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너를 기뻐하리라[최진실,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감격해서사는삶]/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 17:04

081005 너를 기뻐하리라 ( 65:17-25)

성경본문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 못 되어 죽는 자는 저주받은 것이리라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의 건축한 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러분 이번 연휴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저는 책을 읽으면서 연휴를 보냈습니다. <중학생이 읽어야 할 소설> 이란 책을 하나 찾았어요. 한국근대문학의 대표적인 단편 모음집이었습니다. 이광수를 비롯해서 귀에 익은 여러 작가들의 대표적인 단편집이었어요.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거기에 <B사감과 러브레터>라는 책이 있습니다. 현진건 이라는 작가의 1925년 작품입니다. B사감은 사십이 다된 독신녀예요. 선생님이고 여학생 기숙사의 사감입니다. 아주 깐깐한 성격이고 외모는 곰팡이 쓴 굴비 같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남학생으로부터 연애편지가 들어오면 그 여학생은 아주 혼나는 거죠. 누가 보냈는지 모르는 편지일지라도 수신자가 될 경우에 아주 야단을 맞는 거예요. 그래서 여학생 모두가 고양이 앞에 쥐같이 벌벌 떨게 됩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밤마다 바람에 실려서 어디선가 남녀의 속삭이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거죠.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났던 한 여학생의 귀에 아주 또렷하게 두 남녀의 속삭이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래서 옆에 잠자고 있는 친구를 깨웁니다. , 너도 이 소리 들리니? 호기심에 못 이겨서 세 여학생이 도대체 어디서 이런 소리가 나는지 조심조심 찾아 나섭니다. 복도를 따라 소리 나는 방으로 갔습니다. 깜짝 놀랐어요. 그 방은 바로 B사감의 방이었어요. 그래서 조심스레 방문을 살짝 열고 들여다 보았더니 거기서 B사감이 많은 연애편지들 중 하나를 들고 읽으면서 혼자서 연극을 하는 것이었어요. 남자 목소리를 내다가 또 여자 목소리를 내면서 연극을 하는 것이었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여학생들이 아이구, 세상에 저럴 수가, 불쌍해라. 하는 것이 그 소설의 마지막입니다.

낮과 밤이 다른 것이죠. 그 모습이 다른 거죠. 작가는 그것을 비판하지 않고 슬며시 웃음으로 결말을 지었습니다마는 거기 보니 B사감을 기독교인으로 표현했어요. 그렇다면 1920년대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작가에게는 허울과 알맹이가 다른 모습으로 비춰졌다는 거죠. 

또 내친김에 심훈 <상록수>를 읽었습니다. 1935년 작품입니다. 어떤 내용인지는 다 아실 겁니다. 그때 전문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한 학생들이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든다는 내용이죠. 거기에는 채영신이라고 하는 여자주인공과 박동혁이라고 하는 남자주인공이 나옵니다. 두 사람의 사랑과 순수한 헌신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채영신이 병으로 죽는다는 결말을 그리고 있습니다.

원래 이것은 당대 인텔리였던 심훈이 동아일보 기자, 조선일보 기자를 거치고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서 충남 당진 고향에 파묻혀서 소설을 쓰고 있을 때인 1935 1월에 한 뉴스를 듣습니다. 최용신이라고 하는 서울에서 신학교를 나온 여 청년이 서울 YWCA의 파송을 받아서 지금의 경기도 안산 본오동, 그때로 말하면 반월 샘골에 들어가서 동네 주민들을 일깨우고 학교를 세워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헌신하다가 그만 스물 일곱 나이로 병들어 죽었다 는 뉴스를 듣고 느낀바 있어서 이 소설을 쓴 것입니다.

