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102강) 세금에 대한 논쟁! (마 22:15-22)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43

(제102강)      세금에 대한 논쟁! (마 22:15-22)

 

  마21장을 보면 그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권세에 대하여 질문했습니다. 23절에 보면,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이 질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역으로 질문을 했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써 왔느냐? 하늘로 서냐? 사람에게 서냐?'고 묻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면서 그들을 세 가지의 비유를 들어서 책망하셨습니다.
  ①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뜻에 불순종한 큰아들을 비유하시며 유대인들은 책망하셨습니다.
  ②악한 농부의 비유입니다. 유대인들은 악한 농부에 비유해서 책망했습니다.
  ③지난 시간에 배운 왕의 잔치의 비유에서도 왕의 초대를 거절했던 유대인들을 비유하시면서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 보면 이제 유대 지도자들이 세밀하게 꾸민 술수로써 예수님을 반격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여야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할까?' 서로 진지하게 의논한 끝에 당시 원수지간처럼 여기는 헤롯 당원들에게 제자들을 보내어 합세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계속해서 납세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예수님을 공경에 빠뜨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제목 소개!▶

 

  앞에서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로써 그들은 책망하셨습니다. 이제 본문에서부터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역 공격이 다시 시작되고 있습니다.
  본문이하에 보면 그들은 예수님께 정치적, 신학적, 종교적 질문을 퍼붓게 되는데 오늘 본문은 정치적인 질문을 퍼부으므로 예수님을 공경에 빠뜨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 하나이까 불 가하나이까?'입니다.
  똑같은 유대인들이지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만 세금을 바쳐야 한다는 중심을 가지고 있었고 헤롯 당원들은 로마 황제에게 충성하려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예수님이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면 민족의 반역자로 잡아서 종교적으로 매도하려고 했고,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대적자로 헤롯 당원들이 예수님을 잡아갔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교묘히 예수를 시험했던 것처럼 오늘도 끊임없이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마귀는 3가지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마음으로 시험할 때도 있습니다. 둘째는 말로 시험을 합니다. 셋째는 직접 행동으로 시험을 할 때도 있습니다. 이 모든 시험을 예수님은 오로지 '기록되었으되'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할/
  이런 간교한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현실적으로는 로마의 지배아래 있었기 때문에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 아니면 바치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어쩌면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의 공통적인 고민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이런 비슷한  갈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두 나라의 시민입니다. 하나는 세상의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 두 나라에서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이사의 나라가 최고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가 최고라고 가르치면서 가이사의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이사의 것 즉 세상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 나라에 동시에 살고 있는 선민들임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어떻게 조화를 이루면 살아가야 합니까? 예수님 당시 유대인은 로마에 정복당하고 노예와 같이 살았습니다. 자유를 빼앗기고 얼마나 핍박이 심하고, 어려웠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저들과 투쟁하고 싸워서 이기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처럼 세상 법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나라가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예수님은 조화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소속되어 있지만, 육적으로는 대한민국에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양쪽에 모두 의무가 있습니다.
  무디(D. L. Moody) '그리스도인은 지나치게 경건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 유익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유익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지극히 적은 일부분이고, 나머지는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지혜로운 답변입니까? 사실 이 질문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자기들의 술수에 묶으려고 간계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약 그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가하다'로 대답할 경우에는 유대인들로부터 매국노 또는 반역자라는 비난을 듣게 될 것이고 '불가하다'고 대답하면 가이사에 대한 반역으로 고발당하게 될 것입니다. /할/

 

