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인생결단 [등샤오핑,지휘자형 리더십,전도방법]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 16:22

2008 11 30 인생결단

본문말씀;디모데후서 4 1-8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개역개정 디모데후서 4:1-8)



여러분, 모택동, 마오쩌뚱을 다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83세의 일기를 살았습니다. 그가 한평생 공산주의를 위해서 싸웠습니다. 1949년 중국 본토에 중화 인민 공화국이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내쫓고 권력을 장악합니다. 그리고 인민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서 사유재산을 다 몰수하고 집단 농장제로 묶어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생산량이 40%가 감소하고 1952년부터 62 10년 동안 4천만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체제가 흔들리니까 이번에는 문화혁명이라는 것을 주도합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사상으로 그 체제를 더 분명하게 하려고 젊은이들을 앞장 세워서 ‘홍위병’을 만들어서 붉은 사상을 지키는 군대라고 해서 기존 질서를 뒤 흔들고 전통을 부정합니다. 그래서 중국의 지적인, 사회적인, 예술적인 기반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놨어요. 그가 죽으면서 드디어 끝났습니다. 27년 동안 중국을 집권하는 동안에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혼돈이었고 경제적으로는 파탄이었어요. 그의 삶 자체가 재앙이었어요. 그의 인생은 실패였습니다. 그러했기에 그의 후계자인 등소평, 등샤오핑 그 권력이 중국인민에게 빵을 제대로 공급해 주지 못하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음을 알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제까지의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집단 농장에서 사유재산으로 그리고 외국 기업을 수용하고 외국 문물을 점진적으로 받아 들이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 이런 우스개가 있잖아요. 등소평이 차를 타고 갈 때 기사가 이렇게 묻는 답니다. 이제 여기서 좌회전을 하면 공산주의요 우회전을 하면 자본주의인데 어디로 갈까요? 등소평이 말합니다. 좌회전 깜박이를 켜고 우로 돌게. 이게 바로 등소평의 정책이었던 거지요. 사실상 모택동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었어요. 모택동의 삶은 실패였습니다.

어떤 분이 그래요. 진정한 공산주의의 모습은 성경에 있다. 사도행전 2장에 예루살렘의 초대교회, 성령께서 임하시는 초대 공동체 모습이 사도행전 2 42절에서 47절에 잘 나와 있어요. 사람들이 늘 집과 교회에 날마다 함께 모이며 함께 떡을 떼며 찬송하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기뻐하면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의 재산과 소유를 다 팔아서 서로의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 주었다. 공산주의 모토가 뭐냐 하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 쓴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게 되겠어요? 파탄이 났지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놀랍게도 그러한 것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얘기해요. 결정적 차이점이 뭡니까? 하나는 인간이 이념을 앞세워서 강제해서 있는 자들의 것을 빼앗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려 했습니다마는 몽땅 가난해지고 만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스스로 마음을 열고 손을 펴고 나누고 베풀게 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 출발은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 라고 하는 자기 본성을 발견하는 거부터. 공산주의 같이 인간에 대해서 유물론으로 해석하고 인간을 하나의 끝없이 진화하는 존재로 해석해서 인간이 올바른 이념을 가지면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 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건 어느 나라나 다 실패로 돌아갔어요. 그것이 아니고 악한 인간의 본성 욕심에 매여 있는 인간을 부정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능하시고 하나님의 성령으로만 가능하다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아름다운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또 어떤 분은 이렇게 지적해요. 그것은 아마도 성령이 임하시므로 그 예루살렘 사람들이 이제 곧 주님의 종말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제 세상이 끝나는 마당에 이 모든 재물이 다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며 다 서로 내어 놓고 다 나누어 쓴 것이 아니냐. 전혀 틀리다고는 얘기 할 수 없어요. 그렇게 생각한 것은 사실이에요. 내일 지구에 멸망이 온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움켜쥘 것이 뭐가 있겠어요. 다 나누고 베풀겠지요. 자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에 나누고 베푸는 역사가 있었음을 사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이제 갈등이 있어요. 문제가 있어요. 그럼 오늘 우리 교회 속에서는 왜 그것이 되어 가지 않는가.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응답하고 있는가. 그 초대교회 사람들하고 우리는 본질적으로 뭔가 다른 사람들인가. 여기서 하나 깊이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사도바울의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어요. 디모데후서는 사도바울이 자기 아들같이 여기던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그리고 이 디모데후서는 사도바울의 마지막 편지였어요. 지금 사도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있어요. 곧 자기의 죽음이 다가왔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 편지를 쓴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형장에 끌려가서 순교 당했습니다. 마지막 편지예요. 아주 사적인 편지예요. 교회전체를 향해서 주는 편지가 아니에요. 아들같이 여기던 디모데에게 자기의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 편지예요. 그런데 이 편지를 보면 뜻밖에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교회와는 다른 모습이 보여요.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교훈을 듣지 않는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귀를 즐겁게 할 수 있는 그런 이상한 말씀들을 즐겨 쫓는다고 그랬어요. 이건 이방인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교회를 이루고 있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몸은 나와 있지만 진리를 쫓지 않는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상한 이야기, 허탄한 이야기. 신화나 족보나 종말이나 재림이나 날짜를 계산하는 것이나 이런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 안에 다툼이 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다 그래서 교회에서 일하던 일꾼들 중에서도 일을 놓고 떠나가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한 거예요. 오늘 우리 교회와 다를 바 없어요.

