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10102 하나님의 초대(신 5:28-33)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5. 13:32

110102 하나님의 초대 (5:28~33)

성경본문

여호와께서 너희가 내게 말할 때에 너희가 말하는 소리를 들으신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다 옳도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 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가서 그들에게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라 이르고 너는 여기 내 곁에 서있으라 내가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네게 이르리니 너는 그것을 그들에게 가르쳐서 내가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는 땅에서 그들에게 이것을 행하게 하라 하셨나니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

 

지난 번 터키 성지순례를 하는 동안에 성경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방문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 가운데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습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 맨 마지막에 소개된 라오디게아 교회는 특별히 오늘날 현대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교회로 해석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특징은 미지근한 교회라는 거예요.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교회, 그래서 내가 토하여 내치겠다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런 부끄러운 교회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에 가보니까 요한계시록 3장의 라오디게아 교회에 관한 설명이 그저 하나의 문학적 표현이 아니고 그 도시의 상황과 딱 맞는 이야기더라고요. 라오디게아는 히에라볼리와 골로새, 이 세 도시가 삼각형을 이루는 지역에 있습니다. 히에라볼리는 아주 유명한 온천지역이에요. 골로새 옆으로는 강이 흐르고 있어요. 그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라오디게아가 있어요. 뜨거운 물이 내려오다가 차가운 강물과 만나면서 물이 식어버리는 곳이에요. 미지근한 곳이에요. 라오디게아는 당시 교통의 요지였기에 상업이 발달하고 금융이 발달합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나는 부자라,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그렇게 생각하는데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의 곤고한 모습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다 보고 있다.’ 조금 맛있는 것을 먹는다고 평안이 있습니까. 그럴듯해 보일 뿐이죠. 주님이 말씀하셔요. ‘이제는 불로 연단한 순금을 사서 정말 부자가 되고 흰 옷을 사서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안약을 사서 네 눈먼 것을 고쳐라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지역은 상업과 금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금이 많이 생산된 지역이었고 또 면화 밭이 펼쳐져 있어서 그곳에서 나오는 면직물, 옷감들이 아주 유명했던 거예요. 또 물이 겹쳐질 뿐만 아니라 많은 오폐수가  흘러들어 눈병이 심해서 눈병을 치료하기 위한 큰 병원들이 그곳에 있었고 안약이 개발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이 라오디게아의 상황이에요. 순금도 있고 화려한 옷감도 있고 눈을 고칠 수 있는 좋은 안약도 있어요. 그러므로 이제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 말씀하시면서 그 유명한 말씀이 따라붙습니다. 요한계시록 3 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예수님의 초청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기업을 운영하고 일하고 먹고 마시는 건 잘못된 게 아니에요. 다 필요한 거예요. 상업이 잘못된 게 아니에요. 순금은 우리 삶 속에 필요한 거예요. 멋있는 옷을 입는 것도 다 필요한 거예요. 병이 난 사람을 위해서 약을 바르고 치료하는 것도 다 필요한 거예요. 그러나 그러한 것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그분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나를 발견하고 영적인 관계가 활짝 열릴 때에 순금도 의미가 있고 흰옷도 좋은 것이 되고 안약도 유익이 된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만 하더라도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 상황이에요. 그런데 이 2천 년 전 교회 모습이 바로 오늘 현대교회, 자카르타 한인공동체, 한인사회, 한인교회, 우리들에게 하나도 낯설지 않게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이에요. 이걸 다시 역사를 거슬러 출애굽시대로 올라가면 지금으로부터 무려 32백 년 전으로 파악되는 시대로 올라가도 이 문제와 상황은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고 하는 거죠.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지음 받은 인간의 본질적인 상황은 민족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손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기에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는 영적 문제가 있다고 하는 거죠.

여러분, 출애굽이란 애굽에서 탈출했단 말이에요. ‘Exodus’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고 출애굽, 탈출해서 광야생활을 하면서 하나의 신앙공동체가 이루어져요. 같은 경험을 한 거예요. 성경을 꼼꼼히 읽어 보면 히브리민족뿐만 아니라 중다한 잡족들이, 갈래를 알 수 없는 중다한 잡족들이 당시 대제국이었던 애굽의 종살이를 하다가 함께 도망 나왔어요. 히브리인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민족들이 거기 섞여서 같이 광야로 탈출해서 그때부터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함께 만나를 먹으면서 하나의 민족이 된 거죠.

사실 우리들이 단일민족이라고 얘기하지만 그런 말만큼 착각이 없어요. 여러분, 얼굴 한 번 보세요. 같은 얼굴이 있는가. 우리 얼굴도 남방계, 북방계 온통 다 섞여 있는 거예요. 다 섞여 있어요. 흔히 우리 족보를 얘기할 때 우리 아무개 성씨 시조는 누구고, 거기서부터 좍 우산살같이 퍼져 나온 것 같지만 그걸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을 중심으로 그걸 한 번 뒤집어 보세요. 여러분을 중심으로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피가 흘러 흘러 들어가서 여러분에게 다 고여 들어간 거예요. 

