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친구의 기쁨(위대한2인자=조지 마셜,화가친구그림=기도하는손)/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7. 31. 08:16

070708 친구의 기쁨( 3:26-30)

성경본문(개역개정)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위대한 2인자들>이란 책이 있습니다. 세계 역사를 움직인 위대한 인물들의 배후에는 반드시 그 못지않게 혼신의 힘을 다해서 협력한 숨겨진 인물들이 있다는 뜻이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그는 미국 최초로 네 번 연임한 기록을 가지고 있죠. 그런데 그에게는 조지 마셜이라고 하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전형적인 정치가였고 사교적이고 직관적이고 워싱턴 정가의 속성을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들의 마음을 이끌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화려한 갈채를 바탕으로 나라를 이끌어갑니다. 그러나 조지 마셜은 반대로 아주 냉철하고 분석적이고 대통령에게 과감히 직언을 하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이렇게 서로 다르지만 그들은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어요. 조국과 평화를 위해서 깨끗한 마음으로 합력하는 것이죠.

2차 세계대전을 전격적으로 국면을 전환시킨 사건이 바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아닙니까. 이것을 은밀하게 진행하는 가운데 이 모든 것을 총지휘할 연합군 총사령관을 임명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때 조지 마셜은 아주 유력한 후보였습니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조지 마셜은 워싱턴 본부에 남아서 후원하는 역할에 더 적합하다 판단하고 아프리카 전선에서 경험을 쌓은 아이젠하워를 총사령관에 임명합니다. 조지 마셜로는 군 경력이라든지 모든 것으로 봐서 양보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대통령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승복합니다. 그리고 그는 후방에서 전적으로 지원합니다.

사실 아이젠하워는 그 때 전쟁 막바지에 얻은 승리와 인기를 바탕으로 나중에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습니까. 조지 마셜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국무장관이 되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유럽을 재건하는 마셜 플랜’을 계획하고 집행합니다. 그렇게 해서 공산주의 침략에 든든히 맞서게 하는 것이죠. 1953년 그는 직업군인으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79세를 일기로 죽게 될 때에 그는 말합니다. ‘나의 장례식을 요란한 의식으로 행하지 말아주시오. 조국을 깨끗한 마음으로 섬기다가 죽어간 다른 많은 장교들 같이 그렇게 조촐하게 가족장으로 치르게 해주시오’ 그는 끝까지 군인의 모범을 보여주고 정말로 아름다운 조력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세례요한이 나옵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 등장했을 때 순식간에 화제의 인물이 되었어요. 왜 그러냐. 그는 제사장의 아들이에요. 어려서부터 광야에 나가 살았어요.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르면 그는 나실인이었어요. 나실인은 하나님을 깨끗한 마음으로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기한을 정해서 술을 금하고 머리카락에도 손을 대지 아니하고 시체라든지 온갖 더러운 것을 멀리함으로 마치 움직이는 광고판과 같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모델이 된 것이죠. 그런 점에서 세례요한은 어려서부터 죽는 그 날까지 나실인의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었어요. 그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심판을 얘기하고 회개의 세례를 선포할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많은 사람들이 ‘저 사람이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아니냐’ 할 정도로 그는 관심의 대상이었고 인정받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나타납니다. 사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사촌간이잖아요. 세례요한이 여섯 달 앞선 사촌형이잖아요.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이적을 행하시고 하니까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듭니다. 심지어 안드레 같은 사람은 사실 예수님의 제자이기 전에 세례요한의 제자였거든요. 세례요한을 따른다는 제자들 가운데서도 예수님께로 옮겨갔어요. 이것을 보고 어떤 세례요한의 제자가 세례요한에게 말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당신이 세례를 주었던 그 사람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거 위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때 세례요한은 말합니다. “아니다.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그의 길을 예비하러 온 자다. 나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다.”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했어요.