사도행전은 누가가 기록했어요. 의사 누가는 사도바울과 끝까지 선교에 동행한 사람이에요. 그 의사 누가의 글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전편 후편으로 기록되었어요. 그 주제는 뭐냐 하면 예수님의 공생애 속에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그 예수님들의 제자들의 삶 속에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그런 점에서 상당히 긍정적으로 초대교회 이야기들을 서술하고 있어요. 우리가 가정에서도 누구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부부의 의견이 딱 맞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한 사람이 긍정적인 얘기를 하면 다른 한 사람은 상대방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그 뒷면을 얘기해요. 보는 관점이 이렇게 다른가 놀라지 않을 수 없어요.

제가 1995년에 장신대 신대원 연합중창단 이름으로 40명 팀이 되어서 호주와 뉴질랜드를 선교여행한 적이 있어요. 찬양 연주여행을 했어요. 그 때 총무일을 맡아서 아주 복잡했는데 뉴질랜드를 가서 마오리족과 함께 지낼 때 이런 뷔페 식당 저녁에 같이 식사를 하는데 그 누가 우리가 합창단이란 것을 알고서 요청을 해 왔어요. 노래를 한 곡 불러 주실 수 없느냐. 단장님에게 요청이 왔어요. 단장님이 오케이. 합시다. 지휘자하고 마음이 맞아서 갑자기 대원들을 무대위로 불러냈어요. 그랬는데 말이지요. 저는 그날 참 놀랐어요. 선뜻 응해서 일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좀 주저주저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나중에 평가회를 할 때 의견이 쫙 갈라졌어요. 그렇게 요청을 받았을 때 과연 나가서 노래하는 것이 적절했는가 하는 거에 대해서. 어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여기 찬양하고 노래하러 왔으므로 언제라도 누구라도 요청을 하면 할 수만 있으면 노래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반면에 그래도 우리가 합창단인데 그래도 다 수준이 있는데 그래도 다 예라는 게 있는데 그렇게 느닷없이 요청하는 거에 불쑥불쑥 일어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같이 한 팀이 되어서 떠났지만 이렇게 다른 거에 대해서 새삼 놀랐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누구가 틀렸다 그렇게 보아선 안 된다는 거지요. 사람이 다른 거예요. ( )형들은 그런 자리에서 느닷없이 일어나라 그러면 안 되요. 그 사람들은 마음에 준비해야 되고 훈련해야 되고 연습해야 되고 다 해서 상황을 머릿속에 딱 그린 다음에 해야 되요. ( )는 아무 때나 하라고 해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이건 하나님의 뜻이다 하고 벌떡벌떡 일어나서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 안에 너무나 다양한 성격의 유형들이 한 팀이 되어 있었으므로 그런 느닷없는 돌발 상황에서 그런 다양한 의견이 나오게 된 거지요.

그러니까 누가는 굉장히 적극적으로 봤어요.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렇게 보지 않았어요. 어찌 보면 사도바울은 교회실상을 봤어요. 교회는 초대교회나 지금이나 그때 그 장소에만 역사하시는 성령이 아니에요. 성령께 순종한다면 지금이나 그때나 동일한 역사 동일한 사건들이 우리 가운데 증거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순종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여전히 문제가운데 빠져있는 거지요. 그런데 오늘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여러 가지 교회의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지금 자기가 곧 순교 당할 그 상황을 임박해 보면서 아직도 교회는 여전히 문제가운데 있고 떠난 일꾼들은 많이 있고 회중들은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이제까지 한평생의 열매가 보이지 않아요.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인생은 실패입니까? 우리 다시 봐야 돼요.

