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29강)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③ (마 6:9-13)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6:46

(제29강)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③ (마 6:9-13)

 

  먼저 대조적인 두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먼저 구세군을 창설한 '윌리암 부스'입니다. 그의 말년에 어느 기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장군님의 나이는 82세입니다. 이때까지 오직 그리스도의 종으로 변함 없이 일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을 받은 부스가 대답하기를 '비결은 없습니다. 나는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오니 오늘도 마음대로 써주옵소서' 이렇게 그 분은 조용히 되풀이하는 기도가 일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은 '주님을 위하여 바울처럼 날마다 죽겠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나는 예수님의 종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평생 예수님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온 영국이 떠들썩하였습니다. 장례 행렬은 이 끝에서 저 끝이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죽음은 보람 있는 죽음입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그 유명한 '모차르트'입니다. 모차르트가 음악의 천재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8살에 왕 앞에서 연주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음악이든지 한 번만 들으면 악보로 그려낼 정도였습니다. 유럽 전역을 돌며 연주할 때 사람들은 환호했습니다. 그는 교황에게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35세에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죽는 날은 진눈깨비가 내리는 나쁜 날이었습니다. 그의 장례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유족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묘지에서 일하는 인부 한 명이 귀찮은 표정으로 시신을 혼자 묻었을 뿐입니다.
  명성은 얻었으나 존경을 얻지는 못 했습니다. 도도하게 자기만을 위하여 거만하게 살아간 그를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도는 세상을 겸손히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발자취를 남기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남겨야 할 발자취는 복음의 발자취입니다. /아멘!/ ◀제목 소개!▶

 

  기도신학의 핵심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계십시다. 이렇게 기도하면 주님이 들으시고 응답을 주시리라는 것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애굽의 왕은 신입니다. 카이로에 여행을 다녀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피라미드 옆에 선박유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선박유적이 있느냐 하면 죽은 왕은 선박유적을 타고 부활한다는 애굽신앙입니다. 애굽의 왕은 사람이 아니라 신입니다. 그리고 그 왕은 죽어도 부활한다는 부활신앙도 애굽의 고대사상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활교리가 성경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이교에도 있습니다. 이교에도 창조론이 있고 부활론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왕은 아직까지도 한 사람도 부활한 적이 없습니다. 기도는 기도를 받으시는 대상에 따라 그 신비성과 그 초월성과 기도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북한의 인민들은 어버이 김일성에게 기도한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죽었으나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김일성에게도 주체사상에도 영생론이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인민들의 주체사상은 김일성 자리에 하나님만 모시면 똑같습니다.
  성경에 있는 절대신, 여호와 하나님의 그 위상을 김일성이 어떻게 그렇게 빌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영생론이 주체사상 안에 있습니다. 김일성 생일이 북한의 역사기록의 원년입니다. 시간도 역사도 김일성이 자기 맘대로 좌우하는 것입니다. 절대자로 군림하는 것입니다.
  주 기도는 주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니고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우리는 은밀한 중에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한다는 것이 기도신학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고 우리와 같은 수준이 아닙니다. 그 분은 초월 자, 전능 자, 영원히 살아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기도하는 형식과 비교해서 하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기도는 길거리에서, 회당에서, 길거리 어귀에 서서 사람들이 많이 보는데서 기도하는데 반대해서 너희들은 길거리의 사람이 보이는데서 기도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 안 보이는데 가서 기도해도 은밀한 중에 계시는 아버지께 하는 것이라고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바운저'라는 기도 학자는 기도의 핵심 두 가지를 우리에게 강조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방법은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방법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쓰시는 방법이 된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기도하는 삶입니다. 자기 자신이 기도에 대해서 수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그것은 남에게 기도를 가르치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정말 중요한 것은 기도에 대한 강의가 아니고 내가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기도하면서 사는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믿음도 삶이라고 하면 기도도 삶이라는 말입니다. /아멘!/ 그래서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할/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는 여섯 가지의 본질이 들어있는데, 먼저 세 가지는 하나님을 위한 본질이며, 나머지 세 가지는 인간을 위한 본질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위한 기도는 ⑴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본질로써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그리고 ⑵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본질은 '나라에 임하옵시며'이고, ⑶하나님의 뜻을 위한 본질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
  여기까지는 무엇보다도 기도의 우선적 관심이 하나님께 있어야 함을 가르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다음 후반부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관심에서 인간에 의한 관심으로 옮겨집니다. ⑴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이고, ⑵죄의 용서를 비는 기도로써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이며, ⑶보호해 달하는 간구로써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일용할 양식은 죄의 용서, 하나님의 보호, 우리들에게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11절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 기도는 '영적인 양식, 즉 신앙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영적인 은혜의 양식이냐? 또는 우리가 먹고 마시는 육적인 양식이냐?'에 대하여 많은 성경학자들의 논란이 있었답니다.