  ▶15절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여기 바리새인들만 언급한 것은 당시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거의가 바리새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라는 접속사는 그들이 다른 방법을 찾아 다시 예수님을 올무에 씌우라는 술책입니다.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여기서 '걸리게 할까'는 히랍어로 '파기듀오'란 말로 그 뜻은 '짐승을 잡기 위해 몰래 함정을 설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냥감 취급을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을 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사실이지 주님은 그들에게 사냥감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님을 잡아 죽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지금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고 계십니다. 주님은 출애굽 당시의 유월절 어린양처럼 인간의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하기 위한 어린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할/
  사람들은 남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음모가 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함정에 빠지는 것도 잘못입니다만 남을 빠뜨리기 위해 함정을 파는 것을 더 큰 잘못입니다.
  ▶어느 동네에 원수처럼 지내는 두 집안이 있었습니다. 사 대째 내려오는 원수 집안입니다. 사사건건 맞서기 일쑤였고, 때로 패싸움도 벌렸습니다. 어느 날 밤 강 씨네 집안 남녀들이 볼 때 최씨네 집 식구들이 다니는 길에 깊은 웅덩이를 파고 오물을 채운 뒤 나뭇가지와 집단으로 덮고 흙을 깔았습니다.
  날이 새면 최씨네 집안 식구가 지나가다가 빠지라는 계략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잇던 김 씨 마누라가 아침 일찍 일어나 물동이를 이고 물 길러 가다가 그 함정에 빠졌습니다.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뿌리고 내가 거둔다는 말과 같습니다. 남을 해치기 위해 함정을 파면 자신이 그 함정에 빠집니다.
  본문의 배경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듣고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들으라고 저런 말을 하지' 그렇다면 우리도 다시 계획을 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론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서로 의논하고 머리를 맞대고 꾀를 짜냈다는 것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그들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서로 협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은 악과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악은 또 다른 악을 불러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선은 선으로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완악해서 부패되고 사악해 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악한 자들의 부패한 마음이 다른 악한 자들을 어떻게 용납하는지를 롬1:3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성 '어거스틴'은 죄의 속성에 대해서 말하기를 '죄는 다른 사람과 연합하는 사회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양심을 자극하게 되고 그래서 다른 악인을 찾게 됩니다. 이들은 자신과 동일한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들의 양심을 더욱 무디게 하여 양심의 가책을 덜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에서 멀어질수록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한 사람만이 천국에 합당'한 사람임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할/

 

  ▶16절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헤롯 당원에 대하여 알아봐야 본문의 말씀이 더 이해가 쉽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유대는 로마의 속국입니다. 그런데 국민 중에는 양대 주의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반로마주의, 또 하나는 친 로마주의입니다.
  반로마주의는 메시아 대망의 사상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 건국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종교 세력으로 바리새파가 그 중심이었고, 이들은 로마정부에 세금 내는 것을 거부합니다. 반면에 친 로마주의는 헤롯 당을 중심으로 이들은 로마 통치에 복종함으로 찬성하는 주의입니다.
  우리나라도 일본 압제 하에 있을 때 친일파들이 있었습니다. 헤롯 당은 사실 종교가 없고 따라서 신앙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세속적이고 권력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사실 원수지간입니다. 사상이 다르고 신앙적인 면에서도 다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런 원수들끼리 작당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사람들은 서로 대립하다가도 교회를 핍박할 때만은 서로 연합작전을 펴 교회를 괴롭힙니다. 우리는 동네 주민들로부터 이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16절을 보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함하려는 데는 수단 방법을 안 가립니다. 바리새인들은 로마의 세력에 대해 늘 반항적이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아주 수치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헤롯 당원과 합세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헤롯파란 헤롯을 지키자는 친 로마세력의 권력집단입니다. 본문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그 헤롯 왕들에게 찾아갔습니다. 헤롯 당과 야합을 하여 예수님을 공격하는 세력으로 둔갑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목적으로 서로 모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교회 안 밖에서 자주 모입니다. 어떤 모임은 매우 유익하지만, 어떤 모임은 무익할 뿐 아니라 해로운 경우도 있습니다. 꿈의 사람 요셉을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가 보자' 연합하여 음모를 꾸몄습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여 올무를 놓는 자들의 마음은 어두움입니다. 그런데 이는 모든 것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데서 오는 행위요, 때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요, 반역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넘어뜨리려는 자들은 주로 ⑴위장을 합니다. 겉으로는 부드러우나 속에는 악의가 가득합니다(16). ⑵어두움을 좋아합니다. ⑶때를 엿봅니다. ⑷시기와 질투를 좋아합니다. ⑸행악 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자들과 함께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자들의 계획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보시고 비웃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할/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하나님께서 기뻐 흡족하실 수 있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아멘!/
  사실 어떤 의미에서 헤롯파 사람들은 원래 정치적이고 세속적이기 때문에 야합한다는 것은 그들의 정치적은 속성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경우는 다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이란 분리주의자란 말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서 하나님만 경건하게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만 섬기는 전문가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데는 반 신앙적인 자세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하는 말을 보면 거짓 아부를 떨고 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은 외모를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말합니다.


