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한 자유인의 신앙고백[어거스틴의 회심,할례의의미,이니셔티브]/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 14:28

2009 2 15 주일예배

한 자유인의 신앙고백

( 5:1-6)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 메지 말라
  2. 보라 바울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 없으리라
  3. 내가 할례 받는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 따라 소망 기다리노니

 

 

 

  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 무할례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제가 서울의 큰 교회에서 섬기고 있을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같이 사역하는 목사님들이 이른 아침에 회의를 마치고 아침식사를 하러 가는데 주로 설렁탕집에 갔었습니다. 신사동에 `영동설렁탕'이라고 있었는데요. 거기 가서 설렁탕 한 그릇을 먹었습니다. 반찬이라고는 깍두기밖에 없었지만 맛있더라구요. 그래서 자주 갔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주인 내외가 그걸 먹고 있더라구요. 그러면서“우리도 이거 매일 먹습니다.”하는 거예요. 그거 아주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저는 목사요, 설교자로서 제가 한 설교를 `과연 은혜 받으면서 매일 즐겁게 들을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 설렁탕의 독특한 맛이 있더라구요. 파도 들어가고 후추도 넣겠습니다만 결국 탕맛이 제일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설교에 여러 가지 이야기도 들어가고 예화도 들어가고 신학적 교리도 들어가는데 그 맛을 내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은혜 받는다.' 라고 얘기할 때 그 뜻이 무엇입니까?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지금도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밖에 없는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시고 피를 쏟게 하기까지 나를 사랑하신다. 저가 대신 죽지 않았다면 나는 하나님과 끊어진 자로서 죽어야 했을 죄인이요. 그러나 저가 저렇게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볼 때에 `나는 하나님께 저토록 사랑받는 존재로구나'하는 사실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공의 4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로 지능, 머리가 나쁜 것 보다는 좋은 게 좋죠. 둘째로 지식, 그 머리 가지고 공부를 많이 한다면 안 하는 것보다 좋겠죠. 세 번째로는 지혜, 그 머리 가지고 그렇게 공부해서 지혜를 얻어야 하는데 거저 얻을 수 없는 거죠. 오랜 연단과 훈련과 때로는 뼈아픈 고난이 있는 거죠. 최소한 자기 일에 하루 3시간 몰입해서 10년 지속해서 일만 시간을 투자할 때 그것이 손끝에 와 붙는다는 거죠. 머리로만 아는 거는 결코 내 것이 아니에요. 손끝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내 것이라는 거죠. 그리고 그 끝에서 얻는 마지막 네 번째가 삶의 자세죠. 결국 뭔가 달라지는 거잖아요.

   설교원리 중에 설교를 `회중과의 대화'로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이 시간 제가 말씀을 할 때 겉으로 보기에는 일방적인 것 같지만 그러나 이것은 대화죠. 여러분은 지금 마음으로 저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대화의 원리 세 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는 상대방을 존경해야 돼요. 듣는 분을 존경해야 돼요. 두 번째는 이해해야 돼요. 상황을 잘 생각해 보면서 말씀을 전해야 된다고 하는 거예요. 세 번째는 인내해야 돼요. 사람이 하루아침에 안 변하거든요. 그래서 오늘 조는 분이 계셔도 제가 인내합니다. `내일은 달라지겠지.' 그런데 또 졸면 `하나님이 역사하시겠지.' 이렇게 기다립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의 자세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듣는 자는 어떤 자세여야 할까요? `오늘 하나님이 저분을 통하여 나에게 말씀하신다.' 바로 이런 자세여야 합니다.

