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01114 여호와 이레(창 22:7-14)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1. 10:16

101114 여호와 이레 (22:7-14)

성경본문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이슬람이라는 말은 순종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을 무슬림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순종하는 사람들’, 분사형이에요. 그들에게는 다섯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알라만이 유일한 신이시고 마호멧은 그의 선지자다 라고 하는 신앙고백, 그 다음 하루에 다섯 차례를 지키는 기도, 그리고 가난한 자를 돌보는 구제, 그리고 라마단을 맞아서 한 달 단식을 하는 금식이 있고, 마지막으로 평생 정상적인 건강한 사람이라면 해야 하는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내일부터 5일간 성지순례가 이루어집니다. 다른 때도 갈 수 있지만 특별히 이 기간에 가는 성지순례를 구별해서 하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벌써 메카에 2백만 명이 모였습니다. 매년 이러저러한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서도 신의 명령이기에 늘 모여드는 것이죠. 그러면 그 5일간의 성지순례에서 이루어지는 중요한 일들은 어떤 일들인가?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메카에 카바신전을 지었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카바신전을 7바퀴나 도는 것이죠. 그렇게 시작하고 또 마지막 7바퀴를 다시 돔으로써 그 모든 순례가 끝나는 것이죠.

여러분이 창세기를 읽어보면 아시겠습니다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또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기다렸지만 아이가 없자 사라와 함께 의논을 해서 사라의 여종 하갈을 취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스마엘이죠. 그러나 그것이 가정의 불화의 불씨가 되어서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김을 당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갈이 광야에서 목말라 죽어가는 아이를 보면서 애통하면서 물을 구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성지순례에도 하갈이 자기 아들 이스마엘을 위하여 물을 찾아 헤매듯이 그 두 동산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일곱 바퀴를 왔다갔다하면서 물을 찾는 모습을 재현합니다. 또 그들 말로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데리고 신의 명령을 좇아 희생제물을 바치기 위하여 사흘 길을 갈 때에 세 번이나 사탄이 나타나서 그를 유혹했다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래서 그 유혹했던 사탄을 상징하는 세 개의 돌기둥에 돌을 던지는 그런 행위도 있습니다.

이제 17일이면 ‘Idul Adha’라고 하지 않습니까? Idul Adha라고 하는 것은 희생제입니다. Idul Fitri에 버금가는 것으로서 이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신앙절기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바로 그 일을 기억하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양을 내어주신 것을 기억해서 17일 아침에 바로 모든 사람들이 다 양을 잡거나 소를 잡아서 예배를 드리고 고기를 나누고 하지 않습니까? 성지순례의 하이라이트도 바로 그 사건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철저하게 신의 명령을 좇아서 아브라함과 같은 순종을 드리자 라고 하는 것이 이슬람 사람들의 성지순례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을 조금 달리 입체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오늘 창세기 22장에 아들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자리까지 나아오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아브라함보다 더 불붙는 마음으로 이 모든 일들을 지켜보며 함께 하며 이끌어가는 분이 계셔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거죠. 이슬람교에서는 사람의 죄는 자기가 해결해야 된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과 고행과 이 모든 것을 자기가 다 감당해야 되는 거예요. 예수 십자가는 있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남의 죄를 대신한다 라고 하는 것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아요. 있을 필요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고 그러기에 그런 일은 없었다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바로 예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원초적 사랑이 드러나 있는 것이고 오늘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내어드리는 이 사건 속에도 그 원형이 들어있어요. 먼저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건이 그림자 같이 여기에 반영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아들을 내어 놓으라고 하는 이 시험, 이 대목을 읽을 때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갖습니다. 시험할 수도 있지만 어떻게 이렇게 백 세에 얻은 아들을 다시 내어놓으라고 하느냐. 그것도 짐승을 잡듯이 아들을 잡아서 그 피를 뿌리고 불태워 하나님 앞에 드리라고 하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죠. 거부감이 일어나죠.

