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강) 금식기도의 바른 자세! (마 6:16-18)
동물의 왕인 사자가 중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숲 속에 살고 있는 동물들이 모두 문병을 왔습니다. 숲 속에 왕이니까 모두가 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여우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평소 늑대와 여우는 서로 못 잡아먹어 만나기만 하면 싸웠습니다. 한 번도 화해한 적이 없었습니다.
여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늑대는 속으로 미소를 띠고 사자에게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여우가 문병을 오지 않은 것은 틀림없이 왕을 무시한 처사입니다. 엄한 벌을 내려야 합니다.'
밀림의 왕 사자는 그 소리를 듣고 보니 정말 서운했습니다. 그래서 여우에 대한 감정이 급속으로 나빠졌습니다. 그 때 여우가 나타났습니다. 사자는 화가 나 있던 중이라 여우에게 호통을 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네 이 놈! 왜 이제 왔느냐? 그 동안에 어디서 무엇을 하였느냐?'
여우는 틀림없이 늑대가 자기에 대하여 나쁘게 왕에게 말했을 것이라고 눈치를 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왕님! 제가 왕의 중병을 고칠 약을 백방으로 알아보느라고 이렇게 늦었습니다.' 사자는 자기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에 기뻐서 다급히 물었습니다.
'그래. 그 약이 무엇이냐?' 그때 여우가 태연히 대답하기를 '늑대의 가죽을 벗겨 뒤집어쓰고 조금만 있으면 낫는 다고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사자는 자기 코앞에 있는 늑대를 즉시 잡아 가죽을 뒤집어 쓰는 바람에 늑대는 그 즉석에서 죽고 말았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있습니까? 이웃을 용납하고 남을 헐뜯고 모함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 ◀제목 소개!▶
예수님은 마6:1-4절까지 구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구제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신앙적인 행위입니다. 구제는 우리가 이웃을 향해서 행해야 할 의입니다. 구제할 때 주의할 점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리고 '이웃에게 나팔을 불지 말라! 네 자신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5-8절은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행해야 할 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향하는 신앙의 고백이요, 사랑의 대화입니다.
기도할 때 외식하는 자와 같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기도할 때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9-15절까지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주기도문을 가르치시고 나서 본문에서 금식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금식은 먹는 것을 절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우리 자신을 향해서 힘써야 할 의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할/
레16:29-31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1년 중에 속죄일(7월 10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속죄 일에는 음식을 먹는다든지 술을 마신다든지 목욕을 한다든지 기름을 바른다든지 성생활을 하는 것 등은 철저히 금지시켰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40주야를 하나님께 금식기도하고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은 국가적 수란이 있을 때, 하나님께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했습니다. 에스더는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결심, 결단하고 금식했습니다.
예컨대 선지자 사무엘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서 금식했습니다. 또 니느웨 백성들이 요나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회개하면서 금식했습니다. 다윗도 금식을 했습니다. 다니엘도 금식을 했고, 엘리야도 금식을 했습니다.
신약에 보면 금식은 약 30회 정도 언급했는데 눅18:12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한 사실이 나타나 있습니다. 즉 목요일과 월요일인데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서 40일 금식하면서 율법을 받고 내려올 때, 목요일에 올라가서 월요일에 내려왔다고 해서 1주일에 2일을 금식했습니다.
