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125 숨겨진 하나님 (욥 2:7-10)
성경본문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내가 고통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필립 얀시’, 미국의 유명한 기독교 저술가의 책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자기가 잘 알고 있던 20대 초반의 신혼 부부가 겪었던 고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혼한지 채 1년도 되지 않아서 그 아내 클라우디아에게 인파선 암이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암 치료를 받게 됩니다. 가능성은 반반입니다. ‘필립 얀시’가 그들의 병상을 지키면서 그들에게 문병 온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낱낱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같은 교회 다니던 한 여 집사님이 왔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당신의 병을 통하여 당신에게 무엇인가 말씀하고 계십니다. 뭔가 틀림없이 잘못 된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에서 어긋난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잘 생각해 보세요.’ 오늘의 질병 속에 하나님이 무엇을 깨닫게 하시는지 그 교훈을 찾으라는 것이죠. 그럴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거보다 더 크신 분이죠. 고난이 반드시 어떤 교훈을 주시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만약에 고난이 반드시 어떤 교훈을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논리적으로 운명론에 빠지게 되요. 질병이나 재난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한다면 그 질병과 재난을 힘써서 막아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고 어그러뜨리는 일이 되는 것이겠죠.
오래 전에 미국의 대학에서 이런 연구를 했습니다. 미국에 토네이도가 있지 않습니까? 토네이도가 쓸고 지나가는데 그 토네이도에 대한 반응이 다른 거예요. 미국의 남부지역과 중서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비교해 보니까 남부지역 사람들이 훨씬 사망 빈도가 높다는 거예요. 같은 토네이도가 지나가도 남부 사람들이 훨씬 많이 죽는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깊이 분석하고 연구한 결과 남부 사람들이 훨씬 종교적이라는 거예요. 실제로 미국 남부가 보다 더 보수적이거든요. 그들의 신앙관에 문제가 있어요. ‘우리가 어떻게 하든 이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까 재난 대비를 제대로 안 하는 거예요. 중서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토네이도가 온다 그러면 이리저리 대비를 하는 거에요. 어디가 더 많이 죽겠어요? 당연히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죽죠. 그런데 문제는 과연 그게 하나님의 뜻이냐 하는 거죠.
또 문병 온 사람들이 있었어요. 병원을 돌아 다니면서 환자들을 위문하는 전도단의 뚱뚱한 전도단장이 왔습니다. 그는 꽃을 들고 왔습니다. 활기찬 찬송을 부릅니다. 시편 중에서도 힘이 넘치는 시편을 읽어 줍니다. 그러다가 혹시라도 대화가 병에 대한 얘기가 나오려고 그러면 얼른 주제를 바꿔가지고 분위기를 유도하는 거죠. 고통을 잊어버리도록 격려하는 거죠. 좋은 이야기만 하는 거죠. 그러나 과연 그것이 해결책이겠습니까.
또 다른 부인이 왔습니다. 그는 미국 종교 TV를 통해서 방영된 많은 이적 프로그램들을 오랫동안 보아온 사람이에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병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이건 믿음으로 고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산도 옮긴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을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시고 고침을 받으십시오.’ 클라우디아는 고민에 빠졌어요. 남편이나 자기나 분명히 하나님을 믿습니다마는 과연 내 믿음이 부족해서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못되기에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인가. 스스로도 알 수 없습니다.
또 다른 부인이 왔어요. 교회에서 아주 신령하다고 소문난 부인이 와서 말합니다. ‘오늘 이렇게 고통 당하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세요. 하나님께서 오늘 이 고통을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보이시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을 감사하세요.’ 그러나 클라우디아는 이 말을 들을 때에 감사가 넘치기 보다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꼭 이런 고통을 주시고서야 감사를 찾으시는 분인가. 그렇다면 그분은 너무 잔인한 분이 아닌가.
목사님이 찾아와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도록 특별히 선택하셨습니다. 이제 당신의 반응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응답하고 감사로 응답하여 이 고난을 이기므로 당신을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클라우디아의 반응은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왜 나를 택하셨습니까? 나는 뭐 내 놓을 만한 믿음도 없는 사람인데 잘 믿는 사람들을 다 제쳐두고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셨습니까?’ 여러분은 뭐라고 위문하시겠습니까. 사실 저도 병문안 가면 할 말이 없어요. 제가 그 병을 겪어 보았다면 아마도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렸겠죠. 사실 정답은요, ‘할 말이 없습니다’ 예요.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신 분이에요. 그렇게 단답식으로 한마디 해서 응답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인간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넘어선 크신 분이에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일교회의 으뜸가는 지도자였던 ‘헬무트 틸리케’ 라고 하는 목사님이 미국을 여행한 후에 ‘미국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결함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하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고통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고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유명한 욥의 고난을 이야기하는 한 대목입니다. 욥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욥기 첫 부분에서 욥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순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멀리 떠난 자다’ 그러니까 그는 전통신앙의 모델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 말이에요. 이 전통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신명기 28장 ‘집에 있어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성 안에서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고 네가 하나님의 명령을 깨끗하게 순종하면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너에게 복을 주시고 너의 소유에도 복을 주시고 너를 아는 모든 자들에게도 복을 주실 것이다.’ 그런데 곧 이어서 ‘그러나 네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들어가도 저주요, 나가도 저주요, 너에게도 저주요, 네 모든 소유물에게도 저주다’라고 하는 거죠. 이게 바로 신명기 신학이에요. 인과응보죠. 심은 대로 거두리라고 하는 것이죠.