바로 그렇습니다. 모든 시험의 본질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바에요. 우리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에요. 그러기에 우리는 혼란에 빠지는 거예요. 그러나 이 혼란은 그 시험을 내어주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가지고 그 신뢰 속에서만 해결될 수 있어요.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방법도 이해되지 않아요. 시간도 이해되지 않아요. 그 상황은 다 이해되지 않아요. 시험의 본질은 그 모든 것들이 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에 시험이에요. 똑같은 문제라도 11 + 11은 얼마입니까? 우리 큰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 때 11 더하기 11을 못 풀어가지고 1이 네 개 있으니까 4라고 답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초등학교 1학년은 좀 어려울 수도 있겠죠. 유치원 때 공부를 잘 안 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어른들에게는 문제가 아니죠. 똑같아요. 똑같은 문제라도 내가 이해가 되는 문제는 나에게 시험이 아니죠. 시험의 본질은 그때도 장소도 상황도 방법도 이해되지 않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내신 그분, 우리에게 시험을 주셨다고 생각하는 그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통해서만 그 시험은 극복될 수 있고 우리의 믿음은 한 단계 더 성숙할 수 있는 거죠.

이미 하나님께서 네 아들을 내어놓아라 하기 전에 이미 먼저 시험이 있었어요. 아들을 주시겠다 라고 약속을 하셨는데 성경의 기록대로 한다면 적어도 아브라함이 75세에 그 약속을 받았는데 100세에 아들을 얻었어요. 누구는 결혼하자마자 애들을 얻는 집도 있는데 어떻게 아브라함은 100세나 되어 애들을 얻었습니까?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나님께서 그 과정자체가 시험이 되게 한 것이죠. 성경을 읽어보면 로마서 4장에서 다 죽은 것 같은 자기 몸을 통해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라고 하는 거예요. 100세에 아들을 얻었다, 이건 기적이었어요. 이것은 사람의 능력을 넘어선, 사람의 지혜를 넘어선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였어요. 이번엔 반대로 그 아들을 다시 내어놓으라고 할 때에 히브리서 11장에 보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이 칼로 피를 흘리고 불살라 죽는다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다시 하나님께서 살리실 것을 믿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이 시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 시험의 목적은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히 붙들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는 거예요. 처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창세기 12 1절에 보면 그 유명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런 약속을 받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이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주셨던 약속의 말씀이에요. 그래서 4절에 보니까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쫓아갔다 그랬어요. 그랬지만 아브라함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이런 말씀이 있었고 또 하나님이 그 상황을 바꾸어가서 그로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셨습니다만 늘 믿음과 불신앙 사이에서 흔들리게 돼요. 오늘도 이 아들을 바치는 사건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결국 합격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에 하나님이 다시 사자를 보내서 이런 말씀을 하셔요. 오늘 바로 본문 가운데 우리가 읽은 본문에 이어보면 16절에 보니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여러분, 아브라함을 처음 불러내실 때 주신 말씀과 아브라함이 100세가 넘어 낳은 아들, 그리고 또 그게 언제일는지 모르지만 이삭이 장성할 때, 아브라함이 120이 넘어서 얻은 그 시간까지도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요. 내가 너에게 복을 주고 너로 모든 사람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부를 때나 수십 년이 지난 오늘이나 똑같아요. 그것을 처음 듣고 또 다시 오늘 이런 연단을 통해서 새롭게 받아들이는 아브라함의 변화만 있을 뿐이에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이 사건의 핵심은 아브라함의 고백에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시험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자기의 신앙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준비하셨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신다. 하나님이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나를 불러서 온 세상의 복의 근원이 되도록, 나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나의 여러 가지 연약함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나를 연단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훈련시키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다. 여호와 이레라는 거예요.