그 책을 읽을 때 새삼 눈에 띄는 게 있어요. 우리 귀에 낯익은 작가들이 왜 그렇게 젊은 나이에 죽었는지 모르겠어요. <봄봄> <동백꽃> 김유정이 스물 일곱에 죽었더라구요. 이상도 스물 일곱에, 김소월은 서른 둘에, 심훈만 하더라도 서른 여섯에 죽었어요. 페병으로 죽고 폐결핵으로 죽고. 돌이켜 생각하면 도대체 스물 일곱, 서른에 죽었으니 도대체 뭘 알고 죽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죽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최용신만 하더라도 1935년 스물 여섯에 죽었어요. 그 소식을 듣고 심훈이 쓴 소설이 동아일보 공모에 당선이 되고 신문에 연재가 돼요. 연재가 끝나자 자기도 덜커덕 죽었어요.  최용신의 아름다운 일이 있었습니다. 심훈이 그것을 듣고 기록으로 남기므로 그것은 오늘 우리 손에 들려져서 그의 아름다운 삶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안산 본오동에 가면 상록수역이 있고 최용신 박물관이 있고 그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어요. 또 그것을 보고 기록한 사람이 있었어요. 아름다운 일이 있었고 기록이 있었다면 이제 그 완전한 성취는 오늘 그것을 읽는 우리들의 손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일이 있었고 기록이 있었고 오늘 그것을 보는 나에게 있어서 그 삶이 재현될 때 그 모든 것은 완결되는 거예요. 저 자신이 책임을 느끼게 되더라구요. 먼저 살았던 사람들 특별히 최용신이 기독교인으로서 너무나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었구나. 짧은 인생을 살고 갔지만 그는 여한이 없는 삶을 살고 갔구나. 오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오늘 본문 이사야서는 하나님이 쓰신 소설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이 여기에 절절이 녹아 있어요. 전쟁이 있어요. 기근이 있어요. 재난이 있어요. 그리고 죽음이 있어요.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소망과 위로를 주시는 거죠.

특별히 오늘 말씀을 보니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노라. 신약의 요한계시록과 같은 분위기예요. 여러분, 실제로 그래요. 이사야서가 독특합니다. 66장까지 기록이 되어 있는데 마침 성경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두 66권이에요. 구약이 39, 신약이 27권 이렇게 되어 있는데 또 이사야서는 참 재미있게도 1장에서부터 39장까지가 하나님의 말씀과 불순종하는 백성을 향한 심판이에요. 율법과 심판이에요. 40장부터 66장까지가 그 불순종한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찾아가서 그들을 사랑으로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얘기해요. 마치 이사야서가 신구약 성경을 대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 65장이에요. 분위기는 요한계시록과 같아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노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새롭게 된 너를 내가 기뻐하노라. 여기 하나님의 구원이 잘 나타나 있어요 왜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느냐. 우리 스스로는 우리를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삶에 두 가지 모습이 있죠. 전쟁이 있고 재난이 있고 고통이 있을 때 우리가 이기지 못해요. 그러나 또 평안하면 어떻게 되느냐. 모든 일이 만사형통하고 잘 돼가면 어떻게 되느냐. 곧 지루해져요. 삶의 분명한 목적을 붙들지 못하면 잠깐 사이에 길을 잃어요. 왜 내가 여기 있는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는가. 스스로 물어야 해요. 분명한 목적을 붙들지 못하면 흔들릴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말씀하셔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노라.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모르기에 부해도 고민이 있고 가난해도 고통이 있어요. 하나님이 말씀하셔요. 누가 소경이냐. 누가 귀머거리냐. 나의 종 나의 백성이 소경이요, 귀머거리가 아니냐.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바로 네가 소경이다. 네가 귀머거리다. 본다고 하지마는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듣는다고 귀는 열어 놓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못했다. 그래서 어려운 일에 부딪혀서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 하고 절망하고 좌절하는 것, 그게 우리의 모습이죠.

하나님이 말씀하셔요. 너희가 내 명령에 귀를 기울이기만 했다면 너희의 평화가 강 같았을 것이고 너희의 공의가 바다의 파도 같았으리로다. 그렇다면 어디에 문제가 있어요? 하나님과 우리가 어긋나게 된 간극의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정확하게 진단하셔요. 우리를 빚으신 분이니까. 너 지렁이 같은 야곱, 벌레 같은 이스라엘아. 옛날 어린 시절에 지렁이가 나타나면 놀래가지고 발로 밟은 적이 있잖아요. 그렇게 발로 밟히는 존재이죠.

우리나라 교회역사 초기에 선교사들의 글을 읽어 보니 100년 전만 하더라도 서울에 한번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돌면 하루에 수백 명이 죽어 나갔어요. 한평생 가난 속에 살다가 병이 오면 맥없이 쓰러져서 쓰레기 같이 버려지는 존재였어요. 지렁이 같은 야곱, 벌레 같은 이스라엘아 옷은 근사하게 입고 공부는 좀 한 것 같습니다만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도 다를 바 없어요. 또 그런 위험을 피해서 백세를 산다고 한들 무엇을 남긴단 말이에요. 성경이 말합니다. 우리의 의는 더러워진 옷과 같고 마른 나뭇잎과 같다. 아름다운 것 같았으나 낙엽이 되어 바닥에 떨어져 누군가 지나가면서 밟아 버리면 바스러져 버리는 낙엽과 같다. 우리의 삶 속에 내어놓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셨다. 