  ▶여기서 저들의 말을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①'선생님이여'라고 예수님을 호칭했습니다. 이 말은 랍비와 동격인데 진리와 권위를 갖춘 선생님이란 뜻입니다. 그 당시 이 말은 파격적인 말입니다.
  ②'당신은 참되시며' 이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단하여 잘 가르치는 진짜 선생님이라는 말로써 최고의 경칭입니다.
  ③'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참되신 선생으로서의 예수님은 백성들의 여론이나 인기를 생각지 않고 관원들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평가하시는 것과 같이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고 소신껏 말씀하시는 분이라고 최고의 칭찬과 존경을 표하는 말입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말씀하신 것은 진실입니다. 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놀라운 진리를 선포하고 만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은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아첨하는 말로 질문을 시작함으로써 경계심을 늦추도록 한 계략입니다.
  시55:21절의 말씀을 보세요! '그 입은 우유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할/
  여러분, 원수마귀는 우리에게 달콤한 말로 유혹합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속으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첨을 합니다. 대인은 아첨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이승만 박사가 왜 그렇게 비참하게 마지막을 보냈습니까? 아첨하는 것, 좋아하다가 그랬습니다. 특히 정치인들은 아첨하는 것을 좋아하다가 망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 대통령이 바른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늘 도와주소서' 왜냐하면 그 자리는 사람들이 아첨하는 자리요 떠받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삿16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최대의 장사인 삼손이 파멸에 처하게 된 것을 블레셋 군대 때문이 아니라 드릴라의 감미롭게 위장된 사랑의 속삭임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위장된 아첨으로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잠27:21절에 서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칭찬해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시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할/
  여러분, 혹시 사람이 무섭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이 병든 것입니다. 사람은 두려워 할 존재가 아닙니다. 두려워할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얄팍하게 아첨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찬양을 하면 받으십니다. 그러나 마음에 없는 기도, 마음에 없는 찬양은 하나님은 듣지 않으십니다. /믿/

 

  ▶17절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이들은 예수님께 거짓 존경과 찬사를 보낸 다음 올무에 걸릴 수 있는 질문하나를 던집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당시 유대 지방의 납부문제는 민감한 문제입니다. 그 당시 로마가 강요하는 세금에는 세 가지 규칙적인 세금이 있었습니다.
  ①토지세입니다. 누구나 정부에 곡식에 1/10을 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생산한 기름과 포도주의 1/5을 내야 합니다. 납세방법에는 일부는 현물로 납부하고 일부는 그 현물에 상당한 현금으로 납부했습니다.
  ②소득세입니다. 이것은 한 개인의 수입의 1/100을 지불했습니다.
  ③인두세입니다. 이 세금을 내야 할 대상자는 남자는 14-65세까지고 여자는 12-65까지 모든 사람이 다 내되 한 사람 당 1년에 한 데나리온인데 오늘날로 말하면 장년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금이 바로 인두세인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항상 저항감을 불러일으킨 세금입니다.
  본문의 질문은 예수님을 아주 딜레마에 빠뜨릴 수 있는 질문입니다. 이래도 걸리고, 저래도 걸리는 질문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바치라'고 하면 반민족 불경건의 죄목으로 유대인들에게 걸립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왕으로 숭배하는데 로마 황제는 왕으로 인정하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경건 죄에 해당되고 매국노, 반역자로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 당국에 당장 체포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가이사'는 A.D12-37년까지 로마는 통치한 티베리우스 황제입니다. 눅2:1절을 보면 로마 정부는 매14년마다 한 번씩 그 각 지방에서 바쳐야 하는 세금의 총량을 결정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때부터 이방 지배자들에게 조공을 바치는 일에 대하여 문제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로마가 통치하면서 인구조사를 할 때 갈릴리 사람 유다(행5:37)가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신데 이방 왕들에게 세금을 바쳐 그를 인정한다면 이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란은 일으켰지만 로마군에 의해 진압되고 나서도 가이사에 대한 납세의 적법성이 계속 신학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십일조를 바치면서 또 이방 왕에게 세를 바치는 것은 유대인들은 그 꺼림칙하게 여겼습니다. 그 당시 유대에는 열심당원이 있었는데 이 세금문제를 계속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심각한 현실 때문에 내리고 할 수도 없고 내지 말라고 하면 로마 총독과 헤롯왕으로부터 정치범으로 몰리게 되어 있습니다. /할/