  제롬 같은 학자는 라틴어 성경에서 '물질적 양식'이라고 번역하였고, 11세기 70인 역 사본에는 '떡을 위하여 하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옵소서'라는 영, 육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육신과 떡으로만 해석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헬라어 원문에는 '일용할 떡을 주옵소서'로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주식은 보리떡입니다. 우리나라는 밥이 주식이므로 '일용할 밥을 주옵시고'로 표현해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말로 성경을 번역할 때 밥이라고 쓰기에는 좀 어색하니까 일용할 양식으로 썼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기도문을 배우기에 앞서 예수님 당시 먹고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시절인가를 한번 알아봐야 합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하에서 가난한 사람이 많이 사는 갈릴리 호수 주변에서 우리 주님이 자랐습니다. 특히 나사렛은 빈민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곳에서 서민들이 하루 세끼 밥을 해결해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직접 체험하신 분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는 정말 복 받은 나라입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 먹어서 살 빼고 다닙니다. 여러분, 지금 세계 인구의 2/3가 영양실조 상태에 있답니다. 가난한 중에 자라나신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양식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신 분입니다.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찾아 기갈을 면해 보시려는 주님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옛날 히브리 민족은 '영은 선하고 육신은 악하다.'하는 철학사상을 강조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육신은 물질이라고 천대하며 고행을 교회에서 받아들려 금욕주의 사상이 교회의 신앙생활로 인정되어졌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근본사상은 금욕주의가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육신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귀중함을 아신 주님께서 육신을 위하여 제일 필요한 약식을 구하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이 양식 속에는 우리의 모든 생활에 필수품이 다 들어갑니다. 빵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밥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부대 적인 일이 다 포함됩니다. 예를 들면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건강한 몸이 필요합니다. 또 직장이 있어야 하고 직장을 얻기 위해서는 배워야 하고 또 사업도 잘되어야 하고, 또 우리가 쉬어야 할 장막도 있어야 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일용할 양식' 속에 우리의 모든 물질적인 요소가 다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복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잘못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당에게 우상에게 복을 달라고 비는 것이 기복신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 40년 동안 그들이 무엇을 먹고살았습니까? 친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여 주셨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온 인구가 삼백 만 명입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먹을 양식 먹을 물을 가지고 나왔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과 메추라기와 생수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신8:4절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실력자임을 여기서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실력 있는 분에게 청탁을 해야지 사기꾼에게 청탁했다가는 망합니다. 마찬가지로 실력 있는 하나님께 물질을 구하는 것, 절대로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때 두 번이나 굶주리는 백성들을 먹이셨습니다. 마14:20-21절에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오병이어의 기적사건입니다. 그리고 마15:37-38절에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칠병이어의 기적입니다. /할/
  주님은 빵만 먹이신 분이 아닙니다. 사업도 축복하셨습니다. 눅5장 베드로는 물고기는 바로 사업을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즉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를 다 알고 계십니다.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무든 것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믿/
  성경의 66권속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무려 32,500이나 됩니다. 신8:18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할/


  ▶그러면 일용할 양식에 대하여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①일용할 양식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대체로 사람들은 일용할 양식을 매일매일 먹는 떡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는 이 개념을 넓혔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것이 어찌 떡뿐이겠는가?'고 반문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떡은 우리의 육체를 위해서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적인 필요가 또 있습니다. 좋은 친구가 필요하고 좋은 배필이 필요합니다. 좋은 인간관계가 필요합니다. 또 좋은 양서도 필요하고, 좋은 스승이 필요하고, 좋은 환경이 필요하고, 이 모든 것이 일용한 것이라고 루터는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영적인 것이 필요합니다. 파스칼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공허가 있다. 주께서 내 마음 속에 오셔서 나를 채울 때까지 나는 참 만족을 모르는 인생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시고'라는 가르치신 것 같이 우리는 주님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할/
  ②중요한 것은 나만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의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내 가정, 나에게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가 아니라 우리 이웃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엡4:28절에 우리가 돈을 벌어야 할 목적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믿음의 사람들은 돈을 버는 의미와 가치가 세상 사람들과는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주님은 '주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할/
