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네가 본 것을 기록하라[졸리지않는설교,인생의목적발견=성공]/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 10:02

네가 본 것을 기록하라 (요한계시록 1:9-20)  

2009 3 15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지난 주간에 양용은 선수가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미국 PGA골프투어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어보니 인생 역전의 드라마예요. 제주도 사람이잖아요. 별명이‘제주야생마’라는 겁니다. 골프 연습장 출신이래요. 가난해서 낮에 골프장에서 일하고 밤에 맹연습을 해서 챔피언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입니다. 얼마나 고되고 험하게 훈련하고 고생했을까 하는 것이 눈에 훤합니다. 그런데 그가“미국 무대에 진출하고 보니 상황이 근본적으로 다르더라. 체력과 많은 연습만 가지고는 넘어설 수 없는 자기 한계를 느꼈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해 8월에 본격적으로 PGA 선수출신 코치를 모셔서 이제까지의 스윙을 완전히 개조했다는 겁니다. 서른일곱 늦은 나이에 몸에 밴 그 폼을 개조했다는 거예요. 스스로 말하기를“이건 도박에 가까운 모험이었다.”거기에 올인한 것이죠. 6개월 만에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엄청난 노력과 수고로 거기에 올랐습니다마는 앞으로 그 길은 끝난 것이 아니라 더 험난한 여정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대로 배우면 할 수 있다는 것과 자신감을 얻었다는데 있죠.

   골프 하시는 분들에게 익숙한 용어가 있습니다.One point lesson. 스스로는 도대체 뭐가 문젠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코치의 눈에는 딱 드러나는 거죠. 오늘 당신의 문제는 이것이다 라고 지적하고 자세를 교정해 줄 때 확 바뀌는 거죠.‘보다 더 열심히 노력한다’가 아니에요. 눈이 열리는 것이죠. 알고 보면 늘 들어왔던 얘기예요. 사실 처음 듣는 얘기도 아니에요. 늘 들어왔던 얘긴데 그날 그 시간 그 상황에 딱 마음에 부딪혀오는 결정적 말씀이 되는 거죠.

   설교도 그렇습니다. 제가 대학 2학년 때부터 교회학교 주일저녁예배와 수요저녁예배를 떠맡게 되면서 아이들에게 뭘 해야 되는데 동화도 하고 성경 얘기도 해주고 설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 상황에 내몰려서 설교하기 시작한지 30여 년 흘렀습니다. 생각해 보면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처음에는 주일 새벽 1, 2시인데도 설교가 만들어지지 않아서 아주 고통을 겪은 적이 많아요. 너무 피곤해서 채 마무리하지 못하고 잤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자는 게 아니에요. 설교에 관한 꿈을 한바탕 꿉니다. 막 도망 다니고 망신을 당하고. 그러니 주일이 되면 너무 피곤해요.

   설교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어요. 무엇을 전할 것인가? 당연히 복음을 전해야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죠.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어떻게 전할 것인가? 전달의 문제가 있어요. 이 두 개를 함께 갖추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뻔한 얘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거 터득하는데 30년 걸리더라고요.

   무엇을 전할 것인가.‘예수가 그리스도다.’제가 이것을 어느 날 발견하는 순간‘그렇구나’했어요. 한번 눈이 열려야 돼요. 그런데 두 번째 어떻게 전할 것인가가 열려야 돼요. 이게 참 희한해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아무리 큰 목청으로 얘기해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좁니다. 그게 아이러니예요. 크게 얘기하면 할수록 졸아요. 어떻게 전할 것이냐. 문화의 얘기예요.