 

  ▶18절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반응입니다.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주님은 인간의 마음과 생각과 사상까지도 아시는 분이십니다. 두 얼굴, 두 마음, 이중적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들의 악함을 주님이 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실한 사람은 말과 마음이 똑같아야 진실한 사람입니다. '말 따로, 마음 따로' 이런 사람들을 '악한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사람이 참 많습니다. 말은 그럴싸하게 잘해 놓고 마음속으로는 저 사람을 넘어뜨려서 사기를 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사람에게 좋은 말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칭찬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 특별히 그 사람을 쓸데없이 칭찬하기도 하고 기분 좋게 만들기고 합니다. 그러니까 너무 과잉 칭찬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할/
  사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의 가장 큰 원수는 헤롯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야합해서 예수님을 함께 시험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간악한 생각을 아셨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대적자들의 음흉한 속을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외식하는 자들아' 하고 단호히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온갖 것으로 자신을 숨기고 있지만, 속으로는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고 하면서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뿐이었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준수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 진정한 율법의 정신을 짓밟았으며, 사람들에게 훌륭한 교사로 칭찬 받았으나 실상은 백성들을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기 위해 이용했을 뿐입니다. 주님의 말씀 그대로 '회칠한 무덤'이었습니다.
  여기 '외식'은 두 얼굴, 즉 겉 다르고 속 다른 것, 말과 생각이 다른 것, 행동과 생각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악함을 아시고 '외식하는 자들아, 왜 나를 시험하느냐?' 꾸짖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40일 금식기도 후 마귀와 대적할 때 쓰셨던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경외와 경배의 대상이지 시험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할/

 

  ▶19절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여기 '셋돈'은 세금을 말합니다. 그리고 '데나리온 하나'는 세금의 단위인데, 이 세금은 로마 황제가 발행하는 은화로 바쳐야 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화폐는 은전인데 가이사의 화상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세금은 데나리온으로 내고 유대인의 성전 세는 세겔이라는 돈을 사용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화폐를 완전의 상징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바뀔 때마다 자기 화상은 화폐에 넣었습니다.
  심지어 왕위를 노리는 자까지도 자기의 왕 직의 실재성을 과시하기 위해 화폐를 발행했다고 '바클리'는 말했습니다.
  여기 '데나리온' 하나는 성인 남자 하루 품삯이었고, 로마군인의 하루 임금이었습니다. 세금은 매년 일인당 한 데나리온입니다. /할/

 

  ▶20절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데나리온에 새겨져 있는 형상과 글이 대하여 예수님이 물으신 것입니다.
  이 데나리온 주화의 한 면에는 황제의 신성을 표시하는 월계관을 쓰고 있는 황제 티베리우스의 두상이 그려져 있고, 그 밑에는 '존엄한 신의 존엄한 아들 티베리우스 가이사'라는 글이 새겨져 있답니다.

