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801 용서와 은총 (창 50:15-21)
성경본문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5년에 걸쳐서 쓴 작품입니다. 등장인물만도 580명이나 됩니다. 이 작품을 다 쓰고 나서 톨스토이는 2년 동안 완전히 탈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작품이 나오는 그 뒤에는 그를 돕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의 아내 소냐가 있었습니다. 낮에는 남편이 부지런히 글을 쓰면 아이를 돌보던 소냐는 저녁에 그 남편의 원고를 다시 깨끗하게 옮겨 씁니다. 그러기를 무려 7번이나 했다고 합니다. 방탕했던 귀족청년 톨스토이는 30대 중반에 열일곱 소녀를 만나서 결혼합니다. 그리고 한평생 살면서 13명의 자녀를 얻습니다. 그는 평생의 반려자였죠. 그는 모처럼 자기의 흔들리는 마음을 아내에게 넘겨주면서 새로운 출발을 맞이하려고 결혼하며 아내와 이런 약속을 합니다. 서로의 일기를 나누어 보자고. 그리고 이제까지 결혼하기 전에 자기가 썼던 모든 일기를 아내에게 공개합니다. 거기에는 젊은 날에 방탕했던 그의 모든 일들을 다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소냐에게는 평생에 상처가 됩니다. 거기에는 여인들과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냐는 남편이 자기에게 애정을 표시하더라도 이 사람의 첫사랑은 내가 아니다 라고 하는 그 생각에 매이게 됩니다. 그리고 특별히 엄청난 지주였던 톨스토이의 소작농 중에 한 사람이었던 ‘악시냐’ 라고 하는 여인과의 관계, 그리고 그들 사이에 태어난 톨스토이를 똑 닮은 아이를 볼 때, 분노를 이기지 못합니다. 소냐의 일기에 보면 남편은 그녀의 탄탄한 몸매와 그을린 다리를 훔쳐보고 있다. 그녀는 그렇게 남편을 유혹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 소냐의 그런 일기가 쓰여져 있을 때 이미 그 악시냐 라고 하는 여자는 80이 넘은 할머니였다 라고 하는 거죠. 그 분노에 평생 눈 멀어 그 멍에를 벗어버리지 못했다고 하는 거죠. 용서는 괴롭고 힘든 것이죠. 그 배신의 상처가 깊기 때문이죠. 또 하나 용서는 우리 본성에 없는 것이거든요. 애당초 우리는 용서할 줄 모르거든요. 그건 우리의 의지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죠.
오늘 읽은 성경은 창세기 50장이에요. 천지창조로부터 인간창조와 하나의 하나님의 대하드라마의 큰 막을 내리는 창세기 50장 마지막 장의 스토리입니다. 거기 요셉의 이야기가 있어요. 우리가 요셉을 많이 알지 않습니까. 그는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종으로 팔려갑니다. 남의 나라로 팔려갑니다. 열일곱 나이에 팔려가서 삼십에 애굽의 총리로 서기까지 그는 젊은 시절을 종살이로 그리고 또 누명을 뒤집어 쓰고 옥살이를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다가 총리가 되어서 애굽에 불어 닥치고 그 당시 중동에 불어 닥친 온 세상의 대흉년을 해결하는 해결사가 됩니다. 그야말로 인간승리죠. 그러나 성경은 거기서 끝내지 않았어요. 그 뒷얘기가 사실은 진짜였어요. 애굽의 총리가 되고 이방 땅에서 이방여인과 결혼하면서 두 아들을 얻어요. 큰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 했어요. 이 말은 내 지난 날의 모든 뼈 아픈 과거는 잊으리라 하는 거예요. 배신 당했던 기억과 이곳에서 종살이, 옥살이의 그 아픈 시절은 내가 다 잊어버리겠다는 거예요. 둘째 아들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했어요. 에브라임이란 말은 내가 이곳에서 멋있게 성공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이방 땅에 와서 성공해보겠다 라고 하는 뜻이에요. 과연 그렇게 요셉은 성공했어요.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여러분, 성공했어요. 그러나 그게 완성입니까. 아니요, 아직 내면의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어요. 