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73] 귀향길에 오른 야곱③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5:38

" 귀향길에 오른 야곱③"
- 브니엘 체험 ; 야곱이 이스라엘로-
창세기32장 1절~ 32절
석원태 목사

  제3장 족장 야곱의 역사(창 27:41-36:43)

  I. 분리(창 27:41-28:9)
  II. 벧엘의 체험(창 28:10-22)
  III. 하란에서의 야곱(창 29:1-30:43)
  IV. 귀향길에 오른 야곱(창 31:1-34:31)
  1. 하란을 떠나는 야곱(창 31:1-55)

  2. 형 에서를 만나는 야곱(창 32:1-33:20)

  분명 가나안으로 되돌아가는 야곱의 길은 기쁨과 소망의 길이었다. 20년 간이나 사모하던 고향의 길이 아닌가! 거기에다 거부가 되어 돌아가는 야곱이고 보면 참으로 금의환향이 아닌가!
  야곱은 하란의 라반에게서 떨어질 때 큰 위기를 겪어야만 했으나,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섭리와 개입으로 그 위기를 오히려 길르앗의 평화조약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런데 야곱의 금의환향 길에 또 하나의 큰 산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20년 전에 헤어졌던 형 에서를 만나야 되는 일이었다. 참으로 산 중의 산, 첩첩산중이었다. 여기에서 야곱은 사실상 그의 인생 일대의 최대 최고의 위기를 맞게 된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라고 하는 창세기 32장 1절 상반절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의 직접적인 배경은 야곱이 하란에서 고향으로 가는 길을 재출발하는 내용이다. 하란에서의 20년 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라반의 위협적인 추격을 받아 위험이 따르기도 했으나, 하나님께서 야곱을 추격하던 라반에게 나타나 그의 소행을 제지시켜 주심으로 다시 귀향길이 진행되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이것은 그가 진행하던 귀향길의 코스를 알려 주기도 한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출발하여 갈르엣(창 31:47)을 거쳐 남쪽 방향, 곧 요단강 북쪽 지류인 얍복 나루터를 향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 창세기 32장 22절에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 새…」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말은 야곱의 귀향 여정이 하나님의 필연적인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이유는 적어도 족장 야곱의 걸음에는 결코 우연이라고 하는 것이 자리를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야곱이 받은 나그네 인생길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야곱의 인생 여정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쉬지 않는 행보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진행의 여로에서 형 에서를 만나야만 했던 것이다.
  창세기 32장은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되는 브니엘 체험의 장면이다. 하나님은 야곱이 산 중의 산인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그에게 브니엘의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복을 주셨다.

  1) 브니엘 체험 - 야곱이 이스라엘로(창 32:1-32)

