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00704 의심에서 믿음으로(약 1:1-8)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0. 09:22

 

100704 의심에서 믿음으로 (1:1~8)

성경본문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전에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마는 <고통이라는 선물The Gift of Pain>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작가는 폴 브랜드라는 영국 분인데 인도에 가서 의료 선교사로 오랫동안 선교사로 일한 분입니다. 그는 특별히 한센병인 문둥병 전문가입니다. 이병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말초신경의 감각이 다 죽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겁니다. 손을 불에 넣어도 느끼지 못한다는 거예요. 뼈에까지 문제가 생겨 다 썩고 망가져야 그제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치료 시기를 놓친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폴 브랜드 박사는 말하기를 “인간의 오묘한 신체 구조 속에 고통을 느끼는 체계야말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 고통이 있으므로 우리는 또다시 고통을 겪지 않으려는 의지로 노력하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일상적으로 부딪치는 시험에는 고통이 있습니다만 역설적으로 그 고통 덕에 그 시험은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저도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실패해 본 적이 있습니다. 한번 떨어져 보니까 그거 참 괴롭더라구요. 그것으로 인해서 실패해 본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게 되었고 대학을 갈 때는 긴장하면서 준비했고 실패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학생들만 시험이 있는 것이 아니지요. 시험은 우리가 죽는 그날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끝이 없어요. 살아 있는 동안 시험이 없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공동묘지에 가보세요. 거기는 시험이 없어요. 거기는 조용해요. 살아 있는 동안에는 바다 물결같이 늘 다가옵니다. 중요한 것은 시험이 없기를 기대하지 말고 그 시험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준비가 필요한 것이죠.

오늘 본문 말씀에 시험에는 유익이 있다고 말합니다. 시험으로 인해서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고 또 그 시험을 준비하다 보면 실력을 갖추게 되기 때문이죠. 이제까지 잘 몰랐던 것을 바로 알게 되는 것이죠. 심지어는 시험이 왔을 때 인내할 뿐 아니라 유익이 있을 것을 기대하고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제가 아는 선교사님 아들이 있습니다. 10년 전에 독일에서 만났는데 그때 고등학생이었어요. 잠깐 만났는데 참 똑똑하더라구요. 그때 무슨 생각이 다 났는가 하면 우리 딸하고 맺어줬으면 하는 생각이 나더라구요. 그 친구가 아주 건강하고 장래가 훤히 보였습니다. 돈이 많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어려서부터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워 고생도 많았어요.

그런데 얘가 정신이 제대로 박힌 거예요. 얼마 전에 소식을 들었는데요, 독일에서 아르바이트 해가면서 대학을 졸업하고는 군 복무할 때가 되어서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라크의 자이툰 부대에 자원해 갔어요. 그리고 제대하더니 지금 3년째 자전거로 세계 일주를 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2년이면 될 줄 알고 돌아다녔는데 어림도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5년 계획으로 수정하고 지금 3년째인데 현재 시리아에 가 있어요. 인도네시아는 이미 6개월 전에 지나갔어요. <찰리의 자전거 세계일주>라는 그의 홈피에 들어가 보면 날마다 이야기를 올리고 있죠. 대단해요. 그거 쉽지 않은 일이죠. 그 스스로 선택한 시험과 연단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고 그 결과가 얼마나 값있는 것인가를 알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는 시험가운데 특별히 믿음의 시험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말합니다 나도 믿고 싶어요. 그런데 나는 믿음이 없어요.” 여러분, 그러나 잘 생각해 보셔야 돼요.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믿음의 구조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나 일상생활 하는 믿음이나 그 구조는 똑같아요.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얼마 전 뉴스에 보니 버스가 추락해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합니다. 간혹 그런 일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우리가 어디 먼 길을 가는데 걸어갈 수는 없잖아요. 버스를 타야지요. 그런 가능성과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버스를 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아요. 비행기도 타고 기차도 타지요. 먹는 음식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따지고 들면 그거 먹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먹습니다. 저는 언젠가 시내 나가야 하는데 저녁식사 때도 놓치고 해서 거리를 지나다가 잠깐 차를 멈추고 길거리에서 파는 국수를 말아먹었는데, ~ 맛있었어요. 정말 맛있었어요. , 밤에 드시기 바랍니다. 낮에는 지저분해서 눈뜨고 못 먹습니다. 바로 그런 거예요. 다 믿고 사는 거예요. 불완전한 인간끼리도 그런 믿음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데 하물며 만물과 우리 생명을 지으시고 우리 삶에 함께 하시는 완전하신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니 이건 또 무슨 논리예요. 이런 기막힌 역설이 있을 수가 없어요. 불완전한 인간끼리는 믿으면서 완전하신 하나님은 믿을 수 없다. 그건 자기모순이에요.