출애굽은 히브리민족의 원초적 경험이에요. 성경을 보면 항상 유월절을 지키라고 말하고 지금도 유대사람들은 유월절을 그대로 지키고 있어요. 성경에서는 출애굽과 광야생활을 우리들의 인생으로 비유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출애굽사건에 비유해요. 애굽에 종살이 하던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를 지어 죄의 종이 되고 마귀의 종이 되어서 살았던 우리의 과거를 말해요. 그러다가 어린 양을 잡아서 문에 피를 바르고 놀라운 구원을 체험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광야로 나왔어요. 나중에 요단 강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죽음을 말하고 그 죽음은 새로운 부활을 말하고 또 영생을 말하는 거예요. 우리가 요단 강 건너가 만나리그러잖아요. 그건 가나안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건 우리 구원의 완성이에요. 예수 믿고 살아가는 우리의 과정은 광야생활에 비유해요.

그렇다면 광야생활의 초점은 뭐냐? 구원받은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순종하며 사는가, 불순종하며 사는가 하는 거죠. 그런데 광야를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들을 보면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어요. 백성들의 모습이에요. 그들의 몸은 이제 자유로워요. 종살이에서 벗어났어요. 그러나 생각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해요. 생각은 여전히 과거에 묶여 있어요. 생각은 여전히 먹고 마시는 것에 매여 있어요.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마는 광야에서 잠깐이라도 먹을 것이 부족하면 옛날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가마솥 옆에서 고기 얻어먹었던 일을 기억하면서 불평해요. 몸은 자유롭지만 생각은 부자유합니다.

왜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오류에 빠지느냐?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 손에 들려있는 만나와 메추라기와 복만 바라보는 사람들이에요. 당장 물이 떨어지면 하나님을 원망해요. 그러다 하나님께서 이적을 베푸시면 하나님을 찬양해요. 몇 날이 못 가 뜨거운 태양 아래서 또 다시 원망하고 불평하는 모습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어요.

모세는 어떻습니까? 사실 모세는 Prince of Egypt, 애굽의 왕자로 태어난 사람이죠. 영화를 누렸던 사람이죠.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사명을 발견하고는 그 모든 영화를 다 내려놓고 주님을 따랐어요.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가진 사람이에요. 출애굽한 백성들을 먼저 시내산의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갑니다. 하나님을 먼저 만나 언약을 붙들도록 백성을 이끌어가는 사람이죠. 하나님도 그것을 너무나 기뻐하셨어요.

오늘 백성들과 모세가 나누는 대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그의 영광을 보여주시니까 백성들이 너무나 놀라가지고 대표를 세워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 눈으로 보고 목숨을 부지한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타나시니 우리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을 만나서 들은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그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하나님께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는 것을 두려워했어요. 하나님께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시고 모세를 불러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백성들이 하는 얘기를 다 들었노라. 그러므로 백성들이 나를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명령을 순종하도록 하라. 그들을 이제 다 장막으로 돌려보내고 너는 가지 말고 여기 나와 함께 있으라. 내가 너에게 전하는 모든 말을 백성들에게 나눠주라.’

사실 하나님은 우리 부모들과 같은 거죠. 부모들이 여러 자녀 가운데 이미 장성한 자녀도 있을 수 있고 아직 늦둥이 막내가 있을 수 있겠죠. 부모는 늦둥이도 사랑하고 큰아들도 사랑하고 다 사랑하죠.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부모의 사랑은 한결같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자녀의 이해 정도가 다 다른 거죠. 늦둥이가 이해하는 부모가 다르고 장성한 자녀가 이해하는 부모의 모습이 다른 거죠. 하나님은 온전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시지만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는 정도가 천차만별이에요. 갓난 아기라면 그저 엄마에게 젖을 구하는 거예요. 장성한 자녀라면 엄마의 젖을 구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헤아리는 거죠. 더 나아가서 어떻게 하면 엄마를 기쁘게 할까를 생각하는 것과 같죠.

