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그리스도안에서[손창남선교사=포기는 불순종 기다림은 순종]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 17:19

그리스도 안에서

2008 9 7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1:1-6)

 

여러분,‘장미란’선수를 다 아실 것입니다. 이번에 뉴욕타임즈에서 선정한‘베이징올림픽 아름다운 몸매 Best 5’에 첫 번째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115Kg이에요. 역도경기 시상식에서 다른 선수들과 같이 선 것을 보니까 그 몸매가 아름다운 것을 알겠더라고요. 아주 균형 잡힌 몸매죠. 그가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소개로 역도 코치를 처음 만났습니다. 그는 장미란을 보자마자“어우”그랬대요. 처음에는 부끄러워서 운동 못한다고 했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설득을 당해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운동 시작한지 열흘 만에 도 대회에서 1위를 했답니다. 물론 출전 선수가 두 명이었지요. 여자들이 역도한다는 건 누구도 생각 못했으니까요. 운동하게 된 것을 숨기고 다녔지만 대회에도 출전했으니 더 이상은 숨길 수 없어서 주위의 아는 사람들에게 어렵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요. “언니, 나 역도해요.”그랬더니 그 이야기를 들은 언니들이“뭘, 우리도 욕해.”그랬다는 거죠. 잘못 알아들은 거예요. 역도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으니까요.

   친구들은 다이어트할 때 자기는 몸집을 키우고 친구들이 화장할 때 자기는 송진가루를 묻히면서 고된 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합니다. 운동이 너무나 즐겁다고. 오히려 고민이 있대요. 체중이 늘지 않아서. 체중이 늘어야 더 무거운 바벨을 들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거예요. 은메달리스트는 165Kg이거든요. 이 얼마나 건강합니까. 이런 고백을 해요.“처음에 아버지가 역도를 하라고 했을 때 너무 싫어서 아버지하고 말도 하기 싫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그때 아버지의 결정은 너무나 옳았다. 내가 역도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끔찍하다. 지금은 너무 감사하다”하는 거예요. 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편지를 씁니다. 에베소서라는 것은‘에베소에 있는 교회 성도들에게 쓰는 편지’라는 뜻이에요. 사도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혀있는 동안에 편지를 쓴 것입니다. 제가 로마를 갔을 때 그 감옥에 가봤어요.‘야, 이런 데서도 사람이 살 수 있는가’싶을 정도의 지하 감옥이었지요.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기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에베소에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쓸 이야기가 있었고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거예요. 그의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그는 로마감옥에서 나왔다가 다시 잡혀 들어가서 끝내는 순교 당합니다.

   또 하나 오늘날 사도바울은 최고의 신학자로 평가 받아요.‘예수님의 복음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이고 기독교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다.’이런 아름다운 이름을 얻고 있습니다마는 적어도 이 에베소서를 쓸 당시 사도바울은 전혀 아니었어요. 오히려‘어떻게 바울이 사도냐’그 정체성을 의심하고 흔드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원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사도가 되었잖아요. 사도의 조건이 있었어요. 예수님께서 3년 공생애를 사시면서 복음을 전할 때 같이 있었던 사람, 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사람, 그 사역에 있어서 사도라고 인정할만한 분명한 증거가 있는 사람, 이게 필요조건이거든요. 근데 바울은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따라다니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조건으로는 뭔가 미흡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의 사도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또 남들이 하지 않은 새로운 선교를 개척한 사람이기에 그는 제대로 인정받고 평가받지 못했어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사도바울은 자기에 대해서 말합니다.‘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자기 정체성이 분명했어요.

   여러분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이 물음에 대해서 분명히 답할 수 있어야 돼요. 사도바울이 말합니다.‘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와 평강을 너희에게 전하노라.’우리가 왜 사는 것입니까? 백 년을 살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한 가지 버릇이 생겼는데요, 책을 읽으면서 그 사람이 몇 년을 살다가 죽었는가 살피게 되더라고요.‘야, 이 사람은 짧은 일생을 살면서도 하나님 앞에 이렇게 아름다운 신앙을 고백했는데 나는 오늘까지 살면서 부족하고 미흡하구나.’하는 것을 느껴요.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행복하게 사는 것이죠. 그 행복은 하나님이 지어주신 존재이기에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거죠.

