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00328 돌이 외치리라(누가복음 19:37-46)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2. 17:21

돌이 외치리라

2010328

성경본문(개역개정)

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무리 중 어떤 바리세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누가복음 19:37-46

 

얼마 전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2년 만에 삼성전자 회장으로 복귀했습니다. 그러면서 내놓은 모토가 삼성 위기론입니다. 삼성의 작년 매출이 136조 원, 그 분야에서 1위라고 했어요. 그러나 자만할 때가 아니다. 10년 후에 과연 삼성이 어떻게 되겠는가? 얼마 전에 어디선가 100년 후에도 지속될 수 있는 기업을 발표했는데 삼성은 없었어요. 위기라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들으셨어요? 구글과 애플이 싸우는데 구글은 질 수밖에 없다. 여러 가지 이유 중 결정적인 것은 리더십의 문제인데 구글은 목 잘린 닭이 뛰는 것 같다.’ 제가 어릴 때 저희 집 뒤쪽에 닭 잡는 집이 있었는데 목이 달아난 닭이 뛰는 걸 한번 본 적이 있어요.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이건희 회장이 복귀했다는 거예요. 그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간에 시장의 주목을 모았습니다.

이미 삼성은 그런 경험이 있어요. 88년에 그가 삼성회장에 취임한 후 아무리 개혁을 역설해도 마이동풍 듣지 않아요. 이 회장이 미국 LA에 출장을 갔다가 전자 매장을 들렸어요. 쭈욱 둘러보니 맨 앞에 일본 제품들이 놓여있는 거예요. “우리 삼성 제품은 어디에 있나?” 물어봤더니 저 뒤쪽에 먼지가 쌓인 채 놓여 있는 거예요. 충격을 받았다고 했어요. 삼성이 무너지겠구나! 그 위기감으로 잠을 못 이루었다고 했어요. 불면의 밤이 계속되었어요. 드디어 1993년에 모든 사장과 임원들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불러모으지 않습니까? 유명한 프랑크푸르트 회의잖아요. ‘마누라와 자식 빼곤 다 바꿔라그리고 그때 ‘7.4’. 아침 7시 출근, 오후 4시 퇴근, 그리고 남은 시간에 자기의 능력을 길러라 이거죠. 너무나 획기적인 조처였고 또 다른 기업이나 일반사회와 맞지 않아서 1년 만에 그만뒀습니다만 그만큼 충격을 준거죠. 1993년에 휴대폰이 쏟아져나올 때 구미공장에서 전 직원 2,00명이 모여 삼성의 불량 휴대폰 15만 대를 모아놓고 다 깔아뭉개고 불살라버렸어요. 그게 500억 원이었대요. 그런 뼈 깎는 노력이 있었고 신경영을 부르짖었기에 IMF 때 수많은 기업들이 모래성같이 무너졌지만 오히려 삼성은 일류기업으로 도약하는 기회가 됐어요. 삼성의 한 임원이 회고합니다. “93년에 회장이 신경영을 부르짖을 때는 그저 그런가보다 그저 말뿐인 구호로만 알았지만 IMF를 겪고 나서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 된 것을 보고 너누나 놀랐다.” 이 회장은 독특하다고 그래요. 날마다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두문불출하며 궁리한다고 합니다. 앞으로 10년 후에 대한민국은 뭘 먹고 살 것인가를 늘 고민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도 그가 말할 때마다 반응이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리더예요. 어려움이 많아도 그가 제시하는 방향대로 사회가 반응을 보이고 움직인다는 건 행복한 거 아니겠어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위기론을 말씀하고 계셔요.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때 사람들은 만세를 불렀지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셨어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에게 임박한 멸망을 알지 못하고 있구나! 이제 곧 심판과 멸망이 임할 테데, 그 결과는 너무나 참혹할 텐데, 무서운 재앙이 다가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구나! 너희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여기 말씀을 보니까 권고 받는 날을 알지 못했구나!’ 그렇게 표현했어요.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이 너를 찾아오시는 그때를 네가 알지 못했구나!’ 그게 언제냐? 지금이에요. 예수님이 메시야로 예루살렘에 구원을 베풀기 위해서 들어가시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구나!

해외한인들이 사는 수많은 도시 가운데 자카르타 같은 도시가 없어요. 교회출석률이 제일 낮아요. 10%밖에 안 돼요. 눈이 어두운 거예요. 행복을 찾아 여기까지 나왔는데 돈 좀 벌면 그게 행복인 줄 아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눈물을 감추시고 백성들에게 메시야의 들어가심을 선포하는 거예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눈이 열린 자는 볼 것이다.’ 일부러 메시야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에 예언된 대로 하시는 거예요. 구약 스가랴 9 9절에 보면 보라 네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네 성에 임할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어요. 그래서 나귀 새끼를 찾으신 거예요. 그러면 구약성경을 읽은 사람은 기억할 것 아니에요. 이분이 우리의 메시야로구나! 라고 눈을 뜨도록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시는 거예요.