우리 모두는 아기로 태어나면서부터 이날까지 늘 반복하고 경험하며 일상을 살아왔기에 나이든 만큼 세상을 아는 거예요. 세상에 통달한 사람이 된 거예요. 믿음이라고 새삼 말할 것도 없어요. 내재하는 믿음을 가지고 경험하며 살아왔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피겨는 달라요. 남들은 하지 않는데 김연아가 피겨라는 특별한 기술을 집중해서 열심히 배워 드디어 피겨여왕이 된 것이죠. 그의 일상을 피겨를 중심으로 재구성해서 살아온 거에요. 피겨의 동작이 남들에겐 특별해도 김연아에겐 자연스러워요. 그의 일상이 되고 일부가 되었으니까요.

신앙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베드로전서 5 6~7절에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 이는 주께서 너희를 살피고 계시기 때문이니라.’ 이 얼마나 놀라운 위로의 말씀입니까? ‘주님께 맡겨버리라’

여러분, 우리가 인생길에서 지고 가는 짐 중에 가장 무거운 것은 ‘나’라는 존재예요. ‘자아’라는 짐이에요. 얼마나 불완전한지 몰라요. 제 기분대로 감정대로 멋대로 흔들리죠. 약점과 허물이 있어요. 그래서 살면서 나 자신을 짊어지고 가는 게 너무 힘들고 버거운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셔요. ‘그 무거운 짐을 내게 맡겨라’ 그게 신앙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좀처럼 그렇게 하지 않아요. 세상일은 아무리 불완전해도 믿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면서 서로 맡기고 믿으면서 살아 왔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믿지 못하겠다니. 우리의 생각이 모자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흔들어 깨우시려고 때때로 시험을 주시는 거예요. 어설프게 알고 있는 지식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니까 그 지식을 깨뜨리려고. 차라리 죽을 고생을 하고 병이 들면 하나님이라도 찾는데 어설프게 아픈 것, 이게 문제예요. 죽을 듯이 아프면 당장 병원이라도 뛰어가서 의사에게 왜 아픈지 알려주세요, 고쳐주세요 하는데 어설프게 아프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아요.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만 신교환 전()한인회장이 쓴 자서전이 있습니다. <젊은이여 세계를 향하여 웅비하라> 그 책을 보면 그분이 동경제대(東京帝大)를 나오셨더라구요. 그랬으니 그분이 그 누구의 말을 듣겠어요? 자기 누이가 전도사였는데 예수 믿으라는 말에 ‘이 개명천지에 그런 미신을 얘기 하다니’ 하면서 안 받아들였어요. 그러다가 1944년에 인도네시아로 발령을 받아 나오게 되었어요. 그때 인도네시아에 수많은 일본군들이 고립되어 있었어요.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뒤집어져서 그들에게 식량이 공급되지 않았어요. 일본군의 식량을 자급자족하라는 명령을 받아서 배를 타고 오는데 미국 전투기의 공습을 받은 거예요. 배가 막 깨져나갈 것 같은 상황이에요. 너무나 급한 나머지 갑판에 엎드려서 “하나님 나를 살려주세요. 나를 살려주시면 하나님을 믿으며 살겠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예수를 믿게 되었노라 회고하고 있습니다. 참 어찌 사람은 그렇게 위험한 일을 당해서야 하나님을 찾는지. 그러다가도 조금만 틈이 나면 잔머리를 굴려요. 이게 문제예요.

오늘 성경이 말합니다. ‘지혜를 구하라 절대로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 여러분, 뭘 알아야 될까요. 첫째는 순서를 잘 알아야 돼요. 제가 시골에서 고등학교 다니다가 막판에 서울 학원에 올라 왔어요. 그때 깜짝 놀란 게 있어요. 막판에 자기가 가고 싶은 대학 반에 들어가 공부를 하는데 학원 국어선생님이 그러더라구요. 1번 문제 유형은 어떻고 2번 문제는 어떻고 3번 문제는 어떻다’ 막상 시험 당일에 가서 보니까 너무 놀랬어요. 똑 같았어요. 정말 시험문제를 빼돌렸나 싶을 정도로. 그러나 시험 문제를 빼돌린 것이 아니지요. 그거 밥 먹고 밤낮 그것만 연구하면 다 알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우리 신앙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는 원리가 있어요. ‘사실-믿음-감정’이라는 순서가 있어요. 첫째는 사실이에요. 하나님이 이루신 사실이 있어요. 둘째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따라야 되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우리 느낌에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순서를 바꿔요. ‘뭔가 마음이 뜨거워야 믿을 거 아니냐?’ 감정을 앞세워요 ‘놀랄만한 일이 있으면 내가 믿겠다’ 감정-믿음-사실, 이렇게 가요. 이렇게 가는 한 신앙의 문제는 제대로 풀리지 않아요.