  (1) 마하나임의 출현이 있었다(창 32:1-2).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추격을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하고 귀향길을 진행하는 바로 그 시간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났다고 하였다(창 32:1). 야곱은 그들을 보고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하였다. '마하나임'이란 '두 영' 혹은 '천사의 영'이라는 뜻이었다. 야곱은 이 뜻밖의 출현 앞에 큰 위로를 받았다. 물론 그에게 천사들이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타난 사실만은 확실하다. 이들이 출현한 것은 다시 진행되는 야곱의 여정에 일어날 위험들에서 그를 보호해 주실 것을 보여 주는 하나님의 사인이다. 그에게 있어서 천사들의 임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야곱을 위하여 보내 주신 임마누엘의 표징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야곱에게 큰 위로와 용기가 되었을 것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2) 야곱은 형 에서에게 문안 사절을 먼저 보냈다(창 32:3-5).
  야곱은 사자들을 먼저 에서에게 보내면서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창 32:4-5)라고 하였다.
  이 말은 ① 그는 아버지 이삭의 재산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과 ② 형에게 어떤 물질적 피해를 입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형에게로 선물을 보낼 의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③ 그리고 자신이 부자가 되어 돌아오는 길이니 형께서 자신의 지난날의 과오를 용서해 달라는 화해의 요구가 들어 있는 것이다.
  (3) 야곱은 자신에게 복수하려는 형 에서의 소식을 들었다(창 32:6-32).
  사실상 형 에서에게 화해의 사절단을 미리 보낸 것을 보면, 야곱에게는 형과의 관계로 인한 불길한 예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예감은 적중한 것이었다. 에서에게 보냈던 사자들이 돌아와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창 32:6)라고 하는 급보를 전했던 것이다. 야곱의 일차 계획은 실패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이때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했다고 하였다(창 32:7). 형 에서의 보복을 본능적으로 직감했기 때문이다. 실로 오랜 세월 동안 야곱을 짓누르고 괴롭힌 뿌리깊은 죄의식의 충격이었다. 군사 400명이란 고대 족장 시대에서는 실로 대단한 군사력이었다. 칼을 의지하고 생활한 자다운 거동이었다(창 27:40).
  우리는 지금부터 에서의 복수를 대처하는 야곱의 처신을 살펴보기 원한다. 그는 첫 번째 화해 사절 계획이 실패로 돌아감을 알고 또 다른 자구책을 계획하였다.
  ① 재산을 등분하였다(창 32:7-8).
  야곱은 자기와 함께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양분하여 두 떼로 나누었다. 그것은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당시 유목인들이 습격을 당할 때를 대비하여 통상적으로 취하던 방법이기도 했다.
  ② 기도하였다(창 32:9-12).
  그의 기도는 실로 진지하였다.
  ⓐ 야곱은 먼저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를 불렀다(창 32:9). 언약의 하나님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하란에 있는 자신에게 나타나셔서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고 하신 약속의 하나님을 찾은 것이다(창 32:9).
  ⓑ 뿐만 아니라 받은 축복을 감사하였다. 창세기 32장 10절에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라고 하였다. 축복의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한 것이다.
  ⓒ 그리고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야곱이 에서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가 와서 자신과 자신의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라고 기도하였다(창 32:11).
  ⓓ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고 시작된 기도, 곧 조상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시작된 야곱의 기도는 다시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그 기도를 마감하게 된다. 창세기 32장 12절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라고 하였다.
  ③ 야곱은 다시 에서를 맞을 계획을 세운다(창 32:13-23).
  그것은 예물을 가진 사절단을 여러 대로 나누어 형 에서에게 보내 에서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일이었다.
  그 예물은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젖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나귀가 열이라」(창 32:14-15)고 하였다. 모두 580마리나 되는 실로 많은 예물이었다. 이것을 보면 야곱이 하란에서 모은 부가 어떠한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리고 야곱은 이것을 여러 파트로 나누어 보내되 각 파트로 하여금 거리를 뜨게 하여 시간을 격하여 차례차례 에서를 만나도록 하였다. 그리고 예물 사절단에게 이르기를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엣 것은 뉘 것이냐 하거든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창 32:17-18)고 하였다. 야곱은 에서 앞에 계속 도착하는 여러 종류의 예물 사절을 만나는 가운데 형의 마음이 풀리고, 그 후에는 자신을 받아 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창 32:20). 그는 여러 차례 형을 기쁘게 하려고 하였다. 형 에서가 마음을 돌릴 최대한의 시간을 준비한 것이다.
