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이것을 위하여 왔노라[마틴루터킹,인내로써예수만바라보자] / 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 16:57

081012 이것을 위하여 왔노라 ( 1:35-39)

성경본문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한국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는 호주남자가 있습니다. 한국여자와 결혼했습니다. 아내가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되었고 출산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꼼꼼하고 철저하게 준비하는지 인터넷도 들어가보고 책도 사다가 읽어보면서 연구합니다. 어떻게 출산하는 것이 가장 건강한 아이를 낳고 엄마에게 편안한가. 원래 집에서 낳는 게 심리적으로 편안하다고 해요. 요즘이야 집에서 낳을 상황이 못되니까 어쩔 수없이 병원에 가지만. 집에서 낳기로 결정한 거예요. 건강한 아이를 낳기 위해서 배가 남산만한 아내를 데리고 운동을 시키고 또 태교까지 합니다. 건강한 아이를 낳았습니다. 미역국을 끓이는 것부터 기저귀를 빠는 것까지 다 하는 거예요. 원래 사람이 자상하고 꼼꼼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제가 그거 보면서 너무 부끄럽더라구요. 나는 내 아이를 얻을 때 십 분의 일도 못했구나. 솔직하게 말하면 백 분의 일도 못했습니다. 너무 미안하고 부끄럽더라구요. 저렇게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 소중하건만 그저 아이를 얻게 되어서 아빠가 됐다는 것만 기뻐했지 실질적으로는 제대로 돕지 못했구나.

그런데 이 사람이 그렇게 하는 데는 이유가 있더군요. 그 사람이 아홉 살 때 부모가 이혼을 했습니다. 엄마 손에서 자라났어요. 아빠의 모델을 보지 못하고 자라난 거예요. 나름대로 한이 맺힌 거예요. 나만은 좋은 아빠가 되겠다 하는 것이죠.

여러분,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특별히 신앙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이미지는 그대로 하나님의 이미지와 중첩되기 때문에 그래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부정적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건강한 이미지를 가질 수가 없어요. 내가 뜨겁게 기도한다고 이미지가 바뀌는게 아니에요. 내 무의식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내가 열심을 낸다고 이미지가 바뀌는게 아니에요. 대부분은 그 원인을 모르고 있거든요.

마틴 루터 킹 목사, 미국의 인종차별에 목숨을 내어놓고 저항한 사람 아닙니까? 그 사람이 스물 다섯에 목사가 됐는데 4대 목사예요. 증조 할아버지도 목사, 할아버지, 아버지, 자기 4대에 걸친 목사예요. 참 대단한 집안이죠.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는 사랑의 하나님을 생각할 때 그 이미지를 그리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 아버지가 가족을 소중하게 여겼고 어머니 역시 지극히 자상했기 때문에 아주 화목한 가정이었으므로 사랑의 하나님이란 말이 아무런 장애 없이 내 마음에 다가왔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발견했던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예요. 바리새인이나 제사장이 가졌던 하나님의 이해는 하늘 높은 보좌 위에 앉아계신 분, 저 멀리 계신 분이에요. 두려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의 이런 모습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죠. 예수님은 아바 아버지라고 표현했어요. 아바 라는 말은 예수님 당시에 쓰던 아람어로 아빠라는 말입니다. 아버지라는 표현보다 더 가까운 아빠라는 말이에요. 어린 아이들이 쓰는 아빠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에요 하나님을 그렇게 가까운 분으로 이해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너무 기쁜 일이에요. 감사한 일이에요. 언제든지 즐거운 일이에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이해할 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을 열고 들을 수 있어요. 그때 비로소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여러분, 삶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우스개가 있어요.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있었는데 너무 조숙하고 똑똑했어요. 삶은 무엇인가 하고 늘 고민하는 거예요. 친구가 말합니다. 우리는 이제 1학년인데 그런 건 나중에 알아도 돼. 그랬습니다만 그 물음이 떠나지 않는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발견했어요. 우연찮게 포장마차를 지나다가 발견했어요. 거기에 뭐라고 쓰여 있었냐 하면 삶은 계란 이라고 쓰여 있었어요.

여러분은 삶을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한번밖에 없는 이 삶을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예수님께서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것이죠.

오늘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죠. 내가 다른 동네에 가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것을 위하여 왔노라. 여러분은 무엇을 위하여 이 세상에 왔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걸 찾아야 해요. 나는 이것을 위해서 산다 라고 하는 그것을 붙들어야 돼요. 달란트 비유를 다 아시지 않습니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열심히 일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겨서 주인에게 보고했더니 착하고 충성된 종아. 두 달란트 받은 자도 열심히 일해 두 달란트를 남겨서 주인에게 보고 했더니 똑같이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을 받아서 그대로 땅에 묻어 두었다가 주인이 왔을 때 가지고 가서 내밀었을 때 악하고 게으른 종아.