남북전쟁때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언했어요. 북부 흑인노예를 다 해방시켰어요. 드디어 전쟁에서 승리하자 링컨이 선포한 노예해방법은 미국 전역에 공통적으로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어요. 북부에 사는 사람이 전쟁이 끝난지 2, 3년이 지났을 때 남부를 여행하다가 나이 많은 흑인여자를 만났어요. 그런데 아직도 노예살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아니 지금 노예해방이 된지가 언젠데 아직도 노예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그랬더니 “아, 그렇습니까? 나도 어디서 듣기는 들었습니다. 왜 전쟁이 났냐고 물었더니 노예해방 때문이라고 듣기는 들었는데. 그래서 내가 주인한테 가서 물어봤죠. 우리가 해방된 게 맞습니까? 그랬더니 주인이 아니라고 그러던데요. 그래서 또 관청에 가서 관리에게 물었죠. 우리가 노예해방 된 게 맞습니까? 그랬더니 관리가 말하기를 그냥 주인하고 사는 게 낫다고 말하길래 난 그런 줄 알았죠.” 그에게 전쟁이 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자유의 몸이 되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어요. 그 순간 늙은 흑인여자는 “그렇다면 아! 나도 자유를 얻은 것이로군요.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이미 성경이 약속한 법적인 권리를 얻은 거예요. 믿을 때에 내 것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주어진 권리를 남김없이 다 찾으세요. 돈은 다 샅샅이 찾으면서 왜 이 놀라운 권리는 찾지 않으세요? 성경 로마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해결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구나, 성경이 말씀하셨구나, 나는 이제 자유의 몸이로구나” 이렇게 생각을 바꾸면서부터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이제 그만 의심에서 나와 믿음으로 들어가세요. 얼마 전에 제 딸이 모처럼 휴가를 얻어서 여기에 왔다가 20여일 지내다 갔는데요, 막판에 운전 연수하는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연수를 받으면 좋을 것 같더군요.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운전 연수장이 뉴서울수퍼마켓 뒤쪽에 있다는 거예요. 제가 그쪽 동네를 좀 아는데 운전 연수장을 본 적이 없건만 그 뒤에 있다는 거예요. 첫날 제가 딸을 데리고 갔습니다. 갔더니 아주 작은 루꼬가 연수장이래요 차 몇 대가 있더라구요. 훈련차라고 세상에, 기가 막히더라구요 그 동네가 그냥 연수장 이에요. 구분할 것도 없어요. 그러더니 몇 번 기어 넣는 법을 가르쳐 주더니 그냥 나가더라구요. 아니 이게 될려나? 그런데 되더라구요. 동네를 그냥 계속 도는 거예요. 제가 그 다음 날 시간이 없어서 못 가보고 물어봤어요. “오늘 어떻게 했냐?” 그런데 그냥 시내로 나갔대요. 의심할 기회를 주지 않아요. 그대로 기어 넣고 빼고 막 나가라고 하니까 그냥 나가는 거예요. 오직 믿음으로 그냥 붙들고 약 6일을 하더니 이제 좀 빽미러가 눈에 들어오고 할만 하대요. 그 아이가 자전거를 1년 만에 배운 아이예요. 그런데 운전을 6일 만에 배우더라구요. 여러분은 믿음을 너무 느슨하게 배우는 거예요. 여러분도 배타고 가다가 공습을 받아가지고 다 죽게 되면 백이면 백 다 엎드려 가지고 하나님 나 좀 살려주십시오. 나를 살려주시기만 하면 내가 하나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런 방법은 너무 치사하지 않겠어요? 그건 교만한 사람을 꺾기 위해서 쓰는 방법이지 신사 숙녀에게는 그런 방법을 쓰지 않으셔요. 여러분이 알아들을 때까지 하나님은 묵묵히 기다리셔요.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에 있었던 일이에요. 고등학생이 됐으니까 얼마나 신이나요. 학교 매점에 가서 배지를 달라고 했더니 중학교 1학년 배지를 주는 거예요. 그 학교는 중고등학교가 한 울타리로 되어 있는 학교이고 매점도 하나뿐인 학교거든요. 제가 그 중학교를 나왔거든요. 제가 그 매점에서 사 먹은 빵 값만 해도 얼만데, 매점 누나가 날 잘 아는 줄 알았는데,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제 책임이에요. 고등학교 1학년 때 키가 151센티미터였으니 누가 저를 고등학생으로 보겠어요. 그러니 중학생 배지 받는 건 당연하지 않겠어요? 왜 그러냐면 제가 밥을 안 먹었거든요. 밥이 안 들어 가는 거예요. 이게 약이에요, . 그래서 우리 아버님이 너무 화가 나셔서 밥 안 먹으려면 학교에 가지 마라고 할 정도였어요. 여러분 하나님 말씀을 먹지 않으면 신앙이 절대로 안 자라요. 학식으로 신앙이 자라지 않아요. 그런데 고등학교 들어간 다음에는 밥이 막 들어가더라구요. 그때 이만큼 큰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완전한 구원을 만드셔서 선물로 주셨어요. 이것을 기쁘게 받고 살면 그 모든 약속이 우리의 삶 속에 이루어지는 거예요. 믿음은 현재진행형이어야 돼요. 남의 믿음이 아니고 내 것이 되어야 하고 오늘의 믿음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생겨납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만들 필요 없어요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세요. 여러분의 생각을 하나님 말씀 속에 푹 담그세요. 밥을 먹으면 몸이 자라는 거예요 키가 자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들으며 내 생각을 의심으로부터 온전한 믿음으로 바꾸어 가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