새 술은 새 부대에라고 하는 유명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가죽부대였어요. 그런데 가죽부대를 오래 쓰다 보면 이게 딱딱해져요. 탄력을 잃어버려요. 그런데 부글부글 익는 새 술을 그런 가죽부대에 담으면 그게 막 끓어 팽창하니까 부대가 감당을 못해 터져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새 술은 말랑말랑한 새 부대에 담아야 끓는 술을 부대가 탄력 있게 받아들이는 거죠. 묵은 부대에는 묵은 술을 넣을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묵은 것이 좋다고 하는 거예요. 새 술은 새 부대에, 새 시대는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새로운 자세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부으셔요. 그러나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지, 묵은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 옛날의 묵은 은혜를 담아두셔요. 그것도 참 감사한 일이에요. 사실은 모든 사람이 새로운 은혜에 나아가기는 어려운 거예요. 낡은 부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지난 날 그에게 부어주셨던 묵은 은혜를 담아두시는 거예요. 그것도 우리 인생을 위한 놀라운 은총이에요.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늘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사람을 새롭게 하시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셔요. 하나님은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인류를 지으신 그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그의 구원을 이루어가셔요. 하나님을 따라가야 되는 거죠. 이게 광야를 살아가는 법이에요.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법이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나님과 늘 새롭게 만나는 은혜를 사모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죠.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내셔서 광야로 보내셨는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광야에 고난이 있어요. 사람은 이상해요. 왜 그렇게 사업이 다 무너져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을까? 왜 병이 들어야 그 때 하나님을 찾을까요? 고난을 당할 때 사람의 마음이 가난해져요. 무엇이든지 다 소중하게 받아들여요. ‘시장이 반찬이라고 하잖아요. 배고플 때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다 꿀맛이 되잖아요.

제 평생 가장 맛있는 밥을 지금도 기억해요. 제가 논산훈련소 훈련을 마치고 대구 군의학교에서 주특기 훈련을 받았습니다. 훈련을 받는 기간에 군의학교에 사령부교회가 있더라고요. 예배를 갔어요. 거기 예배에는 누가 나오느냐 하면, 물론 군인들이 나오겠죠. 군인 가족들도 나오죠. 훈련 받는 군의학교 학생들도 나오죠. 간호장교 후보생들도 나오죠. 또 기간병들도 나오죠. 아주 다양한 그룹이 모여서 예배를 드려요. 대구통합병원도 함께 있기 때문에 환자들도 나와가지고 예배를 같이 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입대하고 몇 달 지내다 보니까 성경이 너무 아쉬워요. 포켓성경만 하나 가지고 갔는데 글씨가 너무 작아 보는 게 불편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하나님, 이왕이면 성경 하나 큰 걸로 주십시오이렇게 기도했는데요, 재미있게도 군의사령부교회에서 성경암송대회를 한다는 거예요. 성경암송대회인데 상품이 뭐냐 했더니 성경책이래요. 그래서 하나님, 저건 제겁니다라고 기도했어요. 성경암송대회에서 제가 1등 했어요. 그래서 그 성경을 받았어요. 성경을 많이 외워서가 아니에요. 제게 필요했고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거예요. 그 성경으로 군생활 하는 동안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일 저녁에 암송대회에서 1등을 했는데 예배를 마치고 어떤 중년 여자분이 저에게 가까이 오셔요. 그 순간 깜짝 놀랐어요. 주일학교 6학년 여름성경학교 때 서울에서 오셔서 딱 한 번 동화를 해준 예쁜 여선생님이었어요. 그 동화를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아요. 토끼하고 다람쥐하고 여름성경학교에 같이 손잡고 교회 간다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서울에서 세련된 여선생님이 오니까 아이들 눈방울이 이만해져 가지고 눈을 뗄 수가 없어요. “아니, 어떻게 여기 계세요?” 그랬더니 찬양대 지휘하는 군의관의 부인이더라고요. 너무 반가웠어요. 그런데 만나자 이별이라고 바로 며칠 뒤에 저는 기차를 타고 떠나는 거예요. “아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만나자 이별이네그러더니 떠나는 날, 떠나기 전에 교회로 나오라고. 그날 친구하고 둘이 교회를 나갔더니 그 분이 밥을 한 상 준비해가지고 오셨어요. 철조망으로 그걸 받아가지고 교회 뒷방에 가서 둘이 먹는데, 어떻게 된 건지 막 넘어가는 거예요. 그 많은 걸 둘이서 다 먹어버렸어요. 그 쌀밥의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제대 후엔 밤낮 그 밥을 먹는데도 그 맛이 나질 않죠.

