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75] 귀향길에 오른 야곱④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5:40

" 귀향길에 오른 야곱④"
-야곱과 에서의 만남 -
창세기33장 1절~ 20절
석원태 목사

  제3장 족장 야곱의 역사(창 27:41-36:43)

  I. 분리(창 27:41-28:9)
  II. 벧엘의 체험(창 28:10-22)
  III. 하란에서의 야곱(창 29:1-30:43)

  IV. 귀향길에 오른 야곱(창 31:1-34:31)
  1. 하란을 떠나는 야곱(창 31:1-55)

  2. 형 에서를 만나는 야곱(창 32:1-33:20)
  1) 브니엘 체험 - 야곱이 이스라엘로(창 32:1-32)
  2) 야곱의 브니엘 체험에서 받는 현대적 교훈

  3) 야곱과 에서의 만남(창 33:1-20)
  파란만장한 족장 야곱의 인생 파노라마는 계속 된다. 벧엘에서의 사닥다리 체험이 하란으로 떠나던 하나님의 약속의 보장이었다면, 하란에서 돌아오는 길에 얍복강 나루터에서 체험한 브니엘의 은총은 군사 400명을 거느리고 그에게 달려오는 형 에서의 복수를 화해로 변화시켜주던 또 하나의 은총이었다. 큰 사건 앞에는 언제나 큰 은총이 따라다녔다. 야곱이 받은 복이다.
  얍복강 나루터에서 해 돋는 아침을 맞이했던 야곱은 이제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었다. 드디어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은 돋는 햇살을 안고 흔쾌한 마음으로 얍복강을 건넜다. 그리고 처자와 노비를 데리고 형 에서가 오는 쪽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위골된 환도뼈로 인하여 절면서 걸었지만 새 이름 이스라엘을 가지고 기쁨과 환희 속에 걸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어거스틴은 '정정당당히 불의의 길을 걷는 것보다 절면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걷는 것이 복이 있다.'라고 하였다.
  창세기 33장 1절에서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라고 하는 기록을 본다. 그리고 5절에서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라고 하는 말을 본다. 저들의 눈과 눈이 서로 가까워지고 있다.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의 눈이 마주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 눈은 증오의 눈인가, 사랑과 평화의 눈인가? 아니면 용서와 이해의 눈인가? 사람의 눈은 온갖 거짓과 간사와 모함들에 가려져 있다. 그럼에도 사람의 눈은 참으로 몸의 등불이요 비전의 상징이다.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형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는 것이 보였다. 야곱은 가족과 종자들과 가축떼들을 뒤로 돌리고 자기가 그들 앞에서 나아가고 있었다(창 33:3). 이제는 가장의 위치를 견지하고, 그에게 주어지는 모든 사태를 책임지고 감수하겠다는 단호한 의지였다.
  형 앞에 나타나는 야곱의 모습은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나아갔다고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꼭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소돔 성을 방문했던 천사들을 영접할 때와 방불하다(창 19:1).
  일곱이란 수는 언제나 완전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형을 맞는 이러한 야곱의 태도는 형에게 ① 완전 존경(경외) ② 완전 겸손 ③ 완전 용서 ④ 완전 사랑 ⑤ 완전 화해를 요구하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야곱이 절을 계속 하면서 형 에서에게로 가까이 나아가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30:3).
  에서는 눈을 들어 동생 야곱을 보았다. 30장 4절에 보면 이때 에서는 ① 동생 야곱에게 달려왔다고 하였다. ② 그를 맞이했다고 하였다. ③ 목을 어긋맞기고, ④ 그와 입을 맞추고, ⑤ 피차 울었다고 하였다.
  마치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장면 같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집을 떠났던 탕자가 돌아올 때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 편에서 저를 발견하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울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이 연상된다.
  이는 극렬한 기쁨의 표시였다. 애정의 표시였다. 화해와 환영의 표시였다. 그리고 용서와 사랑의 표시였다. 20년 만에 다시 일어나는 억누를 수 없는 형제애의 폭발이었다. 실로 감격적인 순간임에 틀림없다. 족장 이삭의 가문에 벌어진 밝은 축복의 아침이었다. 정말 저들의 상봉은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참으로 소박하고 순전했다. 정말 기념비적 만남이었다. 미움이 사랑으로 변하는 모습이다. 공포와 불안이 평안으로, 불확실이 확실로, 불신앙이 신뢰로, 불화가 화목으로, 어둠이 밝음으로, 저주가 용서로 변하는 모습이다.
  야곱과 이런 해후를 한 에서는 야곱 뒤에 따라오는 모든 가족들과 또 야곱이 선발대로 보낸 선물들에 대해서 묻게 된다. 야곱은 순서대로 처자들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모든 가축떼들은 야곱이 형 에서에게 보낸 예물(선물)임을 설명하였다. 에서는 그 선물을 사양했지만 야곱은 기어이 그 선물이 가납되기를 강청하였다.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창 33:10)라고 하였다. 결국 에서는 야곱의 강권에 못 이겨 그 선물을 받게 된다(창 33:11).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도 같다.
  그 다음에 형 에서는 동생 야곱 일행의 앞잡이가 되어 나머지 여행길을 돕겠다고 제의했다(창 33:12). 이때 야곱이 에서에게 간하기를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컨대 내 주(형)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창 33:13-14)라고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그러자 에서는 내가 내 종자 수인을 네게 머물게 해서 너의 남은 여행을 돕겠다고 하였다. 야곱은 그 청마저 간곡하고 정중하게 거절하고(창 33:15) 두 형제는 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 날에 형 에서는 세일로 회정하고(창 33:16), 야곱은 숙곳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기와 가족을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다. 그래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게 되었다. '숙곳'이란 '우릿간'이라는 뜻이다(창 33:17).
  숙곳은 요단 강 북동쪽과 얍복 강 남방이 만나는 삼각지역에 위치하였다(수 13:27, 삿 8:5). 후에 갓지파의 성읍이 되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 사용했던 청동기물 등을 이 주변에서 주조하였다(왕상 7:14).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난 후 처음으로 진을 쳤던 장소이기도 하였다(출 12:37).
  그가 여기에 집을 짓고 우릿간을 만든 것은 오랫동안 머물 계획이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① 하란에서 그곳까지 강행군을 한 결과 가족과 가축떼들의 피곤이 극에 달했기 때문일 것이다. ② 얍복강 나루에서 천사를 만나 씨름하던 중 야곱의 환도뼈가 위골되어 아팠기 때문일 것이다. ③ 형 에서와의 만남이 화해로 잘 이루어지자 모든 긴장이 일순간에 풀리고 휴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야곱은 다시 세겜으로 옮겨 그 성 앞에 장막을 쳤다고 하였다(창 33:18). 성경은 이 사실을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창 33:18)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 '밧단아람'이란 '아람의 평원'이라는 뜻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일컫는 히브리적 명칭이다(창 28:2, 31:18). 하란에서 가나안까지 평안히 이동했다는 뜻이다. 여기 '평안히'(살람, ?????)라는 말은 '건강하고 안전하게'라고 하는 뜻이다.
  야곱은 평안히 숙곳에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경내인 세겜으로 그 거주지를 옮긴 것이다. 세겜은 예루살렘 북쪽으로 약 58km 지점이다.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 위치한 곳이다. 일찍이 히위족속의 추장 하몰이 이곳에 정착하여 아들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을 세겜이라 명명하였다.
  아직까지는 야곱 일행이 벧엘에 이르지 않았고, 그 아버지가 살던 브엘세바까지는 거리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멀리 유브라데강을 건너고, 얍복강을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경내까지 오게 된 것이다.
  야곱이 지금 도착한 세겜지역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께 언약의 땅으로 지정받은 곳이었다(창 12:7, 13:14-17, 26:2-3, 28:13). 야곱은 세겜에서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사들였다고 하였다(창 33:19). 아마 그곳에 사는 세겜 자손들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 후에 야곱은 거기서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고 하였다(창 33:20).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야곱은 20년 하란생활의 시작을 벧엘의 제단으로부터 시작하고, 또 20년 하란생활의 마지막을 제단(예배) 쌓는 일로 종지부 찍고 있다.