  야곱은 그 예물 사절단을 먼저 보내어 강을 건너게 했다. 그리고 그 날 밤을 이용하여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하였다. 그리고 그 모든 소유도 건너게 하였다(창 32:21-23).
  ④ 야곱은 다시 기도한다. 이 기도가 바로 저 유명한 얍복 나루의 기도였다.
  야곱의 기도! 그것은,
  ⓐ 얍복 나루에서의 기도였다(창 32:22-23).
  그는 물이 흐르는 시내를 두고 있다. 이미 처자와 가축떼들과 종들은 물을 건너 고향 쪽 땅으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야곱은 그 강을 건너지 않고 얍복강 나루터에 주저앉아서 그가 취할 마지막 행동을 감행한 것이다. 그는 이쪽과 저쪽 사이의 작은 강을 앞에 두고, 아직 그 마음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해결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다.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다 취하였어도, 그 행동결과의 성취는 하나님 앞에 있다고 야곱은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 밤중의 기도였다(창 32:22-23).
  사방 천지가 캄캄한 시간이었다. 모든 세상이 고요한 때였다. 야곱은 얍복 나루의 공간적인 밤중에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그 어두운 밤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 그의 마음은 고통의 밤, 불안의 밤, 공포의 밤, 불확실한 밤이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인 지난날의 그 어두운 밤을 벗어나고 싶었다. 20년 세월이 지난 이 시간까지도 원한이 맺혀 풀리지 않는 형 에서가 400인의 군사를 거느리고 피의 복수를 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결코 이 문제는 인간 대 인간의 문제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을 직감하였다. 그래서 야곱은 그가 만난 인생여로의 밤을 벗어나기 위하여 얍복 나루터에서의 한밤중에 문제해결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다시 만나기로 한 것이다. 그분에게는 언제나 밝음만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와 너의 만남에 서로의 뜻이 통하지 아니할 때,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가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처세여야 한다.
  ⓒ 홀로 남아 드린 기도였다(창 32:24).
  창세기 32장 24절에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라고 하였다.
  정말 하나님과 일 대 일의 기도였다. 사람이 홀로 되는 경우는 외롭고 적막하고 쓸쓸하고 고독한 지경이다. 사람들로부터 홀로 되거나, 사회적인 활동으로부터 홀로 되거나, 어떤 경제적 소유권으로부터 적신 상태가 되어버리는 경우 정말 죽음에 이르는 비참을 느낀다. 그래서 중한 죄수들을 독방에 가두어 놓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신자들에게는 이 홀로 되는 경우가 도리어 유익한 축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이 홀로 되는 경우야말로 적신 상태의 인간본래를 깨닫게 하고, 이 세상 것이 믿을 수 없음을 실감하게 한다. 또 자기 자신까지도 믿을 수 없는 무능함을 직감하게 한다. 따라서 전능하신 하나님과 단독으로 대면하게 되는 심오한 기도의 지경으로 성화되는 것이다. 결국 인생은 홀로 되어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모세가 호렙 산에서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났다(출 3:1-12). 여호수아가 홀로 있을 때 여리고 성 함락작전의 비전을 받았다(수 5:13-15). 엘리야가 호렙 산에서 홀로 있을 때 세미한 음성의 하나님을 만났다(왕상 19:9-14). 다니엘이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났다(단 6:16-23). 사도 요한이 정배지 밧모 섬에서 홀로 있을 때 종말계시의 비전을 받았다(계 1:9-11). 파스칼은 말하기를 '인생이 고난에 빠지는 것은 고요하지 못한 데 있다.'라고 하였다.
  ⓓ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는 기도, 곧 전쟁하는 기도, 간절한 기도였다.
  야곱은 그곳에서 뜻밖에 어떤 사람을 만났다(창 32:24). 창세기 32장 25절에도 두 번이나 '그 사람'이라고 하였다. 26절에도, 27절에도, 28절과 29절에도 '그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30절에는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은 그 날 밤에 홀로 있는 야곱에게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었다.
  창세기 32장 29절에 보면 야곱이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라고 그 사람의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라고 하면서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했다고 하였다. 그 축복의 구체적인 내용은 '야곱'이란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개칭한 것이었다(창 32:28).