   제가 오래 전에 미국의 큰 교회인 새들백교회의‘릭 워렌’목사의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라는 글을 읽다가 무릎을 쳤어요.‘청중들이 절대로 진리를 갈망해서 이 자리에 나왔다고 착각하지 마라. 예배하러 왔고 하나님 말씀을 들으러 왔다고 말하지마는 그들이 진리를 열망한다고 착각하지 마라. 그들은 자기 필요를 가지고 나왔을 뿐이다.’사업 문제를 하나님이 어떻게 해결해 주실까 궁금해서 나온 거예요. 몸이 아픈데 이 몸을 어떻게 고쳐주실까 해서 나온 거예요. 내 자녀가 지금 대학을 가야 하고 직장을 가져야 하고 결혼을 해야 하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해서 나온 것뿐이에요. 그러니 목사와 성도가 서로 초점이 달라요. 그러니까 설교 요령의 첫 번째,‘목사 당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먼저 하지 말고 저들이 듣고 싶은 얘기부터 꺼내라.’이게 시작이에요. 그래야 귀를 기울인다.

   두 번째, 천하 없는 진리라도 이야기를 통하여 전하라. 여러분, 드라마를 보다 보면 나도 그곳에 가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스테이크를 먹고 싶거든요. 그게 스토리잖아요. 이야기의 위대한 힘이에요. 이제는 핸드폰을 팔아도‘성능이 좋다’그런 거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거기에 이야기를 자꾸 엮어야 돼요. 그래서 아무개 스타가 쓴 핸드폰이고, 오바마 대통령이 쓴 핸드폰이고, 이렇게 광고하는 거예요. 제가 설교를 해보니 그렇더라고요. 이야기를 할 때는 졸다가도 깼는데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성경은’그러면 다들 긴장을 풀면서 졸음모드로 바꾸시더라고요. 그게 우리의 현실이에요.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이 복음과 어떻게 전할 것인가 하는 문화적인 상황, 이 두 가지의 균형을 생각해야 돼요.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어요.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가다가 칼을 물에 빠뜨렸어요. 칼을 잃어버렸어요. 찾아야 돼요. 이 자리에 잃어 버렸다고 배에다가 표시를 해뒀어요. 그리고 칼을 찾으려는 거예요. 이게 각주구검이라는 거예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놓쳤어요. 그 배는 지금 물을 따라 떠내려가고 있잖아요. 배에 표시한 그 자리에서는 절대로 칼을 찾을 수가 없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지금 몰입하고 있는 일에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때때로 눈을 들어서 지금 세상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두루 살펴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네트워크를 가지고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난 사람을 만나서 도전을 받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해답이다. , 이것을 저들의 필요에 맞춰서 전하라. 그러면서도 다시 그 예수님을 어떻게 새롭게 이해하고 전해야 될 것인가 하는 도전을 강하게 받았어요.

   골프에도 원 포인트 레슨이 있고 설교에도 원 포인트 레슨이 있어요. 인생에도 원 포인트 레슨이 있어요.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청춘을 학원에 다 쏟아 붓고 있다’는 글이에요. 벌써 네 살만 되면 영어유치원에 보내려고 난리에요. 중학교는 이왕이면 국제중학교를 들어가야죠. 고등학교는 특목고를 가야 되겠죠. 대학교에 가기 무섭게 고시학원에 들어가죠. 또 졸업하면 노량진에 취직준비학원 다녀야죠. 애들이 대치동 갔다가 신림동 고시촌 갔다가 노량진 학원가를 가야 된다는 거예요. 만 네 살부터 심지어는 사십 세에 이르기까지 그 아까운 청춘을 학원 순례에 다 쏟아 버리고 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쏟는 열정을 절반만 줄이세요.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려서부터 자꾸 익히게 하세요. 배우게 하세요. 부모들의 눈높이에 맞게 공부 잘하는 애가 몇이나 되겠어요. 내 아이가 혹시 교회에 마음이 있어서 열심을 낸다면 좀 내버려 두세요. 은혜 받아야 공부가 되는 거예요.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 목적을 발견해야 인생이 새롭게 시작되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 공부도 필요하고 다 필요한 거예요. 물론 그 이전에도 공부해야죠. 그러나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돼요.