  ③이 기도문 속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면 내일을 위하여 저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또 계획도 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까? 그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늘 주기도문의 말속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내일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그 재물에 의지하는 것은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오늘의 의무에 대한 우리의 행할 것은 미루지 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내가 내일 하나님께 기도하겠다.'고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늘의 창고를 바라보면서 살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하늘에 창고는 절대로 자원이 고갈되지 않습니다. 그곳은 오일 쇼크도 없고 파동도 없습니다. '주옵시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기중자이십니다.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아름다운 대자연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독생자 외아들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셨습니다.
  롬8: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할/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자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 창고에 넘치게 쌓여 있는 크고 귀한 보화가 다 우리들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못 주어서 안달하시는 분이십니다. '주옵시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7:7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이 말씀과 본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멘!/
  ▶어느 랍비가 유대인 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길에서 돈이 가득 들어있는 지갑을 주웠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는가?'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첫 번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아이들은 많고 생활을 가난한데 하나님이 특별히 나에게 주신 선물로 알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랍비가 '너는 도둑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분명 도둑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나는 즉시 주인을 찾아 돌려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랍비는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랍비는 그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이 말하기를 '그 지갑을 주인에게 돌려줘야 하는 것을 나도 알고 있습니다, 동시에 나는 나의 약함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있습니다.' 그때 랍비가 '네 말이 맞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선한 마음도 주신다는 교훈입니다. /아멘!/

 

  ▶12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오늘 본문의 기도문은 사람들을 위한 두 번째 간구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위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도는 육신보다 영적인 요구가 더 중요합니다.
  다윗은 시51편에서 '나의 모든 죄과를 도말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는 모든 기도의 기초요 신앙생활에 첫 관문입니다. 용서와 사죄는 성도 누구 나가 다 받아야 할 간절한 소원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의 기도는 '하나님!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했으니까 하나님도 내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본문 속에도 두 가지의 의미가 포함됩니다. ⑴'하나님!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이고, ⑵'하나님! 내가 다른 사람도 용서할 수 있도록 십자가의 마음을 주옵소서' 즉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를 깨닫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 사랑으로 내 이웃의 죄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할/
  많은 사람들이 주기도문 중에서 이 말씀이 제일 해석하기도 어렵고, 실천하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용서에 대하여 가르치실 때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오늘 본문의 기도문의 뜻이 아주 쉽고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마18:21절 이하에 베드로는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용서의 한계가 일곱 번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용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한정의 용서'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은 용서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 없는 사랑이 없고, 사랑 없는 용서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같이 경험하는 것은 우리가 큰 용서와 사랑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이론상으로는 다 용서가 됩니다. 의지로도 용서가 됩니다. 믿음으로도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는 용서를 거부하는 죄 성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목사인 저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의 대화 끝에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이 그 빚을 도저히 갚을 수가 없게 되자 주인은 그에게 너희 몸과 처자식과 소유를 모두 팔아 빚을 갚으라고 명하였습니다.
  이때 종은 엎드리어 절하며 빌었고, 주인은 그가 불쌍해서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이 종은 하늘을 낳을 것 같이 기뻐 뛰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길 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는 일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보자마자 내 빚 갚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동관은 빚을 갚을 수 없기에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소연을 했지만 그는 무자비하게 동관의 멱살을 잡고 빚 갚을 때까지 감옥에 있으라고 쳐 넣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당장 그를 불러다가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고 불호령을 쳤습니다.
