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10529 땅끝으로 가리라(롬 15:22-29)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5. 14:26

110529 땅끝으로 가리라 ( 15:22~29)

성경본문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에게 영적인 것을 나누어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대학 때에 고산 윤선도의 유적을 돌아보다가 토말(土末)’이라고 하는 곳에 갔습니다. ‘땅끝이라는 말이죠. 우리나라 반도의 가장 남쪽이라는 곳이죠. 전라남도 해남에 있죠. 그곳에 서서 토말이라고 쓴 표지석을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동안 걸으며 밟고 다닌 게 다 땅이지만 그래도 여기가 땅끝이라고 하니 그 의미가 새롭잖아요.

여러분, 땅끝의 기준은 어디입니까? 어딘가 중심이 있으니까 땅끝이 있죠. 먼저 중심이 있고 그 다음 땅끝입니다.  중심과 땅끝 사이에는 그 둘을 잇는 방향이 있죠. 우리 인생에도 중심이 있고 땅끝이 있습니다. 사도행전1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시대마다 땅끝에 대한 이해는 달랐어요. 우리나라의 땅끝은 해남이었지만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이 이해하는 땅끝은 달랐어요.  오늘  말씀을 보니 사도 바울에게는 불 붙는 소원이 있어요. ‘나는 서바나로 가리라.’ 서바나, 즉 스페인, 또는 에스파니아를 말하는 거예요. 그 당시 지중해  사회에서 땅끝은 스페인이었어요. 그 밖은 미지의 세계에요. 그 당시 과학적 이해로는 그 밖은  낭떠러지가 되어 있어 계속 나아가면 떨어져 죽는다고 생각했죠.

사도 바울의 불붙는 소원, ‘내 목숨이 다하기 전에 스페인으로 가리라.’ 무엇하러?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 생명의 복음이므로. 사도 바울이 예전에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려고 유대를 넘어 이웃나라 시리아의 다메섹(다마스커스)으로 가는 도중에 주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그 인생은 완전히 바뀝니다. 고백이 바뀌었어요. 빌립보서 3 8절에 보면 그가 가문과 학문과 경험과 종교적 열심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를 만나고 보니 이제까지 자랑했던 것들은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게 만든 장애물이었고 좀 더 거칠게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러한 것들은 배설물 같았다, 똥과 같았다는 말이죠. 물론 공부하는 게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죠. 열심히 돈 버는 게 쓸데 없다는 말이 아니죠. 그러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발견하지 못하게 하고 헛된 길로 나아가도록 유혹하는 것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발견한 이후 그의 학문과 열심은 복음을 위해 귀하게 쓰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다음, 그는 사도행전 1 8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리라고 하는 불붙는 소원을 가지게 돼요. 그러자 하나님은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가 시작될 때 그를 보내 그 교회의 일꾼이 되게 해요.

     예루살렘 교회와는 달리 이방인 교회였던 안디옥 교회는 여러 가지 모습에서 많이 달랐어요. 로마제국으로 통일이 되고 그리스 문화로 하나가 된 사회 속에 다문화, 다언어, 다인종이  모이는  이상적인 교회를 이루었어요. 리더들도 다양했어요. 그런 가운데서도 놀랍게 그들은 일치를 이루었어요. 성경에 보니까 성령께서 그들에게 가라사대 너희 가운데 선교를 위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구별하여 세우라.’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음성을 들었고 뜻을 발견했고 전심으로 기도하면서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선교를 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꿈 꾸는 교회는 복음, 즉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본질에 있어서는 ‘Unity’, 일치를 이루어야 돼요. 이것이 분명하지 않다면 아직 신앙이 미숙한 것이지요.  신앙의 핵심, 신앙고백에 대해서는 일치를 이루어야 돼요.  한편 우리는 모든 게 달라요.  은사가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르고 모든 것이 달라요. 그래서 교회 안팎의 여러 가지 일들을 각자 적성과 은사를 따라 골고루 나누어서 일하는 거예요.  그렇게 서로 다른 우리들이지만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배우며 성령의 인도를 기다리는 것이죠. 비본질적인 것에 있어서는 ‘Diversity’, 다양성을 인정해야 돼요.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돼요. 매사에 똑같을 수 없어요.  거기에는 잘 나고 못 나고가 없어요. 비본질적인 것에 있어서는 다양성이에요.