금식기도는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도 금식기도가 있고, 이슬람교도들에게도 금식은 있습니다. 이슬람교에서는 모하메드가 첫 번째 계시를 받았다는 그 날을 기념해서 이때부터 한 달 동안 금식을 했습니다. 이 기간을 라마단 금식 일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그 금식은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만 금식하면 됩니다. 그래서 밤에는 밤이 새도록 잔뜩 먹고, 낮이 되면 금식하는 것이 그들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은 금식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습니까? 본문에는 마치 예수님이 금식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복음주의자들은 금식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은 금식을 비판하신 것이 아니라 바른 금식기도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40일 금식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마9:15절에 보면 금식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금식기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사58:6절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할/
여러분! 왜 금식 기도가 다른 기도보다 효과가 있는지 아십니까? 금식 기도는 목숨을 걸고 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일정량의 식사를 해야 건강을 유지합니다. 이 때문에 금식한다는 것은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금식의 3가지 목적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금식은 우리 육체를 제어하게 만듭니다.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겸손하게 굽히는 증거가 되고,
㈂우리로 하여금 금식을 통해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더 잘 찾게 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금식기도는 사단의 계략을 급하게 무너뜨리는 역사가 나타나게 합니다. 히스기야가 식음을 전패하고 부르짖을 때에 죽을병에서 고침 받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다윗이 식음을 전패하고 눈물로 요를 적셨을 때에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다니엘이 금식하며 기도하고 나자 다른 모든 사람이 해석할 수 없었던 왕이 꾼 꿈을 해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40일을 금식기도 하신 후에 그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금식 기도가 이렇게 귀합니다.
▶16절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금식은 말 그대로 음식을 먹지 않고 굶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지 않으면 어떤 현상이 옵니까? 당연히 배가 고픕니다.
40일을 금식한 목사님에게 금식한 후에 금식기도의 능력을 한번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무슨 환상을 보았습니다.'라고 말을 한 것이 아니고, '이제야 배고픈 자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정말 실제적인 것은 깨달았습니다.
금식을 해 본 분들은 다 느끼시겠지만 금식을 하면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나게 합니다. 좋은 옷이 필요 없고, 인간관계의 모든 문제 등이 그리 큰 문제를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배고픈 만큼 '왜 기도를 하는가?'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그만큼 하나님을 더욱 생각하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금식기도는 자신을 돌아보고 바라보게 하는 놀라운 방법입니다. 이런 영적인 체험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금식할 때에 마치 하나님을 위한 것인 냥 얼굴을 씻지 않고 머리를 빗지 않은 채 얼굴을 흉하게 하며 눈물 자국을 만든답니다. 이들은 마치 '나는 이렇게 굶었소,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굶고 있소, 여러분, 나를 좀 봐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표가 납니다.
이들은 경건의 참된 의미를 '자기 안에 있는 어떤 인격적인 중요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어떤 외형적 형태에서 경건'을 찾았습니다. 흉악한 얼굴, 늘어진 머리, 비실 비실한 모습을 통해서 '나는 이렇게 주님을 위해 굶고 있습니다. 나는 얼마나 신령한 사람인가?' 보여주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외형적인 태도로 경건을 과시하려는 사람들의 잘못된 영성을 주님은 비판하신 것이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외적 경건을 나타내는 주의 종들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명함에다가 40일 금식 몇 번을 했다고 아주 찍어 가지고 다니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부흥강사는 '40일 금식 기도한 불의 사자'라고 당당하게 자기를 내세웁니다. 성경은 이런 식의 잘못된 금식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금식은 어떤 것입니까? 참된 금식은 영적인 목적, 즉 영혼이 잘되기 위한 금식이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죄를 회개할 때에 금식을 했습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나서 하나님께 금식하며 침상을 적시는 기도를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금식이란 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죄를 회개하면서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히브리 민족은 나라의 위기가 올 때 하나님께 금식하며 매달렸습니다.
대하20장에 모압, 암몬, 몇 마을 사람들이 연합군을 편성하여 유다나라를 쳐들어왔습니다. 이때 유다왕은 여호사밧왕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즉각 전쟁준비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한 것이 무엇입니까? 금식을 선포한 것입니다.
