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103강) 부활에 대한 논쟁! (마 22:23-33)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44

(제103강)       부활에 대한 논쟁! (마 22:23-33)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에서 부활이 빠지면 전체적으로 교리가 무너집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에 대한 논쟁'입니다. 

  ▶먼저 부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고전15장은 부활장입니다. '메투헨리'는 고전15장은 '복음의 총체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다루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바울은 고전15:3-4절에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여기서 보면 '성경대로'란 말이 두 번이나 강조됩니다. 즉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럼 '성경대로'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나 부활사건은 우연이나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성경에 예언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사53장을 보면 구구절절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시22편 역시 버림받고 멸시받는 메시아의 모습을 예언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메시아의 부활도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호6: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주님의 부활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시16:10절도 의역에 보면 '주님께서 나를 보호하셔서 죽음의 세력이 나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 하셨으며, 주님의 거룩한 자를 죽음의 세계에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했고, 주님께서도 죽은 야이로의 딸을 보시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마9:2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영혼은 썩지 않으며 사후에 다른 생명이 있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이나 에스겔 선지자 또한 부활의 사실과 부활의 신비를 예언했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해골들이 서로 연결하여 생명을 다시 얻어 군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국가에 대해서만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부활을 구체적으로 예언한 것입니다.
  여기 '성경대로'라는 이 한마디는 부활의 확실성과 역사성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 자체가 없어지지 않는 한, 그리고 성경의 모든 예언과 진리가 소멸되지 않는 한 성경대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영원한 역사적인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 가장 든든한 신앙은 성경대로 믿는 것입니다. 사이비나 이단 교주들은 성경의 권위보다 자신의 교훈이나 권위를 더 높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기독교는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사는 신앙이 최고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눅24장의 엠마오로 내려가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두 제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때문에 공포와 허탈감에 빠져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셔서 그들의 허탈감 속에서 절망하고 있는 두 제자들에게 오셔서 새로운 힘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무덤 속에 있는 죽은 예수님, 절망의 예수님이 아니라 절망과 좌절의 현장에 찾아와 주시는 다시 사신 예수님이십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두 제자는 영안이 열려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았고, 마음이 뜨거워져 새로운 힘이 솟아났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뜨겁다'는 말은 '마음이 감동되었다. 깨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부활의 주님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또 다시 예수님을 찾아와서 '부활에 대한 논쟁'을 벌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의 권세에 대해서 도전했습니다.
  마21:23절에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이 권세 문제는 종교의 본질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 다음 세금문제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도전했지만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말씀으로 그들의 공격을 물리치셨습니다.
  세금문제는 그 당시 사회적인 문제요,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 세 번째 그들은 부활의 문제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부활에 관한 문제는 '교리의 문제요 신학의 뼈대가 되는 문제'입니다. /할/ 
  요6:40절에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기독교는 영생 부활을 빼놓으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몸으로 부활되는가?
  ⑴죽어서 장사되었던 몸이 그대로 부활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령한 몸으로, 영광의 몸으로 부활'합니다. 콩이나 옥수수 알갱이를 심으면 그것은 썩어 없어지고 그와 꼭 닮은 다른 알갱이 열매를 맺듯이 우리가 죽으면 요 모습, 요 나이 그대로 부활하는 것은 아닙니다.
  빌3:21절에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몸이 그대로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장례식으로 매장을 해도 좋고 화장을 해도 좋습니다.
  ⑵썩지 않는 불후불멸(不朽不滅)의 몸으로 부활합니다. 고전15:42절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부활의 몸은 늙지도 썩지도 않으며 영원히 죽지 않는 몸입니다. /할/
  ⑶태양과 같이 빛을 발하고 눈부시게 빛나는 몸으로 부활합니다. 마13:43절에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또 단12:3절에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했습니다.
  ⑷그런데 중요한 것은 부활의 몸은 그 영광이 각각 다릅니다. 고전15:41-42절에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즉 해와 달과 별들의 영광이 각각 다 다른 것같이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갔지만 순교한 바울이나 베드로가 누리는 영광과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 간신히 구원받은 강도의 영광이 결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냥 대충 대충 신앙생활 하는 자들과 열심을 품고 헌신하는 자들의 상급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상급도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이 적용됩니다. /믿/ 