정작 요셉의 이야기의 크라이막스는 원수 같았던 그 형들, 잊어버리라 했고 또 잊었던 그 형들을 다시 만났어요. 13년 만에 다시 만난 거예요. 문제는 형들과 재회를 했을 때, 창세기 43장부터 형들과의 재회이야기부터 마지막 장까지를 죽 읽어보면 아주 요셉의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형들은 자기를 몰라봐요. 그러나 자기가 볼 때 형들은 지난 날의 사건을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있어요. 괘씸하게도. 자기도 모르게 분노가 일어나요. 내가 이들을 어떻게 고쳐 줄까. 그래서 양식을 사러 온 형들에게 너희는 스파이가 아니냐고 몰아부칩니다. 대혼란에 빠지게 만듭니다. 너희는 스파이가 틀림없다. 너희의 일을 자초지종 다 이야기하지 않으면 돌려보내지 않겠다. 그들의 이야기가 나오죠. 그리고 집안 이야기가 나오죠. 내가 그것을 믿을 수 없다. 너희가 데리고 오지 않았다고 하는 막내 동생을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너희의 말을 믿을 수 없다. 너희를 모두다 옥에 집어 넣겠다. 형제들을 다 옥에다 집어넣어버려요. 그 형들이 어떻게 됐겠어요. 옥 안에서 난리가 났겠죠. 도대체 이게 왠 일이냐. 그러면서 드디어 지난 날 자기들의 죄를 회상하기 시작해요.
그러면서 말하죠. 한 사람만 옥에 가두고 나머지는 너희 가족들이 굶고 있으니 빨리 양식을 가지고 돌아가라. 그러나 네 동생을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이 옥에 갇혀있는 사람을 풀어줄 수 없다. 그래서 형들이 양식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양식이 다 떨어졌어요. 다시 양식을 사러 가야 되는데 막내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총리를 다시 만날 수 없어요. 가까스로 아버지를 설득해서 막내 동생을 데리고 옵니다. 요셉이 자기의 피붙이인 막내 동생을 볼 때 눈물을 참을 수 없어요. 그러나 눈물을 씻고는 시치미를 떼고 또 그들을 더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넣어요. 양식을 다 부어주고 돌아가는 길에 자기가 쓰는 은잔을 자기 막내 동생의 쌀주머니에 몰래 감추게 합니다. 그리고 저들을 보낸 뒤에 군사들을 보내가지고 그들을 다 붙들어 오게 합니다. 너희가 왜 내가 쓰는 귀한 은잔을 훔쳐 갔느냐? 그 사실을 모르는 형들이 말합니다. 누구라도 우리 가운데 그런 사람이 하나 있다면 그는 죽임을 당할 것이고 우리는 모두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 쌀자루를 다 차례차례 푸는데 마지막 자루에서 은잔이 나와요. 베냐민의 쌀자루에서 은잔이 나와요. 형들이 다 기겁을 하는 거예요. 누구라도 그 은잔이 나오면 안 되겠지만 베냐민의 쌀자루에서 은잔이 나오다니. 이제 우리는 죽었구나.
거기에 갈등이 있어요. 고조되는 긴장이 있어요. 위기가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요셉의 의도가 있는 거예요. 형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어요. 그러나 또 하나, 대혼란에 빠져가지고 갈팡질팡하고 알 바를 모르고 고통 당하는 저들의 모습을 보면서 불쌍한 마음에 저들을 용서하려고 합니다. 용서할 마음이 있어요. 그러나 용서가 그렇게 쉽게 되지 않아요. 젊은 날의 그 아픔과 배신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때때로는 냉정한 얼굴로 저들을 대하다가도 북받치는 격정을 이기지 못해서 방을 피해서 울고 옵니다. 드디어 마지막, 사람들을 다 물린 다음에 형제들 앞에서 자기를 드러냅니다. 대성통곡을 하면서 자기를 드러냅니다. 내가 바로 당신들이 종으로 팔아버렸던 요셉입니다. 그러면서 말하죠. 그러나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당신들이 나를 팔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 대기근에서 우리 집안과 우리 민족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먼저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아무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자기를 쏟아놓게 돼요.