 어디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실패, 주인에 대한 오해예요. 즉 하나님에 대한 오해란 말이죠. 뭐라고 말했습니까. 나는 주인님이 굳은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나는 주인님이 엄격한 사람이고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이걸 가지고 갔다가 잘못해서 잃어버리면 야단을 맞을 까봐 두려운 마음에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땅에 묻어 두었다가 이렇게 안전하게 가져왔습니다. 주인이 뭐라고 말합니까. 네가 나를 그렇게 알았더냐. 네가 나를 그렇게 악한 자로 알았더냐.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주인에 대한 오해예요. 아마 이렇게 생각했겠죠. 저 사람들한테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주고 나는 한 달란트 밖에 안 주는구나. 나를 무시하나 보다. 나를 덜 사랑하나 보다. 오해예요.

하나님이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실 때 IQ를 일률적으로 150, 이렇게 맞춰 보내지 않으셨어요. 다 달라요. 전 지금도 기억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IQ 테스트를 했는데 90이 나왔어요. 다행히 그때만 하더라도 IQ 에 대해서 덜 예민했기 때문에 망정이지 제대로 알았으면 아마 깜짝 놀랬을 거예요. 아마 그때 답지를 쓰는 게 서툴러서 제대로 못했으니까 그랬겠죠. IQ가 얼마인지는 비밀로 하겠습니다. 상당히 높습니다.

여러분, 그건 하나님이 알아서 하셔요. 그건 우리 일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먼저 알아야 돼요. 그래야 내가 나를 사랑하게 돼요.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남을 사랑할 수 없어요. 자기에 대해서 건강한 이미지를 갖지 못하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겠어요. 나도 굶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도와 줄 수 있겠어요.

왜 우리가 나를 사랑하지 못합니까? 나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제가 신대원 다닐 때 어느 과목을 공부하는데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책을 읽고 요약을 해야 하는데 너무 어려운 거예요. 그런데 그룹스터디에서 한 친구가 그 방대한 책을 두 페이지 정도로 정리해서 얘기를 하는데요, 망치로 뒤통수를 맞는 것 같더라구요. 똑같이 공부하는데 저렇게 잘하는 사람도 있구나. 여러분, 인정할 건 인정하세요. 인정하셔야 돼요.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었어요. 그는 박사였어요. 그러나 전기를 읽어보면 이런 고백이 있어요. 친구와 함께 기숙사에서 공부를 하는데 자기는 몇 시간식 공부해도 알 수 없는 걸 그 친구는 한 시간이면 다 끝내더라는 거예요.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기를 쓰고 했지만 번번히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 기도했대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그거는 내가 알아서 하는 것이니 너는 네 모양대로 살아라. 여러분, 다 다르게 지으셨어요. 자신을 용납하세요. 자신을 받아들여야 돼요.

그 유명한 말 아세요? 미국에 포드 대통령이 있었지 않습니까. 닉슨 대통령 때에 부통령이었던 에그뉴가 뇌물사건으로 물러나게 되었어요. 그 바람에 닉슨이 누구를 부통령으로 삼을까 하다가 공화당 하원 대표였던 포드를 부통령으로 지명했어요. , 저 사람은 잔꾀를 부리지 않는 사람이다. 말을 잘 들을 것 같다고 해서 지명했어요. 그런데 부통령이 된지 채 1년도 안돼서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됐어요. 그래서 포드는 유일하게 선거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이 되었어요. 그러니 국민들이 애이 했어요. 국민들의 기대가 높았던 것이죠. 그때 포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I am not a Lincoln. I am a Ford. 나는 위대한 대통령 링컨이 아닙니다. 다만 포드일 뿐입니다. 나는 링컨 콘티넨탈 같이 그렇게 요란하고 멋있는 차는 아닙니다. 여러분이 타고 다니는 평범한 포드입니다. 그는 정직한 대통령, 성실한 대통령으로 묵묵히 국민들의 인기에 좌우되지 않고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어요. 자기를 용납해야 돼요. 사람이 잘하는 것도 있구요, 잘하는 것보다는 못하는 게 많은 거예요. 용납해야 돼요. 하나님이 주셨어요.