   원 포인트 레슨이라는게 답을 찾는 사람에게 들리는 법이지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아요. 제가 릭 워렌 목사의 글을 복사 해서 가끔 선교사님이나 목사님들에게 나누어 드리는데 얼굴 표정을 보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시더라고요. 나는 속에 불이 나서 드리는데. 아직 시간이 아니라는 거죠. 때가 아니라는 거죠. 정말 우리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서 자라날 수 있도록 해야 돼요. 때가 있어요. 어릴 때 안 하면 어려운 거예요. 여러분, 나이 들어서 늦게 믿는 분들은 이해하려고 해도 그야말로‘알다가도 모르겠네’가 결론이에요.‘알다가도 모르겠네’가 무슨 말이에요? 결국 모르겠다는 말이잖아요. 아는 줄 알았는데 모르겠다는 거죠. 그러나 어려서부터 몸으로 느낌으로 선생님들의 따스한 손길로 신앙을 배운 사람은‘모르는 것 같다가도 결국은 알겠다.’이렇게 결론이 나요.

   오늘 말씀은 요한계시록이에요. 사도 요한이 기록한 계시록이에요. 성경의 마지막 책이에요. 계시록, 또는 묵시록이란게 무슨 말이에요? 숨겨진 것을 드러낸다는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 여기에는 상징이 많아요. 숫자를 그대로 우리가 쓰는 숫자로 이해하면 안돼요.

   제가 80년대 초에 사당동에 살았는데 저희 마을에 들어오는 버스가 666이 있었어요. 그랬더니 그 앞에 있는 신학교에서 데모 했잖아요. 버스 번호 바꾸라고, 기분 나쁘다고. 그래서 567로 바꿨어요. 왜 그랬냐 하면 계시록에 666이 나와요. 유대 사람들의 생각에 7은 완전수. 하나님의 수라고 이해했지요. 그래서 오늘 일곱 촛대, 일곱 교회, 일곱 별, 일곱 사자 그건 꼭 일곱 개를 말하자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7로 표현한 거예요. 6은 뭐냐, 7에서 하나 빠지는 사탄의 수란 말이에요. 그렇게 이해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사단과 같은 로마의 박해자의 이름을 다 밝히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끼리만 알도록 비밀스럽게 표현한 거예요. 그래서 666이 된 거예요. 계시록의 본래 의미는 그런 숫자 맞추기에 있지 않아요. 계시록만 열심히 읽어서 온전케 된 사람들이 없어요. 다 빗나가요. , 성경을 종합적으로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다면 계시록은 결국 뭘 말하느냐. 로마의 박해상황 속에 놓여있는 교회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를 부어주기 위한 거예요. 오늘날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엄청나게 박해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하나님의 교회는 승리하리라. 그건 비단 꼭 로마시대만 말하는 게 아니에요. 어느 시대 어느 상황이나 그러해요. 우리 개인의 상황도 그러해요. 계시록의 의미는 거기에 있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교회의 승리는 결국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승리예요. 그렇다면 결국 내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체험하느냐. 거기에 내 인생의 승리가 담겨있다. 그래서 계시록 첫머리인 1장에서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것이 계시록의 시작이에요. 이게 제일 중요한 거예요.

   종교개혁자‘칼빈’은 성경을 주석한 위대한 학자이지만 계시록만큼은 주석하지 않았어요. 행여 인간의 지식으로 하나님의 마지막 때의 일을 어그러뜨릴까봐 계시록만은 손대지 않았다. 시사하는 바가 있어요. 핵심이 뭐냐. 계시록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만날 때에 우리는 계시록의 문을 제대로 여는 거예요.