여러분, 신앙의 본질은 뭘까요? 우리 인생 마지막 날까지 희비가 교차해요. 저 발리 바닷가에 가서 어느 호텔에 들었을 때 밤바다를 나가서 보다가 느낀 바가 있어요. 어쩌면 그렇게 파도는 단 한번도 거르지 않고 아주 거세게 발끝까지 밀려왔다가 돌아가고 또 밀려와요. 지구가 만들어진 이래로 이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밟았을 것이고 그 사람들은 벌써 땅에서 자취를 잃어버리고 세상을 떠나버렸을 터인데도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파도가 다가오더라구요. 인생의 풍랑은 여전한 거지요. 이제 그것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가.

오늘 사도바울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어서 속히 너는 내게로 오라. 다른 사람들은 다 나를 버렸구나. 사도바울에게도 상심한 마음이 있었나 봐요. 누구라도 옥에 갇히고 오랜 시간이 지나고 눈 앞에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면 불안할 수도 있고 두려울 수도 있고 답답할 수도 있겠지요. 사도바울에게서 이런 모습이 보여요. 겨울이 오기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올 때 어디를 들려서 글자가 큰 성경책도 가지고 오고 또 내가 입을 겉옷도 가지고 오라. 얼마나 사사로운 이야기들을 하는지 몰라요. 오히려 저는 목회자 선배로서 사도바울의 이런 모습이 내심 반가워요. 인간적이고 정겨워요. 원래 젊은 시절의 사도바울은 그렇지 않았어요. 때로는 사도바울은 자기 열심에 붙들려서 스데반을 죽이는 자리에서 증인을 섰던 사람이에요. 사도바울의 성격을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정말로 저돌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세월을 이길 수 없었는지 어찌 보면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지난번에 방지일 목사님이 오셨을 때 그 분은 우리 교회 역사의 산 증인입니다. 올해 98세 이신데 어지간한 여러분보다 그분이 더 강해요. 더 건강하셔요. 더 말씀도 분명하셔요. 특별히 그 분은 중국선교사로 가 계셨기 때문에 그 때의 중국선교 얘기하라고 하면 그 때 중국을 지배하던 군벌들 이름이 쫘악 나옵니다. 그 기억력이 너무 놀라와요. 여러분 잊어버렸다 그런 소리 하지도 마세요. 그런데 전 놀랍던 게 그 분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참 도전을 받았어요. 교과서에서 배우던 한국기독교의 100년 역사를 그 분이 확 꿰뚫고 계셔요. 우리나라의 최초의 목사로 길선주목사님을 들어요. 그분이 한국의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평양에서도 가장 최초의 장대현교회를 담임하던 목사님이에요. 그러니까 오늘로 말하면 서울 영락교회를 담임하던 목사님과 같단 말이에요. 그 영향력이 대단한 분인데 그 분 말년에 이 방지일 목사님이 그 교회 전도사였어요. 그런데 그 길선주목사님 말년에 눈이 머셨대요. 눈이 먼 채로 목회를 하셨대요. 그런데 말이지요 방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셔요. 그 영감이 말이지, 이제 다 지나갔으니까 돌아가셨으니까 그렇게 편안하게 얘기하는 거지요. 얼마나 냉면을 좋아하시는지 꼭 냉면을 드실 때만 되면 두그릇 세그릇을 드셔서는 영락없이 배탈이 난다는 거예요. 아니 눈 머신 분이 배가 꾸룩꾸룩하니 이걸 어떻하면 좋습니까. 그러니까 그분을 붙들고 화장실 가는 게 그분 일이었다는 거예요. 제가 그 얘기 들으면서 교회사 속에 한국 기독교역사 속에 길선주목사님 하면 감히 쳐다볼 수 없을 만큼 평양 대부흥을 주도한 분이며 삼일독립운동에 참여한 분이며 한국교회기초에 초석이 된 분이라고 하지만 그 냉면 한그릇 밥 한그릇에 욕심을 평생 못버린 좀 심하게 얘기하면 식충이 같았다는 거예요. 그래 제가 오히려 감사하더라구요. 그런 약점과 연약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다 들어서 쓰시는 구나.

사도바울은 젊을 때 함께 선교여행을 갔던 마가가 말을 안 들으니까 마가가 제멋대로 대열을 이탈하고 돌아가니까 그 다음에는 마가를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그 다음 여행에서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를 놓고 아주 심하게 싸웠다 라고 성경에 기록해요. 그런데 사도바울의 편지들을 쭉 읽어보면 나이가 들면서 사도바울이 마음을 열기 시작합니다. 마가가 너희 교회에 가면 그를 잘 영접해주시오 라고 얘기합니다. 또 마가는 이제 나의 동역자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드디어 오늘 자기 인생 마지막에 디모데에게 너는 겨울이 오기 전에 빨리 오라고 말하면서 마가를 데리고 오라. 화해한 모습이에요. 완전히 마음이 열려 있어요.

