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주님의 날개 아래 [오바마 대통령, 삼종지도, 룻]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 14:58

2009 1 11 주일예배

주님의 날개 아래 ( 2:10-13)

10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네게 온전한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3. 룻이 이르되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미국의 <타임>지에서 2008년 올해의 인물로 `오바마' 대통령당선자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이제 44대 미국대통령이 되며 미국 건국 233년 만에 최초의 흑인대통령이 되는 것이죠. 그러나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가 흑백혼혈이 아니었다면 과연 대통령이 될 수 있었겠느냐? 부모 양쪽 모두 흑인이었다면 대통령이 될 수 있었겠느냐? 조금 얘기가 달라질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아버지는 케냐 사람이고 엄마는 전형적인 백인여자입니다. 그런데 2살 때 부모가 이혼하고 엄마가 인도네시아 남자와 재혼하므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다문화 가정이죠. 어찌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그도“한때 젊은 시절에 마약에도 빠졌었다.”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을 잡고 공부를 해서 시카고의 빈민들을 위한 인권 변호사로 일을 하고 하버드 법대의 학술지 편집장이 되고 드디어는 정치가로 나서게 됩니다.

   2004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지명을 위한 전당대회에서 지지연설을 했을 때만해도 새로운 얼굴이었고 또 1년 반전에 대통령 출마선언을 할 때만 하더라도 정말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던 사람이죠.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셨다고 충분히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까지 과연 흑인을 대통령으로 세울 것인가 할 때 경제 위기가 불어 닥치는 바람에 사람들의 생각이 `더 이상 종래의 사고방식에 매이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래서 변화와 개혁을 주도할 수 있는 새로운 인물에게 표를 던지게 되었던 것이죠.

   여러분, 그 드라마를 아세요? <오바마를 만든 세 여인> 누구냐? 그의 외할머니, 어머니, 아내라는 거예요. 그 아내 미쉘 오바마는 남편보다 더 똑똑하대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아내의 조언을 귀 기울여 듣는다는 거예요.“나는 아내에게서 안정감을 찾는다.”그렇게 고백합니다.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를 낳은 어머니는“항상 무엇인가를 꿈꾸며 좇아가는 몽상가였다”그렇게 말해요. 그에게는 동서양의 구분이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케냐 사람하고 결혼하고 인도네시아 사람하고 재혼하는 등, 전통과 인습을 넘어서는 사람이었다는 거예요.“나는 어머니로부터 꿈과 도전정신, 모험심을 배울 수 있었다.”그 어머니는 원래 인류학 박사예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에요. 그가 오바마를 데리고 두 번째 이혼을 하고 하와이 친정에 돌아왔다가 자기는 공부한다고 또 동양으로 갑니다. 남겨진 아이를 외할머니가 공부시키고 기릅니다. 그 동안 놓았던 직장을 다시 다니면서 그 아이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었다고 합니다. 이 외할머니도 전형적인 백인이었는지라 흑인 외손자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그래요. 사람들의 눈에 안 띄게 하려고 애를 썼다고 그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핏줄이고 내 딸이 낳은 자식이니 최선을 다해서 공부시켜야지.' 책임을 감당했다고 하는 것이죠.

   대통령 선거 전날 할머니는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마지막 선물로 부재자 투표를 통해서 한 표를 던지고 세상을 떠나요. 오바마가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것을 늘 마음 아파했기 때문에 그 바쁜 선거유세 일정 중에 시간을 내어서 곧 임종을 맞게 될 할머니를 찾아 하와이에 갔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말합니다.“우리 할머니는 수많은 조용한 영웅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비록 그 이름이 신문에 실린 적은 없지만 그는 묵묵히 일상 속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라고 애도 했습니다.

   여러분, 흔히 우리 전통질서에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것이 있잖아요. 여인네의 길이잖아요.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늙어서는 아들을 따른다. 이게 여자의 길이잖아요. 알고 보면 남자의 길도 있어요. 신삼종지도예요. 어려서는 할머니를 따르고 자라면서 엄마를 따르고 장가들어서는 아내를 따르는 게 신삼종지도라고 생각해요.

   신앙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사람 입맛은 네 살 이전에 결정된대요. 엄마가 어떻게 길들이느냐에 따라서 입맛이 결정되는 거예요. 물론 장가가면 웬 여자가 와서 입맛을 바꿔놓으려 하지만. 엄마의 손에서 결정되는 거예요. 신앙은 더더욱 그래요. 어떤 분들은 `내 아들 딸들에게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라고 하지만 그건 조금 모자라는 생각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신앙은 이성적인 판단을 넘어서서 온 몸으로 느끼는 것이죠. 저는 할머니 등판에서 찬송을 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몇 살 때인지는 모르겠어요. 그게 참 저에게는 행복이었어요. 신앙은 그렇게 스며 들어와야 되는 거예요.