  ▶부활하신 주님이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11번 제자들에게 오셨고 후에 스데반 집사와 핍박자 사울에게도 보이셨습니다.
  ⑴무덤 가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오셨습니다(막16:9/요20:14-18). 예수님은 부활 후 무덤 가에서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 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⑵무덤에 갔던 여인들에게 오셨습니다(마28:8-10). 주일 새벽에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 사건은 주일 새벽 일찍이 일어난 사건입니다.
  ⑶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오셨습니다(눅24:13-35/막16:12-13). 제자 중 두 명이 예루살렘에서 25리 되는 엠마오로 가면서 일어난 체험인데 '이 일을 이야기하고 문의할 때' 예수님이 동행하며 자신에 대한 성경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⑷베드로에게 오셨습니다(눅24:34/고전15:5). 주님은 당신을 부인한 제자에게도 나타나셔서 그 좌절과 절망과 낙심과 후회 속에 있는 그를 다시 격려하고 일으켜 세웠습니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⑸도마를 제외한 열 제자에게 오셨습니다(막16:14/눅14:36-37). 주일저녁 방에 숨어있던 열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제자들 앞에 예수의 영(靈)이 나타난 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보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나는 살과 뼈가 있다'고 하시고 제자들이 먹다 남은 생선을 받아서 잡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으로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육신과 함께 온전히 부활하신 것입니다. /할/
  ⑹도마를 포함한 열 한 제자에게 오셨습니다(요20:26-29). 한 주일 후에 도마와 함께 열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왜냐하면 한 주일 전에 도마는 예수님이 나타날 때 없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나타났다니까 비웃었습니다.
  '참 정신 없는 소리하지 말라. 나는 예수님의 손에 내 손가락 넣어보고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고야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 한 주일이 지나서 도마가 열 제자와 함께 있을 때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도마야 이리 오너라 네 손을 내어서 내 못 자국에 넣어 보아라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라 그리고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도마는 너무나 놀라고 감탄하고 탄복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그렇게 고백할 때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⑺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일곱 제자에게도 오셨습니다(요21:1-14). 갈릴리 호수에 이른 아침 나타나셨습니다. 요21:4-6절 '날이 새어 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과 고기를 먹이시고 베드로를 다시 회복시켰습니다. 세 번 부인했기 때문에 세 번 예수님이 회복을 시켰습니다. '베드로야 이 모든 사람들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또 잠시 후에 '베드로야 이 모든 사람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마지막으로 '베드로야 이 모든 사람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부인한 만큼 세 번 그의 입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해서 상처 입은 베드로를 다시 회복시켜 수석제자로 복귀시켰습니다.
  ⑻갈릴리 산에서 열 한 제자에게 오셨습니다(마28:16-20/막16:15-18). 갈릴리 한 산 위에서 지상명령을 내리시면서 나타나셨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⑼500명의 성도들 알에 오셨습니다(고전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한 두 사람이 주님을 본 것이 아니라 500명이 동시에 보았으니 500명이 동시에 다 최면술에 걸렸다고 말할 수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⑽야고보(알패오의 아들)에게도 오셨습니다(고전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⑾부활 후 40일 째 되는 날 감람산에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 모습을 보이셨습니다(막16:19-20/눅24:44-53/행1:1-11). 40일 후 감람산 베다니 근처에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 축복하시고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하늘로 승천해 올라가셨습니다.
  눅24:50-51절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친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그들 옆에 서서 말하기를 '갈릴리 사람들아 왜 하늘을 처다 보느냐? 하늘로 들리운 이 예수님 네가 본대로 오시리라'고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⑿스데반이 순교할 때 하나님 우편에 주님이 앉아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끌려나가서 돌로 얻어맞고 죽을 때 예수님을 보셨습니다.
