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나를 보내소서(성령은 주관적인 계시, 성령 역사의 양태)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7. 31. 08:07

070729 나를 보내소서 ( 6:1~8)

성경본문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직장 생활이 얼마나 어려운지 직장인들의 애환을 이야기하는 여러 용어들이 있습니다. Downshift, 보수는 높지만 대신 업무 강도가 세서 숨가쁘게 직장 생활해야 하는 현장에서 한걸음 물러서서 여유 있는 자기 생활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보수는 조금 낮더라도 내 시간을 확보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그런 흐름이 있다는 것이죠. 이것까지는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하도 위기를 얘기하는 세태 속에 안정을 추구하려다 보니까 처세술이 발달하게 되요. 그래서 이런 저런 신조어들이 나오게 되었어요. 암반수, 암반수라는 건 저 깊은 바위 밑에 고여있는 물 아닙니까? 그러니까 직장에서 숨죽이면서 드러나지 않게 조용히 일하는 사람들, 낙지부동, 복지부동이라는 것은 바짝 엎드려 움직이지 않는 것이고, 낙지 부동이라는 것은 아예 낙지같이 바싹 붙어 있는다 그런 뜻이죠. 심지어는 신토불이, 원래 신토불이라는 것은 먹거리를 가지고 얘기하는 것인데 아예 자기 몸하고 땅하고 하나가 되듯이 그렇게 직장 생활한다는 것이죠. 샐러리맨이 아니라 갤러리맨이다 그래요. 골프장에서 쫓아 다니며 구경하는 사람들같이 아예 이제는 직장생활도 남의 일인 양, 무책임하게 그렇게 지낸단 말이죠. 언제 짤릴지 모르는데 내가 여기다가 내 정열을 쏟을 이유가 뭐냐 이런 세태를 반영한 말이죠.

그러나 이런 삶은 산 것 같지만 죽은 것이죠. 자기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죠. 열정은 어디에 갔습니까? 한번밖에 없는 우리의 삶을 자기 꾀에 속아서 그렇게 살다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까? 왜 열정이 없습니까?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지 못할 때 우리는 열정을 가질 수 없어요.

 여러분, 우리가 너무나 잘아는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와 그가 주관하는 쇼를 알지 않습니까? 그의 책을 읽어보면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지극히 세속적인 쇼를 진행하지만, 그러나 이 쇼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애환을 끌어 내어서 그것을 풀어 헤치고 거기에 위로를 줌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말합니다.

오늘 성경을 읽어 보면, 이사야라는 선지자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시대 상황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유대 웃시야 왕 때에 유대는 강성했습니다. 군대도 강했고, 경제적으로도 번영했어요. 그런데 그 왕이 죽었다. 왕의 부재 상황이에요. 갑자기 미래가 불확실해 졌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됐어요. 특별히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의 먼 인척관계였어요. 왕의 죽음은 더 뼈아프게 그에게 다가온 거에요. 이제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까? 그런 깊은 고민 가운데 어느 날 성전에 나아갔다가 보좌에 앉아 성전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 거에요.

지금 하나님 만나는 장면이 설명돼 있어요. 이 체험을 통해서 그가 발견한 것은 진정 우리 삶의 문제는 왕의 부재가 아니라 만왕의 왕이 되신 하나님의 부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웃시야 왕은 유대의 여러 왕 중에 그래도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행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던 왕이에요. 그러니 예배라던지 이런 모든 의식을 다 복구한 거에요. 그 나라가 강성했어요. 경제적으로 넉넉했어요. 그러나 오늘 하나님의 부재를 발견합니다. 나라는 부해졌지만 백성들은 자만심에 빠져서 하나님께로부터 더 멀어졌어요. 성전에는 절기를 따라서 많이 모인 것 같았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 졌어요. 심지어는 선지자였던 자기 자신도 뭔가 개혁을 이루어 가는 왕에 대한 기대에 목을 매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자기 자신조차도 온전히 하나님께 온전한 신뢰를 보이지 못했구나. 여기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여기 스랍이라는 천사와 같은 존재들이 나와요. 그 날개로 얼굴을 가리우고 발을 가리우고 날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런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이사야는 반대로 자기의 더러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요.

얼마 전에 한국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영국 프로 축구팀이 아시아 투어를 해서 서울에 와서 서울 FC라는 팀과 시합을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 축구 문화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렇게 말해요. 관객들이 우리나라 선수들만 응원한게 아니고, FC 유나이티드 팀도 응원했고, 또 승패를 떠나서  축구를 즐겼다. 수 만 명이 모여 들었다. 심지어는 그 맨유팀과 싸웠던 서울FC의 젊은 선수들이 자기들의 블로그라던지, 미니 홈피에 글을 올렸어요. 당당하게 맞서 싸운게 아니라, 그들과 경기할 수 있었다니, 너무나 황홀했다. 도대체 상대편 공격수들을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물론 4 0으로 졌습니다만 질 수 밖에. 왜냐하면 선수들조차도 냉정하게 맞서지 못하고 그만 거기에 녹아 들은 거죠. 졌어요.