  결국 주인은 대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졸에 붙어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네가 정말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입었다면 네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우리가 겉으로는 용서하고 고개 숙여 주고 그 사람의 발도 닦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 중심에서부터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를 가지고 이웃을 이해해 주고 감싸주는 짓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용서의 맘을 주시면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이신 손양원 목사님처럼 우리도 용사가 될 줄 믿습니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벌써 오래된 영화가 있습니다. 밀양입니다. 그 영화는 국내외적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칸 영화제 여우 주인공(전도연) 수상작으로 그리고 국내적으로도 최고의 영화로 평가받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으로서는 감상하기에 매우 불편한 영화였지만 이 영화가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 실천 전반에 대한 특히 용서의 문제에 대하여 매우 진지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화 밀양의 스토리는 교통사고로 남편과 사별한 여 주인공 신애가 유치원 나이의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 밀양에 내려와 피아노 학원을 차리고 정착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점차 낯선 도시에서 정착해 갈 무렵 신애에게 예상치 않았던 불행이 찾아옵니다. 신애의 유일한 인생의 희망이었던 아들이 유괴를 당하고 아들을 구하고자 얼마 안 되는 자기의 전 재산을 갖다 바치지만 아들은 차디찬 시체로 발견됩니다.
  범인은 아들을 가르치던 웅변 학원 원장이었습니다. 그는 곧 검거되어 감옥에 들어가서 복역하게 됩니다.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져 가던 어느 날 신애는 길 건너 편 약국 집사님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고 그는 부흥회에서 안수도 받으면서 치유를 경험합니다.
  그는 집회시간에 나가 간증까지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애는 목사님에게 자기 아들을 죽인 범인을 감옥으로 찾아가 용서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리는 성도들도 있었지만 어떤 교우들은 장한 결단이라고 칭찬하며 감옥까지 동행합니다.
  면회소의 창살을 두고 범인을 면회한 신애에게 범인은 의외로 얼굴도 깨끗하고 마음도 안정되어 보였습니다. 범인의 근황을 묻자 그는 교도서안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아 이제는 신애씨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순간 주인공 신애는 큰 충격과 혼란에 빠져들어 갑니다. '피해자인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먼저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당신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당신이 용서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때부터 신애는 신과 교회를 버리고 반항을 시작한다는 줄거리입니다.
  물론 이것은 영화 속의 이야기인 픽숀이긴 하지만 우리는 주인공에게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어쩐지 그런 이야기가 우리 주변에도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 같아 우리의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진정한 성경적 용서의 실천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5:23-24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용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인생에게 베푸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가장 완벽한 판단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용서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인간적 매듭 풀기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범죄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고 거기에 반드시 상처라는 매듭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18:18절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에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시면서 인간과의 관계에 용서와 하해를 주문하고 계십니다.
  아마도 영화 밀양에서 제작자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고 싶은 가장 큰 메시지가 이 대목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고 말하기에 앞서 우리가 잘못한 일이나 대상에 대하여 진솔하게 용서를 구하는 것을 전제로 그런 메시지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지 않았는가 생각해 봅니다. 만일 영화 밀양에서 범인이 신애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기에 앞서 신애에게 먼저 진지한 용서를 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화 밀양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 신애가 병원에서 퇴원하여 미장원에 들러 머리를 자르는데 하필이면 그녀의 머리를 만지는 미용사가 유괴범의 딸임을 인지하는 장면입니다.
  그녀는 머리를 자르다말고 미장원에서 뛰쳐나와 집에 돌아와 마당에 거울을 내다놓고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르게 됩니다. 그때 머리를 자르는 마당 한 구석의 지저분한 곳을 한 조각의 빛이 비추면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저는 이 마지막 '빛의 메시지'야 말로 이 영화가 포기하지 않은 마지막 희망이라고 믿습니다. 이 한 조각의 빛은 혼란 속에 방황하는 한 슬픈 여인의 인생의 마당에도 여전히 내려 비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며, 이 빛을 따라서 슬픔의 마당에 버려진 영혼들을 포기하지 말고 따뜻한 사랑의 빛으로 비추어야 할 교회 공동체의 책임이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성경은 용서의 교훈을 가르칠 때 거의 예외 없이 기도를 함께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의 주기도문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왜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용서는 인간의 의지로만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용서할 수 있는 은혜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인간을 하나님께 연결시키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기도하는 순간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이 통로를 통해 흘러오는 것입니다.