2007년 말에 뉴욕 타임지에 ‘리더십의 진화’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1990년 이후 지금까지 미국경제계에 리더십의 변화가 보인다 하는 거예요. 첫째는 황제형, 이건 1990년대 잭 웰치같은 사람이지요. 카리스마를 가지고 구조조정을 해서 그냥 수많은 사람들을 잘라내고 그래서 잭 웰치의 별명이 ‘중성자탄’이라고 했잖아요. 중성자탄잭, 중성자탄의 특징은 건물은 부수지 않고 건물 안의 사람들만 싹 죽이는 그런 비밀무기래요. , 그러나 이런 리더들이 물러났을 때 그 기업은 큰 후유증을 맞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나타난 리더십은 뭐냐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해서 몸집을 줄이고 여러 가지를 수습하는 그런 리더십이 나타났다. 그것을 이름하여 수리공 스타일의 리더십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 리더십이 요구되느냐 지휘자형 리더십이 요구된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사람같이 모든 멤버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저들의 능력을 이끌어내고 혼자 앞서 가는 게 아니라 팀웤을 이루고 네트워킹을 잘 할 수 있는 리더십. 그래서 진정한 리더는 어떤 사람이냐 자기가 잘 하는 것을 극대화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못하는 것을 잘 할 수 있는 다른 사람과 연합해서 그의 능력을 끌어내서 일을 이루어 가는 사람. 이게 진정한 리더십이라는 거죠. 여러분, 여러분 가정은 어떻습니까? 꼭 기업의 리더가 아니라 할지라도 오히려 진정한 리더의 능력은 가정에서 비롯돼요.

사실 남녀 사십을 넘어서면 변화가 일어나요. 남자들의 경우에는 사십대의 특징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피곤함이다 그렇게 말해요. 오십대는 외로움이다. 육십대는 아예 없어요. 그 때는 설명이 불필요한 모양이에요. 사십대의 특징은 피곤함이다. 살아보니까 사십 고비를 넘어보니까 내 뜻대로 제대로 되는 게 없어요.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현실에 순응하게 돼요. 또 뭔가 이루었다 할지라도 그게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어요. 그게 정말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현실 순응하게 돼요. 이건 남자 자존심이 무너지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동시에 나타나는 게 무엇이냐 하면 고집. 그리고 편견이 집착화돼요. 두려움이 자기방어 형태로 나타나는 거예요. 뭐라 그러면 소리를 웩, 지르고부터 시작하지요. 특별히 집에서. 번연히 그게 맞는 얘기라는 걸 속으로 알지만 받아들일 수 없어요. ? 그걸 받아들이면 성이 무너진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동시에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우리 몸에서. 우리 몸에는 남자 여자 불문하고 남성호르몬, 여성호르몬이 같이 있어요. 그런데 사십을 넘어서면 남자에게서는 이제까지는 볼 수 없었던 여성호르몬이 분비되기 시작해요. 감성화 돼가요. 의미를 찾게 돼요. 사십이 넘어서부터 분위기를 찾으려고 해요. ‘우리 어디 나가서 차 한잔할까’ 이런 소리가 나오게 돼요. 여러분은 안 그러신지 모르겠는데 제가 그렇게 됐어요. 저 예전에 일만 알았던 사람이에요. 교회 일을 위해서는 가정 일이고 뭐고 다 희생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그거 비성경적이에요. 그게 아니었어요. 감성화돼요. 드라마도 아직도 추리극이 매력있고 전쟁물이 좋다 그런 분은 철부지예요. 인간 드라마에 드디어 필이 꽂히고 거기에 마음이 열리고 공감하고 눈물이 흐르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진짜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남자예요. 그런데 우리 사회화된 남자는 어떤 거냐 남자는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 하는 것에 세뇌되어 있기 때문에 내 본성이 자유롭게 나를 표현하려고 하는 것을 막아요. 스스로 두려워해요. 부끄러워해요. 거부해요. 그런데다 더 아이러니는 여자분들도 변화를 겪는데 이번에는 여자분들은 남성호르몬이 왕성하게 분비돼 거칠어져요. 아줌마가 돼요. 야성화 돼요. 그리고 현실을 살아오면서 너무나 실리적이 돼요. 그래서 남편이 뭔가 좀 마음 따뜻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고 드라마에 눈물을 흘리고 그럴 때에 불안해해요. 이제 애들 크고 돈 들어가야 할 땐데 남자가 왜 흔들흔들 하는 거야. 그래서 남자의 남자다움을 이해하지 못해요. 여러분 최면을 통해서 남자들에게 여행을 떠나 보냈더니 다 깨어난 사람들의 공통적인 고백이 그 어느 휴양지에 가서 너무 편안했는데 같이 간 사람이 아내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어요. 그걸 기억해요. 얼마나 두려운 존재로 각인되어 있는가. 기억해야 돼요.

