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00718 건강한 믿음(마 8:5-13)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0. 09:25

 

100718 건강한 믿음 ( 8:5~13)

성경본문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 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라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여러분은 예수님의 얼굴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보셨든 못 보셨든 어떻게 생겼다고 생각하십니까? 서양 사람들을 통해서 저해 내려오는 예수님의 얼굴사진이 있습니다만 실제로 그것이 예수님의 얼굴이라고 이야기 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얼마 전에 그곳에서 발견된 두개골을 가지고 예수님의 얼굴을 복원했다고 한 사진을 보니까 아주 투박한 농부의 얼굴이었습니다만, 그것도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죠. 어쨌거나 그 표면적인 얼굴만이 전부는 아니겠죠. 마가복음 12 37절에 보니 예수님이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에 백성들이 즐겁게 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즐겁게 들었을까? 제가 설교하면 그렇게 즐겁게 듣는 것 같지 않는데 예수님께서 설교하시면 어떻게 그렇게 즐겁게 들었을까? 그 대목이 궁금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런 물음을 던지셨어요. ‘여러분은 어찌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라고 말합니까? 시편에 읽어보니 다윗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메시야이신 내 주님에게 말씀하시기를 모든 만물을 네 발등상 아래 놓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이 메시야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이 된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백성들이 즐겁게 들었다고 했어요. 이 어려운 문제를 설명하셨어요.

여러분, 예수를 믿기 때 내가 가지고 있는 예수님의 이미지는 중요해요. ‘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이다.’ 중요한 발견이지만 그것만이 전부일까요? ‘예수님은 따뜻하신 분이다.’ 두 가지 이미지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하나로 잘 녹아 있다면 그의 신앙생활은 아주 건강한 거예요. 혹 여러분 가운데 어려서 술 좋아하는 아버지에게서 맞으면서 자란 사람은 ‘하나님아버지’ 그럴 때 그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가 자기 아버지와 중첩됩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뭐라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그 마음으로는 거부감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그게 인간의 모습이에요. 그 문제를 정확하게 해석해서 분리하고 정리하고 해결해놓지 않으면,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찾고 싶고 믿고 싶어도, ‘하나님하고 부를 때 내 깊은 곳에 과거로부터 쌓여 있던 거부감이 치고 올라와서 어지럽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아버지의 이미지를 갖고 있느냐가 중요해요. 맞고 자란 것은 내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러나 내 안에 들어온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내가 해결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로마의 백부장을 만나셨어요. 백부장이라고 하는 것은 부하 백 명을 거느리는 장수라는 뜻이니까 우리 식으로는 중대장이 될 수도 있고, 혹 파견 나왔으니까 대대장이 될 수도 있죠. 그를 만났을 때 그의 믿음을 보고 놀라셨다그랬어요. 온 이스라엘을 다니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을 만났지만 내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보지 못했다. 예수님이 사람을 칭찬하기 위해서 그저 입에 발린 말로 이렇게 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예수님이 깜짝 놀랐을 거라고 생각해요. ‘깜짝 놀랐다고 하는 바로 이점이 우리가 그렇듯이 사람의 몸을 입고 사셨던 인간적인 모습이죠. 인간 예수의 모습이 뚜렷하게 나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신 대목은 성경에 두 번 나옵니다. 또 하나는 광야의 시험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겨내시고 마음이 너무나 뜨거워서 이 기쁜 소식을 누구에게 제일 먼저 전할까 생각하시고 고향에 가셨어요. 나사렛 회당에 가셨어요. 그래서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성경본문을 받아서 읽었어요. 이사야서 61장이었어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려고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이사야서 61장을 읽으시고 엄청난 말씀을 하셨어요. ‘오늘 이 말씀이 이루어졌도다.’ 예수님이 구약 성경이 예언하는 메시야이심을 자기 고향 사람들에게 선포한 것이에요. 그랬더니 마을 사람들이 이게 무슨 소리냐? 저 사람을 알고 저의 가족들이 아직 여기 살고 있는데 그의 어머니가 마리아가 아니냐? 그의 남동생 여동생 여러 명이 여기 같이 있지 않느냐믿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두 번 놀라셨는데 한번은 기쁨으로 놀라신 것이고, 하나는 믿을 줄 알았는데 믿지 않는 불신앙을 보고 놀랐다고 했어요. 인간 예수의 모습이죠.

