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강) 양과 염소의 비유! (마 25:31-46)
마24-25장을 가리켜 '작은 계시록, 혹은 종말 장'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25장은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는 비유 셋이 나오는데, '열 처녀의 비유'는 '신앙의 준비'를 의미하고, '달란트의 비유'는 '성도의 충성'에 대해서 언급했으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비유는 종말론에 마지막 부분으로써 '주님이 어떻게 심판하시는가?'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 나오는데, 흔히들 본문을 '양과 염소의 비유'라고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할/ ◀제목 소개!▶
▶31절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여기 '인자'는 성경에 약 90회나 언급한 말씀으로써 '메시아의 칭호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인자라는 말은 오직 예수 자신만이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표현할 때에 인자라고 하시면서 '인자가 올 때에'라는 표현으로 쓰십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의 모습을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재림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재림은 주님이 땅에 재림하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 재림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은 성령에 이끌려서 주님과 만나게 되는데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휴거라고 합니다. 이 첫 번째 재림은 준비된 성도들을 위한 재림입니다. 이것은 축제이자 축복입니다. 공중에서 7년 동안 혼인잔치를 베풀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공중에 이끌림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 지상에 남게 되는데 무서운 대환란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두 번째 재림은 주께서 대 심판 주로 오셔서 세상이 끝나게 되는 완전한 재림이 있게 됩니다. /아멘!/
첫 번째 재림은 '성도들을 위한 재림'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재림을 '심판을 위한 재림'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배우면서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내어 쫓으라'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불신자들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 당하는 고초입니다.
여러분, 성도라고 다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나오고 예수도 믿는다고 했지만 실제로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대 환란을 겪게 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마7: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할/
이 말씀은 입술로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만이 압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자신이 제일 잘 압니다. '정말 내가 주님과 함께 하는 자인가?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가? 아니면 나는 그냥 예수님을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인가?'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재림 때 오시는 모습을 몇 가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①자기 영광으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초림과 재림의 차이점입니다. 예수님이 초림하실 때는 정말 낮고 천한 종의 모습으로 겸손하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저 다 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재림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재림의 주님은 오실 때부터가 그야말로 승리한 장군의 모습으로 장엄하게 오십니다. 자기 영광으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영광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②'혼자 오시느냐?' 아닙니다. 모든 천사와 함께 오시는데 구름 타고 영광 중에 오십니다.
③오셔서 영광의 보좌 앞에 앉게 됩니다. 심판석을 말합니다. 세상 법정에도 재판할 때 보면 재판장은 아무 자리에 앉아서 재판하지 않습니다. 재판 석 중에서도 제일 상석 중앙에 앉아 모든 판결을 선언하십니다. /아멘!/
▶32-33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심판 주로 오실 예수님의 하시는 일이 31절에 이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④모든 민족을 심판장 앞에 모읍니다. 여기서 모든 민족이라 하였으니 심판에서 재외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⑤'각각 분별'하신다고 했으니, 심판하실 때는 각각 개별적으로 심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⑥양과 염소를 분별해서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둡니다. /할/
여기서 우리가 먼저 양과 염소에 대하여 알아보고, 그 다음 오른편과 왼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양과 염소는 습성이 다르다고 합니다. 낮에 풀을 뜯어먹을 때는 큰 무리 없이 섞여 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밤에 잠을 잘 때는 목자들이 양과 염소를 구분한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은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한 데 양은 추위에 강하지만, 염소는 추위에 약해서 따뜻한 곳에 재워야 한다고 합니다.
양이 더 가치 있고 값비싼 짐승입니다. 양은 흰색이지만 염소는 대부분 검은색입니다. 그래서 양은 선과 생명을 상징하고, 염소는 악과 멸망을 상징한다고 그럽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는 옛날부터 '하나님은 목자, 그의 백성은 양떼'로 상징하곤 했습니다. 또 염소는 풀밭을 못쓰게 만들고 나무를 상하게 하며, 초목을 죽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할/
본문의 양과 염소의 비유는 '알곡과 쭉쟁이'를 비유한 것이고, '산 자와 죽은 자'를 비유한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비유한 것입니다.
