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00425 구원을 얻는 복음(고전 15:1-11)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0. 09:17

 

100425 구원을 얻는 복음 (고전 15:1-11)

성경본문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저는 평택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저는 학교가 참 좋았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교장 선생님이 아주 멋쟁이셨어요. 교장 선생님이 장로님이셨는데 입학을 했더니 성경 시간에 성경을 가르쳐주셔요. 할아버지같이 푸근하시고 흔히 교장 선생님의 까다로운 이미지가 없어요. 학생들이 다 좋아해요. 소풍 가면 학생들하고 같이 어울려서 춤도 추시고 그래서 교장 선생님이 나가시는 교회에 학생부가 부흥했어요. 학생들이 많이 몰려갔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나를 이끄는 사람을 통해서 예수를 믿기 시작합니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참 중요해요. 오늘 읽은 말씀을 보니 사도 바울이 이렇게 얘기했어요.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 내가 받은 것을 또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이렇게 복음이 흘러 흘러 세대를 넘어서 아브라함 이전부터 오늘 우리에게까지 온 것이지요. “여러분 들은 그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다른 데 가서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마세요. 이미 우리가 들은 말씀과 복음 속에 다 들어 있는 거예요. 복음을 전해 받은 사람의 입장으로 보면 이건 참 놀라운 은총이에요. 내가 똑똑해서 그 길을 찾은 것이 아니에요. 들려진 복음이에요. 또 복음을 전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존재의 목적을 이룬 사람이에요. 가장 행복한 사람이에요. 가장 귀한 것을 받았고 가장 귀한 것을 나누어주었기 때문이에요.

저는 가끔 기도 중에 조카들을 기억합니다. 시집가고 장가간 조카들을 기억할 때 예수 잘 믿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있어요. 우리가 예수를 잘 알지 못해 결혼하고 사는 동안에 어려움이 많았던 걸 생각해보면 환란과 풍파가 더 심해진 요즈음 새롭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저들에게 정말 하나님이 소망이고 구원인데 그것을 붙들지 못한다면 얼마나 고통이 클까? 생각하면 기도가 간절해져요.

우리 신앙이 그래요. 여러 사람의 손길을 통해서 교회에 걸음을 내디뎠어요. 이제는 독립할 때가 된 거예요. 내 신앙고백을 할 때가 된 거예요. 내 아버지 어머니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 또 그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을 발견하고 고백해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암송하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사도신경이라고 하는 것은 사도들의 신앙고백이라는 뜻이에요. 성경에 있는 말씀을 압축해서 신앙의 핵심을 잘 정리한 거예요. 창조주 되시고 아버지 되시는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과 거룩한 교회 성교회’, 부름 받아 한 가족이 된 성도’, 이 다섯 가지 내용이 핵심이에요. 사도신경이 오늘 예배 중에 고백하는 형태로 만들어지는데 수백 년이 걸렸어요. 예수를 믿고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의 신앙고백을 어떻게 하면 정확하고 분명하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기도하고 논의한 끝에 만든 거예요. 수백 년 동안의 신앙의 역사를 단 일 분 만에 고백해버린 거예요. 그러다 보니 그 의미를 놓치기 쉬워요.

사도신경이 만들어지기 전에 신앙고백의 원초적인 형태가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있어요. 고린도전서 15 3절 하반 절부터 5절까지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그리스도의 죽음을 이야기해요. 두 번째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서 게바 베드로에게 보이시고부활을 얘기해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게 우리 신앙의 핵심이에요. 특별히 부활은 아직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사건이에요. 신비로운 사건이요.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건이에요. 왜 이 부활을 이루셨느냐 하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라는 증거로 부활을 이룬 것이란 말이에요. 이 두 가지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더 압축을 하면 하나로 말할 수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그런데 성경대로라고 말해요.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구약성경을 말하는 거죠. 구약성경에 예언된 말씀대로 이루어졌다.

십자가 사건은 그저 어쩌다 보니까 그냥 십자가에 매달린 게 아니에요. 이미 구약성경 몇 천 년의 역사 속에 하나님이 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고하신 것을 이룬 것이에요. 이번엔 더 중요한 얘기를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 부활로 엄청난 의미가 있음을 증명한 그 죽음, 성경대로 이루어진 그 죽음이 누구를 위한 죽음이냐?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라는 표현에서 우리가 자꾸 속아요. 여기서는 를 말하는 거예요.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내가 무슨 문제가 있기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지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실 때 아름답게 만물을 만드시고 모든 솜씨를 다하여 인간을 지으셨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어요. 이 땅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어요. 모든 만물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어요.