욥의 고난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느냐.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네가 욥을 보았느냐. 저토록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를 보았느냐’ 그랬더니 사단도 머리 좋아요. 빈틈을 이용해서 욥을 송사했어요. ‘그거야 하나님이 욥을 저렇게 많은 재물을 주셔가지고 부자가 되게 했으니 하나님을 잘 믿는 것 아닙니까. 뭔가가 있으니까 잘 믿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한번 빼앗아 보십시오. 어떻게 될는지.’ 하나님이 약이 올랐어요. 그래서 애꿎게 지금 욥이 고생하는 거예요. ‘좋다. 그러면 그의 소유물을 거두어 보아라.’ 첫번째 고난을 욥이 잘 견디는 것 같으니까 사단이 와서 말하죠. ‘그래도 사람에게 생명보다 귀한 게 어디 있습니까. 모든 것을 다 내주고도 목숨만은 지키려고 하는 것이 인생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더 약이 오르셨어요. ‘좋다, 그러면 몸에 손을 댈 수 있지만 생명만은 건드리지 말아라’ 나중에 어떻게 돼요, 그 몸에 병을 주는 거잖아요.
여러분, 만약에 하나님이 확실하게 우리 눈 앞에 나타나 가지고 우리가 잘못하면 그대로 형벌이 하늘로부터 떨어지고 반대로 우리가 잘하면 그대로 복이 주어 진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글쎄요. 복 받는 사람보다 엎어져 죽는 사람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저를 포함해서 다 그렇지 않겠어요.
제가 오랜 전에 신앙 간증집을 보았습니다. 어떤 한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은혜를 받았어요. 너무너무 뜨겁게 기도했어요. 그랬더니 신앙이 비실비실하던 사람이 막 힘을 얻은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소위 투시 은사를 받았는지 사람 속이 다 들여다 보이는 거예요. 자기가 만나는 사람 속이 다 들여다 보이는 거예요. 그거 얼마나 재밌어요, 속이 다 들여다 보이니. 그런데 재미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에요. 가는데 마다 사람들 속이 다 시커먼 거에요. 그 더러움을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가 엎드려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 제발 이거는 좀 거둬가 주세요. 도저히 내가 참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안 보이길 다행이에요, 여러분. 그런 은사는 안 받는 게 좋은 거예요. 제가 그 책을 읽고 나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저 적당히 보이는 게 좋은 거죠. 너무 환하게 보이는 거 안 좋은 거예요. 연애할 때는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 가도 불이 환한 데는 피하는 거예요. 불이 좀 어둑해 가지고 흔들흔들하는 촛불에 그저 은은해야 상대방이 이뻐 보이죠. 그게 다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아세요. 그렇게 죄와 모든 것이 송두리째 다 들어 난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신다면 세상은 아주 공정하고 일관성 있고 깨끗할 것 같습니까? 그럴지 모르나,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자유는 실종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헌신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자, 이제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욥에게 있어서는 아주 새로운 경험이에요. 첫 번째 고난은 그의 소유를 다 잃어 버리는 것이죠. 양도 잃어 버리고 나귀도 잃어 버리고 다 잃어 버려요. 종들도 다 죽었어요. 심지어는 사랑하는 열 자녀가 재난으로 다 죽었어요. 기가 막힌 현실이에요. 그 소식을 들을 때에 욥이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엎드러져서 재를 뒤집어 쓰고는 ‘이 모든 것을 주신 분도 하나님, 거둬 가시는 분도 하나님, 내가 세상에 올 때 적신으로, 뻘건 벌거숭이 몸뚱이로 왔는데 돌아갈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 갈 것이니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범죄하지 아니했다. 이것은 말이죠, 신명기 신학의 전통대로 배운 방식대로 재난에 대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두 번째 고난이 왔어요. 악창이 생겼어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견딜 수 없어서 기왓장을 깨가지고 몸을 긁고 있어요. 그랬더니 그것을 보다 못한 아내가 말합니다. ‘여보, 당신 그러고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겠소. 그러고도 믿음을 지키겠다고 그것을 붙들고 있겠어요.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시오.’ 여러분, 이건 사실 정직한 반응이죠. 그만큼 거둬 가시는데 아직도 믿음을 지키겠습니까? 사실 아내는 정직한 반응을 보인 거예요. 그런데 욥이 이렇게 대답했어요. ‘당신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에 하나와 같도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도 받았으니 재앙도 주신다면 그것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했어요.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어요. 먼저 번과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지는 못했어요. 지금 욥의 내면이 점점 흔들리고 있어요. 무너져 가고 있어요. 여기서도 안 무너지는 건 사람도 아니죠. 문제는 아내가 뻥하고 넘어지니까 자기마저 넘어 졌다가는 안되겠다 라고 하는 위기를 느꼈어요. 아내의 부르짖음과 정직한 반응, 그건 남의 반응이 아니에요. 사실 그건 욥의 내면의 고민이었어요. 그런데 아내가 그걸 다 드러내 보였어요. 그 새로운 경험 고난이라는 경험의 끝은 무엇이냐. 그건 죽음이에요. 이제까지 전통을 지켜오던 욥에게 고난이라는 새로운 경험이 왔어요. 전통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이 고난, 그래서 경험의 새로운 문을 열지만 아내의 말대로 새로운 경험의 끝은 죽음이에요. 경험의 한계에요.