목자 장이 되시는 우리 예수님은 양과 염소를 잘 구별하십니다. 언뜻 멀리 보기에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목자의 눈으로는 명백한 것입니다. 주님은 요10:27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할/
▶양은 몇 가지 특징이 잇습니다.
①양은 온유한 자의 상징입니다. 양은 온순합니다. 양은 다투지 않습니다. 양의 특징은 희생입니다.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하며 그를 위해 조용히 자기를 헌신하는 것입니다.
온유의 뜻은 온순하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란 다른 사람의 유익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34-36절 사이에 나옵니다. 희생하는 마음을 온유라고 했습니다. 감싸주고 덮어주는 자가 온유한 자입니다.
'나는 모태신앙이다. 20년, 10년 믿었다. 나는 장로다, 목사다, 권사다, 집사다' 하드라도 그 마음속에 온유함이 없으면 회개하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아멘!/
②양은 순종하는 자의 상징입니다. 양은 제멋대로 가지 아니하고 목자가 가라는 데로 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③양의 또 하나의 특징은 자기의 연약함을 안다는 것입니다. 양은 이리떼가 오면 자기 힘으로 싸우려고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이리 때가 쫓아오면 양은 목자만 의지하고 목자만 따라갑니다.
여러분, 이 양의 행동이 어리석은 일입니까? 아닙니다. 자신을 아는 현명한 일입니다. '나는 지식이 있고, 재산이 있고, 머리가 좋고, 모든 사람들 보다 나는 뛰어난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은 양의 특성을 갖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는 힘이 없다라는 이 세상을 걸어가기에는, 이 가시밭길을 헤쳐 가기에는 너무나도 연약합니다. 하나님! 힘을 주시고 나의 오른손을 잡아 주세요' 이렇게 자기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는 자가 바로 양의 특징을 가진 자입니다. /믿/
▶그렇다면 염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①염소는 다투기를 잘합니다. 툭하면 주인에게 끌려가면서도 옆의 놈들을 받아치는데 그 조그마한 뿔 하나를 가지고 그것이 대단한 것인 양 자꾸 싸움질을 합니다. 왜 싸웁니까? 욕심 때문입니다. 편견 때문에, 고집 때문에 싸웁니다.
②순종하지 않습니다. 청개구리의 심보를 가졌습니다. 제 멋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끌고 가려고 하면 뺑 돌아서 재빠르게 산꼭대기를 올라가 어느 틈에 그 비탈길 위험한 곳에 가서 소리를 내어 줍니다. 목자는 그곳에 가면 위험하다고 못 가게 하면 멋대로 돌아다닙니다.
③염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를 자랑합니다. 교만한 자가 자기를 나타내고 자랑합니다.
▶이제 오른편과 왼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오른편은 외로운 자리를 표현하고, 왼편은 저주받은 자리로, 또 오른편은 보호와 능력, 왼편은 무관심 내버려둠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상에 우편 강도는 구원을 받았지만 왼쪽 강도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본문에서 오른편은 의인의 자리로, 왼편은 저주받는 자리로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오른편은 구원에 자리요, 왼편은 멸망의 자리입니다. /아멘!/
34절부터는 양에 대하여 즉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34절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그때에 임금'은 재림 때 심판 주로 오신 만 왕의 왕을 가리킨 말입니다. 그리고 '오른 편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보호를 받아온 사람들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말씀이기도 합니다. /할/
그러니까 오른편으로 구별된 백성은 복 받은 백성들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자들이여!' /할/ 우리 모두가 이 자리에 꼭 서야 합니다. /아멘!/
시1편은 '복 있는 사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런 사람은 어떤 복을 누린다고 했습니까?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할/
그리스도인들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믿/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멘!/
또한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은 창세로부터 예비가 되어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상속은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버지의 자식이면 누구든지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요1: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우리가 복 받은 것은 창세로부터 예비가 되어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가?