너희의 기도에 응답할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너희는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너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는구나. 우리는 거룩하니 가까이 하지 말아라. 더러워질까 두렵다. 하나님을 잘 믿는 것 같은 모양은 가지고 있으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거짓된 사람이었어요. 이것을 알아야 되는 거죠. 이것을 발견해야 진정한 구원이 우리가운데 임하는 거죠. 이렇게 스스로 거짓에 사로잡혀서 볼 것을 보지 못하고 들을 것을 듣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여신 거죠.

그게 바로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의 종으로 오신 메시야의 십자가 죽으심이죠.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저는 그냥 자기 죄 값으로 죽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이었다. 여러분, 우리는 진흙 같은 인생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빚으신 토기장이죠. 이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들을 때에 그 안에 감동이 있어요. 순종이라고 하는 말을 헬라어로는 휘파쿠오 이렇게 말해요. 휘포라는 단어와 아쿠오라는 단어가 합성된 거예요. 휘포 아래라는 뜻이에요. 아쿠오듣는다는 말이에요.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거예요.

그런 생각을 많이 해봅니다. 여러분, 예전에 나름대로는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습니까? 또는 열심히 일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그런 자세로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리 삶 속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 되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셔요. 어찌 어미가 젖먹이를 잊을 수 있겠느냐. 예전에 결혼한 많은 분들이 그랬잖아요. 남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실망했지만 내가 낳은 자식을 위해서 견디고 사는 거잖아요. 엄마가 젖먹이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그러나 어미가 젖먹이를 잊을지라도 나는 결코 너희를 잊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이에요. 자기 이름을 걸고 하신 약속이에요. 겸손한 자 회개하는 자와 함께 하리라.

헨리 나우엔 이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어요. 성경을 보니 하나님은 죄인 한 사람이 돌아오는데 하늘 문을 여시고 하늘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기뻐하신다. 죄인 한 사람이 돌아오는 것뿐이에요. 세상의 모든 일이 해결된 거 아니에요.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온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한 죄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몸을 돌리고 마음을 열고 돌아올 때 하나님이 하늘문을 열고 기뻐하신다. 세상 끝날까지 전쟁과 재난과 고통은 영원할 것입니다. ?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을 찾을 인생들이 없기에. 그건 오히려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아마도 영원히 인간과 함께 존재할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돌아올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그 주인공이 누구예요? 바로 나예요. 오늘 하나님은 바로 나를 찾으시는 거예요.

여러분, 다 아시죠. 최진실의 죽음. 저도 정말 놀랐습니다. 너무 안타까워요. 제가 드라마를 끝까지 본 게 별로 없는데 그 중에 하나가 장밋빛 인생이에요. 최진실이 못된 남편 만나서 평생 고생하다가 결국 화해하나 했더니 암으로 죽잖아요.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요. 그런 사람이 그 드라마 보다 더 허무하게 죽었다는 소식에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장례식장 장면을 보니까 성도라고 썼더라구요. , 이 사람도 교회를 다녔구나. 이 사람도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이구나. 하나님은 마음이 넓은 분이니까 그가 그러한 선택을 했을지라도 아마도 그를 사랑으로 덮어주리라 믿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본인은 말할 것도 없지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붙들어 주었어야 할 것을. 보도에 따르면 그 전날 낮부터 내내 술을 마시고 인생을 한탄했으니. 결국은 술 취한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자살했으니 말이죠.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몰라요.

같은 날 또 다른 뉴스가 나왔어요. 예순 여섯 동갑인 두 사람이 2500km의 거리를, 남한을 한 바퀴 도는 그런 마라톤을 완주했다는 거예요. 최장거리 최단시일 최고령 기록을 남겼다는 거예요. 혼자 뛰라고 했으면 과연 뛸 수 있었을까. 마음이 하나가 된 두 사람이 같이 뛰면서 서로 격려하고 붙들어 주면서 함께 목적을 향하여 나간 거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족을 주신 이유는 이거예요. 혼자는 세상 못살아요. 자녀를 기르느라 고생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녀를 통해서 얻는 기쁨이 얼마나 큽니까. 나 혼자였으면 벌써 열 두 번도 더 넘어졌을 것이지만 자녀 때문에 참고 견디어 나가는 거 아닙니까. 부모형제와 함께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라고 하는 거 아닙니까. 그게 가족을 주신 이유죠. 서로 붙들어 주게 하는 거죠. 그러나 종국적으로는 언젠가 각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것이기에 내 죽음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있어야 되고 준비가 있어야 돼요.