박주영 선수가 출전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부상 때문에. 우리나라 역대 내노라하는 골잡이들이 뽑은 최고의 골잡이는 박주영 선수다. 이런 평가를 받는데, 요즘 부상으로 슬럼프잖아요. 그러니까 팬들이 몸이 달아 가지고, 안타까워서 맨유의 퍼거슨 감독이 우리 박주영 선수가 뛰는 모습을 봐 가지고 스카우트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얘기 했답니다. 만약에 그 감독이 좋다. 박주영 선수는 가능성이 있다. 내가 데려 가겠다.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모든 사람들이 다 기뻐하겠죠? , 이것이 바로 죄사함의 은총이에요. 만약에 서울FC의 어떤 선수를 아직 뭔가를 다른 사람이 발견하지 못했는데 그 감독이 저 친구에게 가능성이 있다. 널 데려 가겠다. 옛날의 박지성같이 널 데려 가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난리가 나겠죠? 그것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오늘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자기의 초라한 모습을 발견하고 자기의 죄를 두려워하며 그 영광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핀 숯으로 그의 입술에 대며 너의 모든 죄악을 내가 용서하노라 이렇게 자유함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까 할 때 이사야 선지자가 말합니다. 하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부르소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체험하면 이런 변화가 일어 납니다. 누가 그걸 마다하겠어요.

어떻게 그런 부르심을 우리의 삶 속에서 확인할 것인가? 하나님의 부르심은 말씀을 들을 때 옵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객관적 계시예요. 그런 말씀을 우리가 집중해서 들을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건드리시는 거에요. 우리 죄를 드러내시는 거에요. 그리고 그런 죄를 내가 감당할 수 없어서 절망할 수 밖에 없는데 십자가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또한 깨닫게 하시는 거에요. 그 말씀을 듣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시는 죄사함의 놀라운 은총에 대해서 성령이 내 마음을 건드리시는 거에요. 그것이 내게 주시는 선물인 것을 깨닫게 하시는 거에요. 그럴 때 내가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 거예요. 성령은 주관적 계시예요. 성령의 역사는 말씀을 들을 때 함께 역사하세요. 함께 일하셔요. 그 말씀을 깨닫게 하셔요. 그것이 그저 내 귓전을 때리는 말씀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 주시는 말씀이구나. 오늘 내게 주시려고 준비하신 말씀이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또 여러분, 우리의 삶의 현장에 부르심이 있어요. 여러분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야구에 이런 병이 있대요. 스티브 블래스라는 병이 있데요. 혹은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 이렇게 말하네요. 이게 뭐냐하면 1970년대 미국의 메이저 리그에서 100승을 달성한 스티브 블래스라고 하는 투수가 있었는데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막 무너지기 시작한 거에요. 제대로 공을 못 던지는 거에요. 계속 빈 볼을 던지고 사사구를 내는 거에요. 결국 그는 추락해서 평범한 선수가 되고 방출되고 은퇴했습니다. 투수가 스트라이크를 못 던지는 거에요. 직구를 못 던지는 거에요. 그래서 그 선수의 이름을 따서 그 다음부터 그런 현상을 보면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에 걸린게 아니냐고 합니다. 왜그러냐? 학자들이 연구해 보면, 운동이 체력만이 아니거든요. 결국 정신의 문제거든요. 마음의 문제거든요. 자신감을 잃은 거에요. 과도한 기대와 스트레스, 여기에 스스로 무너진거에요. 투수만 그런게 아니에요, 미국에 내노라하는 어떤 타자가 있었어요. 자기 팀에서 너무너무 잘해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어요. 그랬더니 당시 최고의 팀인 뉴욕 양키즈에서 이 사람을 어마어마한 돈을 주고 데려 갔어요. 그런데 정작 양키즈에 가서는 이런 증상이 나타나서는 그대로 무너졌어요. 그리고 나이 33살에 은퇴 했어요. ? 이 과도한 기대를 감당할 수 없어서 스트레스에 짓눌린 거에요.