이제는 욥이 찬송하지 못해요. 약해졌어요. 더구나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이게 지금 욥기 2장 마지막이거든요, 욥기 3장에 가면 드디어 욥이 입을 여는데 뭐라고 말하느냐 ‘욥이 입을 열어 말하기를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기 시작한다.’ 드디어는 욥도 무너졌어요. 결국 시간 문제였어요. 그런데 친구들이 찾아왔지요. 친구들이 찾아 와서 뭐라고 얘기합니까. 세 사람이 찾아와서 차례대로 뭐라고 복잡하게 얘기하는데 그 얘기를 압축해서 말하면 ‘망하는 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그것은 자기 죄 때문에 망한 것이다. 그러니 너의 죄가 무엇인지 하나님 앞에 회개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회복 시켜 주실 것이다.’ 그런데 욥은 너무 억울한 거예요. 도대체 내가 전통신앙에 어그러진 게 무엇이 있느냐 이거죠. 내가 아들들이 잔칫날 혹시라도 술 마시고 방탕하고 실수할까봐 잔치가 끝나면 아들들을 대신해서 예물을 드리고 철저하게 뒷마무리를 할 정도로 완벽한 신앙 생활을 했는데 도대체 이 재난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가 하고 욥이 몸부림 치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사실 현대를 말한다면 완전히 성공에 목맨 사회예요. 성공한 사람은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과연 그렇습니까. 성공하면 다 의로운 것 입니까. 그렇다고 실패한 사람이 의롭습니까. 그건 아니죠. 몸부림치며 하나님에게 울부짖습니다. 나중에는 욥이 이렇게 말해요. ‘하나님 좋습니다. 나 이제 죽어도 좋습니다. 대신에 한마디만은 내가 듣고 죽겠습니다. 내가 뭐를 잘못했는지 그건 얘기해 주십시오’ 그렇죠. 사람들이 너무나 억울하면 한강다리에서 떨어지잖아요. 나 죄 없다 이거죠. 너무 억울하다 이거죠. 자기의 결백을 호소하는 마지막은 죽음이잖아요. 지금 욥이 그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나 죽어도 좋습니다. 그러니 내게 한마디만 얘기해 주십시오. 내가 뭘 잘못했는지.’
그런데 하나님이 마지막에 나타나셔요. 그리고는 먼저 욥의 친구들에게 야단치셔요. ‘너희는 알지도 못하면서 고통 당하고 고난 당하는 친구를 위로하겠다면서 오히려 저를 더 괴롭혔으니까 너희는 잘못했다.’ 그러나 욥에게도 말씀하셔요. 뭘 보이십니까. ‘내가 세상을 창조할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인과응보, 뿌린 대로 거둔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는 이 인간의 논리밖에 넘어서서 만물을 다스리시고 만물을 운영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그 엄청난 모습을 욥기 38장부터 41장까지 보이셔요. 가끔 환경 다큐멘터리를 보면요, 항상 결론이 이렇게 나요. 하나님은 너무나 신비하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은 너무나 오묘하다. 그것을 욥이 발견했다는 거죠. 그걸 발견한 다음에야 욥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내가 알지도 못하면서 입을 열고 떠들었습니다. 이제까지는 내가 귀로만 주님을 들었는데 이제 내가 눈을 열고 주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나의 허물을 회개하오니 용서해 주시옵소서.’