   성경에 `디모데'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찾아낸 인물이에요. 사도 바울과 선교여행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사람이에요.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를 통해서 너에게 전달된 소중한 믿음을 간직하라.'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 사람이었어요. 사실 신앙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은 그 할머니와 어머니를 통해서 그에게 깊이 들어온 거죠. 그 바탕 위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서 이제까지 느끼고 호흡했던 신앙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이성적으로 훈련하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 룻이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예요. 이 여인의 이야기는 다윗 왕 때문에 실린 거예요. 다윗 왕이 누구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높이는 사람이에요. 심지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표현했어요. `다윗 시대의 영화를 다시 맛볼 수 있었으면' 이게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적 소망이었어요. 어떻게 다윗이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느냐. 그가 태어나기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룻기입니다.

   여기 보니 사사시대에요. 사사시대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강한 왕이 등장하기 이전의 부족연맹 단계예요.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서로 어우러져 자치로 살다가 적의 침입을 받는다든지 할 때는 리더를 세워서 적을 막아내고 나라를 통치하는 그런 불안정한 구조 속에 있었어요. 성경에서 사사시대를 뭐라고 얘기 하냐하면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살았다.' 영적인 암흑기로 표현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지러운 사사시대를 겪으면서 고통스러워하면서 우리를 잘 이끌어 줄 왕을 갈망하게 돼요. 그 왕이 다윗 왕이었어요. 하나님이 룻이라는 여인으로부터 그 일을 시작했어요.

   간혹 우리가 축구시합을 볼 때 우리 선수들을 응원하다가도 잘 안 되면 욕을 해댑니다.“바보같이”때로는“내가 들어가도 저거보다는 더 잘하겠다.”심지어 이렇게까지 얘기해요. 그러나 정신 차려야죠.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는 거죠. 자기가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게 마음만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오랜 훈련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빛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어둠이 있는 거예요. 그 어둠 속에서 묵묵히 단련하고 훈련해야 언젠가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사사시대라고 하는 영적 암흑시대에 한 여인을 통해서 왕의 시대를 준비했다는 거죠.

   두 번째는 이방여인을 쓰셨다는 거죠. 룻이라는 사람은 원래 유대인이 아니고 모압 여자예요. 유대 남자를 만난 거예요. 그 집에 시집 간 거예요. 시어머니 나오미가 남편과 아들들을 다 잃고 홀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때 그를 따라가게 되는 것이죠.“내가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따라가겠습니다.”정황을 살펴보면 룻이라고 하는 여인이 아주 믿음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남의 나라 땅에 이민 와서 살다가 남편 잃고 장가간 두 아들 다 잃고 며느리들과 함께 과부가 되어버린 불쌍한 시어머니, 이제 빈손으로 돌아가는 시어머니를 그냥 보낼 수가 없어서“내가 시어머니와 함께 하겠습니다. 내가 시어머니의 친구가 되겠습니다”라고 따라나선 거죠. 그러나 그러한 결단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었어요.

   예수 믿는 경우 중에 가장 보편적인 예가 결혼하면서 남편 따라 오거나 아내를 따라오는 경우가 많아요. 저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서 믿음은 없습니다만 세례 받지 않으면 결혼할 수 없다고 하니까 할 수 없이 머리를 디밀고 세례 받으신 분이 많아요. 그러나 여러분, 그건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에요. 거기에 어떤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지를 보세요.

   우리 남자 분들 중에 누구라고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만“당신이나 믿고 나한테는 제발 강요하지 말라고.”그런데 인도네시아에서 아내를 홀로 교회 보낼 수는 없으니까 밤낮 차로 태워다 주고 예배드리고 나오는 동안 차 안에서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지루하기도 하고 `이 마누라가 도대체 저 건물 안에서 뭘 하는가'하고 한발 한발 들어왔다가 예수 믿게 된 분들, 그건 놀라운 은총의 시작이에요. 알고 보면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예요. 우리가 진리의 구도자가 되어가지고? 아니요, 저나 여러분이 그렇지 않아요. 너무 평범한 사람들이에요. 때로는 배부른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겠기에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 거예요.