그리고 우리의 섬김, 봉사와 사역에 있어서는 ‘Charity’, 오직 사랑으로.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신  은혜와 사랑으로 일할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부탁이 있어요. 일하다가 힘이 들면 일이 어려워서 그럴 수도 있지만  먼저 내 마음의 상태를 한 번 체크해보세요. 은혜가 바닥 나면 일할 때 마찰이 일어나는 거예요. 모든 섬김에 있어서는 Charity, 이게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안디옥 교회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 자기들끼리만 재미있고 신난다가 아니에요.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어요. 바울과 바나바를 선택해서 선교사로 보내셨어요. 그들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선교여행을 하지 않습니까? 특별히 바울은 평생 세 번 선교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2차 선교여행을 갔을 때에 사도행전 16장에 보니 그는 소아시아 터키 지방에서 선교를 하려고 했는데 성령께서 그 걸음을 막으셨어요.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왜 막으실까?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를 기다리고 있을 때 저 건너 유럽의 마게도냐에서 한 사람이 손을 흔들며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시오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우리를 저쪽으로 부르시는 구나하고 건너가게 돼요. 복음의 물줄기가 아시아 방향이 아니라 유럽쪽으로 건너가게 돼요. 놀라운 일이죠. 하나님이 이끌어주신 거지요.

드디어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마지막 3차 선교여행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직 로마 교회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로마 교회가 잘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하면서 지금 그리스 고린도에서 편지를 쓰고 있어요. 로마에 가고 싶은데 지금 급한 일이 생겼어요. 예루살렘 지역에 대흉년이 들었어요.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에 빠졌어요. 그래서 그리스 지역의 교회에 널리 알려서 구호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가 저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들로부터 이 복음을 전해듣지 않았느냐. 이 영적인 축복을 나누어 받았으니 오늘 재난 때문에 고통 당하는 저들에게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마땅하다. 여러분이 모아준 헌금을 빨리 전달해야 되겠다. 이 일을 마친 다음에 로마로 가겠노라. 여러분을 만나 어떻게 신앙생활 하는가를 보면서 기뻐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여러분이 나를 도와서 파송해  준다면 서바나로 가리라, 스페인으로 가리라. 이것이 나의 꿈이다.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노라’. 이게 사도 바울의 땅끝이에요.

땅 끝이라는 자그마한 표식도 그 앞에 선 사람에게 감동을 주잖아요. 마찬가지로 1 365일 소털 같이 많은 날이 있습니다만 사람이 어떤 날에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잖아요. 우리가 아기를 낳았다. 생일이지요. 하나님이 주신 날이에요. 그날을 얼마나 기뻐합니까? 내가 아이를 얻었다. 소중한 날이죠.  또 젊은 남녀가 사랑하다가 날을 잡아 결혼했다. 그들의 인생에 소중한 날이잖아요. 마침 오늘 우리가 선교40주년을 기념하는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오늘 해가 두 개 떴습니까? 그건 아니죠.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러나 오늘을 소중하게 구별하는 거예요. 40년전 첫 선교사가 이곳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했던 일들, 그의 앞길을 성령께서 인도하셨던 일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곳에 와서 겪어야 했던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부어주셨던 은혜들. 선교사뿐만 아니라 비즈니스맨으로, 가정주부로 와서 살며 겪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 40년 전인 1971 9월에 박창환 목사님이 첫 선교사로 여기에 오셨어요. 그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교회의 윤경일 성도님 같은 경우는 벌써 68년에 들어왔어요. 코데코 회사의 선발대로 들어왔어요. 얼마나 의미가 있는 일이에요. 동시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새시대를 열어가시는 것을 지금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서 역사를 열어가시는 하나님을 봐야 돼요.

여러분, 하나님은 늘 하나님이 이루어가시는 역사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고 바라보는 자를 들어서 쓰셨어요. 똑똑한 자를 쓴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를 보고 그곳으로 나오는 자. 요한복음 1장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러잖아요. ‘와 보라.’ 긴 얘기 하지 않았어요.

교회와 신앙의 역사가 흘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130년 전 언더우드 선교사를 기억합니다. 미국 남북전쟁 이후에 사람들의 마음이 피폐해졌습니다. 나라가 잿더미가 되고 깊은 상처만 남았어요. 그 갈급한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으셨어요. 전쟁의 고난을 통해서 돈을 좇고 인생의 즐거움을 맛보던 모든 사람들이 그 모든 것이 태산같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 폐허 속에서 하나님을 찾게 돼요. 이것이 사람의 한계에요.

