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내 너를 아노라 [김춘수 시인의 꽃,구원의 참된 의미=자유]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 15:05

내 너를 아노라

2009 1 4일 주일예배

( 1:4-10)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1.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3.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4.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말을 입에 두었노라
  5.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의 <>이라는 시입니다.

   여러분, 오늘 누가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주고 있습니까? 그 이름을 들으므로 여러분의 인생이 그 빛깔과 향기에 어울리는 꽃과 같이 활짝 피어나고 있습니까?

   현대인을 정의한다면 `이름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름보다 주민등록번호 같은 것이 실제 생활 속에 더 필요한 사회가 되었어요. 간혹 일이 있어서 관공서에 갔을 때 신분증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참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습니까? 내가 나를 증명할 길이 없어요. 비인격적이고 간접적이고 추상적인 존재로 점점 변해가고 있어요. 이런 세상에 오래 물들어 살다 보니 스스로 착각하게 됐어요. 나의 학력, 경력, 명예, 내가 쌓은 부, 그게 곧 나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것을 가지고 나를 드러내려고 해요. 그러다가 나를 잃어 버렸어요.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설교집을 만들다 보면 표지 안쪽에 얼굴 사진을 싣게 되요. 저도 사진을 실었지 않습니까? 그 사진이 몇 년 전 사진인가 하면 8년 전 사진이에요. 그래도 저는 양반이에요. 어떤 분은 20년째 그냥 싣는 분이 계시더라구요. 저도 `이걸 바꿔야지'하다가 그만 유혹에 넘어갔어요. 어떤 분이 그러더라구요.“목사님, 살인 미소 끝내줍니다.”그 말에 마음을 접었습니다. `그래, 그냥 내버려 두자.' 그 사진은 대통령이 찍는다는 사진관에서 찍었거든요. 확실히 잘 찍더라구요. 이제까지 찍은 사진 중에 제일 잘 나왔어요. 그래서 미련이 남아서 바꾸질 못하고 8년째 그러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책을 읽다 보니 영성 신학자 `토마스 머튼'이 말하기를 `여권사진 같은 외적 정체성에 안주하는 것은 영적 재앙이다.' 제가 크게 찔렸어요. 사람은 자기를 잘 보이려고 합니다. 사진도 제일 잘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자기가 이제까지 살아 온 중에 제일 멋있는 것으로 자기를 드러내어 이야기 하고 싶어 해요. , 그렇게 자기를 포장하다가 자기를 잃어 버렸어요.

   하나님과의 관계조차도 그렇게 됐어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만나기를 원해요. 그렇지만 그 동기는 무엇이냐. 다 나름대로의 동기가 있어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참 많아요. 그러나 말입니다. 여기에도 함정이 있어요. 하나님을 만났더니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더냐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만난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만났을 때 하나님이 당신에게 뭐라고 하시더냐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소망을 주고 구원의 길을 열어 준 것은 아니에요. 하나님을 만났는데 책망을 들은 사람도 많아요. 심지어는 그렇게 책망을 듣고서도 마음이 둔해져서 하나님을 향하여 돌이키지 못한 사람들도 많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을 갖는 것은 아름다운 소원이지만 왜 그렇게 하나님이 내게는 나타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말씀하시는데 나하고 주파수가 맞지 않는 거죠. 나는 나를 과시하려고 하거나 내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하인같이 부리려는 것은 아닙니까? 정말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됐습니까?

   `전문가적 변형'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몸이 아파서 의사에게 왔어요. 정작 몸은 내 몸이 아픈데 그것을 제대로 진단하고 처방하고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의사예요. 그러나 말이죠. 의사가 환자가 의학적으로 무지한 것을 이용해서 그를 온전히 고쳐주기 보다는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여긴다면 그 얼마나 무서운 재앙이에요. 수술을 안 해도 되는 사람을 굳이 수술을 하라고 했다가 탈이 나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간혹 있거든요. 또 변호사라면 어떻겠어요. 목사도 예외일 수 없죠. 참으로 두렵습니다. 한 분 한 분이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사의 직무일 터인데. 빗나가지 않는가 참으로 두렵고 떨립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난 한 해 동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우리 삶이 과연 어떻게 됐습니까? 더 풍성해 졌습니까? 아니면 더 움츠러들었습니까? 어디에 문제가 있습니까?