   보세요. 사도 요한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원래 어부였죠.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난 거잖아요.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따라 다닌 거잖아요. 많은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의 이적을 체험했어요. 요한은 제자들 중에 아주 젊은 사람이었어요. 패기가 넘치는 사람이었고 어부였으니까 좀 거친 사람이었던 같아요. 누가복음에 보면 사마리아 마을을 지나가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 일행을 환영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뭐라고 얘기하냐 하면‘주님, 감히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 마을에 하늘로부터 불을 명하셔서 이 마을을 태워버리시죠.’이렇게 주님을 자랑하고 높이다 못해 이런 헛소리를 했어요. 예수님이 화를 내셨고 그들을 꾸짖으셨다고 했어요. 이게 바로 요한이 가졌던 예수님에 대한 이해예요, 권능의 주님이시다.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돼요? 예수님이 못 박히실 때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갈 때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십자가 아래까지 나아왔어요.‘이가 오늘부터 네 어머니다. 네가 모셔라.’마리아를 평생 모셨다고 해요. 그래서 요한복음을 보면 요한은 자기를 자기 이름으로 표현하지 않아요. 뭐라고 썼냐 하면 꼭‘사랑 하시는 제자’. 이게 바로 요한의 자기 이해이며 예수님 이해예요.‘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분, 이렇게 어리석고 미련하고 고집스러운 이런 못된 놈을 끝까지 끌어안고 사랑해 주시는 분.’이게 요한의 이해였어요.

   제자 중에 요한이 제일 오래 살았어요. 아마 젊었으니까 그랬겠죠. 그래서 교회의 환란과 핍박을 오래도록 봐야 했어요. 오늘 말씀을 보니까 그 역시 밧모섬에 갇혔어요. 늙었습니다. 밧모섬에 유배됐습니다. 들려오는 소식은 교회가 핍박을 당하고 있어요. 살아날 길이 보이지 않는 거예요. 너무나 괴롭고 답답해서 주일에 주님께 엎드려 기도할 때 예수님을 만나는 거예요. 성령의 음성을 듣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만난 예수님을 보세요. 더도 말고 어떤 예수님이냐 하면 우리가 흔히 보는 예수님의 성화, 전신을 그린 바로 그 모습이에요. 뭘 보고 그렸겠어요. 바로 이 대목을 생각하면서 그린 그림이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그 모습 그대로예요.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발견된 인골을 연구한 결과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같이 미남자형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더욱 서양 사람들 같은 얼굴은 아니었을 것이다. 굉장히 투박한 농부 같은 얼굴이었다. 그건 하나의 학설이죠. 그 얼굴이 어떤지는 몰라요. 그러나 오늘 변화된 모습을 보면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새로운 말씀을 들어요. 이제 마지막 때에 될 일을 듣습니다.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에 미래를 아는 것이 아니에요. 정보가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게 아니에요. 변모된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그 안에 답이 다 들어 있어요. 예수님의 온전한 모습과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고 죽었으나 다시 사셔서 영원토록 나와 함께 하리라고 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주님의 영원한 사랑, 내가 죽더라도 나를 이 죽음 가운데서 건져주실 주님을 발견하는 그것이 이 답답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 살아가는 나와 교회의 해답이에요. 그리스도를 발견한 거예요.

   여러분의 예수님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믿을수록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점점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온전해져야 돼요. 할아버지가 손자들을 보고‘허허’하지 않습니까? 아빠는 버릇없다고 하고 불러내서 때려주고 야단하죠. 바로 그것과 같이 나이에 맞게 인품이 넓어지는 거죠. 폭이 넓어지는 거죠. 마치 세상 이치를 깨달은 노인과 같이 우리의 신앙도 그리스도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어야 된다.

  ‘장기려’박사라고 하는 이름을 아실 겁니다. 그는 복음병원을 시작하신 분이고 청십자 의료보험을 시작하신 분이고 무의촌 진료를 하신 분이죠.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몸으로 실천하신 분으로 유명합니다. <장기려, 그 사람>이라고 하는 책을 읽어보면 젊은 시절에 세 가지 시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결혼이에요. 미스코리아 같은 사람하고 결혼하고 싶었대요. 그랬는데 너무 평범한 여자하고 결혼했대요. 친구가 권했는데 좀 주관이 있었으면‘싫어’했을 텐데 우물쭈물하다가 엉겁결에 결혼해 버렸대요. 옛날 분들이 다 그러긴 합니다마는 그래서 이분의 고백에 의하면 결혼하고 15년 만에‘나와 아내 사이에 그래도 사랑이 있구나’하는 것을 느꼈대요. 부부간에 아직 사랑을 느끼지 못하신 분들에게 기회를 드리겠어요. 장기려 박사 같은 분도 15년 만에 깨달았대요. 따뜻한 봄볕이 내리는 날 자기는 방안에서 글을 쓰고 아내는 밖에서 뭔가 일을 하는데 문득 눈길이 가면서‘저 사람과 나 사이에 사랑이 있구나’그 사랑을 느끼는 순간‘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먼저 사랑의 기회를 주신 거로구나. 그리고 사랑이란 곧 영생이구나.’했대요.