그렇다면 나의 소명은 무엇이냐. 남보다 못하는 것도 많고 모자른 것도 많지만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내셨을 때 주신 소명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 소명이 무엇이냐. 내가 이것을 위해서 살고 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걸 찾아야 되는 거죠. 지금 여러분 하고 있는 그 일이 소명입니다. 더 원초적으로 얘기하면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가정이야말로 여러분의 소명이에요.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직종에서 일을 하던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 그게 우리의 소명이에요.

예수님이 마을에 가서 전도하겠다고 하시고는 그 마을의 회당을 찾아가셔서 말씀을 증거하셨어요. 하나님이 사람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뜻을 두셨어요. 교회도 마찬가지로 목적이 분명해야 돼요. 목적을 잃은 교회, 이건 세상보다 더 악해요. 우리가 기도할 때 흔히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해 밖에서 방황하는 사람들 이렇게 얘기하지만 사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방황하는 사람들도 어지간히 많아요.

필립 얀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을 보면 자기의 어린 시절 교회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미국 남부의 근본주의 교회에서 자라났어요. 그는 어린 시절 다녔던 교회를 통해서 말할 수 없이 많은 상처를 입었다고 말해요. 많은 사람들이 그 상처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갔다. 왜 그랬느냐, 자기가 어릴 때 다녔던 그 교회는 술 마셔도 안됩니다. 담배 피워도 안돼요. 주일날 영화 봐도 안돼요. 화장해도 안돼요. 보석 같은 거 걸어도 안돼요. 주일날 신문 봐도 안돼요. 주일날 운동해도 안돼요. 여행은 말할 것도 없구요. 여자들은 치마길이를 잘 맞춰야 돼요. 남자들은 머리길이를 잘 맞춰야 돼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는 다 잊어버리고 자기들 나름대로 복잡한 규율을 만들어서 그것을 가지고 서로를 비판하고 정죄했던 것이죠.

그런데 꼭 미국만 그렇지 않았죠. 제가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닐 때도 율법을 가지고 서로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일이 많았어요. ? 교회가 목적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교회는 철저하게 세상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너희는 내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헐벗을 때 입을 것을 주었으니 너희는 다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라.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지극히 작은 형제 한 사람에게 나누고 베푼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게 교회의 일이에요.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최고의 구제가 뭔지 아세요? 돈으로 구제하는 것이지만 최고의 구제는 내가 건강하게 자기를 사랑하며 소명의식을 가지고 환한 얼굴로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구제예요. 옆 사람이 왜 그렇게 괴로워하는지 한번 물어 보세요. 다 나 때문에 괴로워하는 거예요. 내가 마음을 열고 생각을 열고 하나님의 은혜에 매여서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다 살아날 텐데.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죠.

예수님의 일상을 보면 참 느끼는 게 많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셔서 기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 하셨겠죠. 이 동네에서 복음을 전했으니 저 마을로 가자. 거기 가서 문제를 가진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경청합니다. 공감합니다. 그리고는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너무나 평범해요. 낮에는 말씀을 전하시고 밤에는 물러가서 쉬셨다고 했어요.

요즘 프로야구에 다들 푹 빠져있죠. 그런데 프로선수들이 그런 말을 하지요. 시합을 위해서 몸을 만든다. 우리 같으면 당장 신발만 갈아 신고 가면 되지 무슨 몸을 만들어? 그게 아마추어예요. 몸을 만든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하루하루 몸을 만들어야 돼요. 마음을 준비해야 돼요. 은혜의 그릇을 아침부터 준비하고 하루를 살아야 돼요.

내가 거기에서도 말씀을 전하리니 내가 이것을 위하여 왔노라. 그런데요,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이 주님을 찾습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말했어요. 제자들은 단편적으로만 봤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만 보지 않았어요. 가는 곳 마다 말씀을 전할 때 많은 이적이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나가고 고침 받는 사람도 많고 행복해하는 사람도 많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 기득권 세력들은 거부했어요. 마가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를 어떻게 할까? 어떻게 저를 죽일까? 예수님이 이것까지 봤어요.

공자가 이런 말을 했어요. 어떤 사람이 바른 사람입니까 하고 묻자 바르게 사는 사람들에게 칭찬 듣고 못되게 사는 사람들에게 욕먹는 사람, 그 사람이 바른 사람이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들으려고 하는 건 우리 욕심이에요. 진정 바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올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그릇되게 사는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는 사람이에요. 예수님은 언제 죽을는지 모르는 그런 위기를 알고 계셨어요. 그러하기에 그는 새벽마다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며 이 고난과 역경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날마다 공급받았던 거예요.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은혜를 공급받았던 것이죠.