  4) 에서와 야곱의 만남에서 받는 교훈

  (1) 화해의 만남이었다.
  이 화해는 몇 가지 특색들을 담고 있다.
  ①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된 결과 받은 축복의 표징이었다.
  곧 브니엘 체험의 결과였다.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본 이후에 사람과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진리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요일 1:1-3).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은 사람과도 화목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 문제를 해결받은 사람은 사람과의 죄 문제도 해결을 본다. 그는 에서를 야곱으로서 만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로서 만난 것이다.
  ② 겸손은 화해의 첩경이다.
  야곱은 형 에서를 향하여 일곱 번이나 땅에 몸을 굽히며 나아갔다. 교만은 패망의 앞잡이지만 겸손은 모든 것을 얻는 축복의 전령인 것이다.
  ③ 사람끼리의 화해는 하나님의 축복에서만 가능하다.
  동생 야곱은 형을 향하여 허리를 일곱 번이나 땅에 굽히면서 나아가고, 형 에서는 동생을 향하여 달려와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울었다고 하였다. 이런 만남은 결코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화해의 만남 배후에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섭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야곱에게 장자권을 축복하셨다는 사실, 벧엘의 언약, 하란에서 야곱의 귀향길의 안전을 약속한 것 그리고 막다른 지점에서 다시 브니엘의 은총을 입혀 주신 것 등이다. 이 모든 하나님 자신의 약속이 성취되기 위한 수단이 야곱과 에서의 화목이요 화해의 만남이라는 사실이다.
  ④ 사랑의 예물이다.
  사람의 마음을 주고받는 표시 가운데 하나는 눈이다. 눈길과 눈길을 주고받는 것이다. 야곱의 눈, 에서의 눈이 서로를 보았다(창 33:1, 5). 그리고 야곱은 형 에서에게 후한 선물로 형을 위로하고자 한 것이다.
  (2) 야곱이 범하는 또 하나의 오류를 본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형 에서의 문제를 통쾌하게 해결해 주었다. 그럼에도 그는 떠날 때 서원한 대로 벧엘로 직행하여 브엘세바로 오지 않고 중간에서 머뭇거리는 것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먼 여행으로 인한 피곤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세겜에 와서 아예 땅을 사고 집을 짓는 야곱의 모습은 걱정스럽기까지 하다. 그것은 벧엘의 은총을 받고 서원한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 화장실 갈 때의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는 말이 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여유가 생기면 딴 생각, 딴 곳으로 빗나가는 연약이 있다.
  (3) 야곱이 올린 감사예배이다.
  야곱은 세겜에서 단을 쌓고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나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부르며 감사하였다. 이 예배는 족장 생활의 위대한 힘이었다. 어떠한 나그네 여로에도 하나님을 향한 예배 생활이 그리스도인의 중심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함으로부터 인생을 시작하고, 예배로 진행하고, 예배로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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