①그 곳을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계21:1절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도요한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은 단순히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는 것을 믿은 것이 아니라 직접 자기의 눈으로 영안을 통해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②이곳에 누가 다녀왔습니까? 사도 바울이 보고 왔습니다. 그는 그 곳을 묘사하기를 '셋째 하늘, 낙원'이라고 했습니다. 고후12:2-4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이 땅에서 그토록 충성하고 헌신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천국에 있습니다. /아멘!/
③그 곳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라고도 하는데 '하늘에서 내려오는 성'이라고 합니다(계21:2). 천국에는 센터가 있습니다. 그곳에 '거룩한 성'이 있는데 '새 예루살렘, 즉 새로운 평화의 도시'라는 천국의 수도가 있습니다. 지상의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인 것처럼, 새 예루살렘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수도입니다. 거기는 성도들의 영원한 공동체가 거주하는 곳입니다. 말하자면 성도들이 거주할 영원한 집인 셈입니다.
그곳이 얼마나 좋은지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다고 말씀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단장된 것은 신부의 모습입니다.
천국은 이미 공사가 다 끝났습니다. 여기 '단장한'이란 말은 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미 준비가 끝났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신부인 성도들을 데리고 들어갈 신방이 다 꾸며졌다는 뜻입니다. /할/
④천국의 우리가 들어갈 처소를 무엇으로 지었는가?
계21:11절에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새 예루살렘이 '보석, 벽옥, 수정 같이 맑고 빛나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또 18절에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새 예루살렘 성곽이 벽옥으로 쌓여있고 정금으로 되어 있고 유리 같이 맑고 아름답습니다.
21절에도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성에 문에 열 두 개인데, 진주로 되어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길이 정금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아름다운 본향 있음에 감사하며 기뻐합시다. 고후5: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천국의 소망이 없다면 굳이 예수 믿을 필요도 없고, 전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은 지옥 갈 우리를 값없이 구원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할/
⑤천국은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곳입니다(계21:3).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요14장에서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나있는 곳에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고, 골3:1절 이하에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에 누가 계십니까?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할/
▶35-36절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세상에서 믿음의 행위대로 산 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심판의 기준을 봅니다. 심판의 기준이 수 천 만원 헌금이나 자선기관에 회사한 일이나 역사에 남길만한 업적으로 심판의 기준을 삼는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그리 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심판의 기준을 단순한 일들 가운데 마음을 모아 도와준 일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①주린 자를 보고 음식을 주는 일입니다.
②목마른 자를 보고 마실 것을 주는 일입니다.
③나그네를 영접한 일입니다.
④병든 자를 위로하는 일입니다.
⑤헐벗은 자를 도와주는 일입니다.
⑥갇힌 자를 찾아가 위로해 주는 일입니다. 물론 이 여섯 가지만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내용을 가만히 보면 인간이 가장 참기 힘들고 괴롭고 어려운 형편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할/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배고픔입니다. 그 다음에 목마를 때 물 한 그릇 그것이 얼마나 우리를 감격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또 나그네 되었을 때 어디에 가서 잘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어찌할 줄 모를 때 정말 외로울 때, 그럴 때에 은혜를 입으면 그것은 정말 잊을 수가 없습니다.
또 벗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춥고 헐벗어 보세요,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또 병들었을 때는 어떻습니까? 세상에 병들면 정말 서럽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옥에 갇혔을 때 아무도 변호해 주는 사람이 없고, 돌봐주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처량하고 외로운지 모릅니다. 주님은 이런 형편을 당한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것이 '바로 주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보았습니다. /할/
우리는 유명한 성 프란시스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귀족이요, 부자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말을 타고 가던 프란시스가 불쌍한 거지를 만나게 되어 무엇을 좀 도와 주려고 말에서 내렸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보니 문둥병자가 있습니다. 프란시스는 추위에 떨고 있는 그 문둥병환자에게 자기의 외투를 벗어 입혔습니다. 그랬더니 그 거지가 고맙다고 연신 고개를 숙이며 하는 말이 '이렇게 입어도 추우니 자기를 좀 꼭 껴안아 달라'는 것입니다.