   흔히 신앙의 인물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거의 예외 없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결정적인 순간들이 있습니다. 유명한 신학자요, 목회자였던 `어거스틴'의 회심은 유명합니다. 그가 방탕한 생활에서 돌아왔어요. 말씀을 듣고 깨달으려 하지만 어려움이 많았어요. 그런 깊은 갈등 가운데 있을 때에 담 밖 어디선가 어린 아이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책을 집어라. 펴서 읽어라'하는 음성을 듣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책을 펴는 순간 로마서 13 11-14절 말씀을 찾게 됐다는 거예요.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이제 어둠의 일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

 

그러나 저는 이러한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물론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이기도 하지만, 성경은 항상 수동적인 자세만 말하지 않아요.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만 이야기하지 않아요.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때가 악하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껴라.'라는 표현이 있어요. `아껴라'라는 말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엑사고라조마이'라고 하는데 `아고라'가 광장이잖아요. 광장에서 장사했어요. 그래서 `시장'이라는 뜻도 돼요. 그게 동사가 되면 `물건을 사고 판다'는 뜻이 돼요. 결국 `엑사고라조마이'라는 말은 `기회를 돈 주고 사라'라는 뜻이에요. `세월을 아끼라' `적극적으로 그 기회를 사라.' 지금 말씀을 듣는다면 `하나님이 이 시간 저분을 통하여 나에게 말씀하신다 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열고 말씀을 들으라.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으라.' 결국은 자세예요. 이런 자세로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늘 말씀하시는 거예요. 가만히 수동적으로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들을 때까지 기다리겠어요? 아니에요. 깨닫고 보면 아침, 점심, 저녁, 기쁜 일, 슬픈 일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이 늘 나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회심의 사건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것으로부터 `내 삶의 모든 순간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는 거잖아요. 자세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이 오늘 읽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굉장히 중요한 얘기를 해요. 이렇게까지 얘기해요. `보라. 나 바울은 여러분에게 증거합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케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할례입니까? 그리스도입니까?' 여기서 할례라고 하는 것은 남자들 성기의 포피를 끊어내는 거예요. 그건 하나의 위생학적인 것이죠. 고대사회로부터 할례를 행하는 민족들이 많이 있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만 행한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그들은 할례라는 사건을 신학적으로 해석했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셨어요.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에게 복을 주고 너를 통하여 모든 민족에게 복이 퍼져나가게 하겠다.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 너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이에요. 이 약속을 받았습니다만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흔들릴 때마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고 세워주시다가 드디어는 이것을 잊지 말라고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어요. 몸에 칼을 댄 거예요. 피를 낸 거예요. 피는 생명을 의미해요. 생명만큼 중요한 언약이다. 잊어버리지 말라고 몸에 새겨 넣었다. 이게 할례의 뜻이죠. 언약이 있고 그 언약을 기억하도록 할례를 행한 것이죠. 그래서 할례는 율법을 압축한 거예요. 오늘 그렇게 말하죠. `할례를 받는 자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이런 우스개가 있어요. 경상도 분들은 압축의 달인이라고 하더군요. 왜 그러냐.“할아버지 오셨습니까?”이런 말도“할뱅교?”하면 끝난다는 거죠.“왜 그러십니까?”는“뭥교?

   할례는 그 안에 모든 것을 압축했어요. 구약의 모든 율법을 그 안에 담고 있어요. 할례를 행한다는 말은 뭘 말하느냐 하면 `모든 율법을 지키는 자'라고 자기를 드러내는 거예요. 이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믿고 의지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돈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지위를 의지하고 있습니까? 미모를 의지하고 있습니까? 자기 자랑, 자기 의, 자기의 열심. 이게 다 할례와 똑 같은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 하는가? 과연 하나님이 그것을 찾으시던가? 아니에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찾으신다.

