의지의 변화이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metanoia)이다.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회개는 믿음의 행위이다. 믿음의 열매이다.
회개는 영적 건강의 열쇠이다.
회개는 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회개는 죄로 인해 상한 그리고 죄로부터 벗어난 마음이다.
회개는 죄인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유일한 조건, 자격이다.
회개는 죄에 대한 단순한 뉘우침이 아니라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회개가 이루어진다.
진정한 회개에는 배상을 요구한다. 회개로 인한 열매가 있어야 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참된 회개의 증거는 행위의 변화이다.(마3:8)
회개는 교회를 세우는 기초이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회개하는 것이 고통을 없애는 첫걸음이 된다. 회개하면 천국이 임하게 된다.
회개의 본질은 현생의 질과 미래의 운명을 결정하는 결단이다.
회개는 행동의 전체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회개는 저주를 깨뜨리고 되돌려 놓는 방법이다.
죄의식과 양심이 회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지 않는다.
사랑과 용납이 다시 양심을 눈뜨게 하고 회개를 일으키는 강력한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엄격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케 한다.
정죄와 심판을 피하는 길은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통치)에 들어갈 수 없다.
회개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막1:15)
회개는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회개의 눈물은 마음의 창문을 닦아준다.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죄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회개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던 인간이 그의 인생 전부를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이다. 전면적인 전환이다.
회개는 신생활의 상징으로써 죄인된 과거를 청산하는 것이다.
회개는 그 결과를 초래한 죄를 정죄하는 것이다. 후회는 죄의 결과를 슬퍼하는 것이다.
회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구하는 것이다.
모든 회개의 출발은 돈지갑 회개이다.
지속적인 회개는 이 세상에 집착하는 것에서 돌아서는 것,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는 것을 깨뜨리는 것이다. /자료ⓒ창골산 봉서방
순종 |
순종은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순종은 포기가 있지 않는 한 이루어질 수 없다.
자기의 뜻을 꺾기까지는 아무도 하나님을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순종에는 희생이 따른다.
순종의 대가 : 고난, 희생,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
하나님을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순종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순종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죽어야 순종할 수 있다.
순종은 믿음이 참되다는 증거이다. 순종함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
순종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없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순종은 사랑에서 나온다. 진실된 사랑은 순종에 의하여 증명된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진정한 사랑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척도이다.
순종은 하니님과의 인격적 관계 안에 있는 사랑의 표현이다.
순종은 체험적인 믿음과 사랑이 자연적으로 흘러 넘치는 것이다.
순종은 우리의 자발적인 행동이다. 능동적으로 성령께 순종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 능동적이 되면서 순종하게 된다.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발적인 반응이다.
철저한 순종이어야 한다. 절대적 순종이어야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미루거나 연기해서는 안 된다. 미루거나 연기하는 일은 성령을 슬프시게 한다.
무조건적인 순종이어야 한다. 조건부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하나님이 먼저 이렇게 해주시면 내가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그와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과 좋은 친교가 이루어진다.
순종이 없이는 하나님과의 교제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법을 터득하게 되면 우리의 삶이 순종하는 삶이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듣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순종하는 행동을 포함하는 것이다.
순종하면 성령 충만함을 입게 된다. 순종은 성령의 충만과 성령의 역사의 전제 조건이다.
순종이 있어야 성령의 역사가 벌어진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
순종은 불순종과 그 결과에 대한 치료책이다.
불순종은 자아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다. 인류가 멸망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자기 자신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순종은 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다.
순종은 예배의 기초적인 전제 조건이다.
순종이 곧 예배이며,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없이는 진정으로 그분을 예배할 수 없다.
순종은 생명을 살려내는 원리이다.
순종은 아름다운 어리석음이다. 어리석게 보이지만 아름다운 것이다. 내 마음과 이해에 맞지 않아도 따르는 것이다.
순종은 의의 본질이다. 의롭게 되었다는 능동적인 표현이다.
순종은 우리의 영혼에 힘과 기쁨을 가져다준다.
순종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다.
순종은 참된 거룩의 출발점이다.
순종은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축복의 원칙이다.
순종은 구원에 대한 감사와 겸손의 표현이다.
순종은 우리를 생명과 번영으로 인도한다.
순종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순종은 영혼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증거이다.
순종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변치 않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순종은 내가 하나님 뜻 앞에서 완전히 굴복하는 것이다.
순종은 우리 눈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만 가능하다.
순종은 쉽고 즐거운 것이다. 어렵고 힘든 것이 아니다.
순종은 가장 완전한 행복이다.
순종은 구원이 말하는 모든 것이다.
순종은 참된 섬김의 본질이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된다.
순종은 확신을 낳는다.
순종은 부정적인 두려움이라기보다 사랑으로 영감되어서 마음의 가장 큰 바람이 된 것이다.
순종은 실제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경험함으로써만 배울 수 있다.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 : 게으름, 쾌락, 탐욕, 정욕, 소유욕
순종은 계시에 앞선다.
성령의 징계는 순종이 있을 때까지 계속된다. 고통을 통해 순종을 배우게 된다.
위선자는 순종하는 삶이 없다. 입술로만 신앙을 고백한다.(lip service)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은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순종의 능력은 살아있는 인격적 임재의 힘있는 영향력에서 나온다.
순종해서 받는 은혜 : 부어지는 은혜, 승리하는 은혜
순종하는 자에게는 안식이 있다. 진정한 쉼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권위는 순종에 엄격하게 비례한다.
순종하는 방법 : 자원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순종의 대상 : 하나님, 영적 지도자, 부모, 상전과 고용주, 아내가 남편에게
문제는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누구에게 순종하느냐 하는 것이다.
순종하는 것만이 가장 온전한 지혜이다.
순종이 없이는 하나님께 대한 헌신도 없다.
순종은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을 행하는 것이다.
아래에서 듣는 마음 자세이다.
공경이 없는 순종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순종하고자 하는 것은 행위적인 목표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풍성함이 없이는 순종할 수 없다. 그런데 순종함으로서 우리는 풍성함에 도달하게 된다.
순종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훈련의 결과이다.
순종은 묘하게도 내적 변화로 이어진다. 그 다음에 능력이 온다. /자료ⓒ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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