  행7:55-56절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⒀교회를 열렬히 대적하던 사울에게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고 하시며 그를 사도로 세우셨습니다(행9). /할/ 우리는 부활신앙을 소유한 백성입니다. 넓은 마음, 관용의 마음, 섬김의 마음이 우리 안에 넘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23절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지난 시간에는 당시 헤롯 당원들과 바리새인들이 합세하여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원수지간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 위해서는 어떤 세력과도 단합하여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보면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과의 원수지간처럼 지냈습니다. 그 당시 유대교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센파' 세 종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모든 면에서 서로 대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파가 예수님 앞에 실패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사두개파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몰아넣고자 공모를 하고 예수님 앞에 나왔던 것입니다.
  먼저 사두개파의 기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사두개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기원 설이 있는데 가장 폭넓게 지지 받는 설은, 사두개란 이름이 원래 다윗 시대에 제사장이었던 사독에게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사독은 원래 아비아달과 함께 제사장이었으나 솔로몬이 사독을 제사장의 우두머리로 삼았으며(왕상2:26-) 그 후손들이 나중에 마카비 시대에 본격적인 유대교의 한 당파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제사장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로마의 통치아래서 로마의 정치적인 상황을 지지했고, 헬라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세속주의였고, 합리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고위 제사장과 대제사장은 예외 없이 사두개인들이 차지하였고, 유대의 최고 의외기관인 산헤드린의 다수도 사두개인들이 차지했고, 성전 안에서의 돈 바꾸는 일과 희생제물인 비둘기를 파는 일에도 개입했으며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백성들로부터도 지지를 못 받을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에게도 경멸을 받고 있었으며 당시 예수님도 그들은 좋게 여기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두개파를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⑴부요하고 귀족들이며 친 로마 파들입니다.
  ⑵로마 정부에 협력자요, 헬라문화권에 빠져있었던 소위 진보주의, 자유주의자입니다. 신앙은 정통 보수주의가 최고입니다.
  ⑶성경 중 '율법서'만 인정하고, '역사서, 예언서'는 성경으로 인정치 않은 사람들입니다.
  ⑷헤롯파에 속한 제사장이 많았습니다.
  ⑸부활도, 천국도 믿지 않았고, 천사와 악마의 존재로 믿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은?
  ⑴친 유대애국주의자들입니다.
  ⑵보수적이고 율법은 생명으로 알고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⑶구약성경을 다 인정하고 장로들의 유전을 인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⑷부활도, 천국도, 천사도, 악마도 다 믿었습니다.
  이렇게 교리적인 면에서나 모든 면에서 서로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이들이었지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은 공격하는데 실패했다고 소리를 듣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파가 함께 공모하여 예수님을 함정에 몰아넣고자 온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 이들은 성경 모세 오경만 믿습니다. 또 그들은 육체가 죽을 때 영혼도 멸망당하게 되므로 내세의 보상과 부활 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본문에 사두개인들이 부활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사실 부활은 인간의 이성이나 합리적 방법으로나 과학적인 사고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만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17세기에 가장 유명했던 과학자요, 철학자요, 신학자였던 파스칼을 하나님의 은혜와 신비한 성령의 불을 체험한 뒤에 가죽에 써 가지고 자기 옷자락 안에 붙이고 다니던 글 중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철학자나 과학자나 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는 자의 하나님이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신앙의 길을 갔습니다. /할/
  다시 말하면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증명하고 실험해서 믿는 것이 아니며 철학적으로나 합리적인 논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질문이 무엇입니까?