   이것저것을 가지고 자랑거리를 삼는 인간이지만 역시 사람은 어리석어서 정작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해요. 부부로 사는 모습이 세대를 따라서 달라요. 이런 말이 있어요. 20대는 미쳐서 살고 30대는 한 눈 팔며 살고 40대는 마지못해서 살고 50대는 불쌍해서 살고 60대는 필요해서 살고 70이 돼서야 감사하면서 산대요. 그런 사람들이 내세울게 뭐가 있어요. 또 그나마도 내 능력으로 된 겁니까? 지능도 주신 거고 건강도 주신 것이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알고 보면 주신 것이고 모든 일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과 도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마치 일이 잘되면 내가 잘한 것이고 일이 어그러지면 다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잘못해서 그런 것 같이 생각하는, 이 철저한 자기중심적 자세, 이게 바로 죄라고 하는 거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민족을 `구원과는 관계가 없는 이방인'이라고 무시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선민이다' 할례를 자랑하고 율법을 자랑하고 성전을 자랑했어요.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어요. 바벨론 포로로 다 끌려가게 하셨어요. 성전도 다 허물어 버리셨어요. 믿음의 비밀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성전까지도 외면하셨어요.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서야 비로소 그 고통 속에서 온전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돼요. 그래서 선지자들이 말합니다. `네 몸에 할례를 행하지 말고 네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 하나님이 네게 주신 언약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라.' 마음의 할례가 뭐예요? 골로새서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할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놓으시기까지 사랑하셨던 그 비밀을 깨달아라.

   성경을 읽다 보면 사도 바울의 편지 즉 로마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등등의 수많은 편지들 속에 재미있는 현상이 있어요. 예수님이 행하셨던 이적에 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아요. 왜 그럴까요? 사도 바울도 선교여행을 하면서 많은 이적을 행하였지마는 정작 교회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 이적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아요. 사람들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이적을 보고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빠져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만 얻으려고 하는 인간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적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그 이적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느냐? 궁극적으로는 최대의 이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리키는 표적인 것이죠. 하나님의 최대의 이적은 십자가와 부활사건이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최대의 메시지도 십자가와 부활사건이고 정말 우리를 자유케하는 비밀도 십자가와 부활 사건임을 올바로 발견하는데 있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편지에서 이적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오직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그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죽음을 깨뜨리고 다시 살리신 그 하나님의 능력을 이야기해요.

   여러분, 우리 신앙의 기초를 어디에 두어야 하겠습니까? 주도권[Initiative이니셔티브=스스로의 책임있는 결정(결단), 창의, 진취적인 마음, 독창력]이에요.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 내가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더니 하나님이 내게 보상하신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더 깊은 눈으로 보세요. 하나님이 내 삶을 이끌어 가셔요. 그리고 나는 그 음성을 듣고 응답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요. 소명이에요. 부르심, 그걸 이해해야 돼요. 또 은혜란 무엇입니까? 우리 자녀들이 대학에 들어가고 직장생활하고 결혼하고 잘살아가는 것, 참 중요하죠. 하나님이 그걸 무시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것만 은혜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잘못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기에 오늘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올바로 이해하고 하나님께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내게 베풀어 주시는 모든 것이 은혜예요. 때로는 고난도 눈물도 아픔도 은혜예요. 그걸 이해할 때 건강한 사람이에요.

   또 우리 신앙의 초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를 드러내고 내가 누구보다도 잘한다는 자기 자랑에 관심을 두는 것, 그건 빗나간 거예요. 날마다 십자가와 부활을 주목해야 돼요. 거기에 사랑이 있죠. 그래서 이제 우리 삶에 변화가 일어날 때 그 변화의 참 의미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즐거운 마음으로 나를 드려서 헌신합니다. `여기에 내 살길이 있구나'하는 것을 알고 기쁨으로 헌신하는 것. 이게 사명이잖아요. 사명이라는 말은 `보낸다'는 말이에요. `Mission' 보낸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보내시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삶이에요.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에는 강을 건널 때에 돌멩이를 지고 건넌대요. 왜 그러냐 하면 수심은 깊지 않지만 물살이 세기 때문에 혼자 건너가려고 하면 넘어진대요. 그래서 자기 몸에 맞는 돌멩이를 하나씩 짊어지고 가야 이 무게로 인해서 강을 건널 수 있대요. 우리의 일들이 때로는 우리들을 짓누르기도 해요. 그러나 알고 보면 그 무게로 인하여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을 덧입기 때문에 오늘도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쉼이라는 것도 일하면서 `좀 쉬었으면 좋겠다' 하다가 어쩌다 쉴 때 이게 꿀맛같이 달콤한 거지, 일을 내려놔 보세요. 그날부터 그 쉼은 더 이상 쉼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 성경이 말합니다. `할례든 무할례든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할례의 전통을 가진 유대 사람들은 할례를 받고 예수를 믿으면 돼요. 할례를 모르는 이방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으려면 할례 받아라.' 할 필요는 없어요. 그들에게는 그들의 문화가 있는 거예요. 할례나 무할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문화 속에 들어있는 본질이 무엇이냐. 오늘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에 감동해서 사랑을 베푸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다.'