누가복음 522절에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말합니다. ‘아기 예수가 키가 자라고 몸이 자라고 지혜가 자라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셨다.’ 우리 인간모습의 성장 과정을 그대로 거치셨어요. 또 예수님 자신이 요한복음 828절에서 나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대로 말하고 행하노라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 종말이 언제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그날은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인 나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이게 예수님이 스스로를 낮추어서 말씀하신 겸손의 표시일까요? 아니요.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의 한계 속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사람과 똑같이 이성과 감정과 경험, 그리고 우리가 부딪치는 일상의 문제와 고통과 고난을 몸소 다 겪으신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 날은 하나님께 맡기신 거예요. 심지어 겟세마네 동산의 사건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히브리서 5 8절에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 간구하셨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고 온전함을 이루었다.’ 인간 예수의 모습이에요. 그러나 이렇게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놓쳐서는 안되지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또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특별히 성령이 강림하신 이후에 초대교회가 시작되고,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깨닫게 하시고 눈이 열려서 이제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모습을 뚜렷하게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함께 사셨지만 그는 하나님이셨다라는 고백이에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임을 선포하셨잖아요.

여러분,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이나 거기에 다 스토리가 있어요. 그런데 그 스토리는 어느 한 점을 향해서 이야기가 모아지고 있어요. 그 결정적인 이야기가 뭐냐면 베드로의 고백이지요. ‘주는 그리스도이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을 얼마나 기다리셨던지 이 고백을 듣는 순간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하신 이는 네 아버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 놀라운 비밀을 너에게 보이셨구나.’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는 것을 제자들이 알기를 원했고, 그래서 계속해서 이적을 베풀고 그 이적을 설명해 주시고, 그 이적을 깨닫지 못하니까 다시 반복해서 설명해주셨던 것이죠. 특별히 병자를 고치시고 네 죄가 용서함 받았느니라.’ 죄사함을 선포하셨어요. 바리새인이 깜짝 놀라서 저가 누구인데 죄사함을 선포하느냐. 하나님 외에는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없는데 어찌 감히 참람하게 하나님을 모독하느냐라고 얘기했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들것에 실려온 병자에게 “가라”하시며 일부러 한마디를 더했어요. “네 죄를 용서함 받았느니라. 그러니 네 침상을 가지고 가라.” 이렇게 말 한 이유가 무엇이냐? ‘나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는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믿듣지 말든지 양보하지 않으셨어요. 그리스도를 선포하셨어요. 그래서 요한복음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이 있죠. 그리고 그 말씀은 구약시대에 예언자들을 통해서 기록되고 전파된 말씀이죠. 그게 구약성경이에요. 그 말씀이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이시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 그분을 깨닫게 하실 때 제자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 하는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했어요. 선포하는 말씀, 이것을 케리그마 라고 말해요. ‘그 말씀은 기록되었다.’ 기록된 말씀, 성경말씀이에요. 그리고 이 시간에 강단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선포돼요.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느냐? ‘눈을 감고 꿈속에서 나를 만나주세요.’ 그것은 비공식적인 방법이구요, 잘못된 방법일 수 있어요. 하나님이 택한 공식적인 방법은 강단의 말씀을 통해서 만나는 거예요. 우리가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뜻을 정하고 감정을 전하고, 약속을 하고 그 약속대로 행하고 그 이루어지는 것을 보듯이, 하나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셔요. 이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2 5-10절에서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자기를 낮추시고 자기를 비워 사람으로 오셨다. 이 땅에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게 바로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의 고백이에요. 그는 분명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고 먹고 마시고 희로애락을 같이 했는데, 이제 알고 보니 그분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 가운데 오신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는 500년 동안 예수님이 누구신가 라는 문제로 고민했어요. 그러나 마지막으로 내린 결론은 ‘그분은 참 사람이요, 참 하나님이셨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선포하시고 그렇게 이루셨으므로 우리가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런데 쉽지 않았어요.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성만 강조하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반대로 예수님의 인성만 강조하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2000년 교회 역사 속에 마치 시계추가 왔다 갔다 하듯이 해요, 그러나 예수님의 신성만 강조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인 것 같지만 그건 잘못된 거예요. 그것은 인성을 부인하겠다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것은 거룩하고 눈에 보이는 것은 더럽다는 이원론적인 그리스 철학에 빠져 있는 거예요. 교회 안에서 하는 일은 거룩하고 교회 밖에서 하는 일, 가정에서 하는 일, 일터에서 하는 일은 열등한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잘못된 거예요. 교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거룩한 성전이지만,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시기에 우리 몸은 성전이고 우리가 가서 일하는 가정도 일터도 다 거룩해요. 함께하는 예배도 거룩하지만,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고 있는 우리들이 먹고 마시고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이 모든 일이 다 거룩한 일이에요. 오류에 빠지면 안돼요.