그런데 그만 인간이 사탄에게 속아서 네가 이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같이 되리라는 말에 속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순간 자기의 허물을 알게 됐어요.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됐어요. 무력한 것을 알게 됐어요. 하나님을 떠난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어요. 그 삶에 어둠이 덮여버렸어요. 그게 바로 죄예요. 갓난아기도 말이지요, 조금 자라면 자기 고집대로 하려고 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주제에 엄마를 뿌리치고 내가 하겠다고 고집대로 해요. 하나님 앞에서는 갓난아기와 다를 바 없는 우리의 모습이에요. 여러분, 그게 죄예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무한한 권세로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거부해버렸어요. 고아와 같이 집을 나와버렸어요.

이제 제한된 자기의 능력을 가지고 이 험한 세상을 살려고 해요. 탕자같이 부모가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자기 유산을 강제로 뺏다시피 들고 나와서 먼 나라에 가서 내 뜻대로 살아보겠다고 하다가 그만 돈을 날리고 이방인들이나 할 수 있는 돼지치기를 하고 돼지나 먹는 쥐엄 열매도 먹지 못해 굶주리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을 떠나서 내 능력대로 살려고 했던 인간의 모습이에요. 바로 실패한 인간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자기의 아들을 주신 거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뭡니까? 예수님 당시의 정치적 현실과 경제적 상황과 사회적 형편을 보면 우리보다 너무 어려운 상황이지요.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모든 사회는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이 살아가기에 고통으로 가득해요. 특별히 예수님이 사셨던 시대가 그러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속에 예수님의 모습을 보세요. 얼마나 생생한 영적인 현실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교제가 살아 있어요. 하나님을 아바라고 불러요. ‘아바라는 말은 갓난아기가 아빠라고 부르는 바로 그 말이에요. 당시 아람어예요. 다른 종교지도자들은 감히 하나님을 그렇게 부를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감히 죄인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그렇게 부를 수 있느냐?’ 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예수께서 그것을 깨셨어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해주셨어요. ‘그분은 나의 아빠가 되신다. 생명의 주인이 되시고 나에게 모든 것을 말씀하시고 나는 그분 뜻을 따라서 오늘을 살아가노라.’ 정치, 경제, 사회적 현실은 여전해요. 그런데 놀랍게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과 열린 관계 속에서 살아가시는 거예요. 우리들에게 이 삶을 주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어요. 그가 죽으심으로 그를 믿으며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으로 오셨어요. 그게 바로 초대교회 교인들의 모습이잖아요. 오늘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가난과 사회적 불평등과 고통 속에 살아가는데도 초대 교인들의 삶을 보면 힘이 넘치고 은혜가 넘쳐요. 그래서 교회들마다 표어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거잖아요. 더 잘 먹고 잘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자는 것이죠.

우리가 교회를 나와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셔요. 그래서 건강해지기도 하고 사업이 잘되기도 하고 자녀들이 잘되기도 하지요. 그러나 여러분, 이런 세속적인 성공을 넘어서서 더 깊은 은혜의 비밀을 알아야 돼요. 잘못 믿어서 실패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꼭 그렇게만 얘기할 수 없어요. 세상 살아가는 데 하나님이 재능을 달리 주셨어요. 적성도 다르고 기질도 달라요. 어떤 사람은 눈앞에 돈이 글러가는 게 보이는데 어떤 사람은 눈앞에 돈뭉치를 흔들어도 안 보이는 사람이 있어요. 그거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생긴 대로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러나 다섯 달란트를 받았건 두 달란트를 한 달란트를 받았건 간에, 하나님의 의도는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대로 일해서 다섯 달란트를 내놓으면 백점이에요.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를 내어 놓으면 하나님 앞에 똑같이 백점이에요.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부끄러워할 것 없어요. 한 달란트를 가지고 한 달란트를 하나님 앞에 드리면 백점이에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을 바라보고 그걸 부러워하는 것은 빗나간 거예요. 잘못이에요.

세속적인 성공과 경쟁에 매몰되면 신앙을 잃어버려요. 그러면 안 돼요. 원래 복음이라는 말은 승리라는 말이에요. 진정한 승리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세상 어느 사람보다 많은 것을 가진 것이 승리가 아니에요. 여러분, ‘그저 로또 복권 수십억짜리 한번 맞았으면그러죠. 인터넷으로 클릭해서 찾아보세요. 로또복권 맞아 가지고 제대로 된 사람 몇 명이나 있나 한번 찾아보세요. 다 폐가망신이에요. 자기의 분수대로 살아야 하는 거예요. 진정한 승리는 기쁨에 있어요. 잠언 15 13절 말씀에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진정한 승리는 우리의 삶을 감사하는 것에 있어요.

제가 지난 주간에 3 4일로 선교지 방문을 했습니다. 한국에서 신학대학원 동기들 중에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나와 있는 사람이 모두 다섯이에요. ‘모처럼 이번에 한번 어떻게 하는지 보자.’ 그리고 가본 거예요. 다 둘러보고 돌아온 결론은 뭐냐 하면 감사였어요.