   `스탠리 존스'라고 하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1938년 타임지에서 이 사람을 `사도 바울 이후 최고의 선교사다.' 이런 평가를 내렸어요. 주목할 만한 사람이죠. 그는 24세에 인도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 젊은 나이에 불붙는 열정을 가지고 8년 동안 배운 대로 많은 선교활동을 했어요. 그러나 일을 하다가 지쳤어요. 몇 번 쓰러졌어요. 완전히 탈진했어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어요. `너는 내가 맡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느냐?' `아니요, 하나님. 나는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나는 마치 벼랑 끝에 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내게 맡기겠느냐?' `, 하나님. 하나님께 모든 걸 다 맡기겠습니다.' 그러자 그때 고요한 평화가 그 마음에 스며들어왔어요. 자기의 선교활동을 점검합니다. 그때 깨닫습니다. `내가 이 인도에 서구문화를 전하려 했구나. 기독교라는 종교를 전하려 했구나.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전하리라.' 갈릴리 호숫가를 거닐면서 사람들을 고치셨던 그 예수님이 문화와 종교를 넘어서서 먼지에 뒤덮인 인도의 길거리를 다니시면서 불쌍한 사람들의 마음을 싸매시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이분이 책을 냈어요.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 이제까지의 선교와는 다른 새로운 선교의 문을 열어 놓았던 거예요. 우리 삶 속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우리 집 거실을 거니시는 예수' 혹시라도 남편 분들에게 `교회 나가려면 담배 끊어라. 술 끊어라.' 그 얘기하지 마세요. 그건 문화잖아요. 물론 잘한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러나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의 고백과 사랑을 가지고 감싸고 기다려주고 기도하고 격려하고 세워주면서 하나님의 때를 따라 변화를 기다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 한 그릇에도 감사하시고 또 병들어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여인을 붙들어 주시고 또 이방인이 믿음을 보일 때 율법이나 할례의 문제를 가지고 그를 막아서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 믿음을 칭찬하시고, 죄 많은 여인이 옥합을 가지고 나와서 깨뜨려 향유를 부을 때 많은 사람들이 저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할 때에도 그녀의 진정성을 이해하시고 다가가시고. 급기야는 일생 동안 악을 저지르다가 십자가에서 `예수여, 당신이 천국에 들어가실 때 나를 기억해주소서'라고 외치는 강도의 외침마저도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영생을 약속하시는 주님의 사랑. 그 사랑이 오늘 내게 부어주시는 사랑이에요. 그 사랑 속에서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십자가로 자유케 하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고 자유에 감격한 삶을 살고 이 자유를 선포하라.' 이렇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우리는 내 삶이 괴로울 때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밖으로 돌려 내 환경이 잘못되었고 상황이 어그러졌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괴롭히고 저들이 문제라고 이야기했습니다마는 모든 문제의 열쇠는 내가 쥐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십자가 그 놀라운 사랑으로 내게 다가 오셔서 나를 싸매시고 붙드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시고 오늘까지 나를 기다려 주시고 내게 말씀하시고 흔들리고 넘어지는 나를 붙들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주목하게 하시고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너희를 자유케 하였노라.' 귀한 선물로 받고 자유함을 누리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