 

  ▶21절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은 그 화폐가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단호하게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 깊은 영적인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것과 세상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①'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로마의 정부를 인정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의 국가는 일시적이고 불안전합니다만 그래도 국민은 국가의 존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국가라도 예수님은 국민이 지켜야 할 의무인 납세를 잘 내라는 것입니다. 요19:1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 받으실 때 잘못된 사법제도이지만 그 재판권도 인정하셨습니다.
  바울은 롬13:1절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여기 '위에 있는 권세'는 세우신 위정자들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고, 악을 제어하며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권세자(왕과 관리들)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는 로마 정부의 지배아래 있었습니다. 식민지 백성으로 어렵게 살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로마 정부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하는 극렬분자도 있었고 열성당원이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이 열심당원들은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 밖에 왕이 없다고 믿었고, 세상에 왕은 아예 인정하자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로마 황제를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더 나아가서 로마 정부에 세금을 바치는 것도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고분고분 세금을 바치는 자가 있으면 암암리에 죽이기도 하고 집에 불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로마 정부를 뒤집어엎겠다는 일념으로 어떤 폭력도 마음대로 행사했습니다. 바라바라는 인물이 바로 열심당원으로써 로마 정부에 아첨하는 자들을 죽인 폭도입니다.
  이런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로마의 유대인 중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매우 애매한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로마 정부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매우 난감한 위치에 놓여 있을 때 바울이 이 말씀을 주어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고 했습니다. /할/
  우리는 기독교의 신자인 동시에 또한 이 나라의 국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위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를 위하여 충성을 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죽기까지 복음주의, 죽기까지 독일주의'라고 외치면서 그의 신앙과 애국심을 표현했습니다. 예수님도 그의 전도생활에서 먼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보냄을 받았다고 하시면서 애국심을 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악으로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한없이 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눈물은 조국은 사랑하는 눈물입니다. 희랍의 소크라테스는 부적당한 법률 하에 독약을 먹어야 하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때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그런 방법인 국법에서 피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덴의 시민이 된 이상 아덴의 법을 지키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하면서 독약을 마셨습니다. 예수님이 본문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국가에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나라를 사랑해야합니다. 오늘이 삼일절인데 그 당시 33인의 민족 대표 중에 16명이나 목사와 장로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국민의 4대 의무가 있습니다. '국방, 납세, 교육, 노동'의 의무입니다. 잘 지켜야 우리가 혜택을 누립니다. /아멘!/
  ②'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나님의 것이 무엇입니까?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시민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믿/
  우리는 영원에 속한 사람이요,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자매도, 우리의 재물도, 우리의 시간도, 우리의 생명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삶은 온전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 일어납니다. /할/
  온전한 11조를 하늘 창고에 드리십시오, 그리하면 우리들의 재물창고가 차고 넘치는 복이 임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오병이어의 기적은 하나님께 감사한 어린아이의 손길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것이란 국가나 이 세상 누구도 받을 수 없는 하나님만이 받을 수 있는 예배와 경배를 의미합니다. 시24:1절에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아멘!/

 

  ▶22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기이히 여겼다는 말은 깜짝 놀랐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런 답변이 나오리라고는 절대 상상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의 협공을 피하면서 도리어 그들의 부패한 심령골수를 찔려 조갠 것입니다. /할/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의 것'이라는 무거운 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에 압도당하여 '기이히 여겨' 놀라고 감탄할 뿐이었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땅에서 사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삽니다. 이 세상의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이 구원의 은총을 누리지 못한 채 하늘과 땅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세상의 무거운 짐을 여전히 온 몸을 짓누르도록 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질서보다 세상의 가치 질서를 따라 사느라 바쁩니다. 세상의 유행과 풍조를 좇아 이리저리 방황합니다.
  신앙생활에 기쁨을 모르고 만족도 없이 불편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진리에 익숙하지 못해서입니다. 아직 복음에 익숙하지 못해서입니다. 요14: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바른 길을 갈 때 당당하고 자유합니다. 안정을 얻습니다. 평안을 누립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길을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인간의 길을 가르쳐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잘 배워서 그 길로 바로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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