대하20:3절에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또 요엘2:12-14절을 보면 하나님은 '타락한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기 위하여 금식하라'는 명령을 직접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 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끼치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우리가 겸허히 금식하고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분명히 역사 하십니다. 여호사밧왕이 금식을 선포하고 매달리자 하나님은 역사하면서 연합군들끼리 살육이 벌어져 한사람도 피할 자가 없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그 전쟁에서 승리했는데 전리품만은 가져오는데도 얼마나 많은지 사흘 동안에 취했다고 20:25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금식은 하나님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태도입니다. 금식이란 자기가 음식을 굶으면서 얼마나 그것을 잘 견디느냐를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가진 문제가 너무나 심각해서 밥을 먹을 수가 없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한 태도입니다. /아멘!/
금식은 단식투쟁도 아닙니다. 단식투쟁은 어떤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니면 어떤 사람에게 압력을 주기 위해 좋은 방법으로 공갈치는 것입니다. 전두환, 김영삼도 단식을 했습니다. 인도의 간디도 금식운동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의 금식은 하나님과는 아무관계가 없는 금식입니다.
금식은 은혜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겸손한 태도입니다. 병에 걸렸을 때 금식, 어떤 문제를 놓고 금식, 저는 술도 금식으로 끊었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금식 기도를 통하여 역사 하심이 빠릅니다. 하나님은 금식할 때 환경을 바꾸어 주시고 마음도 바꾸어 주십니다. /믿/
시35:13절에 '나는 저희가 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다는 말은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뜻입니다.
▶금식을 하면 어떤 유익이 옵니까?
⑴건강에도 좋습니다. 동양의학에도 단식요법이 있지만 온 내장을 청소하는 격이 됩니다. 금식은 육신건강에도 참으로 좋습니다. 요즘 다이어트가 유행인데 금식하면 살도 빠집니다.
⑵영적으로도 심령이 순결하여지고 영이 맑아집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큰 은혜를 받습니다.
⑶금식은 자기 수련에도 좋습니다. 교만이 꺾어지고 아집이 녹아 내립니다.
▶이렇게 좋은 금식을 하면서 외식하는 자 같이 하면 안 됩니다.
⑴외식하는 자는 겉과 속이 다른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양을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어떤 마음으로 금식하고 있습니까? 당시 바리새인들은 외식의 대명사였습니다.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슬픈 기색으로 초췌한 모습으로 있을 때, 사람들이 '안색이 왜 그렇습니까?' 하면 '아 내가 국가를 위해 한 보름씩 금식하고 있네,' 하면 '아 참으로 애국자구나' 이런 칭찬을 노리고 금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외식입니다.
⑵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죽는시늉하면서 금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인데 왜 슬퍼합니까? 성경은 어디를 보나 기뻐하라고 했지 슬퍼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너희의 죄를 보고 슬퍼하라고 했습니다.
어떤 생활의 염려근심 때문에 슬퍼하는 것, 이것은 불 신앙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께 맡긴 사람은 담대합니다. 하나님께 맡긴 사람은 여유가 있습니다.
오늘 '외식하는 자, 슬퍼하는 자'들은 '이미 자기의 상을 다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로부터 경건하다는 칭찬을 듣는 것이 목적이 있는데 그것을 받았으니 그의 상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진정한 금식이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철저히 쳐 복종시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기 위한 신앙의 방편입니다. /믿/
▶금식기도에 대한 바른 가르침은 사58:3-9절에 나옵니다.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형식에 남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죄로 타락되어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사58:3절에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 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금식기도를 잔뜩 하고는 '하나님께서 왜 금식기도를 들어주지 아니하는가?' 원망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내가 금식을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하나님께서 나를 돌아보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3절 이하를 보면 금식기도를 하면서 오히려 타락한 생활을 한 모습이 나옵니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 도다.' 한마디로 금식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금식으로 인한 배고픔을 잊기 위해 세상 온갖 오락을 탐하고 있었습니다.