동부자바 말랑에 싸앗SAAT’이라는 신학교가 있어요. 현대식 건물로 잘 지었어요. 거기에 친구 선교사가 교수로 왔어요. 어떻게 사는지 다 둘러보고 기념촬영을 하려고 하는데 거기 보니까 분수대 조형물을 잘 만들었어요. 저 위에 생명 샘에서 물이 계단식으로 흘러내려 마지막에는 수영장 같은데다가 예수님이 물에 빠진 베드로를 건지시는 조각상이 있고 거기에 이분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참 구세주다.’ 라는 라틴어가 쓰여 있어요. “여기서 사진 한번 찍읍시다.” 이춘모 선교사님이 카메라를 들고 조정을 하다가 한발 뒤로 물러서는 순간 그만 뒤에 있는 또 다른 자그마한 분수대에 발이 탁 걸려 퐁당하고 물에 빠진 거예요. 얼른 가서 꺼내 보니까 다행히 찰과상 정도였지만 안 꺼냈으면 죽었을 거예요. 사람이 몸을 틀 공간이 없어요.

제가 이번에 절감했어요. 한순간 뒷걸음 잘못하면 그냥 물에 빠지는 거예요. 구원해주는 사람 없으면 죽는 거예요. 물에서 생쥐 꼴로 나오니까 우스워서 웃기는 했습니다만 가만히 집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순간순간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는 거예요. 여기가 후방이라 안전한 거 아니에요. 하나님 품 안이니까 안전한 거예요.

또 살라띠가에서 말랑까지 차로 갔는데요, 길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얼마나 길이 비좁고 위험한지 목이 붙었다 떨어졌다 하더라고요. 여덟 시간이나 가는데 선교사님들은 그런 데를 늘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아찔한 순간이 몇 번 있었어요. 다시 감사하게 되더라고요. 다 하나님이 불러주신 자기 자리가 있어요. 제가 그랬어요. “어떻게 이런 데서 일합니까?” 그랬더니 그분은 반대로 얘기하시더라고요. “전 차라리 이게 낫지요. 전 한인교회 목회는 정말로 못합니다.” 이러더라고요. 하나님이 부르신 모양새가 다른 거지요. 그 생김 대로 쓰시는 거예요.

또 다른 친구 선교사님은 중부 자바 웅아란에 압디엘 신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있는데요. 마침 간 날이 장날이에요. 스마랑 지역에 열다섯 개 교회가 모여 차례대로 부활절 찬양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인도네시아 교인들 찬양하는 거 들어보셨죠? 먹는 거 봐가지고는 도대체 어디서 저런 목소리가 나오나 싶을 정도로 뜨거운 마음으로 찬양해요.

그날 찬양제가 모두 세 시간 걸렸어요. 그래도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마치 7,80년대 한국교회 같아요. 교회마다 부지런히 연습하고 모여서 같이 찬양하고 은혜 받곤 하지 않았습니까? 가난하지만 은혜가 풍성했어요. 오늘날 우리에게 큰 약점이 있어요. 손에 쥔 게 많아졌어요. 다 문 걸어 잠그고 절대로 들어오지 말라고 빗장을 지르고 살지요. 앞집에 누가 사는지 관심도 없어요. 다 이러고 살아요. 행복해요? 사실 불행한 거예요. 그렇다고 7,80년대로 돌아가면 행복하겠습니까? 아니요. 오늘은 오늘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전을 주셨어요. 우리에게 주신 일터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일하고 뜻을 모으고 마음을 모아서 손을 펴서 나누고 베푸는 거예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조금만이라도 인도네시아 이웃들에게 나눠주면 얼마나 풍성한데요.

또 하나는 고난 속에 겸손이에요. 두 친구 선교사님들이 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고 예전에 함께 유럽에 갔다 온 중창단 멤버들이에요. 둘 다 미국에 가서 십여 년 뼈아프게 고생하고 다시 인도네시아로 돌아왔어요. 만나보니까 너무 행복하대요.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가르치는 게 너무너무 행복하대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빌립보 4 1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이거 내가 구하는 대로 하나님 다 들어주신다, 그런 말인 줄 아세요? 그게 아니에요. 지금 로마 감옥에서 말하는 거예요. 로마 감옥에 갇혀서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고난까지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로 받아들인다. 여러분, 그리스도 십자가의 구원과 부활의 승리는 어떤 절망과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셔요. 어떤 사람이 세상을 정복한 사람이냐? 오늘의 모든 삶을 감사로 보는 사람, 감사로 해석하는 사람, 입을 열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 오늘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자였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들어서 하나님의 일꾼을 삼으셨다. 내가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수고를 하지만 그러나 하나도 자랑할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다.” 이런 은혜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