  영화 밀양에서 주인공 신애는 용서를 너무 쉽게 생각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녀가 정말 난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도움으로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기도로 범죄자에게 나아갔다면 다른 상황이 전개될 수가 있었으리라고 믿습니다.
  ▶화란의 믿음의 여인 '코리 텐 붐'은 자기의 언니의 목숨을 앗아간 원수, 나치 수용소의 간수를 직면하는 순간 외마디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난 저 사람을 용서 할 수 없어요.' 그러나 이 고백조차도 그녀의 기도였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기도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난 너에게 용서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묻지 않았다고. 넌 나에게 순종하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코리가 다만 순종의 마음 하나로 상대방을 의지적으로 포응하는 그 순간 그녀에게 용서하는 진심이 위로부터 자신의 마음속에 쏟아지고 있었다고 간증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진정한 용서의 실천을 위해서 기도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가 능력입니다. /아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성경에는 죄에 대해 설명하는 여러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⑴하마르티아: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뜻으로 즉 진리에서 벗어난 것이 죄입니다.
  ⑵파라바시스: '짚고 넘어간다.'는 뜻으로, 즉 죄를 지으면 안 되는 금이 있는데 그 금을 넘어서는 것을 죄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⑶파라프로마: '떨어지다, 미끄러지다.'라는 뜻으로 진리에 서 있지 못하고 악에게 떨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⑷아노미아: '불법을 행한다.'는 뜻입니다.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악을 행하고 불법을 행하는 것을 죄라고 했습니다.
  ⑸오페일레마: 이 단어가 본문의 죄라는 단어에서 쓰고 있는 단어입니다. 빚, 채무란 의미입니다. 이것은 마땅히 지불해야 할 것을 지불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의 빚 진자들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빚을 탕감 받았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의 근원은 우리는 잘 압니다. 아담이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 속에 잉태되고 죄 속에 태어납니다. 누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까? 다윗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성경은 죄의 문제로 인해 인간에게 저주가 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데, 이 문제는 인간의 편에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쉽게 예를 들면 누가 나에게 죄를 지었다고 합시다. 내가 그 사람 용서해 주면 끝이 납니다. 어떤 사람이 국가에게 죄를 지면 국가에서 처벌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으므로 반듯이 하나님이 용서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믿/ 사람들은 죄를 말할 때 흔히 들키면 죄를 안 들키면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도소엔 들킨 죄인들이 가득하고 세상에 안 들킨 죄인들이 점잖게 걸어 다닙니다.
  어째든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죽게 했던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여러분, 용서와 사랑은 성경의 주제입니다. 용서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고, 성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용서와 사랑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풀어 준 최대의 선물이요, 그것은 마치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빚은 탕감해 준 주인과 같습니다.
  롬5:8절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또 롬8: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또 롬8:33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아멘!/
  이것이 바로 죄로부터 구원받아 자유 하게 되고 의롭게 됨을 의미합니다. 요8장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한 여인에게 예수님은 '너를 고소하는 그들이 어디 있느냐?' '주여! 떠났습니다.' '나도 너를 정좌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지 말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이요 구원 받은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고 용납해 줘야 합니다.
  ①용서는 우리 주님의 명령입니다. '너희가 이웃을 용서했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씩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②우리가 용서할 때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③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꼭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못할 때, 우리는 미움의 감정의 노예가 됩니다. 그런데 되면 우리는 아무리 성경 읽고 기도해도 마음의 평화가 없습니다.
  용서는 우리는 건강하게 합니다. 용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줍니다. 이러한 의미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엡4:32절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우리가 용서할 때, ⑴우리가 용서하지 못한 그 형제를 하나님이 용서했다는 사실입니다.
  ⑵성령의 도우심을 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⑶용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가능합니다. ⑷남은 용서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용서받은 죄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