또 4절에 보면 유대인들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 도다.' 금식 기도하면서 개인적으로는 다투고 단체적으로는 당파싸움만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왜 서로 다툽니까? 사람이 교만하면 다투고 욕심을 부리면 싸우게 됩니다. 당파싸움은 나라가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책망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형식적으로는 머리를 갈대같이 푹 숙이고 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특히 슬퍼할 때, 머리에 재를 덮어쓰고 굵은 베옷을 입고 기도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외형적인 기도보다는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을 찾는 기도가 더 중요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참된 금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했다고 가르칩니다.
사58:6-7절입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어떤 모습으로 해야 하는가?
⑴'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자기의 악한 일을 행하던 것을 벗어 버리라는 뜻입니다. 금식 기도하면서 우리의 못된 악한 행동을 회개해야 합니다.
⑵'멍에의 줄을 끌러 주라' 고통 받는 사람을 돌아보아 그 묶여 있는 문제에서 풀어주라는 것입니다.
⑶'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배고파 굶주리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했습니다.
⑷'유리 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나그네를 불러다가 옷을 주고 잠자리를 주라는 것입니다.
⑸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말라' 골육지친이 도움을 청해 올 때에 피하여 숨지 말고 도와주는 손길이 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금식기도를 바로 하면 어떤 축복이 있습니까?
⑴8절 '네 빛이 아침같이 비칠 것이며' 흑암의 권세가 물러날 줄 믿습니다. 밤과 같이 어두운 세상에서 실수할 줄 모르는 빛의 사람이 되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집과 두려움은 도망시켜 주십니다.
⑵'네 치료가 금속할 것이며' 이 말씀은 회복이 빨리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병든 몸이 빠르게 회복되고, 손해를 보았던 재산이 다시 회복이 되고, 잘못하여 엉클어지고 무너졌던 것이 다시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할/
⑶'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이 말씀은 '생각도 말도 일도 실수함이 없이 바르게 행하는 의로운 사람으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⑷'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호위하리니' 무슨 말씀입니까? 내 생애를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⑸언제 어디서 무슨 사건을 놓고 기도하여도 즉시 응답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을 합시다. 그리하면 우리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할/
▶다시 본문 16절로 들어가겠습니다. 예수님은 금식할 때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서론부분에서 잠시 언급했습니다 만은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바리새인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던 내용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들은 자신이 이레에 두 번, 곧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하필 월요일과 목요일을 택해서 금식했겠습니까? 물론 명목상의 이유는 이러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을 금식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모세가 금식을 하기 위해서 시내산에 올라간 날이 바로 목요일이고, 시내산에서 내려온 날이 바로 월요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모세의 제자이기 때문에 모세가 40일 동안 금식한 것을 기념해서 자기들도 그 두 날, 곧 목요일과 월요일로 정해서 금식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이유는 다른데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월요일과 목요일은 전통적으로 장날로 모이는 날이었습니다. 그 날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장터에 모였습니다. 농사꾼들도 모이고, 장사꾼들도 모이고, 또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과 구경꾼으로 왁자지껄했습니다.
그러니 자기들이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기가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일부러 월요일과 목요일을 택해 금식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금식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얼마나 자신이 많이 기도하고 경건한 사람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그 날을 이용한답니다.
그들은 일부러 머리를 풀어 헤쳤습니다. 그리고 얼굴은 창백하게 보이는 화장을 하고 헤어진 옷을 입고 땅에 옷을 질질 끌면서 '오! 하나님!' 하면서 돌아다닙니다. 가장 금식을 잘하는 것처럼 꾸며대고 있습니다.
그들의 외식적인 모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16절에서 그들의 외식적인 모습을 두 가지로 지적하셨습니다.
첫째, 그들은 슬픈 기색을 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옷 가운데서 제일 헌 옷을 골라 입었습니다. 그들은 일부러 옷을 잡아 찢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재를 뿌렸습니다. 몸에는 더러운 먼지를 뒤집어썼습니다. 슬픈 모습을 가장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일부러 금식한 티를 내려고, 멀쩡한 얼굴에 재를 발라서 얼굴이 상해 보이도록, 창백해 보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왜 그들이 금식할 때 슬픈 기색을 하고, 얼굴을 흉하게 했다고 했습니까?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금식은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것이지,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의 목적은 온전히 금식하는 자의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금식을 한답시고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로 가 있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사람에게 향하고만 있었습니다.