그리고 유월절에 들어가셔요. 애굽에 종살이하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놀라운 기적으로 구원해내신 그날, 이스라엘 전국에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이 유월절을 지키려고 모인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딱 시간을 정해서 들어가셔요. 예수님이야말로 유월절 어린양이심을 알리려고, 눈에 보이는 것만 위해서 인생을 허비하며 좇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시고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희생제물로 자기를 내어드리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유월절에 들어가시는 거예요.

백성들이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베다니에서 나사로를 살리셨잖아요. 의도적인 거예요. 유월절 명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들었어요. 예수님이 누구냐고 지금 주목하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셔요. 많은 백성들이 우리의 구세주가 오셨다. 메시야가 오셨다.” 자기의 겉옷을 나귀 등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길에 깔고 깃발같이 흔들면서 호산나를 부르는 거예요. ‘호산나만세라는 말이에요. 엄밀한 뜻은 우리를 구원하소서!’이지요. 누가 왕이에요? 우리를 구원하시는 자가 왕이잖아요.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어려움, 사회적 불평등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는 거예요. 불완전한 외침이었지만 언젠가는 그대들이 놀라운 구원의 비밀을 알게 되리라 생각하시면서 멀리 내다보시고 왕으로 입성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옆에서 바리새인들이 말하잖아요.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멈추게 하소서, 어찌 감히 메시야라 할 수 있습니까?” 왜냐하면 다윗의 후손 메시야로 오려면 적어도 백마 타고 와야지 저렇게 비리비리한 나귀 새끼를 타고 와 가지고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라고 하는 것이에요.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율법주의에 매여있는 거예요. 세상의 화려한 성취, 그것이 우리 인생의 전부인 것 같이 이해하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에요? 우리의 땀과 수고와 노력으로 아름답게 이룬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셔요. 맛있는 것 먹는다고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하나님이 먼저 아셔요. 우리에게 마음의 평강과 기쁨과 영의 안식을 주시려고 메시야를 보내시는 거잖아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약에 저들의 메시야 외침을 막는다면 길바닥의 돌들이 대신 소리를 지를 것이다.” 돌들이 이제 곧 이 도시가 망할 터인데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부르짖을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 이렇게 밝은 날 살고 있다는 것, 참 은혜예요. 너무 감사해요. 여기서 한걸음 더 들어가야 돼요. 주님을 바라보면서 내 남은 삶을 살아야 돼요. 언제 무슨 일이 있을는지 누구도 알지 못하잖아요. 세상 사람들이 길을 잃고 헤매며 살고 있어요. 다 길 잃은 양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먼저 하신 일이 뭔가 주목해야 돼요. 성전에 가셨어요. 예루살렘 성전을 둘러보셨어요. 그때의 성전을 흔히 헤롯 성전이라고 그래요. 헤롯은 유대 왕이었어요. 그런데 헤롯은 유대사람이 아니에요. 이두매라는 다른 종족이에요. 로마 권력에 줄을 대어서 유대왕이 되었어요. 유대사람들이 얼마나 자존심이 센지 굽히려 하지 않아요.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효과적인 방법이 뭘까 생각해낸 게 바로 성전을 지어주는 것이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성전을 확장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시작한 성전이 46년째 계속해서 지어지고 있어요. 확장되고 있는 거예요.

그 성전을 예수님께서 둘러보셨어요. 그런데 그만 당시 성전이 타락했어요. 밖에서 가지고 온 제물은 불합격시키고 안에서 비싸게 파는 제물을 가지고 와야 합격시켜요. 이게 부조리였어요. 성전세를 내려면 당시 통용되는 로마 돈은 받지 않았어요. 유대 돈으로 바꿔야 돼요. 성전 안에 환전소가 있었어요. 수수료를 비싸게 매겼단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분노하시고 채찍을 내리치면서 짐승들을 흩으시고 비둘기를 내쫓으시고 환전하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으셨어요. 그러면서 외치셨어요. “내 집은 만민이 나와서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가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구나!” 예수님의 분노예요. 생각해보세요. 나이 30의 젊은 청년 예수가 성전에서 채찍을 휘둘렀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니 제사장은 말할 것도 없고 바리새인들이 볼 때 어떻게 보였겠어요. 혹시 우리 교회에 어떤 사람이 와서 교회가 죽었다고 외치면서 똑바로 하라고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겠어요? 일의 전후 사정은 나중에 알더라도 기분 나쁘지 않겠어요. 오늘 말씀을 보면 이 일이 있은 다음에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긴급회의로 모여서 결론을 내려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저 예수를 죽여야 된다.’ 이렇게 결론을 내린 거예요.

