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84] 곡물을 사기 위하여 애굽으로 간 야곱의 아들들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5:48

" 곡물을 사기 위하여 애굽으로 간 야곱의 아들들"

창세기42장 1절~ 38절
석원태 목사

  제4장 족장 요셉의 역사(창 37:1-50:26)

  I. 꿈꾸는 자 요셉 - 꿈을 받은 요셉(창 37:1-36)
  II. 유다의 아들들(창 38:1-30)
  III. 꿈과 현실(창 39:1-23)
  IV. 해몽자 요셉 - 두 장관의 꿈(창 40:1-23)
  V. 애굽 총리가 된 요셉(창 41:1-57)

  VI. 곡물을 사기 위하여 애굽으로 간 야곱의 아들들(창 42:1-38)

  드디어 야곱 가족들의 애굽 이주의 본격적인 서막이 열리게 됨을 본다. 사실상 이스라엘의 애굽과의 관계는 저들의 조상 아브람이 가나안의 흉년을 피하여 애굽에 잠시 머문 적인 있은 후(창 12:10-13:1),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게 되어 애굽의 총리로 자리를 잡으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39-41장).
  창세기 42장은 근동 전체 지방의 대 흉년 때문에 야곱의 아들들, 곧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에 곡식을 사러 가는 일로 인하여 야곱 가문의 애굽 이주가 시작되는 셈이다.

  1. 창세기 42장의 개략

  야곱은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창 42:1). 그는 곡식을 사러 열 아들을 애굽으로 보내게 된다(창 42:2-3). 야곱은 라헬이 자기에게 낳은 막내아들 베냐민은 보내지 않았다(창 42:4).
  야곱의 아들들이 곡물을 사기 위해 애굽에 도착했을 때,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모든 백성들에게 곡식을 팔고 있었다. 드디어 요셉의 얼굴 앞에 가나안 땅에서 곡식을 사러 온 야곱의 열 아들, 곧 요셉의 형들이 나타났다(창 42:6). 요셉은 즉시 그들이 자기의 형들인 것을 알았으나 모른체 했다(창 42:7-8). 물론 형들은 애굽의 총리가 자신들의 동생인 요셉인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자기 앞에 절하며 인사를 하는 형들을 보며 요셉은 옛날에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였다(창 41:9).
  그러면서 요셉은 엄한 소리로 「…너희는 정탐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창 42:9)고 하였다.
  그러자 형들은 요셉에게 결코 자신들은 정탐꾼이 아니라고 변명을 하게 되었다. ① 저들은 다 한 아버지의 아들로 '독실한 자'라고 하였다(창 42:11). 독실하다는 말은 거짓이 없이 진실한 자라는 뜻이다. ② 자신들은 본래 열두 형제였는데 막내아우는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고, 또 한 아우는 없어졌다고 하였다(창 42:13). 이때 요셉은 「너희는 정탐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말째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창 42:14-15)고 하였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을 다 함께 삼 일 동안 가두어 놓았다(창 42:17).
  삼일이 지난 후 요셉은 그들을 다시 불러내고 이르기를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너희가 독실한 자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들의 주림을 구하고 너희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리하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창 42:18-20)고 하였다. 그때 그들은 지난 날 자신들이 요셉에게 범한 잘못을 뉘우치고 있었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창 42:21-22)라고 하며 후회하고 있었다. 저들은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고 있었다. 피차간에 통변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그 말을 알아들은 줄을 알지 못하였지만, 요셉은 잠자코 저들의 말을 다 듣고 있었다(창 42:23). 마침내 그 형제들 중에 시므온이 담보로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당하여 애굽의 감옥에 남게 되고, 저들은 곡식을 사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때 요셉은 저들이 곡식 값으로 지불한 돈을 몰래 곡식 자루에 다시 넣어주고, 많은 곡식과 함께 길양식까지 그들에게 주게 하였다(창 42:24-25). 형들을 향한 요셉의 은밀한 사랑 표현이요 전달이었다. 저들은 아비 야곱에게 와서 이 사실을 모조리 보고하였다. 그리고 곡식 자루를 열어 본즉 자신들이 곡식 값으로 지불한 돈이 각인의 자루에 그대로 들어있음을 보고 또 한 번 놀라며 두려워하였다(창 40:27, 35).
  이때 그 아비 야곱은 그들에게,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라고 하며 탄식을 발하였다(창 42:36). 그러자 장자 르우벤이 아비에게 이 모든 일의 책임, 특히 베냐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고 아버지를 위로하나, 인간 야곱은 위로받지 못했다. 그리고 야곱은 베냐민까지는 결코 애굽으로 보낼 수 없다고 완강히 거절하였다(창 42:37-38).