당시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하지 말라! 슬픈 기색을 띄지 말라!'는 것입니다. 금식기도는 금식을 하는 과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마음입니다. 금식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은 이미 다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외식적인 금식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이미 그들은 받을 상을 다 받았습니다. 더 이상 받을 상이 없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속여서 사람들의 인정은 받았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서 받는 인기는 쉽게 사라져버립니다.
예컨대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을 생각해 보세요. 누구나 취임할 때는 인기가 하늘을 찌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인기는 곧 떨어지고 맙니다.
불행하게도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이나 힘들게 금식하고서도 그들이 받은 상이라고는 쉽게 사라져버리고 마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기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질책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져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내리실 화뿐이었습니다.
▶17절 "너는 금식 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너는 금식할 때에' 예수님은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에게 금식할 때가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 금식할 때입니까? 마9:14-15절에 보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물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그러니까 '예수가 떠나는 날 금식할 때'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늘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삶을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는 예수님이 멀리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영적인 각성을 위해 금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 쉽게 말하면 예수 충만이 사라질 때 영적인 각성을 위해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육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영적인 사람이 되어서, 모든 일에 승리함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라고 금식에 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너는 금식할 때에' 우리가 금식할 때에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외식적인 행동을 삼가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⑴금식은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보이는 것을 중요시하고 의지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행위나 용모, 실력 등을 은근히 과시하며 자랑합니다. 남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인간의 욕구는 신앙생활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표현됩니다.
즉 남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적 열심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은 바른 신앙이 못 됩니다. 엄밀한 면에서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로만 모아져야 합니다. 사람을 상대로 하는 신앙은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기 쉽고 낙담하며 좌절합니다.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금식은 주님의 책망을 받습니다. /할/
⑵금식할 때일수록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금식은 성도가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SOS신호입니다. 금식은 하나님과 비장한 만남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아멘!/
⑶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느9:1절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
느헤미아가 그의 동족들을 모아놓고 함께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또한 요나의 전도를 들은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며 금식 할 때에 굵은 베를 입고 티끌에 앉아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의 회개 금식 기도를 받으시고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죄를 통회하는 심령을 멸시치 않으십니다. 시51:17절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금식은 회개를 동반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아니한 완악한 죄인의 금식은 금식이 아니고 단식입니다. 단식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인간의 목적만을 이루려는 인본적인 행위입니다.
반면에 금식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는 모두 버리고 하나님의 뜻만을 이루려는 고귀한 신앙적인 행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금식을 위해서 우리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여기에 기름을 바르는 행위는 어떤 특별한 기쁨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몸단장을 위한 것입니다.
삼하12장에 보면, 다윗이 밧세바가 낳은 아이의 병을 위해 금식하다가 그 아이가 죽고 나자 금식을 중단하고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발랐습니다.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금식의 행위를 밖으로 나타내지 않은 표적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할 때 슬픈 기색을 내기 위해서 일부러 머리를 헝클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재를 뿌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금식할 때 머리를 깨끗이 빗고 기름을 바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할 때 얼굴을 흉하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얼굴에 재를 발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금식할 때 우리의 얼굴을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8절입니다.
▶18절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신앙생활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식은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께 바로 보이고 해야 합니다.
금식이란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을 절제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 전제의 성결과 거룩과 절제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히브리어의 금식의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나춘다.'는 뜻입니다. /아멘!/
행13:2절을 보면 안디옥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할 때에 '누구를 선교사로 파송할 것인가?' 하는 이 중요한 교회적인 문제를 놓고 성도들이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 후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가 기도할 때입니다. 금식기도는 특별 기도로써 모든 문제해결의 마스터키입니다. /믿/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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