반대로 예수님의 인성만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르네상스를 지나서 계몽주의 시대가 되면서, 과학이 발달하고 사람들이 부를 가지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쳤어요.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시고 우리에게 맡겨놓으셨다. 마치 시계를 만드는 사람이 시계를 만들었지만 그를 산 사람의 손목에서 돌아가듯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만드셨지만 관여하지 않으시고 맡겨주셨다.  이제 이성을 가지고 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파악할 수 있고 고쳐나갈 수 있다라며, 인간 자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어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아들임을 거부하고 그는 인간 중에 가장 고상한 인간이었다, 도덕적인 모델이었다.’ 이렇게 이해했어요.

그러나 여러분, 그렇습니까? 그렇게 이성이 발달해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떠합니까? 참 인간은 대단합니다. 손 안에 있는 휴대폰 하나로 모든 것을 다 처리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 한마디를 곱게 못해요. 자기가 내뱉은 말을 후회해요. 평생을 그렇게 해요. 부끄러운 모습이에요. 그게 인간의 모습이에요. 왜 예수께서 피 흘리며 죽으셨는가를 날마다 일상 속에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어요. 조금 배워서 고상해지는 거 아녜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그분은 뭔가 단단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안돼요. 십자가의 온전한 사랑 아니면 안돼요. 이토록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은 적당히 타협해서 고쳐 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성경은 너는 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토록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옛사람은 죽고 네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가야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는 거예요. 오늘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말합니다.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고통 당하고 있습니다. 고쳐주십시오.’ 가버나움 지역을 지배하는 로마인 백부장이니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마치 그 지역 사령관같이 위세를 부릴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겸손하게 나사렛 청년에게 나와서 무릎을 끓으며 “내 종을 고쳐주십시오.” 하는 그 자세에 놀라신 거예요. 그래서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말했더니 아닙니다 그저 말씀만 하십시오.” 왜 그랬냐면 원래 유대인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지 않아요. 부정 탄다고 생각했어요. 예수님도 유대인이니까 이 사람이 생각하기에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시면 나로서는 영광이지만 혹 예수님에게 누()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아닙니다. 내가 어찌 예수님을 모실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만 하십시오.” 예수님을 깊이 배려한 것이지요.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다음에 나옵니다. “저는 군인입니다. 저에게는 상관이 있고 부하가 있습니다. 우리 군대는 명령하면 그대로 행합니다. 명령이 저 멀리서 왔어도 명령대로 행합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시면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놀란 거예요. 온 이스라엘에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가 없도다. 그토록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날마다 성전과 회당에 나가 공부하고 그 많은 지식과 규례를 가지고 있건만, 정작 이방인인 이 백부장의 믿음만 못하구나!