   `윌리암 스태포드'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당신은 언제부터 시인이 되기로 작정하셨습니까?”그때 그는 이렇게 응답합니다.“잠깐, 그 질문은 틀렸습니다. 이렇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왜 다른 사람들은 시인이 되기를 그만 두었습니까?”이게 무슨 말입니까? 모든 사람들은 시인으로 태어나는 거예요. 다 순수한 감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거예요. 내 안에 시인의 감성이 있어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질과 통로가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게 다 막혀 버린 거예요. 어둠에 덮여버린 거예요. 언제부터 시인이 되기를 그만 두셨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늘 우리에게 말씀하셔요. 우리의 이름을 부르셔요. 오늘 `예레미야'라고 하는 선지자를 하나님이 부르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 `네가 어머니 뱃속에 지어지기도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어머니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했으며 열방을 위하여 선지자로 세웠노라.' 요즘 여러분이 많이 보시는 드라마 제목을 보니까 `너는 내 운명'이라 그러더군요. 이게 그 말 아니에요? `지어지기도 전에 알았고 어머니 태 밖에 나오기도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열방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선지자로 세웠다.'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씀이에요. 하나님의 사랑 고백이에요. 너는 내 운명이란 말이에요. 너와 더불어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고 싶다. 그런 말이에요.

   그런데 예레미아의 반응을 보세요. `, 슬프도다. 하나님 나를 좀 보십시오. 나는 어려서 철이 없어서 말할 줄을 모릅니다. 나는 이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셔요.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어디로 보내든지 그대로 가고 무슨 말을 하든지 내가 너에게 가르쳐주는 말을 담대하게 전하라. 두려워 말라. 사람들을 두려워 말라. 환경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억지로 이끄시는 은혜죠. 우리가 깨달아서 주님을 즐겁게 따라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저를 억지로 이끄셨던 은혜를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학 2학년 때예요. 친구 따라서 청년부흥회에 갔었어요. 원래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친구가 자꾸 가자고 성화를 대는 바람에 그래도 명색이 장로 아들인데 안 간다고 말할 수가 없잖아요. 끌려서 갔어요.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시더니 초청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헌신할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초청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그 시골에서 초청에 헌신하겠다고 나올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어요. 그 시간 그게 제 생각이었어요. 아무도 나갈 사람이 없는 분위기예요. 집회가 너무나 썰렁해지겠어요. 그래도 제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회장도 했고 여러 가지 경력을 고려할 때 나갈 사람은 천상 나 밖에 없겠더라구요. 나가고 싶진 않은데 할 수 없이 나갔어요. 그때 제 마음에 `난 이제 망했다. 하나님을 믿는 게 내가 아니고 우리 부모님이 믿는 거고 나는 그냥 흉내만 내며 왔는데 오늘 된통 걸렸구나. 내 인생을 하나님 앞에 내어드린다면 `내 인생은 나의 것' 노래는 불렀는데 과연 내 인생은 어디로 가느냐.' 세상에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어요. 정말 그렇게 분할 수가 없어요. `내가 저놈 때문에 괜히 와서 오늘 막다른 골목에서 이렇게 됐구나.' 어떻게나 억울한지 눈물이 막 펑펑 쏟아지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친구들은 은혜 받아서 우는 줄 알아요. 자존심에 내색도 못하고. 너무나 기가 막히고 억울했어요.

   그런데 세월이 흘러 돌이켜보니 그날 억지로 한 헌신을 하나님이 받으셨어요. 목사로 부르시고 세워 주셨어요.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제가 먼저 은혜를 받아서 목사가 되겠습니다 했으면 더 멋있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몰랐어요. 무지했어요.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어요. 마치 어린애가 국화빵을 사달라고 조르는 것과 같아요. 엄마가 말합니다.“네 생일 케이크를 사다 놨다.”그래도 막무가내예요. 지금 눈에 보이는 것만 먹겠다는 것과 똑같아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오늘은 다 이해되지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 알았습니다' 순종하는 것이 참 귀한 거예요. 오늘은 다 모릅니다. 시간이 흘러야 알아요. 그 말씀대로 순종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귀한 복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돼요.

   오늘 하나님이 말씀하셔요. `네가 나를 찾고 알기도 전에 내가 먼저 너를 알았노라.'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어요.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이 모든 것을 질서정연하게 정리했습니까? 아니오. 태어나 보니 한국인으로 태어났어요. 20세기에 태어났어요. 이미 내 삶의 거의 모든 것은 결정된 채로 태어났어요. 하나님이 다 준비해 놓으시고 나를 그 자리에 초청하셨어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한다고 하지만 그거 잘 이해해야 돼요. 헌신이랄 것도 없어요. 지금 나의 지정학적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면 모든 것을 다 감사와 은혜로 받게 되는 거예요. 그야말로 인터넷 세상같이 다 만들어 놓았는데 나는 그냥 접속만 하면 되는 거예요.

   인터넷을 할 때마다 참 신기해요. `어떻게 이런 걸 다 만들었을까. 어떻게 클릭만 하면 다 찾아가도록 만들었지. ,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내가 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만들어 놓으시고 나의 인생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접속시키셨다고 하는 거예요.