   영생이라는 게 뭐예요? 오래 사는 것? 착각하지 마세요. 사랑하는 게 오래 사는 거예요. 그게 영생이에요. 옛날에 제가 연애할 때 다방에 아침에 들어가서 문 닫을 때 나왔잖아요. 그런데 시간이 언제 갔는지 모르겠더라고요. 그게 사랑 아니겠어요? 어떤 분은 그래요, 천국 그러면 지겹다고요. 이 세상 사는 것도 버거운데 그걸 어떻게 영원히 사느냐. 단단히 오해한 거예요. 깊은 사랑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환경도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아요. 젊은이들이 사랑에 빠지면 얼마나 무모해져요. 상대방의 모든 허물을 다 감싸겠다는 거죠. 부모는 그 사람하고는 절대로 안 된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니래요.‘내가 그 사람의 모든 걸 다 짊어지고 가겠다.’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게 사랑의 위대한 힘이에요. 오늘날도 그 사랑으로만 살 수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로 그러한 사랑이죠. 그래서‘사랑이 영생이구나’하는 것을 깨달았다는 거예요.

   두 번째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의사가 되겠다고 서원했다는 거예요. 그가 경성의대를 나왔어요. 오늘의 서울대 의대를 나왔어요. 그런데 모든 걸 다 버리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살겠다 했으니 그 가정은 여전히 가난에 매일 수밖에 없잖아요. 사람인데 왜 거기에 갈등이 없겠어요. 그게 두 번째 시험이었다.

   세 번째 시험은 드디어 1941년 나이 삼십 세에 평양에 기홀병원이라고 선교사가 세운 큰 병원에 외과 과장이 되어서 갑니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이 선교사들을 다 추방하는 바람에 원장이었던 선교사가 가면서 장기려 박사를 원장으로 세우고 떠났어요. 난리가 났어요. 이제 나이 삼십에 원장이 되다니. 같이 있는 의사들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어요. 온갖 모함으로 원장 된지 삼 개월 만에 다시 강등됐어요. 외과 과장으로 내려갔어요. 그리고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이 사람을 내보내려고 온갖 모함을 다 한 거죠. 장기려 박사가 깊은 고통 속에 빠졌어요.‘그래, 내가 이것을 견뎌야지.’아무 얘기하지 아니하고 변명하지 아니하고 죽은 것 같이 십 개월을 지냅니다. 자기가 맡은 일을 붙들면서 그가 택한 방법이 뭐냐, 오직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었어요. 그의 글에 의하면 10 개월 만에 모든 오해가 다 풀리고 관계들이 회복되었다.‘그 10 개월 동안 나는 죽었고 다시 살았다. 내세신앙을 확인하고 부활하신 예수를 새롭게 만났다’고 고백합니다.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에도 우리는 감동하고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고 영감이 떠오르잖아요. 장기려 박사의 고백은 이러합니다.‘자그마한 자연의 손길을 통해서도 노래하지만 예수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최고의 영감을 얻노라.

   여러분, 이걸 교리로만 이해하지 마세요. 상상해 보세요. 사랑은 상상력이에요. 믿음도 상상력이에요.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그 놀라운 상상력이 없었다면, 우리를 행위대로 다스렸다면 죽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 부으면서 우리의 변화를 꿈꾸시면서 오늘도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거예요.

   오늘 성령께서 사도 요한에게 말합니다.‘네가 본 것을 기록하라’이것을 우리 마음에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