혹 여러분 이런 영화를 보셨습니까? <천년학>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임권택 감독이 100번째 만든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주목을 끌었어요. <서편제>란 영화를 보셨잖아요. 서편제 영화를 또 새로운 각도로 다시 찍은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면 하나하나가 정말 예술입니다. 그 영화를 봤는데요, 다 보고 나서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게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창을 바닥에 깔고 노래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유감스럽게 우리의 노래이건만 낯설어요. 그리고 정작 영화에 나오는 그 창을 부르거나 하는 그런 가사나 내용들이 무슨 소린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참 아쉽더라고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영화의 장면장면은 훌륭했지만 조금 흥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가 말이에요, 이곳에서 DVD를 다시 어떻게 얻게 됐는데 거기에는 영어자막이 있었어요. 그 영어자막이 어디에서 효과를 발휘했느냐 하면 창을 부를 때 , 이게 이런 내용을 부르고 있구나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단 말이에요. 우리말로 부르지만 창으로 부르다 보면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는데 영어자막을 보니까 , 이게 이런 뜻이구나하면서 그 전체적인 스토리와 내용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고 감동이 있었다는 말이에요.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신앙이 그래요. 우리가 늘 말씀을 듣는데 듣기는 들으나 정작 알지 못해요. 그 말씀을 내가 제대로 알았다면 기쁨으로 순종했을 거예요. 더 하나님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거예요. 여러분 신앙이 뭐겠습니까. 처음에야 잘 모르니까 그저 체면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고 얽히고 설켜가지고 아내 때문에 나오기도 하고 애들 때문에 나오기도 하고 친구 때문에 나오기도 하고, 뭐 여러 가지 동기와 이유로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 말씀을 하나하나 듣게 돼요. 그럼 어떻게 돼요. 결국 그렇게 가다가 나의 삶 속에 간섭하시는 그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체험하면서 마지막에는 어떻게 됩니까? 마치 부활 이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주시고 베드로에게 다시 한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말씀하시고 베드로의 고백을 받으신 다음에 이런 예언을 하시잖아요. ‘이제까지는 네가 스스로 마음대로 돌아다녔지만, 이제부터는 너는 두 팔을 벌리고 네 몸을 내게 내어 맡기면 내가 성령의 띠로 너의 허리를 묶어서 너를 이끌어 가리라.’ 그런데 그것이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 주셨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갈 수 있는 거예요. 성숙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환영하며 가는 사람이에요. 교회 일을 많이 하는 사람, 아니에요. 지금 하나님에 대해서 밝고 건강한 이미지를 가지고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라면 틀림이 없다, 내 계산과 내 생각과 다르지만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이런 말씀을 주셨다고 생각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좇아가는 거예요. 그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이에요.

제가 지난 주간에 책을 한 권 읽었는데 참 많은 도전과 은혜를 받았어요. 미국 뉴욕에 Promise교회가 있어요. 알고 보면 뉴욕순복음교회인데 이름을 바꿨어요. 거기의 김남수 목사님이 뉴욕에서 한 30여 년 목회를 하셨더라고요. 그런데 그분에 관한 책을 읽어보니 그가 아주 어려서 강원도 산골에 살 때 그 어머니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니까 그래도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무언가 다르다 라고 판단해서 아무것도 교육환경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그곳에서 자기 아들들을 어릴 때에 교회를 나가게 했어요. 아버지가 반대하지만 몰래 나가게 했어요. 그런데 이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얼른 갔다 온 후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업에 재능이 있었는지 벌써 24살에 큰 건축회사 사장에 직원만도 스무 명이고 집을 짓는 대로 얼마나 잘 팔려나가는지 막 왕왕 돈을 벌었어요. 자기가 이렇게 돈을 잘 버는 줄 스스로 몰랐어요. 참 내가 대단하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가 어느 날, 함께 동업하던 친구가 돈을 가지고 도망가버렸어요. 그 바람에 한 순간에 회사가 무너져버렸어요. 그리고 자기도 그것을 어떻게 할 길이 없어서 가족과 함께 야반도주 도망가고 또 빚쟁이들이나 사채업자들에게 피해를 입을까 봐 가족들을 다 흩어놓고 자기는 숨어서 사는데 도저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서 마지막에 죽기로 작정을 합니다.

자살할 생각을 하니까 부모님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래도 가서 인사나 드리고 죽어야지. 부모님을 찾아 차를 타고 가다가 가만히 생각하니 어린 시절 교회가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사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교회를 다녔는데 너무 사업이 불 일 듯 일어나다 보니까 예배도 빠지고 다 흐지부지 되었던 것을 기억해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나 하고 죽어야 되겠다. 서울 뒤에 영천에 자기가 다니던 교회를 가려고 했는데 말이죠, 시내버스 운전수가 그만 멈추라는 얘기도 못 듣고 확 내려가버려 가지고 지나쳐 버렸어요. 서대문에 가서 내렸어요. 서대문에 내렸는데 사람들이 어디론가 많이 몰려가고 종소리가 들려요. 따라가 보았더니 거기가 바로 옛날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서대문 네거리에 있었잖아요, 그 교회를 들어가게 된 거예요. 그곳에 가서 저 뒤에 기둥 뒤에 안 보이는데 웅크리고 말씀을 듣습니다. 최자실 목사님, 옛날 조용기 목사님의 장모님 되시잖아요. 그분이 일본선교를 다녀와서 말씀을 전하는데 놀랍게도 일본에서 만난 젊은 청년의 회심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사람도 젊은 시절에 어마어마하게 사업을 하다가 이렇게 하나님을 모르고 살다가 망했던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나서 이제는 사업을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살고 있다 라고 하는 그런 놀라운 간증을 전해 듣게 됩니다.