  2. 이 사건에서 받는 영적 교훈

  1) 축복받고 있는 자에게 사람이 모여든다는 사실이다.
  창세기 42장 6절에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라고 하였다.
  애굽의 바로 왕은 양식을 구하러 오는 자국의 백성들은 물론 타국의 백성들에게 요셉에게 가라고 하였다(창 41:55-56). 이런 경우 요셉의 창고는 세계의 생명을 대신했던 것이다.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 새…」(창 41:56)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요셉이 받은 축복은 세계의 소망이 아닌가? 축복받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단체에는 사람이 모여든다. 그래서 그는 축복의 머리가 되는 것이다. 위에만 있고 아래는 있지 아니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2) 요셉은 꿈을 생각하고, 그 꿈을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을 다시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형들에게 각성과 회개의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다.
  창세기 42장 9절에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요셉은 그들을 정탐꾼으로 몰아세우며 ① 과연 베냐민이 살아있는지 그 생존여부를 알려고 하였다. ② 하나님의 이름으로 형들에게 자신의 말에 대한 신뢰성을 갖게 하였다(창 42:18). ③ 우선 급한 가나안 땅에 있는 가족들의 생계를 염려하여 양식부터 보냈다. ④ 그리고 형들이 지불한 곡식 값을 다시 자루에 넣어 되돌려 줌으로 골육에 대한 은밀한 사랑을 표현하였다.

  3) 요셉은 형들을 먼저 알아보고 울었다고 하였다.
  창세기 42장 7절에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 아나 모르는 체하고…」라고 하였다. 42장 8절에 「요셉은 그 형들을 아나 그들은 요셉을 알지 못하더라」고 하였다. 42장 23절에 「피차간에 통변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그 말을 알아들은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고 하였다. 42장 24절에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라고 하였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우리를 향한 주님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자주 자주 주님을 주님으로 몰라볼 때가 많지만, 주님은 우리의 모습도 알고 마음도 알고 계획도 알고 판단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 모르게 그 분은 얼마나 우시는가!
  요셉은 혈연적 사랑 관계 때문에, 아니 하나님의 섭리적 사랑 때문에 울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한 대속적 사랑의 관계 때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경우에 얼마나 우시는지…. 자식을 향한 부모의 눈물도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를 향한 주님의 그 뜨거운 대속의 사랑의 눈물을 우리 중 누가 알겠는가?

  4) 야곱의 어쩔 줄 모르는 탄식소리를 듣는다.
  (1) 지난날의 자기 죄에 대한 보응적 고통이라 생각된다.
  아비 이삭을 속인 보응으로 그도 자식들에게 속임을 당하며 탄식하고 있지 않은가?
  (2) 인간무지의 한계상황에서 토해지는 탄식이다.
  야곱은 탄식하기를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창 42:36)라고 하였다.
  이는 앞날을 너무 모르기에 하는 탄식이 아닌가? 요셉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애굽에 생존해 있다. 단순히 생존해 있을 뿐만 아니라 총리대신으로서 세계를 먹이는 아비로 살아있는 것이다. 시므온도 없어진 것이 아니라 애굽의 감옥에서, 총리가 된 동생의 은밀한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있다. 베냐민 또한 빼앗아 가고자 함이 아니라 애굽에 있는 그의 친형 요셉이 만나보고 싶어 부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인간의 무지는 이렇게 어쩔 수 없는 탄식을 토하게 한다. 실로 무지한 인생, 유한한 인생, 무능한 인생이 아닌가?
  (3)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축복의 미래를 알지 못하는 탄식이었다.
 
야곱은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창 42:36)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것은 잠시 후에 야곱 자신을 애굽의 총리의 아버지로 만드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축복의 섭리가 아닌가? 그러나 인간 야곱은 조금 후에 이루어질 자신의 미래마저도 몰랐기 때문에 이런 탄식을 쏟아놓았던 것이다.

  5) 요셉이 살아 있기 때문에 야곱의 가문은 죽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사실상 선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세계사적 섭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무대가 이제 바야흐로 애굽으로 옮겨지기 직전이 아닌가?
  예수가 무덤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사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롬 8:34, 히 7:24-25), 우리도 살 소망이 있다. 믿는 자에게만 보장된 생명의 약속이 아닌가!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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