여러분, 하나님께서 광야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셨어요. 신명기 8 2~3절에 만나를 주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만나를 주셨다만나라는 것은 날마다 하늘로부터 부어주시는 은총이에요. 하나님께서 만나를 먹이실 때 어떻게 하셨어요? 날마다 들에 나가서 만나를 구하되 자기 분량만큼만 구하도록. 그런데 사람들이 욕심이 많아 더 많이 거둬들였어요. 먹고 남은 것을 장막에 두었더니 그 다음 날 썩어가지고 구더기가 나고 악취가 났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 분의 만나를 거두도록 했어요. 하루치는 그날 먹고 남은 하루치는 그 다음날 안식일에 먹도록. 그런데 그렇게 거둔 만나는 그 다음날이 돼도 썩지 않았어요. 안식일에는 일체 나가서 만나를 구하지 말고 그 전날 준비한 것으로 먹도록.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만나를 구하러 나갔지만 아무것도 구할 수 없었어요. 이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요. 여러분, 주일을 지키되 올바로 지켜야 되요. 바르게 지켜야 되요. 사실 주일에 일하는 것, 그거 하나님의 뜻 아닙니다. 부득이해서 어쩔 수 없이 그런다 할지라도 알고나 하세요. 주일은 깨끗하게 지켜야 되요.

원래 만나라고 하는 말은 이게 무어냐?’라고 하는 말이에요. 어느 날 나가보니까 들판에 자그만 알갱이 같은 것들이 좍 널려 있거든요. 이게 뭐냐? 히브리어로 만후에요. 그말에서 만나가 된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이다.’ 광야를 히브리어로 밋바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오묘한 진리가 있어요. 원래 만물을 창조하신 말씀을 히브리어로 따바르라고 말해요. 따바르에다가 장소를 뜻하는 M을 앞에다 붙이면 밋바르가 돼요. 광야란 무슨 말이냐 하면 말씀이 있는 곳이에요. 유대인들의 생각이 얼마나 놀라운지 몰라요. 출애굽과 광야의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 낸 단어에요. 광야란 뭐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그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생수를 주시고 적을 물리치시고 언약의 백성을 삼으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이에요. 광야는 고난이지만 그건 고난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이에요.

여러분, 새해에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워야 돼요. 주일학교 하면 그저 어린아이들만 와서 공부하는 줄로 알아요. 유치부, 아동부, 학생부, 또 청년부, 여기까지가 주일학교인줄 알아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어른들도 주일학교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 전에 매주일 8 30분에 이 자리에서 장년부 주일학교를 하잖아요. 와서 배우세요.

<십계>라는 영화 아시죠?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 십계를 봤는데,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은 정말 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영화를 한 번 보고 안 나왔어요, 두 번 보려고. 옛날 영화관은 들어가면 끝이잖아요. 좌석이고 뭐고 없으니까 그냥 그 자리에서 뭉개고 또 보는데, 그 영화가 얼마나 긴 영화인지 몰라요. 홍해가 갈라지는 걸 보려고 다시 눈을 비비면서 버티다가 다시 봤는데 그 감동은 여전하더라고요. 두 번 봤는데도 여전해요. 그렇게 영화를 좋아하더니, 결국 대학 전공을 역사학과로 결정했는데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어요. ? 영화 속에서 다져진 실력이 있어서 나는 무조건 사학과라고 중학교 때 벌써 결정했기 때문에 그냥 그 길로 가버렸어요.

여러분, 히브리서 4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이 시퍼런 검보다도 더 예리해서 우리의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고 고칠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의 생각과 뜻까지도 낱낱이 드러내어서 고쳐준다고 말씀하셨어요. 머리가 좋아서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들을 때 그 말씀이 우리를 고쳐주시는 거예요. 믿음이 저절로 생기는 거 아니에요. 태어날 때부터 믿음 있는 사람? 그런 사람 없어요. 말씀을 듣는 것만큼 우리들 안에 변화가 일어나요.

<오랑 꼬레아의 아리랑>을 여러분에게 소개했습니다만 거기에 이런 장면이 나와요. 이 나라 대통령 경호부대가 택한 무술이 어떤 거냐 하면 용무도라는 거예요. 그걸 누가 가르치냐 하면 한국사람들이 가르쳐요. 그 장면이 나오는데 대단합니다. 태권도, 합기도, 유도 모든 것을 종합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훈련 받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눈빛이 살아있고 시퍼런 것을 봤어요. 교관들이 젊은 한국사람들이에요. 우리하고 똑 같은 한국 사람들인데 무술이 대단해요. 방법은 딱 하나죠. 일찍 시작해서 날마다 훈련하고 배워서 남의 나라 대통령을 지키는 경호부대에 무술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이 되었어요. 훈련해야 돼요.

여러분,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잠언 4 23절에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네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건 내 마음이에요. 마음먹기에 따라서 오늘이 복된 날이 되기도 하고 재앙의 날이 되기도 해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초청하십니다. 이사야서 55 3절에 보면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서 들으라 그리하면 네 영혼이 살리라.’ 사도 요한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요한복음 14 21절에 내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자기 이름을 얘기하지 않아요. 자기가 등장하는 대목에는 어떻게 쓰고 있느냐 하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이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자유인이에요. 오늘 나를 돌아보세요. 나는 나를 뭐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여기에 진정 자유가 있고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