여러분, 구약 성경에 보면 신앙의 두 가지 기둥이 있어요. 하나는 전통이에요. 또 하나는 경험이에요. 그것을 잘 조화를 이루는 사람이 지혜자에요. 소위 지혜문학이 있어요. 잠언, 전도서, 욥기. 잠언은 뭘 말합니까. 잠언 9장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이 잠언에 흐르는 바탕은 뭐냐 하면 인간 이성에 대한 낙관이에요. 하나님이 다 보여 주셨으니까 네가 똑바른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이성에 대한 낙관이에요. 그런데 전도서에 가면 조금 색깔이 흐려져요. 모든 것이 헛되다고 탄식하게 되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가지고 너의 삶을 주장하신다. 인간이 스스로 헤아려서 알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라. 인간 이성을 불신하는 거예요. 혼돈한 세상을 제대로 파악할 능력이 없어요. 무능이 그대로 들어나고 있어요. 그러므로 과거든 미래든 그건 묻지 말아라. 오늘 주신 이 하루를 소중히 여기면서 살아가라.
그런데 이제 욥기로 넘어오면 거기에 고난이 더해져요. 이 고난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인간의 지혜로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고난이에요. 오직 하나님의 간섭, 하나님의 개입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고난이에요. 왜 고난을 주시느냐,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그릇된 동기를 하나님이 고쳐 주셔요. 이제까지는 보이지 않던 하나님, 숨겨진 하나님이 드러나게 돼요. 그러므로 여러분 고난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난의 원인을 굳이 찾으려 하지 마세요. 그건 때가 되면 알게 돼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세요. 그리고 묵묵히 참으세요. 하나님은요, 꼭 옳고 글러서가 아니에요. 이 사람은 옳고 저 사람은 그르다가 아니에요. 사실 둘 다 틀렸어요. 그러나 참는 사람을 손들어 주셔요.
제가 이전에 큰 교회에 있을 때 억울한 일을 당했어요. 정말 억울한 일을 당했어요. 그래서 그 다음 해에 보직을 뺏겼어요. 그런데 그냥 참았어요. 여러 사람이 와서 위로의 얘기를 하는데 거기다가 맞장구 쳐서 얘기하면 그건 교회의 평화를 깨뜨리고 흔드는 일이에요. 묵묵히 참았어요. 그랬더니 그 다음 해에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해외에 자꾸 나갈 기회를 만들어 주시더라고요. 보직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의료선교 가는 일도 저한테 오고, 성지순례 가는 일도 저한테 오고, 그래서 그 한 해에는 6번이나 해외에 나갈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야, 성경대로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나갈 때 사울의 자손이었던 시므이가 와서 막 다윗을 저주 합니다. 사울 집에 흘렸던 피를 하나님이 네게 다 갚는 거다. 막 저주합니다. 그럴 때 다윗의 부하 장수가 ‘저걸 그냥 내버려 둡니까. 제가 당장 가서 칼로 저를 죽이고 오겠습니다’ 할 때 다윗이 말합니다. ‘아니다. 내버려 둬라. 저건 다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다. 내 자식도 나를 죽이겠다고 하는데 하물며 남의 자식이야 말 할 것이 있겠느냐. 다만 오늘 내가 참는 것을 하나님이 기억하셨다가 언젠가 갚아 주실 것이다.’ 여러분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그거 복 받는 기회예요. 그냥 참으세요. 너무 속 터지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울면서 기도하세요. 그러나 사람 앞에서는 말하지 마세요. 잘 참다가 팍 터지면 그거 복 날아가는 것인 줄만 아세요.
두 번째는요, 그렇게 고난을 겪으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게 돼요. 그게 축복의 통로가 돼요. 병을 앓아 보고 수술 해 본 사람은 병 문안 갔을 때 할 말이 있잖아요. 저는 할 말이 없어요. 저는 작은 교회의 어려움을 겪는 목사님들 이야기를 들으면 진짜 마음이 아픕니다. 왜, 제가 그런 것을 겪어 봤기 때문에. 겪은 대로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위로자가 되게 하시고 복음을 증거하는 통로가 되게 하셔요.
고난을 어떻게 받아 들일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저 소경이 누구 죄 때문에 저렇게 됐습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자기의 죄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한 일이다.’ 이게 참 지혜예요. 이런 지혜를 갖는 사람이 바로 자유자(自由者)가 되는 거예요. 형통할 때는 기뻐하고 고난 있을 때는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고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이것을 풀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묵묵히 오늘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 그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우심을 새롭게 발견하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기도
하나님 어려움을 당할 때에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고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참된 삶을 위하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손길임을 인정하고 묵묵히 고난의 때를 이기게 하시고 그 고난을 통하여 새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며 복음의 통로가 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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