여기 다섯 달란트 인생을 한 사람 소개하고 싶습니다. 디트리히 본 훼퍼 입니다. 그는 독일사람이죠. 스물 두 살에 신학박사가 되었어요. 스물 다섯 살에 교수가 되었어요. 스물 여섯에 목사가 되었어요. 그리고 서른에 신학교 교장이 되었어요. 이렇게 똑똑하고 잘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만 당시 독일은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때였습니다.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에 패배해서 자존심이 다 무너진 독일민족을 세계 최고의 민족으로 일으키겠다고 국민들을 선동했어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빠져들었어요. 열광했어요. 독일 교회도 히틀러를 지지했어요. 심지어는 뭐라고까지 얘기했냐하면, 하나님은 오늘날 히틀러를 통하여 우리에게 역사하신다. 그래서 인사말이 하일 히틀러가 된 거예요. 히틀러 만세예요. 히틀러가 구원이란 말이에요. 이렇게 온 나라가 헛된 환상에 속아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본 훼퍼가 막아섭니다. 고백교회라는 거죠. 히틀러는 전쟁으로 망하고 죽기 전까지 고백교회를 잔혹하게 탄압했어요. 디트리히 본 훼퍼의 친구들이 차례차례 잡혀갑니다.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합니다. 죽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지켜줄 사람이 없었어요.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미국으로 가서 공부한다는 명목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어요. 미국에 갔었어요. 그러나 끝내 그곳에 혼자 머물러 있을 수 없었기에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면서 자기 친구에게 깊은 고민을 말합니다. 왜 하나님은 오늘 이 고난을 이길 힘을 나에게 주지 않는가. 만약에 하나님이 그 힘을 주셨다면 왜 그 힘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가. 그때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지금 급한 마음으로 구하는 응답만을 구하기 때문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지금 이것을 주시는데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부르짖고 울부짖느라고 정작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또한 믿는 사람들의 죄가 아닌가. 깊이 생각하게 돼요. 일이 잘못되었을 때 잘못에 대한 책임과 형벌을 받을 준비는 되어있지만 값없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을 준비는 안되어있지 않는가.

여러분, 우리는 보통 선물을 좋아하면서도 간혹 선물을 받을 때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이 사람이 이걸 주고 뭘 기대하는 것은 아닌가. 세상이라는 건 다 주고 받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온전한 사랑을 깨끗한 믿음으로 받아드릴 준비가 안돼있다는 말이에요.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놀라운 얘기를 하셔요. 우리의 죄를 탕감하셨다. 두 사람이 식당에 갔어요. 맛있게 잘 먹었어요. 돈을 내려고 했는데 저 친구가 낸 거예요. 그럴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어요? 카운터에 가서 저 친구한테 받은 돈 돌려 주세요. 내가 내겠습니다. 이러면 관계를 깨뜨리는 거지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탕감하셨다. 십자가로 탕감하셨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갚을 길이 없어졌어요. 이제는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해결하셨어요. 이제는 그것을 깨끗한 마음으로 받아드리는 것뿐입니다. 이토록 연약한 나에게 날마다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디트리히 본 훼퍼의 전기를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있더라구요. 나에게 이런 고난과 고통과 죽음의 위기가 온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서른 아홉에 순교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한 달란트 인생이로구나. 그렇다면 한 달란트 인생에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다섯 달란트 인생을 산 사람들은 가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어요. 이런 위기 속에 앞장서서 싸우느라고 가정이 깨어지기도 했어요. 희생이었어요. 그러나 그것은 수 많은 한 달란트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예요. 그들이 앞장 서서 피 흘린 대가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자유로운 예배와 평범한 일상을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은혜로 가꾸어 가야 할 것입니다.

제가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을 때 화생방 훈련을 두 번 받았어요. 가스실에 들어가는데 유심히 듣고 요령을 잘 생각해서 첫 번에는 용케 잘 견디고 살아 나왔어요. 그런데 그 후에 또 한번 들어갔는데 실패했어요. 숨을 쉬는 순간 숨이 탁 막혀요. 죽겠더라구요. 이러다가 죽는구나 했어요. 가까스로 살아나왔습니다. 사는 게 때로는 내 노력으로 조금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생사를 하나님이 주장하고 계셔요. 오로지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거예요.

히브리서 12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그들이 그러했듯이,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만 바라보자. 그것이 바로 죽음까지도 이기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공급받고 승리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기도

하나님, 내가 이것을 위해 사노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인생의 목적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와 형제와 이웃을 주셨고 그 사랑을 마음껏 표현하라고 일터를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수많은 만남의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온전한 순종과 믿음으로 사랑을 맛보며 누리며 나누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