신앙이 뭘까요. 큰 집을 이루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내 안에 일어나는 하나님이 주신 이 몸의 변화 여기서 나타나는 그 감성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이성으로 잘 이해하고 하나님의 선물로 받고 이것을 잘 가꾸어 감으로 이제 이런 변화를 잘 이해하고 수용하게 되면 사람이 더 넉넉해져요. 용납하게 돼요. 나누고 베풀게 돼요. 그런데 여기서 잘 못되면 더 다치는 사람이 돼요. 참으로 우리 신앙은 자전거타기와 같아요. 자전거 타보셨어요? 쓰러지려고 하면 겁이 나서 반대로 돌리게 되잖아요. 아니요. 그렇게 하면 안되고 기울어지는 방향으로 한발 더 몸과 함께 기울여야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고 가는 거예요. 우리 몸에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서 두려워하거나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하나님이 주신 변화예요. 중요한 것은 그런 감성의 변화를 잘 이성적으로 이해해야 돼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온전한 변화를 선물로 받을 수 있는 결정적인 방법이 뭐냐 그게 놀랍게도 사도바울이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예수님은 아파하는 사람과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셨어요. 자기의 풍부한 변화를 부끄러워 하지 않았어요.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은 학문과 옷과 의식으로 자기의 감정을 꽁꽁 묶어 두었어요. 그게 불경하다고 생각했어요. 아니에요.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펼치셨어요. 자기에게 일어나는 감성을 소중하게 여겼어요. 그렇게 흔들리는 것같이 가지만 그러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이에요. 그래서 내게 주신 이 복음과 이 삶과 이 일터를 소중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그 사람이 복음의 증인이에요. 어디 버스 안에 가서 전도하려고 하지 마세요. 저는 예전에 버스 안에서 물건 파는 사람같이 하도 뜨거워서 버스 안에 서서 운전수에게 먼저 인사하고 막 성경을 외치고 그랬었어요. 지하철에서도 했고 버스에서도 했고 고속버스에서도 했고 지금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 저를 목사로 세우기 위한 훈련이었어요. 그러나 지내놓고 보면 가장 멋있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뭐냐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일터, 가정에서 넉넉한 마음으로 남편의 자존심을 세우고 아내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기다려주고.

원수같이 여겼던 마가. 내 사역을 깨뜨렸다고 생각했던 마가를 향하여 마지막 순간에 저를 데리고 오라 저는 내게 매우 귀한 사람이다. 여러분 신앙이 정말 뭡니까? 성공하는 인생은 뭡니까? 오늘 사도바울이 고백했듯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쳤으니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그 믿음을 지켰으니 의의 면류관이 나를 기다리도다. 사도바울 말년에 마음에 드는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 교회는 다 문제가 있었어요. 다 시끄러웠어요. 많은 일꾼들이 떠나갔어요. 그걸 수습하지 못한 채 나는 이제 형장의 이슬로 순교 당해야 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몫의 고난을 주님과 함께 감당했노라. 내 역할을 여기서 다 했노라 그리고 연약한 디모데에게 이것을 넘겨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있는 은혜 속에서 이것을 계속 이어가라. 여러분 신앙의 비밀 다른데 있지 않아요. 내 속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강건해지고 풍부해지고 모든 사람의 허물을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넓어지는 것 거기에 신앙의 놀라운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경쟁 속에 살면서 먹고 마시고 입는 일에 매이다 보니 복음마저도 우리의 의식주를 위해 수단화하는 우리들인 것을 고백하오니 우리를 용서하시고 진정 복음의 능력이 우리의 속 사람을 온전케, 새롭게 하시고 서로의 허물을 이해하고 용납하고 서로를 세워주고 사랑함으로 내 마지막 순간이 왔을 때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달려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내 앞에서 주님께서 의의 면류관을 가지고 나를 기다리시는구나 고백하는 그런 성숙한 신앙으로 오늘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