여러분, 가수 김장훈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이미 기부로 유명한 사람인데 지난 10년간 45억을 기부했다고 합니다. 액수도 놀랍지만 그 내막을 살펴보면 거기에 놀라운 인간드라마가 있어요. 그의 인생이 고난의 연속이었더라구요. 아버지 없는 아이에요. 아버지 없이 어떻게 태어났겠어요. 그러나 아버지를 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 병약해서 3년 간 입원했던 어린 시절을 비롯해서 늘 병원 신세를 졌어요. 학교가면 늘 왕따 당하다가 결국 중퇴하고 또 가수로 어렵게 데뷔했지만 오랜 동안 무명가수의 설움이 있었어요. 한 십여 년 전에는 정말로 밑바닥에 떨어져서 월세 8만원 방에서 살아야만 했다는 거죠. 견디다 견디다 못해 너무 괴로워서 선배를 찾아가서 자기의 아픔을 토로합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을까요? 내가 어떻게 해야 이 밑바닥에서 좀 일어날 수 있을까요? 고집을 꺾고 비로소 이렇게 물으니까 그 선배가 딱 두 마디 했어요. 너 이제 좀 싸우지 마라. 네 속이 뒤집어 진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싸우면 되겠니? 두 번째는 언더그라운드 가수가 되겠다고 고집부리지 말아라.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니다. 이제는 방송에 나가라. 그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여요.

그때부터 문이 열렸어요. 98년엔가 나와 같다면 이란 노래로 인기를 얻었어요. 제가 한번 인터넷으로 찾아서 들어봤어요. 가슴을 울리더라구요. 드디어 인기를 얻었어요. 가수로서 무대에 서서 노래할 때 사람들이 열광하고 행복해 하는 것을 보니 너무 기쁜 거예요. 다 끝나고 나니 돈이 손에 쥐어졌어요.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기쁘게 해 주는 사람들에게 다시 돌려주자. 그때부터 자그마한 기부가 시작되었는데 지금은 반대가 돼버렸어요. 이 사람이 돈을 쌓아놓고 기부하는 게 아니더라구요. 기부하기로 작정을 하고 약속을 하고 그것을 벌기 위해서 열심히 무대를 뛰더라구요. 그러면서 말합니다. 20대에는 매일 죽을 생각만 했고 실제로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었습니다. 30대 들어서는 정말 나도 살고 싶었습니다 몸부림치면서 살고 싶었습니다. 40대 들어서는, 이 사람이 마흔 셋이거든요, 정말 살아 있는 느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지금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그런데요, 이제 만사형통해서 행복하다 그렇게 듣지 마세요. 그게 아니더라구요. 이 사람이 공황증이 있더라구요. 밤엔 잠을 못 자요. 그렇게 피곤한데도 밤에 누워있기는 한데 잠을 못 자요. 아침에 동이 터야 잠이 들어요. 밤새 텔레비전을 켜놓고 불을 켜 놓고 뒤척거리다가 해가 떠야 그제 잠이 와요.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그러니 날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들락날락하는 거예요.

그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더니 단호하게 말합니다. 잘 죽는 것이 내 꿈입니다. , 인기도 돈도 명예도 허망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나는 예전에 죽어도 몇 번 죽었어야 할 사람인데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살았습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단 하나, 잘 죽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잘 죽는다고 생각합니까? 오늘 잘 사는 것이 잘 죽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내가 받은 사랑에 감격하고 또 이 사랑을 나누어 주는 그것이 오늘 내가 살아야 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구약이기 때문에 구약의 복 개념을 가지고 백세 넘어 장수할 것이다. 네가 수고한 모든 것을 다 네가 가질 것이다. 네가 지은 집을 다른 사람이 차지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현세적으로 표현했지만 예수님이 해석하신 대로라면 진정한 행복의 본질은 백세를 사는 게 아니라 단 하루를 살더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붙들려서 감격해서 사는 삶. 그게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죠. 이게 그리스도인의 축복이요, 특권입니다.

 

기도

하나님, 있으면 교만하고 둔해지고 허무해 하는 우리들. 없으면 불편해 하고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안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우리 마음을 십자가 사랑으로 새롭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남편과 아내와 부모와 자녀와 형제와 일과 쉼과 건강과 또 병약함까지도 하나님의 은총인 것을 기억하게 하시고 지난 모든 날 하나님이 은혜로 붙들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남은 날을 뜨겁게 살게 하시고 기쁘게 살게 하시고 나누며 베풀며 살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총을 덧입으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