그런데요, 요셉이 이렇게 형들 앞에 자기를 드러내며 형들을 용서하죠. 그리고 형들에게 빨리 가서 아버지와 남은 식구들을 다 데리고 오십시오. 이제 흉년이 2년 밖에 안 지났습니다. 아직 흉년은 5년이나 더 지속되어야 되고 어려움이 클 것입니다. 그러니 다 모시고 오십시오. 가족이 다 왔어요. 야곱이 백삼십 나이에 요셉을 다시 만났어요. 그리고 그 땅에 17년을 살다가 야곱이 지금 죽었다는 얘기에요. 야곱의 장례를 끝낸 다음에 형들이 두려움이 생겼어요.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요셉이 드디어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들에게 지난 날의 그 모든 일을 되갚음을 할는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는 거예요. 요셉이 형들 앞에서 내가 바로 요셉입니다라고 자기를 실토한 창세기 45장이 크라이막스인 줄 알았더니 아니에요. 오늘 이 대목이 크라이막스에요. 야곱이 17년 동안 애굽에 살다가 죽었는데 그 17년 동안 형들은 요셉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믿지 못했어요. 두려워했어요.
여러분, 만약에 요셉이 총리가 아니고 평범한 애굽에서 장사하는 사람으로 살다가 식량을 구하러 온 형들을 길거리에서 만났다고 합시다. 그러면 형들이 어떻게 했을까요. 과연 총리 앞에 엎드리듯이 이렇게 엎드리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과연 빌었을까? 저는 믿음이 없어서 그런지 안 그랬을 것 같아요. 용케도 살았네. 권력을 두려워하지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인간이죠.
역사 속에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1077년에 교황 그레고리 7세와 독일의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4세가 부딪힌 사건이에요. 아주 대표적인 세계사적인 사건이죠. 권력다툼을 한 거죠. 그래서 교황이 파문을 명했어요. 파문이에요.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단 말이에요. 그러면 기독교 세계 속에서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는 말은 교황의 보호 밖으로 내친다는 말이에요. 누가 저의 왕위를 빼앗든지 그냥 그대로 인정하겠다는 얘기에요. 저가 누구에게 칼을 맞아 죽어도 그 죄를 범한 사람은 죄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인리히 4세가 궁지에 몰렸어요. 제우들이 들썩들썩하니까 겁이 나가지고 교황을 찾아왔어요. 카노사 성에 머무르고 있는 교황을 만나려고 해도 교황이 만나주지 않아요. 한겨울 눈밭에 맨발로 사흘 동안 무릎을 꿇고 용서해달라고 빌었어요. 사흘 만에 교황이 용서해줬어요. 그래서 황제는 가까스로 그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어요. 여기까지 보통 공부하고 끝내요. 그런데 그 뒷얘기가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그 왕이 정말 용서를 받고 기뻐서 돌아간 걸로 끝났을까요. 아니요. 그는 이를 갈았어요. 그리고 자기의 세력을 규합했어요. 드디어 세를 몰아가지고 교황을 쫓아내고 길거리에서 죽게 만들었어요. 강요된 용서는 용서가 아니에요. 권력이 무서워서 무릎 꿇는 것은 용서가 아니에요. 우리가 왜 용서해야 하는가. ‘용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에요. 왜 그렇게 명령하셨는가? 하나님 자신이 용서하시는 분이기 때문이에요. 마태복음 18장에 종의 비유가 있잖아요. 왕에게 어마어마한 빚을 져가지고 마누라, 자식을 다 팔아도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종에게 왕이 용서해주잖아요. 네가 그 빚을 어떻게 갚겠느냐. 빚 갚지 않아도 좋다. 용서해줬다는 얘기가 있잖아요. 그런데 빚 갚음을 받고 나오는 종이 기뻐가지고 가다가 길거리에서 자기 친구를 만났는데 조금 빚 진 그 친구를 보고는 내 빚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거예요. 그 친구가 조금만 나에게 말미를 주면 내가 갚겠다고 하는데도 막무가내 목덜미를 잡고 경찰서로 끌고 갔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그 주위에서 그것을 본 사람들이 하도 기가 막혀서 왕에게 얘기하니 왕이 다시 불러가지고 그를 감옥에 넣었다는 얘기죠.