그러면 여기 핵심은 뭐지요? 많은 지식보다도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있잖아요. 결국 신앙은 자세잖아요. 그게 핵심이잖아요. 실천하는 믿음이지요. 저는 시골 중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만 늘 아쉬운 게 있어요. 음악시간에 노래 한 곡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요. 선생님이 시끄러운 아이들 앉히고 뭐하고 하다 보니 노래를 좀 배우다 보면 노래를 끝까지 배우지도 못해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게 너무 아쉬웠어요. 지금도 기억나는데요. 각 나라의 민요 그런 것도 있었는데 붕아완쏠로 Bengawan Solo도 있었어요. 그때 그런 것 몇 마디 배웠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내 나라 노래도 제대로 못 배웠으니까요. 그런 번잡한 것은 내려놓고 사람이 핵심으로 들어가서 음악시간에 노래 하나 제대로 배워서 평생 기억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우리가 한 시간 예배를 드립니다. 번잡한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런 분이로구나 하면서 실천과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며칠 전 반둥을 갔다가 밤에 돌아오는데, 이 나라 고속도로가 위험하잖아요.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하고 막 달리고. 이걸 타고 집에 가겠다는 내 믿음도 참으로 엄청나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안 갈 수 없잖아요. 믿고 타는 거지요. 여러분, 어두운 밤 반둥에서 돌아오는 그 믿음이면 하나님이 깜짝 놀라셔요. 그 믿음의 물줄기를 하나님께 돌리세요. 불완전한 사람이 그 불안한 상황에서 어둠을 헤치고 달리는데도 불구하고 떡 맡기고 자면서 오기도 하잖아요. 그 믿음의 물줄기를 하나님께로 돌리세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날 거예요.

성경의 이적은 단순히 병자를 고쳤다는데 의미가 있지 않아요. 그분이 누구신가? 예수님이시고 산상수훈의 윤리를 말씀하신 분이시기에 진리다, 그래서 표적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 말씀 속에 이적이 있고 뜻이 있다, 그게 표적이에요. 그러나 예수 믿는다고 다 벌떡벌떡 일어나는 거 아니에요. 죽은 사람이 설령 일어났어도 그 다음에 죽겠지요. 또 죽을 사람은 죽어야지요. 그렇게 계속 일어나 있으면 어떻게 해요.

여러분, 한번 창조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결국 몸을 고친다는 것은 나를 고치신 분을 바라보게 하는 거예요. 내 영을 고치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영적 관계를 바르게 함으로써 나를 바라보고 주위를 보는 눈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거예요. 몸은 비록 장애와 허물 속에 있을 지라도 우리의 영적 관계가 분명한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에요. 우리가 말을 고쳐야 해요. 말은 생각의 표현이라고 했어요. 이 병든 생각을 고쳐야 해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오랫동안 살았습니다만 순간순간 말 한마디를 잘 못하는 병을 고쳐야 해요. 고질병이에요. 죽는 날까지 하나님이 불치병으로 놔둔 거예요. 순간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밖엔 방법이 없는 거예요. 한나 스미스라고, 100여 년 전에 수많은 크리스천들에게 도전을 주었던 사람이 있어요. <크리스천의 행복한 비밀> 이라는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온전히 믿는다면, 그분을 향한 온전한 순종은 가장 완전한 행복이 될 것이다. 대통령 주위에서 그 권력을 두고 싸우는 것을 보잖아요. 그렇다면 가장 완전하신 그리스도 앞에 온전한 순종을 드리는 것은 잠깐 동안 고통이고 고난일지 몰라도 진정한 행복이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 건강한 신앙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