   룻이라고 하는 이방여인이 시어머니를 따라서 이스라엘에 돌아왔습니다마는 그러나 당장 그 앞에 기적이 펼쳐진 게 아니에요. 가난한 일상이에요. 낯선 사람들 속에서 모압사람이라고 무시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일상의 곤고함이 있어요. 보리이삭을 주어서 그것을 털어서 먹어야 되는 가난이 있어요. 놀랍게 그런 속에서 하나님께서 만남을 예비하셔요.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많은 사람들은 `내 앞에 하나님의 이적이 있다면 내가 하나님을 믿을 텐데' 그렇게 바래요. 당연한 얘기죠. 그러나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이적이 눈앞에 나타난다고 다 믿게 되는 거 아니에요. 스스로 속이지 마세요. 내 앞에 기적이 일어나면 믿을 것 같죠. 내가 지금 숨 쉬고 있는 것, 그 이상의 기적은 없어요. 내가 잠자리에서 건강하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 그 이상의 이적은 없어요. 눈을 떠야 돼요. 이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이적인가 하는 것을 발견해야 돼요.

   ,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으로 이끄시는가를 보세요. 만남의 축복이 있어요. 여기 룻이라고 하는 모압 여인이 보아스라고 하는 주인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보아스가 룻을 칭찬합니다.“내가 당신이 시어머니를 따라서 고향과 친척과 부모를 버리고 여기에 와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소문을 들었소. , 대단한 일이오.”그러면서 축복합니다.“하나님께서 당신이 베푼 그 아름다운 마음을 받으시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넓은 날개 아래로 당신을 인도하시길 바랍니다.”그랬더니 룻이 그 말을 듣고 감격합니다. 이방인인 자기를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는데 그 한마디 위로의 말에 너무 기뻐서“종과 같은 저에게 이런 말씀을 주시니 너무나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됩니다.”감격합니다.

   여러분, 뜻밖에 사람은 말 한마디에 감격하는 거예요. 그래서 빵을 사줘도 배부른 사람에게는 사주지 마세요. 괜히 맛있네 없네 군소리나 듣게 돼요. 그거는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거하고 똑같아요. 저는 빵 하나 사주고 엄청나게 복을 받은 경험이 있어요. 제가 군 생활 할 때 병장 때 PX에서 빵을 사먹고 나오다가 마침 눈에 띠는 신병이 하나 있기에 이리 오라고 했더니 군기가 바짝 들어서 뛰어 옵니다. 혼내는 줄 알고. 빵을 하나 줬어요. 제가 제대하는 그 날까지 그 친구가 저만 만나면 그 빵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만 하라고 해도 하는 거예요. 충분히 알만해요. 누가 이등병에게 빵을 줍니까? 위로의 말 한마디, 사실 우리에게 많은 게 필요하지 않아요. 따뜻한 말 한마디에 절망 가운데 있다가도 소망을 얻는 법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더 놀라운 것을 계획하셨어요. 룻과 보아스의 만남은 그저 말 한마디로 지나치는 만남이 아니었어요. 나중에 룻기를 읽어 보면 어떻게 됩니까? 보아스와 룻이 결혼을 하잖아요. 이 결혼은 청춘 남녀의 결혼이 아니에요. 성경을 잘 읽어보면 룻은 젊은 사람이고 보아스는 자기 아버지만큼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이에요. 보아스가 룻의 집안을 책임지는 거예요.

   예전에 어느 목사님에게 들은 얘기예요. 그 분이 황해도 분인데 6.25통에 단신 월남하셨어요. 백령도로 도망갔어요. 백령도는 외딴 섬이잖아요. 거기 가보니까 무법천지래요. 경찰서장이 제일 높은 사람이래요. 거기서는 누구 하나 죽어도 소식이 밖으로 안 나가니까. 그런데 교회를 갔더니 장로님이 계신데 부인이 여섯 명이래요. 깜짝 놀랐대요. 알고 보니까 고기잡이하러 나갔던 남편들이 죽어 젊은 과부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리고 전쟁 통이고 어수선해요. 그러니까 이 장로님이 다 거두어서 먹여 살리는 거죠. 시대 상황이 낳은 문화의 문제죠.

   유대 사람들에게는 어떤 전통이 있었냐 하면 50년마다 희년을 선포해요. 기쁨의 해를 선포해요. 자유의 해를 선포해요. 그래서 50년마다 한번 정리를 하는 거예요. 가난해서 땅을 팔았던 사람은 그 땅을 되돌려 받고 종으로 팔렸던 사람은 자유함을 얻게 되고 빚에 눌려 있던 사람은 빚을 다 탕감 받고. 하나님이 세우신 법이에요.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보아스가 그 법을 하나님의 법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희년을 지키는 방법 중에 뭐가 있냐 하면 자녀가 없이 죽은 사람에 대해서 그 여인을 자기 아내로 삼아서 아이를 낳아서는 죽은 사람의 집안을 세워주는 일이 있었어요. 그건 자기 재산을 많이 들여서 남의 집안을 세워주는 일이죠. 그건 얼핏 손해 보는 일이죠. 그래서 모두들 잘 안 했거든요. 그런데 보아스가 나오미와 룻의 집안을 세우기 위해서 룻과 결혼하는 것이죠.