프란시스는 좀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으나 외투까지 벗어주었는데 그까짓 포옹 한 번 못해줄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힘껏 포용해 주었더니 그 문둥병 환자의 얼굴이 예수님의 얼굴로 변하더니 사라지고 말더랍니다. /할/ 이때부터 프란시스는 귀족의 위치를 버리고 재산을 다 정리해서 하나님의 사업에 보탰고, 그 길로 수도사의 길을 감으로 마침내 성자 프란시스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멘!/
또 하나 '마틴'이라고 하는 로마군인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마틴이라는 군인은 예수님을 잘 믿는 로마의 군인입니다. 그 역시 말을 타고 가다가 추위에 떨고 있는 거지를 만나게 되어 옷을 주어야하는 입장에 되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옷은 천으로 감은 옷감입니다. 이 마틴은 그것은 절반 찢어서 주고는 나머지는 그냥 자기가 입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날밤 중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는데 입으신 옷을 보니 자기가 찢어준 그 반쪽을 입고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할/
'마틴'은 너무나 미안하고 송구스러워 하고 있는데 예수님 옆에 있던 천사가 말하기를 '주님! 어떻게 옷을 반쪽만 입고 계십니까?' 예수님이 '낮에 저 사람이 반쪽만 주어서 그랬다'고 그러십니다. 그때 마틴이 크게 회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하는 이야기합니다. /할/
여러분,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행위가 좋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았기에 선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①주린 자를 생각합시다. '에릭프림'은 '사랑하는 것은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②목마른 자로 생각합시다. 그리고 ③나그네 된 자, ④헐벗은 자, ⑤병든 자, ⑥옥에 갇힌 자들에게 관심을 갖읍시다. /할/
주님은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나 피를 쏟고 죽어 가는 이웃을 그냥 보고 지나쳤는데, 그 당시 '상놈'이라고, '이방사람'이라고 무시당하던 사마리아 인은 강도 만난 이웃을 감싸주고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참된 이웃은 바로 이런 사람이라고 가리켜주시면서 '너희들도 그렇게 하라'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할/
▶37-39절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지금 의인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너무 황송하고 칭찬들을 말한 일이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의인의 또 하나의 특징은 겸손입니다. 37절에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생활 속에서 평범하게 행한 것이므로, 그것이 주님께 한 것인 줄 전혀 의식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혀 의식할 수 없는 선행, 그것이 참으로 순수한 선함입니다. /믿/ 여러분, 좋은 일을 하면 바로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남을 좀 도와주고 기억하고 있으면 괜슬히 우쭐해집니다.
주님은 마6:3-4절에서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마10:41-42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할!/
의인들은 계속해서 '언제 나그네를 영접했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입혔나요?' 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를 돌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베풀었던 여섯 가지의 선행은 점점 더 높은 차원의 선행임을 알아야 합니다. '배고픈 자, 목마른 자'를 도와주는 것은 쉽습니다. 우리가 먹는 대로 주면 됩니다. 그러나 '나그네를 돌보는 것과 벗은 자에게 옷을 주는 것'은 더 차원이 높습니다. 그 다음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를 돌보는 것은 더 한 차원 높은 선행입니다. /할/
▶40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주님은 '이 지극히 작은 자'를 '너희 형제 중에 하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작은 자는 주님의 형제입니다. 야기서 더욱이 주님은 '이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고 주님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은 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것이 '나에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작은 자에 대한 사랑은 심판의 기준이 대고 심사의 대상이 되는 법입니다. 그것이 곧 주님의 형제에게 한 것이요 주님에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 원시림에서 구십이 가까운 노쇠한 연세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을 돌보고 있는 것을 보고 한 방문객이 물었습니다. '당신과 같은 저명한 분이 꼭 이렇게 고생스럽게 살아야 합니까?' 그러니까 '이제 이 일은 젊은이에게 물려주시고 여생을 평안히 보내시라'는 지극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물은 것이라고 봅니다.