여러분,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에요. 그것도 주도적으로 용서하시는 분이에요. 십자가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자기 죄를 알지도 못하고 있을 때에 이미 용서를 다 선포해놓으셨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지 않고는 우리가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음을 아시기 때문에. 마치 우리가 자녀를 낳잖아요. 여러분, 그 갓난아기를 낳았을 때 여러분은 이미 그 아기와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앞으로 네가 살아가는 동안 평생 지을 허물을 내가 다 용서하겠노라고 이미 다 선언하셨잖아요. 저도 그랬는데요. 제가 둘째를 보기 몇 달 전에 말입니다, TV에 아이들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특집방송을 보면서 여러 가지 내용이 있었어요. 그걸 보는 순간 제가 첫째가 딸이었기 때문에 둘째는 혹 아들이면 좋겠다고 하면서 이름도 아들 이름을 하나 지어놨다가 그 프로를 보는 순간 제 욕심이 과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다 내려놓고 주님 그저 건강한 아이, 정말 제가 둘째 아이를 받아가지고 입원실에 옮겨놨을 때 저 혼자 몰래 들어가서 손가락 발가락을 다 헤아려봤습니다. 나머진 다 사치에요. 그 순간 저는 마음으로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평생의 네 허물, 똥오줌 다 받아낼 것이다 했던 거죠. 물론 한 번도 받아내진 않았습니다마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용서하신 거예요. 십자가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죄를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세요. 이게 용서의 시작이에요. 하나님의 용서. 달란트 비유에서 하나님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아가지고 장사해서 이득을 남긴 사람을 칭찬하셨어요. 한 달란트 받은 종이 한 달란트 달랑 그대로 가지고 왔을 때, 야단하셨어요. 왜 그랬는지 아세요?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생각, 주인은 무서운 사람이어서 이 돈을 가지고 장사하다가 이 돈을 다 잃어버리면 야단맞을 것이 두려워서 내가 땅을 파고 이 돈을 그대로 묻어두었다가 이제 꺼내가지고 왔습니다. 주인이 분노하면서 뭐라고 얘기합니까. 너는 나를 그렇게 악한 자로 생각했느냐.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말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세요. 십자가에 드러난 그 한없는 용서로 우리를 받아주시는 분.
두 번째는요,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을 용서하세요. 여러분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다 그대로 받으세요. 한국분들이야말로 이 부분에서 빨리 고쳐야 돼요. 경쟁에 사로잡혀 자기 인생을 다 잃어버렸어요. 남이 그렇게 기업을 잘하고 사업을 잘하는 것은 다 그만큼 능력도 있고 타고난 재주도 있고 기술도 있고 다 있는 거예요. 다 자기 생긴 대로 사는 게 가장 행복한 거예요. 왜 이제까지 남의 인생을 쫓아가면서 내 인생을 허비합니까. 그게 바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고치지 못하는 열등의식이에요. 병든 생각이에요. 하나님이 여러분 나름대로 인생을 꽃피도록 인도하셨어요. 그것을 찾으세요. 여러분 자신을 용납하세요. 받아들이세요. 자기가 용서하지 않고는 남을 용서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의 용서를 받을 수도 없어요.