  이런 내용은 사사기에서 마노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의 경우와 꼭 같다(삿 13:19). 그 사자는 마노아에게 「내 이름은 기묘니라」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야곱이 그 날 밤 얍복강 나루에서 만난 하나님의 사자 '그 사람'은 바로 성육신 이전에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이다. 호세아서 12장 4절에서는 여기 '그 사람'을 '천사'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그 사람'으로 그 밤에 야곱을 찾아오신 것이다. 야곱은 그 사람을 붙잡고 밤새도록 씨름하는 기도를 하였다. 여기 '씨름'이란 육체적인 힘 겨루기가 아니고, 정말 간절히 애원하는 강청을 가리킨다(눅 11:8). 야곱이 마치 전투장에서의 병사와 같이 고투하는 상태였음을 알려주는 말이다.
  야곱은 날이 새기까지 그 사람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것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라고 하는 결정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기도였다.
  ⓔ 눈물의 기도였다.
  호세아서 12장 3-4절에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라고 하였다.
  날은 밝아오고, 그 사람은 이제 가야 하니 놓으라고 하는데,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그 사람을 붙잡고 소리칠 때 그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야곱은 울었다고 하였다. 실로 처절한 밤이었다.
  저드슨(Judson)은 말하기를 '어떤 희생을 내면서라도 기도를 유지하라'고 하였다. 사무엘 루더포드(S. Ruderford)는 말하기를 '나는 일곱 지옥을 건너서라도 하나님을 만나리라'고 하였다. 결사적인 기도를 가리킴이 아닌가?
  우는 기도! 밤에 얍복강 나루터에서 야곱이 그 사람을 붙잡고 축복받기 위하여 울었다! 이미 거부가 된 야곱이 아닌가? 그럼에도 그가 원하는 또 다른 축복이 있음이 아닌가? 그것은 영의 평화, 마음의 평화, 죄문제 해결을 받은 평화의 축복이었다.
  ⓕ 환도뼈가 부러지는 기도였다.
  창세기 32장 25절 중에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기지 못했다고 하는 이러한 표현은 야곱의 결사적인 눈물의 간구를 뿌리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여기 '환도뼈'는 엉덩이 아래쪽 넓적다리 상단에 있는 좌골을 의미한다. 골반을 형성하는 한 쌍의 뼈이다(창 24:2). 몸의 중심부분으로 힘과 생명을 상징한다(창 35:11, 46:26, 히 7:10). 이 부분은 고대 병사들이 칼을 차는 부분이었다(삿 3:16, 시 45:3, 아 3:8).
  이 날 밤의 사건으로 인해서 그 이후 한평생 동안 야곱은 걸음을 걸을 때 절었다고 하였다.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창 32:31-32).
  실로 옛사람 야곱이 죽는 순간이다. 육이 죽는 순간이다. 세상의 사람 야곱이 죽는 순간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 야곱이 끝나는 시간이었다.
  ⓖ 축복체험(브니엘)의 기도였다.
  야곱의 결사적인 기도는 마침내 그 사람의 결재를 받고야 말았다. 그 사람이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창 32:27)라고 물었다. 이는 그 이름을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인간적 본성을 되돌아보게 하는 질문이었다. 그때 야곱은 「야곱이니이다」(창 32:27)라고 대답하였다. '속이는 자', '빼앗는 자', '발뒤꿈치를 잡은 자' 등등의 뜻을 가진 어둠의 이름이었다.
  그때 그 사람은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창 32:28)고 하였다.
  그는 그 때로부터 20년 전에 형 에서와 겨루어 이긴 자였다. 하란에서 라반과 겨루어 이긴 자였다. 그는 다시 에서와 한판 승부를 앞에 두고 있었다. 그는 사실상 한평생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다. 신앙의 승리자였다. 다만 방법적인 문제가 따라 다녔다. 이제 그는 하나님과 겨루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자비에 근거하여 약속된 장자 기업에 대한 마지막 보증을 받기 위함이었다.
  그 보증은 형 에서의 복수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결국 그 사람은 야곱에게 지고 말았다. 이 말은 야곱의 결사적인 눈물의 기도에 그 사람이 응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모든 악으로부터의 구원과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 이름은 야곱 개인에게 신기원이 된 이름이었을 뿐만 아니라 선민국가의 대명사가 되고, 모든 축복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신령한 이스라엘의 칭호가 된 것이다. 야곱은 그곳을 이름하여 '브니엘'이라고 하였다(창 32:30). '브니엘'이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야곱은 '그 사람' 곧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를 만나 본 사람이다. 그 사람은 야곱에게 이스라엘의 새 축복을 허락하신 분이었다.
  그 날 밤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과 함께 새날이 밝아왔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 밝은 아침 햇살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정녕 야곱에게서 밤은 물러가고 새 아침, 새 날, 새 출발, 새 평화가 찾아 온 것이다. 비록 절름발이로 강을 건너는 사람이 되었지만 적어도 그 이름은 이스라엘이었다. 그 인격은 새사람이었다. 그의 삶의 새 출발이었다. 새 아침, 새 이름, 새 걸음이었다. 위골된 환도뼈를 인하여 절고 있는 그의 모습은 오히려 축복의 상징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제 그의 앞에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원한을 갚고 복수하려고 오는 에서는 사실상 이스라엘의 눈에는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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