그가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고꾸라집니다. 회개합니다. 그리고 한 주간 그 집회를 통해서 은혜를 받고 자기의 삶을 돌아보고 다시 한번 하나님께 결단하게 돼요. 이상하지요. 은혜를 받고 나니까 마음의 평안이 찾아 오는데 아무것도 환경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태산 같은 평화가 임하는 거예요. 빚쟁이들이 있는데 이제는 두렵지도 않아요. 전에는 뒷골목으로 숨어 다녀야 했는데 마음에 너무나 넘치는 평안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분이 자기의 인생을 깊이 생각하다가 신학교를 가기로 작정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신학교에 가기 전에 가족들을 구원하지 않고는 갈 수 없겠다, 그래서 가족을 위해서, 가족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부모님께 나아갑니다. 그런데 이제 십여 살 된 막내 동생이 죽을 병에 걸려 병원에서도 더 이상 못 고친다고 해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집에 돌아와 온 가족의 고통거리가 되어 있는 거예요. 부모님에게 가서 엎드려서 말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만약에 우리 동생이 살아난다면, 고침을 받는다면, 그러면 다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을 믿으시겠습니까?” 그 막내아들의 병으로 인해서 절망에 빠져 있던 부모님이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그렇게만 된다면야 뭘 마다 하겠느냐. 당장 하나님을 믿지.” “그러면 우리 다같이 나가서 예수님 믿읍시다. 하나님은 반드시 고쳐주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그 동생을 쳐들어 업고 삼각산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작정한 날을 매달려서 눈물로 부르짖고 기도합니다. 기도가 약속한 날이 끝나서 동생을 업고 내려오는데 놀랍게 고침을 받은 거예요. 그 가족이 다 예수를 믿고 돌아서게 된 거예요.

그래서 너무나 불 붙는 마음에 신학교에 가서 열심히 공부를 한 다음에 하나님, 저는 교회가 없는 저 시골에 가서 목회하겠습니다.’ 예전에 돌아다니다가 충청도 음성에 교회가 없는 그 마을을 기억하고 그곳에 가서 개척목회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어려운지 밥 굶기를 밥 먹듯 했대요. 너무너무 힘들어요. 아이 둘이 있는데 둘 다 병이 오는 거예요. 마지막에는 두 분이 다 회의가 오는 거예요. 이렇게까지 우리가 주를 위하여 다 내어놓고 헌신하는데 왜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이 없으신가. 사람이기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막 회의가 오는 거예요. 사모님이 먼저 회의가 온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찌 이럴 수 있을까요? 그래서 두 분이 우리 다시 한 번 성경을 봅시다. 만약에 성경에서 하나님이 포기했다는 말이 나오면 우리 포기합시다.” 그리고 성경을 다시 읽습니다. 눈을 벌겋게 뜨고 포기라는 단어를 찾으려고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놀랍게도 포기라는 단어가 안 나오는 거예요.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끝까지 너를 지켜주리라는 말씀, 그것밖에 없어요. 그러면서 믿음을 지켜가고 있을 때, 이제 하나님이 때가 되었는지 그들을 부르셔요. 놀라운 역사로 그들을 부르셨어요.

베트남에 선교사로 나가게 됐는데 놀랍게도 그 교단에서 베트남 선교사를 뽑아 보내는데 원래는 미국 선교사로 뽑았어요. 미국 선교사 한 사람 뽑고 베트남 선교사로 젊은 한 사람을 뽑았는데 이 젊은 분이 불평을 하는 거예요. 지금 베트남이 전쟁터가 되고 이런데 장가도 안 간 나를 베트남으로 보내다니 하고 투덜투덜 대고 불평하는 것을 듣고는 이 분이 그 분에게 제안했어요. 듣고 보니 그러니까 당신이 미국으로 가고 내가 베트남으로 가겠습니다. 교회에다 얘기해서 베트남에 갔는데 1974 2월에 갔어요. 베트남이 1975 4월에 망했는데 완전 전쟁터 한복판에, 불구덩이 속에 들어간 거죠. 그런데 얼마나 놀랍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지 모든 사람이 다 도망가고  다 후퇴하고 나라가 망하는 그 와중에 마지막 헬리콥터에 하나님께서 한 미국 선교사를 불러 보내셔가지고 그를 끄집어내셨어요. 그리고는 이번에 또 독일로 보내요. 광부와 간호사들을 중심으로 모여있는 교회에서 또 섬기게 해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때가 됐는지 하나님께서 그를 뉴욕으로 보내셨어요.