흔히들 그래요. 사장이 되면 왜 사람이 저렇게 변할까. 높은 자리에 오르면 왜 저렇게 될까. 교회에서도 그러잖아요. 목사가 위임목사를 하게 되면 왜 저렇게 변할까. 또 장로가 되더니 사람 변했다, 이런 소리를 들어요. 우리 교회의 장로님이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니까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리더십 바이러스>라는 책이 있어요. 리더가 되면 리더십 바이러스라는 게 있어가지고 사람을 변질시키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거예요. 리더에게는 세 가지 조건이 있어요. 첫째는 비전이에요. 공동체를 이끌어갈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야 돼요. 두 번째는 그 직책에 따른 권한이에요. 그리고 세 번째는 권한에 따른 책임감이에요. 그런데 이게 쉽지 않거든요. 비전을 이루려면 그 리더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공동체 구성원이 각각 그만큼의 희생을 해야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겠어요.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또 권한도 그렇습니다. 권한이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면 권위가 돼요. 긍정적 의미에서 존경과 권위가 돼요. 그러나 많은 경우 부정적 방향으로 가요. 그러면 권력이 돼요. 변질된단 말이죠. 권력이 되면 사람이 거만해지고 그 공동체 안에서 자기의 이득을 취하려 하고 나중에는 독재를 부리게 되는 거죠. 또 책임감, 직책에 따른 책임감이 있습니다. 이 책임감에는 스트레스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또는 계획했던 일이 뜻대로 안됐을 때 책임을 져야 되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거든요. 책임을 전가하려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질책합니다. 또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외면하고 회피하려고 합니다. 어려워요.

    여러분, 제가 ‘위기목회’라는 과목을 공부해보니까 목사는 맷집이 좋아야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왜 그러냐. 교인들이 그들의 삶 속에 어려움이 있고 위기가 닥치면 그것을 나름대로 풀어나가는 방식이 세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울부짖고 기도합니다. 건강한 거예요. 그래야 돼요. 두 번째는 불평합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불평하느냐. 자칫 잘못하면 목사에게로 향하는 거죠. 목사에게 불평한다는 거예요. 세 번째, 제일 위험한데 이게 뭐냐, 침묵. 아무 말도 안하고 다니는 사람. 이거 시한폭탄이죠. 조용한 것 같지만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제가 보니까 목사에게 제일 어려움을 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설교시간에 조는 사람. 위기목회에서 뭐라고 얘기 하냐면 조는 사람을 앞에 두고 설교하는 목사는 수명이 평균 48개월 단축된대요. 이게 목사의 스트레스에요.

이걸 어떻게 해결하느냐.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리더십 백신이 있다는 거예요. 백신을 맞아야 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첫째,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2장에 그랬잖아요. 예수님이 사람의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아시므로 사람을 의지하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아요. 우리 목사가 할 수 있는 실수가 이거예요. 열심히 일하는 일꾼에 대해서 더 실망하는 경우가 있어요. 왜 요것까지 못할까 해서. 사실 어떻게 보면 잘못 생각한 거예요. 예배에 나와주는 것만 해도 감사하지. 그렇잖아요. 그래서 기대하지 않아요. 오히려 있는 모양 그대로 자그마한 것에 감사해요. 두 번째, 나는 변질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늘 기억하는 거예요. 성경이 보여주는 거예요. 사람은 다 변질될 수 있어요. 그러기에 겸손하게 늘 새로운 마음으로 배워야 하는 거죠. 세 번째는 한걸음 더 나가요. 나는 죽을 수 있다. 그렇잖아요. 하나님이 오늘이라도 불러 가시면 뭐 교회가 당장 무너질 것 같지만 그건 아니에요. 교회는 참 오묘해요. 제 고향교회도 가보면 저 자랄 때에 지도해 주셨던 목사님들은 벌써 다 떠나시거나 돌아가셨고 장로님들은 다 돌아가셨어요. 교회 구성원이 다 바뀌었어요. 그때마다 겸허해집니다. 야 참 교회는 신비하다. 그래서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로구나. 나는 죽을 수 있다. 그러므로 혼자 독재 부려서는 안돼요. 정말 목회를 잘 하는 목사는 그가 떠난 다음에도 교회가 흔들리지 않아야 돼요. 그러므로 리더십을 나누어줘야 돼요. 함께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돼요. 또 저가 실수하더라도 좀 기다리고 참아야 돼요. 그렇게 해서 그가 자라나도록.