여러분 누구나 높아지기를 원하고 승진하기를 원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세요. 현재 그 자리가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신 자리에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좋아 보여야 되요. 난 정말 이거 하고 싶어. 그러하기에 그 일이 쉬워요. ? 하나님이 이미 주신 은사가 있으므로 즐거워요. 그렇게 쉽고 즐겁게 하므로 열매가 있어요. 이게 바로 우리 일터에 하나님이 부르시는 증거에요. 목사나 선교사만 부르시는 것이 아니에요. 주를 믿는 모든 백성들에게 주님의 부르심이 있는 거에요. 그걸 잘 기억해야 되요. 꼭 오늘 이사야 같이 뭔가 환상을 봐야 주님이 날 부르셨다? 아니에요. 우리에게 주신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감성을 가지고, 의지를 가지고 말씀을 집중하여 듣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바꾸시는 거에요. 우리의 마음을 흔드시는 거에요. 우리의 삶의 환경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거에요. 그걸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중학생 때로 기억나는데요. <닥터 지바고>라는 영화가 있잖아요. 그때는 사람들이 낙이 없었는지 그런 영화가 오면 영화관이 메어 터지지요. 그 영화가 얼마나 깁니까? 영화관에 사람들이 가득 들어찼는데, 저는 그만 자리를 못 얻어 가지고 옆에 기대서서 본 기억이 납니다. 다리가 얼마나 아팠는지. 그래도 그 영화에 푹 빠져서 말이죠, 그 눈 덮인 아름다운 모습,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그만 넋이 나갔죠. 그래서 그 여배우 이름은 모릅니다만 거기에 나오는 라라 라고 하는 여인을 제 이상형으로 마음에 품었죠. 이제는 그 영화가 DVD로 나왔잖아요. 가끔 제 방에서 다시 틀어서 그 긴 것을 다 볼 수는 없으니까 기억나는 대목만 클릭 클릭해서 보는데 감동은 여전 하더라고요.

여러분, 결국 부르심은 우리로 하여금 뜨겁게 살라고 하나님이 부르신 거에요. 사랑하며 살라고 부르신 거에요. 그런데 말이에요. 한 번 더 생각해 보세요. 괜히 남의 사랑에 흥분해서 눈물 흘리고 그러지 말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오늘 내 삶 속에서 그런 사랑을 이뤄 가세요. 연애 소설 읽는 것도 재미 있지만 그 언제까지 남의 것이나 읽고 그러겠어요. 내가 연애해야 되지 않겠어요? 내가 사랑해야 하지 않겠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음성을 듣고 나를 오늘 여기에 부르셨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옮겨져 오고 그것이 내 삶을 넉넉하게 이길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거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집중해야 되요. 연애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뭐에요. 집중력이잖아요. 학자들이 연애하는 사람들, 2개월, 3개월, 반년 된 사람들의 뇌 사진을 찍어 보니까 머리가 어떤지 아세요? 전부 빨개요. 그런데 사실 그 상태는 오래가면 안돼요. 그래서 평균 18개월이에요. 18개월에서 길어야 30개월 후에 다시 찍으면 뻘건 게 다 없어져 버렸어요. 다 밋밋해 졌어요. 다 말라 버렸어요. 그러나 학자들이 말합니다. 그거 뻘건 채로 더 가면 사람 죽는데요. ? 진이 다 빠져서요. 그건 집중하는 거니까.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과 그 말씀에 집중해야 되요.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파스칼(Pascal)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 집중한 사람이에요. 17세기 프랑스 사람이에요. 그는 천재적인 수학자였어요. 벌써 16살 때 원추 곡선에 대한 공식을 발견해서 파스칼의 정리라는 것을 내놓은 사람이에요. 물리학자요, 공학자요, 철학자요, 평신도 신학자였어요. 그는 39살에 죽습니다. 참으로 짧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말을 우리가 다 기억합니다. 사람은 갈대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다. 이건 사람의 양면을 얘기합니다. 사람은 지극히 연약한 존재에요. 시간적으로 이 영원 속에 우리의 인생은 보이지도 않는 한 점이에요. 공간적으로 이 무한한 우주 속에 우리의 모습은 한 점으로도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이렇게 말해요. 우주의 물 한 방울로도 인간을 죽일 수 있다. 그렇게 연약한 존재다. 그러나 우주보다 인간은 더 위대하다. ? 우주는 그런 것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사람은 자기의 생각 속에서 죽음과 우주를 동시에 품을 수 있으므로 인간은 위대한 존재다. 그러나 그 생각으로는 위대하지만, 그 비참한 상황을 스스로 벗어 날 수는 없다. 여기에 인간의 한계가 있다.

이런 모순된 존재인 인간이기에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 파스칼이 관찰한 사람들의 모습은 첫째 시간 죽이기. 오락한다던지, 사냥한다던지, 도박한다던지, 잡담하면서 이 인생의 문제를 외면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하나님께 지음 받아 태어난 인생이 하나님의 진리를 쫓아 가야 할 텐데 진리는 좇아 가고 밤낮 토끼 뒤만 뒤쫓고 있다. 시간을 죽이며 살아가요. 두 번째는 회의에 빠져서 살아가요. 인생을 알 수 없으므로 판단을 중지하고 모든 것을 불확실한 상태로 내버려 둔 채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 안에 깊은 본성은 해답을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세 번째로는 뭔가 배운 사람은 자기 지식을 참된 것이라고 애써 주장하고 고집하고 집착하며 살아간다. 독단주의에요. 독단론에 빠져 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이성은 우리에게 스스로 말한다. 그것이 아니라고. 진정한 길을 찾으라고 우리에게 요청한다. 그래 사람들은 불안합니다. 권태에 빠져 있어요. 불완전해요.