사람이 잘 나갈 때는 누구나 이건 다 내가 잘해서 이렇게 된 거라고 흐믓해해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헌금도 하지만 그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거 다 내가 수고해서 얻은 열매라고 생각해요. 그러기에 정말 깊은 은혜는 우리가 깨어질 때 부어지는 거에요.  사업이 부도나고 건강을 잃고 가정이 깨어지고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는 깊은 아픔이 있을 때에 오직 하나님만이 내 마음을 다듬어주셔요. ‘억울합니다가 아니고 그 단계를 넘어서서 그렇습니다, 하나님. 오늘의 이 재난과 고통과 아픔이 누구 때문이 아니라 결국 나의 무지, 불신앙, 불순종 때문입니다.’ 사실 이렇게 고백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자존심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누구에게 그런 약한 모습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뒤흔들어 놓으시는 거예요. 전쟁으로 무너진 민족에게 새로운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6.25전쟁의 아픔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왔던 거죠.

미국도 예외가 없었어요. 무디 부흥운동을 통해서 새로운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수많은 대학생 젊은이들이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헌신했어요. 언더우드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어요. 언더우드는 원래 인도를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어요. 선교 집회를 좇아다니면서 열심히 듣고 배웠어요. 그런데 어떤 선배 선교사가 와서 보고를 하는데 그 가운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은둔의 나라, 조선을 소개하는 거에요. 우리 나라가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에게 억지로 개항 당하잖아요. 그러자 다른 서구 열강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서로 통상조약을 맺자고 해서 1882년에 미국이 우리와 조미수호조약을 맺었어요. 이렇게 조선의 문이 열렸는데 선교사가 한 명도 없다는 보고를 한 거예요. 조선으로 갈 선교사를 찾습니다. 여러분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언더우드도 함께 1년동안 기도했어요. 그러면서 조선으로 갈 만한 사람을 계속 찾았어요. 아무도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 ‘왜 너는 가지 않느냐?’ 자기는 인도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그렇구나. 하나님이 나를 조선으로 부르시는가 보다.’ 그래서 선교부에다 청원했는데 안 된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이미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거예요. ‘ , 다른 사람이 갈 모양이로구나’. 다시 인도 선교사 지원서를 내려고 하는 순간에 성령께서 그를 막으셨어요. 마지막으로 선교본부를 다시 방문하고 결정을 지어야 되겠다.  선교본부를 찾아가서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순간에 우체부가 먼저 문을 열고 나왔어요. 들어가서 선교부 총무를 만났더니 그는 편지봉투를 손에 들고서 자네 잘 왔네. 조선으로 가라고 준비시켰던 사람이 갈 수 없다고 편지를 보내왔네. 자네가 가게.” 결국 언더우드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조선으로 들어왔어요. 마치 바울을 유럽으로 부르신 것 같이, 인도로 가려고 의학을 공부하던 언더우드를 하나님께서 조선으로 보내셨어요.

그런데 언더우드는 우등생이었어요. 우리 나라에 첫 선교사로 온 언더우드, 아펜셀러는 각자 신학교에서 최우등생들이었어요. 하나님께서 잘 준비된 사람들을 첫 선교사로 보내주신 거죠.  언더우드가 우리 나라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하나님께 드린 유명한 기도가 있어요. ‘하나님, 이 땅이 어쩌면 이렇게도 황량합니까. 아무런 반응도 없습니다.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서양사람들에 대해서 딱 마음을 걸어 잠그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놀랍게도 교회 역사 100년 만에 이렇게 부흥을 일으킨 민족과 나라가 없어요.

오늘 한국 교회가 10여 년 전부터 후퇴의 조짐을 많이 드러내고 있어요.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방향을 찾지 못한 거예요. 자기만족에 빠진 거예요. 건물과 머릿수와 돈에 그만 연연해하다가 하나님의 방향을 놓친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흔들어 깨워서 지금 전세계에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어요. 다 연약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사람들을 파송하고 계셔요.

미국 선교사들은 대부분 나오기 전에 잘 훈련 받고 준비해서 나와요. 체계적인 훈련을 받고 나와요. 나오면 또 선배 선교사가 있고 만들어 놓은 선교베이스가 있어요. 인수인계를 잘해요. 그러나 한국 분들은 일하는 스타일이 아예 달라요. 여러분하고 똑같아요. 일단 나와요. 그 준비훈련 답답해서 못 받아요. 현장에 나와서 직접 몸으로 부딪혀요. 여러분이 그런 식으로 비즈니스를 시작하는 바람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선교사님들도 지켜보면 대부분 우리하고 똑같이 고추장 먹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급해요. 그래서 역시 하나님이 다루시는 방법이 서구식과 달라요.