교회의 일꾼을 세울 때 기준이 뭘까. 우리도 권사님도 세우고 장로님도 세우고 하지 않습니까. 간혹 그런 일들을 하다가 교회 안에 갈등이 일어나는 일들이 있거든요. 왜 그럴까. 하나님 앞에서 한번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그거 얼마나 두려운 일이에요. 옛날에는 교회살림이라는 게 어려웠잖아요. 목사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교회 살림을 다 떠맡는 사람이 장로였어요. 그래서 그 지역의 유지들이 장로가 됐어요. 그것은 그 상황 속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에요. 목사는 간혹 그 교회를 떠날 수 있어요. 그러나 장로는 그 교회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 각오가 없이는 장로가 될 수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말씀 앞에서 생각하면 이건 정말 두려운 일이에요. 그러다가도 주위를 둘러보니까 ‘저 사람이 장로가 될 바엔 내가 되는 게 낫겠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주관적인 판단이죠. 객관적으로는 고린도전서 16 18절에 사도 바울이 아주 명확하게 얘기했어요. ‘나와 교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자라. 저는 고린도 교회의 첫 열매다.’ 스데바나라고 하는 사람을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식구들에게 얘기하는 거예요. 저는 고린도 교회의 첫 열매요, 나와 너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자라.

그래서 제가 어느 날 말씀을 읽다가 답을 얻었어요. 우리 교회 일꾼을 세울 때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이다. 그 이름을 탁 떠올렸을 때 마음이 시원해지면 일단 후보로 합격이에요. 마음이 답답해지면 그는 낙제에요. 사실 그렇잖아요. 아니 이 어려운 일들을 떠맡고 가야 되는데 후보로 추천해도 될까 고민스러운 사람이 어떻게... 우리가 민주적인 절차를 따라서 교회공동체의 투표라는 절차를 거치기는 합니다만, 아슬아슬하게 한 표 차이로 당선됐다 이거 사실은 곤란한 거예요.

또 우리 식구들, 교회 교인들도 잘 기억할 게 있어요. 이거 쉬운 거 아니거든요. 마침 또 사도 바울이 절묘하게 얘기했어요. ‘그는 나와 너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자라. 너희는 이러한 자들을 알아주라’ 그랬어요. 목사도 그래요. 하나님께서 부르셨고 하나님 앞에서 사명을 받았어요. 그러나 눈을 떠보니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거잖아요. 이게 또 기분으로 일하는 거예요. 전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우리 교회 식구들이 격려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일꾼들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세운 일꾼들이 수고하고 애쓰는 것을 격려해주고 인정해주고 협력해줄 때 하나님의 교회는 세워지는 거예요.

오늘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높이면서 ‘나는 그의 앞길을 예비하는 자입니다’ 참으로 겸손했어요. 그러나 이제 한걸음 더 들어가요. 사실 세례요한은 율법의 대표자에요. 구약을 상징하는 마지막 인물이에요.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인물이에요.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만남은 율법과 생명의 만남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내 죄를 회개했어요. 회개의 세례를 받았어요. 그러나 이것은 출발일 뿐이에요. 정말 신앙생활을 시작하는데 뭐가 필요합니까. 성령의 은혜, 말씀을 들을 때마다 깨닫게 하시는 그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오늘 이렇게 말하죠. ‘나는 마치 신랑과 신부가 결혼하는데 그 결혼식 잔치를 돕는 친구와 같다. 그리고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서 신랑보다 더 기뻐하는 친구의 기쁨으로 충만하다’. 여러분 우리는 이게 뭐 회사에서 월급 주니까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 아니에요. 그저 제2인자가 아니에요. 나는 그의 친구다, 이게 신앙의 비밀이에요. 교회의 규범을 따라서 아주 성실하게 열심히 일한다. 그것도 훌륭하지만 하나 더 들어가야 되지 않겠어요. 친구의 마음으로.