파스칼이 이런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깊이 사유합니다. 알고 보니 파스칼에게도 체험이 있었어요. 파스칼 스스로 그날의 체험을 불의 밤 이렇게 명명했습니다. 그가 31살 되었을 때, 1654 11 23일 밤 10시 반부터 12시 반까지 마치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났던 것 같은 결정적 사건을 체험해요. 그래서 그의 일기에 이렇게 남겨 두었습니다. , 철학자와 지식인의 신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확신, 느낌,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너의 하나님. 이것을 양피지에 써 가지고 자기가 입고 다니는 옷깃에다가 꿰매 가지고 항상 품고 다녔어요. 그가 죽은 후에야 우연히 발견됐습니다. 파스칼은 항상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사유하는 철학자인줄만 알았더니 그 철학의 밑바닥에는 하나님 만남의 깊은 고백이 있었던 거에요. 그래서 그는 이렇게 하나님을 만난 다음에 자기의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신앙에 관한 수상 단편을 기록하죠. 그걸 묶은 게 바로, 완성되지 못한 채 우리 앞에 나왔습니다만, 팡세.

파스칼은 이렇게 제안합니다. 인간의 존재는 수수께끼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의 타락 이야기, 그 아담의 타락 속에 온 인류가 함께 죄에 빠졌다고 하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로 인간존재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 존재 자체가 수수께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다 알 수 없는 것을 굳이 다 안다라고 얘기 하는 것이 이성적인 태도가 아니라 의심할 때는 의심하고 고민할 때는 고민하지만 그러나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이성적인 태도다. 이성이여, 겸손하라. 본성아, 입을 다물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는 데카르트(Descartes)와 동시대를 살았어요.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어떤 출발점을 자기로부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의 철학을 기하학적 정신이라고 얘기 합니다. 거기서부터 유추된 신은 존재하지만 그건 인격적인 신이 아니에요. 합리적인 논리적인 신에 그쳤어요. 그러나 동시대의 파스칼은 말합니다. 그는 데카르트를 부정했어요. 우리의 마음에는 이성이 모르는 논리가 있다. 그러면서 그것을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섬세의 정신이다. 왜그러냐? 우리의 일상 속에는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어떤 느낌이 있고 직관이 있고 그것을 가지고 판단을 내려야 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여러분, 그게 뭘까요? 그게 뭐냐 하면 생명이에요.

제가 며칠 전에 KBS WORLD를 우연히 켰다가 <바다는 살아 있다>라고 하는 프로그램을 봤는데요. 그냥 한 번 틀었다가 거의 끝날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바다 속 생명의 신비가 얼마나 오묘한지 몰라요. 수많은 물고기의 생존 보존 방식이 다 달라요. 너무 오묘해요. 그 중에 제가 제일 놀랬던 것은 어떤 물고기인지 이름은 잊어 버렸어요. 암컷이 알을 몸 밖으로 내뱉는 순간 수컷이 그것을 자기 입으로 빨아 들여요. 그래 가지고 이 알을 자기 입 속에다가 담고 부화할 때까지 이놈을 지키는 거에요. 잡아 먹히지 않도록. 그리고 쉴 새 없이 입을 벌려서 산소를 공급해서 이 놈들이 부화되도록 해요. 드디어 이 알을 하나 가득 품고 몸부림 치다가 드디어 다 내뿜어서 부화시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될까요? 그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다 내뿜고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서 죽습니다. 그대로 죽어요. 죽는 순간 또 다른 물고기들의 밥이 됩니다. 생명이 얼마나 신비한지 모릅니다. 저는 그걸 보면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몸과 피를 다 내어주시고 찢기시고 하는 그러한 생명의 신비와 똑같은 유비를 봤어요. 그 미물인 물고기에게 생명의 신비가 있다면 우리 사람에게는 더 말 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이 정하신 영적인 사실이 있어요. 영적 생명의 놀라운 신비가 있어요. 그게 바로 말씀이에요. 그 말씀을 들으며 믿음을 보일 때 우리는 스스로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오늘 우리의 현장 속에서 감격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받아 이날까지 살아오면서 온전한 마음으로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지식과 경험으로 하나님에 대해 함부로 생각하고 말했습니다. 겸손한 이성과 부드러운 마음으로 말씀을 듣게 하시고 기쁘게 순종하는 은혜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