   또 하나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나를 거룩하게 구별하셨어요. 하나님 편으로 나를 부르셨어요. 우리가 어느 편에 있는가가 더 중요해요. 사람들은 능력을 생각합니다마는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다면 내게 능력이 없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요.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중요해요.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모태로부터 예정하셨다. 나를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은혜는 이렇게 나를 먼저 아시고 거룩하게 구별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방법이에요. 십자가에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내어 주셔서 그가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씻는 희생 제물이 되셨다. 그 사건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인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죠. 우리가 몸부림쳐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거예요.

   `열방을 위한 선지자로 세웠노라.' 꼭 목사 되라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가 어디에서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 라고 하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그 일을 단순히 밥벌이로만 여기지 않아요. 그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거예요. 도와주는 거예요. 세워 주는 거예요. 기쁨을 주는 거예요. 행복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나는 더 행복해 지는 거예요. 성경은 이것을 `복의 근원이 된다'라고 표현했어요. `내가 너에게 복을 주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 너를 통하여 모든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여러분, 새를 보세요. 새도 발이 있으니까 가끔 종종 걸어요. 때로는 가지에 매달리기도 해요.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새가 밤낮 걸어 다니고 가지에 매달려만 있다면 그게 새 예요? 새는 날개를 펴고 날아야 새 예요. 예수 믿는 사람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이 도우셔요.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 믿는 자의 모습은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나는 새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끗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내게 주신 일이 무엇이든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고 기도하면서 그 일을 해나가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날마다 듣는 사람, 그 사람에게 자유함이 있어요.

   오늘 하나님이 말씀하셔요.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너를 구원하리라.' 여러분, 구원의 참된 의미가 뭡니까? 자유예요. 죄로부터 저주로부터 진노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사단의 권세로부터 자유한 사람이에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거예요. 그럴 때 부질없이 내 이름을 드러내려는 욕심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거예요. 

   충청도 공주에 `공주제일교회'가 있어요. 그 역사가 이제 백 년이 넘었어요. 그런데 공주제일교회 역사 속에 이런 얘기가 있어요. 공주가 원래 충청도 양반들이잖아요. 일본 사람들이 경부선 철도를 놓을 때 그게 당연히 공주를 지나가야 되는데 공주 사람들이 반대했어요.“어디 감히 왜놈들이 양반 동네에 철길을 깐다는 말이냐. 안 된다.”참 그 기개는 대단했는데 길이 다른 쪽으로 나다 보니까 공주는 뒤쳐지게 된 거예요. 안성도 그래요. 안성도 양반 하다가 경부 철로가 날 때“감히 여기 못 온다”해서 원래 그 쪽으로 도로가 나는 건데 밀려서 평택으로 난 거예요. 평택은 허허벌판이었는데 철로가 나므로 거기에 도시가 세워진 거예요. 길이 날 때 잘 판단해야 돼요. 은혜의 길이 날 때 그쪽으로 얼른 줄을 서야 되는 거예요.

   공주 양반들이 기독교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어렵게 시작했습니다만 1907년 평양대부흥으로부터 시작해서 드디어 공주에도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어요. 부흥이 일어났어요.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됐어요. 자그마한 예배당이 비좁게 됐어요. `도저히 안 되겠다. 우리도 교회를 건축하자.' 그런데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선교사님들과 온 교우들이 늘 모여서 기도했다는 거예요. 어느 날 비가 많이 오는 날에도 기도하고 있었어요. 어떤 낯선 사람이 그날 예배 자리에 참여했어요.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면서 그런 사정을 듣더니 큰 봉투 하나를 내놓고 갔대요.“이름이라도 알려 주셔야죠?”했더니“아니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 아니겠습니까?”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대요. 봉투를 열어보니 큰돈이 있었던 거예요. 그것을 기금으로 해서 교회를 건축하게 됐어요.

   그런데 그때는 워낙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에 큰 기부금을 받아서 건축하면 그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건물의 이름을 지었어요. 세브란스 병원도 미국의 세브란스라는 갑부가 보내준 돈으로 세워져서 그 이름이 세브란스 병원이 됐어요. 그래, 이름을 정해야 되겠는데 이름을 알 길이 없어요. 그래서 뭐라고 이름을 지었는지 아세요? `협산자挾傘者 예배당'그랬어요. 낄 협挾에 우산 산傘, `비오는 날 옆구리에 우산 끼고 온 사람'이 낸 돈으로 이 교회가 세워졌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을 늘 듣고 내 이름을 부르시는 것을 듣는 사람은 굳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 하지 않아요. 자유인에요. 올 한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유인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2008년 한해 우리를 지켜주신 것 감사합니다. 새해 소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내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날마다 듣기를 원하고 나를 사랑하신 그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기를 원하고 부질없는 세상의 명예와 권세로 내 인생을 허비하지 않기를 원하며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때 부끄럼이 없도록 소중한 신앙으로 살기를 소원하오니 올 한해 이러한 우리의 소원을 붙들어 주시고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