   이런 유머가 있어요. 아담이 어느 나라 사람이냐 하는 논쟁이 벌어졌대요.“이라크 사람이다, 그리스 사람이다. 또는 유대 사람, 이집트 사람이다.”이렇게 얘기하는데 어떤 사람이 얘기합니다.“아담은 틀림없이 인도네시아 사람입니다.”전혀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발상이에요.“아니, 왜 그렇습니까?”“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손에 쥔 것이라고는 사과 한 알뿐이고, 입은 것이라고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엮은 팬티뿐인데도 거기를 낙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인도네시아 사람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하긴 그래요, 인도네시아 사람이 그만큼 낙천적이라는 거죠. 또 하나의 유머가 있어요. 아담이 만약 한국 사람이었다면 인류는 절대 타락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 뱀이 유혹할 때 그냥 잡아 먹어버렸을 테니까. 하긴 그래요.

   여러분, 정말 우리 삶의 행복의 조건이 뭡니까? 은혜와 평강, 너무 소중한 말이에요. 평강, 샬롬이라는 말이에요. 히브리 사람들은‘샬롬’, 회교권에 있는 사람들은‘살람’합니다만 같은 말이에요. 평강은 어디에서 옵니까?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어요. 하늘로부터 오는 은혜가 있을 때만 평강이 있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감옥에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놀라운 축복을 발견하라. 하나님이 교회에 부어주신 축복을 발견하라. 이것은 신령한 복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 은혜와 평강이다.

   신앙에도 수준이 있어요. 운동도 옛날 가난하고 못살 때는 권투라든지 레슬링과 같은 것에 얼마나 몰두 했습니까. 그러나 이제 먹고 사는 것이 나아지면서 운동의 양상도 점점 바뀌는 거예요. 요즘은 골프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물론 축구나 야구도 여전히 좋아하지만 그만큼 시설들이 갖추어져야 되는 거잖아요. 바뀌는 거예요. 신앙도 그래요. 너무 가난하고 없을 때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구할 수 밖에 없어요. 눈에 보이는 상황이 그러하므로 그 이상의 것을 좀처럼 생각하지 못해요.

   , 어떤 관점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말씀을 이해하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바른 신학이 있고 잘못된 신학이 있어요. 첫째는 주도권의 문제예요. 내 삶의 주도권. 하나님이 이끌어 가셔요.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응답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나 잘못된 신학은 내가 열심히 믿고 일하면 하나님이 보상하신다, 이런 거예요. 옛날에 가난하고 힘들고 못살 때에는 혹시 봐줄 수도 있었어요. 그러나 이만큼 살고 보니 그건 아니에요. 이제는 우리의 신학도 성경 이해도 한 차원 높이 생각해야 돼요. 은혜란 무엇이냐.‘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힘쓰고 애쓰고 구했더니 하나님이 응답하셨다, 이게 은혜다.’맞기는 하지만 아주 좁은 이해예요. 은혜를 더 폭넓게 이해해야 돼요. 하나님께 지음 받은 인생이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기 위해,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모습을 내 안에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모든 것, 좋은 것도 있지만 눈물도 있고 연단도 있어요. 이것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이해하는 것, 이게 성숙한 신앙이요, 바른 신학이죠. 보상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두는 거죠. 또 다른 사람이나 외적 상황을 고치는 것이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내면을 새롭게 하고 온전케 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비밀인 것을 아는 것이죠.