여러분, 의복을 단정히 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교회에 나오는 거, 잘하신 거예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돼요. 예수님의 행위의 참뜻은 뭐예요? 멸망 당하게 된 예루살렘을 살릴 수 있는 곳은 하나님의 성전인데 하나님의 성전이 한발 먼저 빗나가버렸어요. 타락했어요. 개혁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느냐 성전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해요. 우리 자카르타 한인사회의 변화는 우리로부터 시작해야 돼요. 나부터 시작해야 돼요. 그 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결국 먼저 변화된 사람들로부터 변화가 가능해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외에 어떻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되겠어요? 우리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게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올바로 기억하는 거예요. 고난주간에 금식을 하며 기도하는 건 너무 잘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잖아요.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일을 오늘 내 삶 속에서 이뤄가야 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우리가 알아요. “아버지여!”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내 아버지여!” 이렇게 가까이 부를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내 생각 내 뜻보다 과연 하나님의 이름이 우선하기를 바라고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누가복음 17 20절에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잇다 저기 있다 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지역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말씀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열망이고 소원이에요.

예수님이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46년 동안 지어지는 화려한 성전을 보고 이 성전을 헐라그랬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죄목이 성전 모독죄예요. “이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성전을 다시 세우리라.” 그러니까 다들 깜짝 놀라서, 46년 동안 지어진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말하다니, 자기가 3일 만에 세우겠다니! 이게 무슨 소리예요? 요한복음 2장에 설명했어요. ‘이 말씀은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날 자기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것이다.’ 성전의 비밀은 십자가와 부활이에요. 십자가와 부활의 비밀을 놓치면 우리는 괜히 헛고생하는 거예요. 그거 절대로 놓쳐선 안 돼요.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한다.’라는 것은 무슨 의미겠어요?

<용의 눔물>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거기 태종 이방원이 어렵게 셋째 아들 충녕을 왕으로 세우고 —그가 세종이잖아요— 그에게 당부하는 이야기가 나와요. “내가 아버지를 이어서 이 나라를 이만큼 오려놓기까지 지은 모든 악업은 내가 지고 갈 터이니 부디 왕은 이 나라를 바로 이끌어 가시오.” 그리고 죽었어요. 그거 사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에요. “내가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으로 너의 죄와 허물을 다 해결하였으니 너희는 이제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이 땅을 새롭게 하나님의 나라로 일구어 가라.”고 하는 거예요. 왕도 눈물을 흘려야 할 만큼 왕의 삶에도 고난이 있는 거예요. 모든 사람에게 고난이 있는 거예요. 어떻게 살아야 되겠어요?

미국의 철강왕 케네디도 젊은 시절 사업에 실패해서 자살하려고 했어요.뉴욕 허드슨 강에 가서 떨어져 죽으려고 하는데 이 심각한 순간에 누군가 뒤에서 연필 한 다스 좀 사주세요.” 그러는 거예요. 돌아보니까 어떤 사람이 연필 한 다스를 내미는 거예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두 다리가 없어요. 널빤지에다 바퀴를 달아 만든 휠체어 같지도 않은 것을 타고서는 연필을 내밀고 이것 좀 사주세요.” 주머니에서 1달라를 꺼내주었어요. 지금 빠져 죽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연필이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연필은 필요 없어요.” 그랬더니 아니요, 이거 받으세요. 만약에 이걸 받지 않으시면 돈을 돌려드리겠어요.” 그 연필을 받는 순간 장애인의 눈에 희망이 피어오르는 거예요. 정정당당하게 물건을 주고 값을 받은 것이니까. 그것을 보는 순간 저 사람의 얼굴에 살아 있음이 생생하구나!’ 번쩍 깨달았어요. ‘정말 내 속사람이 찾고 있던 것은 죽음이 아니라 희망이었구나!’ 용기를 얻고 돌아서서 다시 시작했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삶의 고난을 피하려고 하지 마세요. 고난은 늘 있는 거예요. 그게 다 살아 있다는 증거예요. 문제는 이 고난을 어떻게 넘어설 것이냐? 에베소서 2 4절에서 11절에 놀라운 말씀이 있어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가 살아나실 때 함께 부활하고 그가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으므로 우리도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예수 이름의 권세를 누리며 사는 것이다' 이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고난의 참 의미예요.

우리가 오늘 예수 고난으로 말미암아 이루신 승리를 마음 가득 받아서 어떤 어려움과 절망 속에서도 낙망하지 아니하고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게 고난주간을 올바로 보내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만 늘 얼굴이 우거지상이라면 이제 그만하세요. 얼굴 좀 펴세요. 무슨 문제가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다 해결하신 거예요. 그리고 약속하셨어요.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다.’ 여러분, 예배 중에 설교를 잘 들어야 돼요. 기도 응답을 어디서 받으려고 하세요. 말씀 속에서 기도응답을 받는 거예요. 십자가 고난을 통해 받은 새 생명을 노래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유대인들은 제대로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호산나를 불렀어요. ‘예수님 만세를 불렀어요. 그러나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성령으로 다시 오셔서 이루신 수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야말로 모든 결론을 알고 있어요. 그러므로 믿음으로 염려와 근심을 다 내려놓고 주님을 주목하고 노래하고 찬송하는 거예요.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