목회하면서 저는 아직 어려워서 밥을 굶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분의 어려움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을 실감해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딱 하나에요. 이분에게 나는 죽었구나라고 하는 이런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으시고, ‘하나님 이제 나는 죽었으니 하나님 마음대로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고백할 때부터 하나님이 그를 들어서 쓰시고 그의 생각 속에 비전을 주셔요. 이번에는 미국 뉴욕에서 30여 년 목회를 하시면서 하나님이 그에게 큰 비전을 주셨어요. 앞으로의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를 볼 때, 지금 기독교가 역삼각형이 되어 있어요. 나이가 어릴수록 교회를 나오는 아이들이 적어요. 왜 그런지 알아요? 지금 부모들이 잘못 믿고 있기 때문에. 부모들이 다 내 자식의 신앙은 자기들이 커가지고 결정해라,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건 뭘 말하고 있냐 하면 부모세대의 불신앙이에요. 하나님을 믿는다지만 믿지 않는 거예요. 그 피해를, 그 결과를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이 고스란히 당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옛날 어린 시절에 우리 부모들이 못 배웠어도 하나님을 향해 믿음은 가지고 있었기에 그 어린 시절 우리를 다 교회로 보내고 해서 믿은 거예요. 오늘날 예수를 믿는 사람의 70%는 다 고등학교 이전에 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닌 경험이 있고 뿌린 씨앗이 있기 때문에 오늘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우리 어린 아이들, 학생들은 텅텅 비어있어요.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책임이에요.

이 분이 ‘Four, Fourteen Window’ 그러니까 네 살부터 열네 살까지, 이 어린 아이들을 신앙으로 양육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에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 여기에 뜻을 두고 지금 사역을 하시는 거죠. 그래서 이 분이 세계  수많은 곳에 선교를 하면서 특별히 크리스천 학교, 미션 학교를 세우는 거죠. 학교를 세워서 어린 아이들을 신앙으로 양육하는 일, 그것만이 그 아이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 아이의 인생을 구원하고 그 아이를 통해서 이루어질 모든 일들을 구원하는 일이라고 하는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에 꼭 목사로 부르는 거 아니에요. 한국에 석봉 토스트라고 유명하지 않습니까. 충무로에서 토스트를 만들어 팔던 그 분이 지금은 어마어마한 프랜차이즈를 이루는 큰 기업을 이루게 됐잖아요. 그 분은 사실 원래 신학생이었어요. 그러다가 너무 가난해서 그 일을 다 내려놓고 빵 굽는 일을 하다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비전을 발견해요.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이 사업을 통해서 후대들을 위하여 아름다운 교육기관을 일으켜서 아이들을 신앙교육 하겠다는 게 그분의 사업의 목적이에요. 여러분이 사업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돈을 많이 벌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쓰겠다 라고 하지 않는 한은 그것은 풍랑에 흔들리는 돛단배 같은 거예요. 언제 어떻게 될는지 모르는 거예요. 우리가 IMF 때 한국의 수많은 내노라 하는 재벌 기업들이 하루 아침에 무너진 것을 알잖아요. 한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마찬가지죠.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는가, 그 고백이 분명해야 돼요.

오늘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통해서 고백을 얻었어요. 처음에 자기를 부르실 때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고 한 그 말씀대로 하나님은 깨닫지 못했던 나를 시험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믿음이 없었던 나를 연단을 통해서 그 믿음이 자라나게 하시더니 드디어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구나 이렇게 고백하게 되는 거예요.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준비하셨다. 그 산의 이름을 모리야라고 그랬잖아요. 여러분, ‘이레라고 하는 말, ‘준비한다라는 말이에요. 모리야 라는 말은 이 말의 분사형이에요. ‘준비되고 있는 곳이런 뜻이에요. 교회는 모리야산이에요.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신앙을 준비하는 곳이에요. 여기서 하나님이 다 우리를 위하여 친히 준비해나가셔요.

욥기 23 10절에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우리의 신앙을 한 번 점검해야 되겠습니다. 내 인생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친히 내 인생의 길을 준비하신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