그러나 감사한 것은 우리 한국 사람들처럼 은혜 받으면 저 죽을 줄 모르고 내어드리기를 기뻐하고  아프리카든 어디든 물불을 가리지 않고 가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거예요. 그 열정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예요. 그러니 생긴 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일본사람으로 태어나지 않고 한국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너무 감사해요. 한국사람들은 기질이 너무 드라마틱해요. 2002 한일 월드컵에 응원을 그렇게 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쏟아져 나온 우리도 몰랐으니 온 세계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 이후에 한국사회에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정치에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많은 변화가 일어났죠.

인도네시아 한인공동체도 마찬가지에요. 더 이상 한국은 고립된 나라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쓰시기로 작정하신 거예요. 인도네시아는 오늘날 땅끝이에요. 이슬람 선교의 교두보에요.  첫 한인선교사로 박창환 목사님이 오셨어요. 서만수 목사님이 재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만 제가 기록을 확인해보니까 한국에서 출발하기는 서목사님이 먼저 출발하셨어요. 며칠 먼저 나오셨어요. 그런데 인도네시아에는 박 목사님이 먼저 도착하셨어요. 서 목사님은 싱가폴을 거쳐서 들어오시느라고 71년 말에 오셨어요. 박 목사님은 곧바로9월 중순에 들어오셨어요. 인도네시아 교단에서 지정해주는 대로 방카섬에 가서 유치원 사역을 하다가 만3년 만에 한국 장로회 신학대학에서 부르는 바람에 들어가셨죠. 서만수 목사님은 여기서 40년 동안 일하셨어요. 그러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어요. 두 분 다 너무나 귀하신 분들이죠.

오늘 인도네시아 교회는 30년 전의 한국 교회의 모습과 비슷해요. 열심히 모이고 열심히 기도하고. 30년 전에 한국 교회가 100주년을 맞아 백만 명씩 모여 기도하고 헌신했던 그 모습을 지금 인도네시아에서 보고 있어요.  내년에 ‘WPA(World Prayer Assembly 세계기도성회)’가 자카르타 스나얀 대운동장에서 열립니다. 1984년 한국이 기독교 100주년을 맞았을 때에 한경직, 김준곤 목사님이 주도해서 세계중보기도대회를 열었는데 정작 우리는 잘 알지 못했어요. 내년에 열리는 모임이 제 2회가 되는 거예요. 30년 만에 열리는 뜻 깊은 집회인데 기도하고 성장하는 민족과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신 거예요.

우리가 지금 자카르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잘 아셔야 돼요.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주도적인 관심이 지금 여기 있다 한다면 여기가 땅 끝이란 말이에요. 태초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주도적인 계획이 현재 진행형으로 움직여가는데 지금 여기를 지나가고 있어요. 성경을 보면 참 재미있는 표현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에 눈이 먼 소경 바디매오가 그 소식을 듣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짖어요. 예수님은 항상 지나가셔요. 정면으로 오시지 않고 지나가셔요. 부르짖는 것은 우리의 몫이에요.  주여 나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내게 오셔서 나를 붙들어 주세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시끄럽다고 하고 잠잠하라고 얘기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주목해서 들으시고 마침내 부르셔요. ‘내가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  주여 눈 뜨기를 원합니다.’ 결국 눈을 떴어요.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 해주시기를 원합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십자가를 지러 올라가실 때에 아무리 봐도 지금이 결정적인 순간이다하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예수님의 이모인 어머니를 동원해서 압력을 넣잖아요. 예수님이 나중에 혁명을 일으키셔서 왕의 보좌에 앉게 되면 야고보와 요한을 그 좌우에 앉게 해주십시오, 그러잖아요. 그랬더니 예수님이 뭐라고 그럽니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구하는지 알지 못하는 도다.’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녔는데 무엇을 구하는지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다고 책망하셔요. 제자들은 알지 못했는데 여리고의 소경 바디매오는 주님을 부르짖어 외쳐요. 뭘 원하느냐 했더니 단번에 얘기해요. ‘눈 뜨기를 원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눈을 떴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그들은 곧 예수님을 좇았다는 말이에요.

여러분, 눈 뜨세요. 지금 예수님이 우리 곁을 지나가고 계셔요. 그걸 알아야 됩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자리에 있을 겁니다. 우리의 마음과 기도와 헌신으로. 사도행전 1 8절이 우리 교회의 방향입니다. 우리는 한인사회를 잘 섬기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한인사회와 더불어 살아가며 한인사회를 섬기며 한인사회를 이끌어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또 이 인도네시아에 파송된 선교사들에게는 베이스캠프가 되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정상에 도전하는 선교사들을 위한 베이스캠프가 되어서 그들을 후원하고 기도하면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사도행전 29장을 써나가려고 합니다.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의 꿈이 있고 열망이 있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어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갈 때 우리 삶에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