왜 용서해야 하는가. 용서야 말로 사람으로 하여금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해요. 마틴 루터 종교개혁자는 참 짓궂은 얘기를 했어요. 용서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900년 동안 반복했을 그 말다툼을 생각해보라. 왜냐하면 성경에 보니까 아담이 930년을 살았다고 하니까 타락하고 쫓겨나서 여자가 더 사는 법이니까 말이죠. 한 900년 동안 말다툼하지 않았겠어요. 이젠 그만 하세요. 제일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아내를 용서하는 남자, 남편을 용서하는 아내, 이 사람이 가장 훌륭한 신앙인이에요. 용서야말로 신앙의 극치에요. 이거야말로 비판과 고통의 악순환을 끊어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과거를 감옥으로 만들고 스스로를 가두어두었던 것으로부터 진정 자유를 누리는 거예요. 그리고 늘 다가오는 새로운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다면 과거에 갇히고 절망에 갇히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어요. 또 용서만이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거예요. 놀랍게도 용서하면 가장 먼저 고침을 받는 사람은 용서하는 그 자신이에요. 용서를 받은 그 사람이 어떻게 하는 것을 오늘 봤어요. 요셉은 용서했지만 요셉은 비난과 갈등의 멍에로부터 풀려났지만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요셉의 형들은 17년 동안이나 더 감옥에 매여 있었어요. 용서하는 순간 가장 먼저 자유를 맛보는 사람은 용서하는 사람이에요. 여러분의 인생을 위해서 용서하세요. 남편 아내를 위해서 용서하는 건 이차적인 문제에요. 나를 위해서 용서하세요.
‘헨리 나우엔’이라고 하는 유명한 성공회 신부가 있지 않습니까. 그분의 책은 많은 신앙인들에게 도전을 주는데 그 중에 한 책 <거울 너머의 세계 Beyond the Mirror>라고 하는 책을 보면 놀랍게도 이분이 대학교수잖아요. 그런데 말년에 캐나다의 장애인 공동체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을 돕는 도우미로 살았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을 차에 태우고 다니는 봉고 기사노릇을 했어요. 그러다가 교통사고가 났어요. 죽게 됐어요. 의식을 잃어가요. 그리고 그는 죽음의 세계를 갔다 왔어요. 그 과정을 기록한 책이 바로 <거울 너머의 세계>라고 하는 책이에요.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이 이렇게 죽는 거구나. 모든 의식이 꺼져가는 것 같은 그 순간에 빛이 나타나요. 그리고 주님을 만나요. 그것을 경험하면서 예수님과 죽음 이후의 세상이 이토록 평안하고 이토록 밝고 이것을 알지 못했구나. 그러면서 그 마음에 가장 걸렸던 것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과 더불어 산다고 하면서도 매듭짓지 못했던 그 용서하지 못했던 문제가 그에게 가장 큰 아픔으로 다가왔어요. 내가 왜 이것을 알지 못하고 그 부질없는 일을 놓고 용서하지 못했는가. 여러분 용서해야 돼요. 용서는 믿음의 행위에요.
근처에 ‘Indah Clinic’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무슨 일이 있어서 병원에 갔다가 좁은 대기실에 앉아있는데 어린아이 사진이 하나 있더라고요. 우량아에요. 여자아이에요. 거기에 영어로 재미있는 글귀가 있었어요. 뭐라고 얘기하냐 하면 ‘하나님 저를 날씬하게 할 수 없으시다면 제 친구들을 뚱뚱하게 해주세요.’ 인간의 본성이죠. 그런 마음을 가지고 누구를 용서한다고요. 내가 저를 고치겠다고요. 아니요. 로마서 12장 19절 말씀, ‘원수 갚는 것을 내게 맡기라. 내가 갚으리라.’ 여러분 하나님의 정의를 신뢰하세요. 하나님이 알아서 하셔요. 그건 하나님의 일이에요. 오늘 말씀하셨어요. 원수 갚는 것은 내 일이니까 내게 맡기고 너는 저를 용서하라. 우리가 용서해야 할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 믿는 사람은 용서받은 죄인이에요. 죄인이에요. 단, 용서받은 죄인이에요. 하나님의 용서는 주저함 없이 십자가로 약속하셨으므로 단번에 믿어야 돼요. 그리고 그 믿음으로 사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의 실생활 속에서 우리가 가정에서는 늘 용서해야 되는 거예요. 이런 믿음으로 용서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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