알브레이트 뒤러라고 하는 르네상스기의 화가가 있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 너무 가난했어요. 그림을 배우고 싶지만 돈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의 친구도 똑같았어요. 어느 날 친구가 말합니다. “우리 이렇게 하자. 내가 가서 돈을 벌테니 넌 먼저 가서 공부해라. 내가 너를 공부 끝마칠 때까지 도와주겠다.” 그래서 뒤러는 미술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친구는 그를 위해서 열심히 일합니다. 학비를 매번 보내줍니다. 몇 년의 시간이 흘러서 뒤러가 드디어 공부를 다 마치게 되었을 때 친구를 찾아갑니다. 친구의 반가운 얼굴을 기다리며 그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 문을 열기 직전 기도하는 소리를 듣게 돼요. 그래서 잠깐 멈추고 옆으로 돌아서 창가에서 그 안을 들여다봅니다. 친구가 엎드려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 이제 얼마 있지 않아서 뒤러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뒤러를 만나게 될 터인데, 그러나 하나님, 저는 이미 궂은 일로 손이 거칠어져서 제대로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제 몫의 능력을 뒤러에게 주시고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진실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은혜도 주십시오.” 뒤러는 너무나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손을 모아 기도하는 그 친구의 손을 스케치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화가의 그림으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오늘날까지 들을 때마다 은혜가 되는 ‘기도하는 손’, 그 손의 주인공 그는 정말로 아름다운 친구였어요.

요한복음 15 13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 그보다 큰 사랑이 없다.’ 그렇게 말씀하신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기를 찢으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셨어요.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십자가의 희생과 고통이 있었지만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고통을 넘어선 놀라운 기쁨이 있고 평강이 있고 영생의 약속이 있음을 아셨기에 우리를 친구로 부르셔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종에게는 비밀을 말하지 아니하지만 친구인 너희에게는 내가 하나님께 받은 바 모든 비밀을 말하였으며 너희가 내 이름으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응답 받게 하였노라. 그래서 예수를 친구로 고백하고 믿는 사람에게는 예수께서 누리셨던 놀라운 평강을 주시는 것이죠. 예수 믿는 사람의 인생관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낙망과 절망이 아니에요. 불교식으로 ‘인생은 고해다.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하는 이런 잿빛 색깔이 아니에요. 밝고 환한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야 돼요.

오늘 세례요한이 말해요. 예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결혼식에 비유했어요. 예수님은 신랑이시고 나는 신랑의 친구이다. 성령충만하다는 건 뭐예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있어요. 그렇다면 그것을 성경말씀을 통해서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해석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거죠. 오늘 내가 왜 이 시간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를 분명히 알 때에 우린 기쁨이 충만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세례요한은 말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오늘 주님이 세례요한을 뭐라고 말합니까. ‘여자가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고요 은혜는 겸손한 마음을 갖는 사람에게 흘러요. 겸손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덕목이에요. 성령충만한 사람의 특징은 환한 얼굴과 열려있는 마음, 그리고 남의 말을 부드럽게 듣는 겸손한 마음이에요. 이런 은혜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어려운 일들도 있었지만 우리를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신랑의 음성을 듣고 기뻐하는 친구와 같이 그런 기쁨이 넘치게 하시고 겸손하게 주의 말씀을 의지하고 살아감으로 우리의 삶 속에 평강과 기쁨이 넘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