이때 슈바이처는 대답했습니다. '나를 동정적으로 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손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아십니까?'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슈바이처 자신이 그리스도의 손이 되고 그리스도의 다리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 대신 뛰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곧 주님에게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주님의 손이 되고 다리가 된 영광스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그 일을 쉬라고 한들 쉬겠으며, 이 영광스런 일을 중단할 수 있겠습니까? /할/
그렇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만약 예수님이 찾아오셨다면 어지간한 사람은 다 대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자에게는 인간적으로 볼 때 무시하기가 쉽습니다. 여기 '지극히 작은 자'란 '소자 중의 하나'로 표현했고, 18:5절에서는 '어린아이 하나'로 표현했습니다. 이는 매우 축소 지향적인 묘사입니다.
즉 '작은 자'를 '지극히'란 단어로 축소 강조했습니다. 이 말은 '세상에서 잊어진 자, 버려진 자, 인기가 없는 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선행을 한 것이 곧 자기에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에는 처음부터 큰 일이 없습니다. 위대한 일이 없습니다. 지극히 작은 소자의 만남에서부터 기독교는 탄생합니다. /할!/ 그것이 자연스럽게 커져서 오늘같이 된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 대형교회라고 해서 주님이 계십니까? 어떤 사람은 대형교회만 하나님이 계신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작지만 오늘 이 자리가 '주님 계시는 자리'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할/
이제 왼쪽에 있는 염소에게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41절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왼편에 있는 자'는 염소를 가르친 자요, 쭉쟁이를 가리킨 자요, 마귀의 자녀를 가리킨 자입니다. 그들은 '저주받은 자'들입니다. 본문은 34절의 '복 받은 자'들과 비교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7:23절에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말씀은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즉 저주받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이를 갊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과 영원히 관계가 단절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어떤 자가 복 받은 자입니까? 주님과 교제하는 자입니다. /할/ 이 말씀을 '동행'이라는 말로도 표현합니다. 성경에서 '형통의 복'이란 금 덩어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을 가리켜 말하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에게 얻어지는 축복을 의미합니다. 요셉을 보세요!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그 삶이 형통하더라' /할/ 그러므로 사랑하는 참 행복한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마귀와 그 졸개들을 위해서 지옥을 만드셨는데 인생도 마귀에 속아서 마귀를 따라가면 마귀가 들어가는 지옥에 저절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사실을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할/
이제 왼쪽에 있는 염소를, 그러니까 저주받은 자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의인들과는 정반대로 살았습니다.
▶어떤 신앙의 좋은 주일학생이 학교에서도 성경을 보고 기도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불 신앙의 담임선생이 아니 꼬아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는 천국이 있다고 분명히 믿느냐?' '예! 분명히 믿습니다. 제가 가는 길로 곧장 가면 천국이 나오고, 선생님이 가는 길로 곧장 가면 지옥이 나옵니다.' 맞는 말입니다. 염소들은 정반대로 살았습니다.
42-43절은 35-36절에서 의인들이 행한 똑같은 6가지를 반대로 얘기합니다.
▶42-43절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주여! 가로되 우리가 어느 때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들이 대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라고 말씀하시고 오셨다면 당장 대접했지요'라는 반응입니다. /할/
▶45절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믿음의 열매는 지극히 적은 것에서 나타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멘!/
▶46절 "저희는 영 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과 정반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그 말씀을 인정하지 않은 태도를 취합니다.
이제 주님은 판결을 내리십니다. '저희'는 '염소와 왼쪽에 있는 사람'을 가르치는 말로 '영 벌'에 즉 '지옥 행'이요, '의인'들은 '영생'에 나라에 들어갑니다. /할/
결론입니다. 주님이 왜 양과 염소의 비유를 주셨습니까?
①주님은 분명히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가 받아야 할 메시지는 주님은 분명히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②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히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③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의 메시지는 천국과 심판은 현재의 삶의 태도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현재 '내가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봉사하고, 어떻게 헌신하느냐'에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25장에 나오는 비유 셋의 이야기는 바로 오늘 우리의 신앙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기름을 준비하십시다. 충성하십시다. 사랑과 헌신과 봉사가 바로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아멘!/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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