 

  ▶24-28절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부활이 없음을 입증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한 것입니다. 사두개파의 질문의 초점이 무엇입니까?
  '부활 후에 일곱 번이나 결혼한 이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예리하고 날카로운 질문 같습니다. 이 말씀은 신25:5-10절 인용한 것인데 그들이 성경을 잘못이해하고 있습니다.
  신25:5-6절에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그 당시 유대인의 법 가운데, 형이 죽은 뒤에 형수를 취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 시대의 윤리였습니다. 특별히 그 시대는 전쟁이 많았고 병이 많았기 때문에 남자들이 죽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랬을 때에 그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서 이런 제도가 생겼습니다.
  창38장에 보면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다에게 아들 셋이 있었는데 큰아들이 엘론입니다. 그가 다말과 결혼을 해서 사는데 그가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다 징계를 받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유다가 둘째 아들 오난에게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네 형의 기업을 위하여 씨를 있게 하라'고 하자, 오난은 자기 아들이 되지 않음을 알고 그 형수에게서 씨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오난의 악함을 보시고 그를 죽였습니다.
  그 다음 유다의 셋째 아들 셀라가 있었는데 유대가 생각하기를 셀라마저 죽으면 어떻게 할까 하고 다말에게는 셀라가 아직 어리니까 성장하기를 기다리라고 하면서 친정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셀라가 장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말에게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유다가 며느리 다말이 살고 있는 딤나에서 양털을 깎는 일이 있어 내려갔는데 그 며느리 다말이 얼굴을 변장을 하고 몸을 파는 창녀로 분장해서 시아버지를 의도적으로 유혹해서 아기를 낳습니다. 이것은 인륜적으로 생각하면 참 이해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만 그 당시 여자가 그 가문에 대를 잊는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다말은 후에 훌륭한 여자로 인 침을 받아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갔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유다가문에서 메시아가 오시는데 그 메시아의 맥을 잇는 일을 다말이 했기 때문입니다. /할/ 그 당시 대를 잇는 것이 이렇게 중요했습니다.
  룻기서를 보면 나오미가 모압 땅으로 내려갔다가 두 아들이 죽어버리자 다시 며느리 룻과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보아스를 통하여 룻이 대를 잇는 것이 나옵니다.
  큰 형이 후손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어서 그 가문을 잇게 하고 기업을 이어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형제가 없으면 가까운 근족의 가문과 기업을 잇게 해 주었는데 바로 룻기의 보아스와 롯의 결혼이 바로 그런 제도의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이런 제도를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이 말씀의 본뜻을 제쳐놓고 부활이 없다는 자기들의 교리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이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두개인이 들고 나온 본문의 질문은 가상적인 질문입니다. 일곱 형제 중 큰아들만 결혼했고, 동생들은 다 결혼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큰아들이 죽고 둘째, 셋째, 차례대로 다 죽고 마지막에 일곱째 아들이 죽고 나서야 그 여자가 죽었다고 했는데 그 연차대로 따져보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 가상의 이야기를 지어냈고 모세의 율법은 잘못 인용한 것입니다. /할/ 이러한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29절입니다.

 