   이게 바로 희년이에요. 이것을 `기업 무르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가난해서 돈이 없어서 땅을 팔았을 때 친척 중에 돈이 있고 뜻이 있는 사람이 대신 그 값을 치러주고 그 땅을 원주인에게 되돌리는 것을 `기업 무른다'고 했어요. 땅만 무르는 게 아니에요. 종이 된 사람은 해방시켜 주고 자식 없는 사람은 자식까지 낳게 해서 그 집안을 세우는 법이 있었다는 거죠.

   알고 보면 현대인은 모두 나오미와 룻과 같아요. 가난한 사람들이에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에요. 보아스가 필요해요.

   미국대학의 심리학 교수가 연구했습니다. 미국의 400위 안에 들어가는 부자들의 만족도는 놀랍게도 아프리카 케냐 원주민의 만족도와 같아요. 세계 평균을 내보니까 연평균 소득이 일만 불이면 더 이상 소득이 높아져도 만족도는 변함이 없대요. 여러분, 소득이 얼마입니까? 한국 사람은 물론 조금 다르겠죠. 한국에서 조사한 통계예요.“만약에 당신이 가족과 친구의 관계를 끊는다는 조건으로 10억을 준다면 당신 그거 받고 관계를 끊겠느냐?”그랬더니 한국사람 53%가 그 돈 받고 관계를 끊겠다고 그랬대요. 돈에 미친 세상이에요. 남편, 아내를 다시 한 번 잘 살피셔야 될 겁니다. 그러니 많은 것을 가지고도 다 잃어버린 사람들이에요.

   원래 나오미라는 이름은 `기쁨'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나오미는 남편을 잃고 장가간 두 아들을 잃고 가난해져서 고통 속에서 기쁨을 잃어버린 사람이에요. 그래서 고향에 돌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이거, 나오미 아니냐?”했을 때“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아라. 내가 있는 거 모아가지고 돈 벌어오겠다고 남의 나라에 갔다가 완전히 빈손으로 돌아왔다.”꼭 주머니에 돈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우리 마음이 너무나 피폐해져 있어요. 나오미예요. 보아스가 필요해요.

   그런데 보니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기업을 무르는 자예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목적을 잃어버리고 일상 속에 숨겨져 있는 놀라운 은총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잃어버린 걸 다 찾아주는 거예요. 죄의 종 되었던 우리를 자유케 하는 거예요. 죽은 것 같았던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광야 시험을 마치고 자기 고향에 오셨을 때 이사야 61장을 펴서 읽지 않습니까?

 

보라.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나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노라.

눈먼 자가 보게되며 포로된 자가 자유케 되며

눌린자가 해방되는 주님의 은혜의 날을 선포하노라.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되찾아 주시는 분이다. 삶의 목적, 방향, 의미, 지혜,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되찾아 주는 분이시다.

   여기에 교회의 비밀이 있어요. 교회 안에는 기쁨을 잃어버린 나오미도 있어요. 룻도 있어요. 또 보아스도 있어요.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거예요.

   우리가 나오미 같이 기쁨을 잃을 때가 있어요. 그러면 룻을 통하여 도움을 얻어요. 원래 룻이라는 이름은 `친구'라는 뜻이에요. 보아스란 뜻은 `힘센 자'라는 뜻이에요. 때로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우리가 힘센 자가 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의 친구가 되고 나누어 주는 거예요. 연약한 자, 기쁨을 잃은 자를 세워주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은혜 받았다고 교만하면 안돼요. 하나님이 절묘하게 기쁨과 슬픔을 고루고루 나누어 주세요. 오늘은 기뻤는데 내일은 사람인지라 실망할 때가 있어요. 그러면 내가 어제 기쁨을 나누어 줬던 그 사람이 오늘은 그 기쁨을 가지고 나를 세워 주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여기에 교회의 은총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이 말합니다. `주님의 날개 아래'. 교회란 주님의 날개 아래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우리의 모든 것을 되찾아 주신 그리스도를 주목하며 내 인생의 의미와 목적과 방향을 찾아가는 것 그리고 연약한 자를 서로 붙들어 주고 세워주는 것. 여기에 교회의 놀라운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참으로 우리에게 교회 공동체를 허락하여 주시고 믿음도 부족하고 온전한 순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늘 모으시고 불러주셔서 주님 말씀 앞에 엎드리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오늘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고 어려움도 서로 나누며 하나님의 날개 아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 속에 날마다 새로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