  ▶2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나타난 두 가지 잘못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①그들이 성경을 인용했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을 백독이나 했고, 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면 뭘 합니까? 성경의 진리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믿/
  이단들을 만나면 아주 성경을 잘 아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교리만을 구슬 뀌듯이 꿰어 신구약 전부를 짝을 맞춥니다. 그리고 그것을 달달달 외웁니다. 여호와증인이 그렇고 통일교, 구원파가 그렇습니다.
  성경 전체의 중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기들의 교리만 들고 외칩니다. 다른 사람이 들을 때는 아주 전문적으로 그럴 듯합니다. 성경에 대해 정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을 보시고, '너희가 성경을 오해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성경의 핵심과 본질을 잃어버렸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부활이 있다는 성경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할/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만 부활이라는 말에 눈을 돌리지 못합니다. 구약에 보면 부활이라는 단어를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곳곳에서 몸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32:39절에 '이제는 나 곧 내가 그 인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또한 사26:19절에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으리로다' /할/
  인간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으나 살릴 수는 없습니다. 구약에 한나의 고백처럼 죽이고 살리기도 하시는 하나님은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에녹은 죽지 않고 산채로 들림을 받았고, 엘리야는 불 수레를 타고 승천했습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이러한 놀라운 부활의 진리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리에 얽매인 사람들의 불행입니다. 이단에 얽매인 사람들은 거기서 가르치는 것 외에는 모두 진리를 외면해 버립니다. 성경은 66권 전부가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 재림'입니다. /할/
  ②사두개인들의 또 한가지 실수는 '하나님의 참 능력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가장 큰 죄가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 바로 큰 죄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부모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할 수 있거든이 내 아들을 고쳐 주소서!' 이렇게 말할 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그때에 귀신들린 아이의 부모가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이 산을 저 바다에 옮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나보다 너희들이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저는 요즘 제 자신과 싸우고 있습니다. 교회가 어렵게 되니까 자꾸 불 신앙이 고개를 드는 것 같아서 자꾸 제 자신과 싸웁니다. 여러분, 목사는 약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강하십니다. 우리는 돈이 없지만 하나님은 없는 것이 없습니다. /믿/

 

  ▶30절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이 말씀의 요점은 세상 질서와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천국을 세상 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세상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있습니다. 아기 낳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그런 질서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지상에서 필요한 가정 제도를 주셨습니다. 교회도 하나님이 주신 신적 기관입니다. /할/
  그러나 이 기관들은 지상에서만 필요한 제도를 천국생활의 그림자로 주신 것이지 영구한 제도가 아닙니다.
  고전15:42-44절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육의 몸으로 삽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신령한 몸을 가지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부모와 자식관계, 부부관계가 천국에서 계속 유지되거나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 장로, 권사, 집사가 하늘나라에 가서도 동일한 직분을 계속 갖는 것이 아니며 그 나라에 가면 하나님 한 분은 아버지를 모시고 주님이 우리의 신랑이 되셔서 영생복락의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서간 부모형제와 자식은 천국 가서 만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상에서 누렸던 정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 안에서 지상에서 보다 더욱 풍부한 사랑을 우리가 누리게 된 것입니다. /할/

 

  ▶31-32절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출3:5-6절에 나왔던 말씀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 올라가서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하나님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셔서 믿음의 조상이 되기까지 신실하게 인도하시고 보호하셨던 살아 계신 하나님아버지란 뜻입니다.
  또한 이삭의 순종과 제사를 통해 나타났던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사 우리를 사랑하셨던 성자 하나님의 모습이고, 아주 못되고 고약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야곱을 연단 시키고 훈련시켜 드리어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꿔주시며 거듭나게 하시는 살아 계신 성령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살아 계신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할/
  이 말씀에 최고로 은혜를 받은 사람이 위에서도 언급했던 불란서의 유명한 파스칼입니다. 이 사람은 13세에 세상 모든 학문을 통달한 천재였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는데 어느 날 자기의 삼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들려주면서 그에게 십자가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때 파스칼은 십자가를 만진 후 놀라운 성령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열심히 예수님을 믿는데 성경 속에서 은혜 되는 말씀을 다시 적어 쓴 책이 있는데 그 책이 바로 파스칼의 유명한 '팡세'입니다.
  여기서도 파스칼은 하나님은 '과학자의 하나님도, 철학자의 하나님도, 사학자의 하나님도 아니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과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은 하나님은 실험대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은 하나님은 인간의 이론의 대상이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파스칼은 산 자의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엎드려 하나님을 찬양하며 환희로 외쳤답니다. 할/

 

  ▶33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무리가 듣고' 그 속에는 사두개인 바리새인 장로도 제사장들과 많은 유대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야! 성경 속에 그런 뜻이 있었구나'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놀라고 그냥 끝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놀라고 깨달았으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복'을 받습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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