   오늘 성경이 말합니다.‘창세 전에 나를 선택하셨다. 기쁘신 뜻을 가지고 나의 인생을 예정하신다. 하나님이 섭리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다. 아무런 자격 없는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셨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은혜다.’여러분, 이렇게 이해할 때만 평강이 있어요. 이 놀라운 은혜와 평강을 어디서 구할 것이냐.‘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영생을 이야기 합니다. 요한복음 17 3절에 보니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여러분, 일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똑바로 보고 바르게 알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밤에 하나님이 부르신다면 주저함 없이 천국에 갈수 있다, 이런 고백이 있어야 돼요. 그것이 없다면 신앙의 기초가 연약한 거예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희생제물이 되셨다. 구약 이사야 53 4-6절 말씀에 메시야의 수난을 예고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메시야 예언의 말씀에‘그’대신에‘예수님’을 넣고‘우리’대신에 자기의‘이름’을 넣어 보세요. 그리고 다시 한번 조용하게 읽어 보세요. 제 이름을 넣어 읽어보겠습니다.‘예수님은 실로 영수의 질고를 지고 영수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영수는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예수님이 찔림은 영수의 허물을 인함이요, 예수님이 상함은 영수의 죄악을 인함이라.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영수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영수가 나음을 입었도다. 영수는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영수의 죄악을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되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그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시고 하나님을 떠나 양과 같이 헤매던 나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내 죄를 용서하시고 자녀가 되게 하시고 자녀의 축복을 누리게 하셨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은혜는 뭐냐, 여러 가지 체험이 있습니다만 은사나 체험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방편이요 수단이에요. 궁극적인 목적은 뭐냐.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이심을 증거하시는 거예요. 말씀을 들을 때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찬송을 부를 때 그 가사가 나의 신앙 고백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어떻게 기도해야할 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 욕심에 매여서 기도하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속에서 안타까워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시는 거예요.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합니다.‘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담겨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이다.’이것이 교회의 영광이요, 교회의 축복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증거하는 것, 그게 교회의 본질이요, 교회의 사명이에요.

 ‘칼 바르트’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어요.‘예수 그리스도는 세 번 오신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며 마지막 날 종말에 다시 오실 것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교회 가운데 오신다.’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오늘 교회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일을 우리가 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하는 것이죠.

   <아라비안 나이트>라는 책을 아시죠. 그런데 <족자비안 나이트>라는 책이 나왔어요. 이것은 족자에서 십 년 동안 대학생 사역을 성공적으로 하신‘손창남’선교사님이 쓰신 책이에요. 저는 이 책을 받았을 때 너무 기뻤어요. 왜 그러냐. 한인들이 이 땅에 와서 40년을 지내면서 그간 기업가들의 전기가 몇 권 있었어요. 저는 내심 이곳 한인선교 역사도 근 40년이 다 돼가는데 선교 역사에 대한 기록도 나와야 된다 라고 생각했는데 마침 나온 거예요. 이건 그분만의 기쁨이 아니에요. 우리 모두의 기쁨이에요. 그분은 원래 한국에서 세무대학의 교수였습니다. 경영학과 회계학을 가르치시는 분이었어요. 그러다가 그분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헌신한 가운데 족자에 있는 두따와짜나 대학에 교수로 오게 됩니다. 

   그가 참으로 성공적인 대학생 사역을 한 것은 아름다운 선교의 모델이 되요. 참 감동이에요. 그러나 오히려 저에게 더 큰 은혜가 되었던 것은 그가 그런 성공적인 사역을 하기 전에 어려움을 겪는 과정 속에서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는가 하는 부분이었어요. 그가 선교사로 결정이 되고 3년을 훈련 받습니다. 한국과 싱가폴에서 훈련을 받고 반둥에 가서 언어 훈련을 받고 족자의 대학에 교수로 갔어요. 반둥에서 1년이나 말을 배웠고 한국에서 강의를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거든요. 첫 학기를 맞았습니다. 기도하고 들어갔어요. 아주 자신만만하게 들어갔어요. 그런데 말이 안 되는 거예요. 하기는 아무리 자기가 전공하는 과목을 가르친다고 해도 현지 학생들은 대학생들이고 자기가 아무리 부지런히 말을 배웠을지라도 중학생 수준 밖에 안 되는 말을 가지고 전달할 길이 없는 거예요. 또 가르치는 것은 어떻게 만들어서 가르치는데 학생이 질문을 하면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는 거예요. 문제를 내서 시험을 치렀는데 도대체 학생들이 뭐라고 썼는지,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분량을 보고 A, B 이렇게 줄 수 밖에 없었어요. 너무 고민에 휩싸인 거예요. 시간마다 도살장에 들어가는 기분인 거예요.

   그 때 의문이 생겼어요.‘내가 제대로 온 거냐?’한국에서 세무대학에서 기쁘게 가르치고 학생들과 성경 공부하면서 신앙을 지도하고 했어야 하는 것을 괜히 여기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겼어요. 고민하다가 포기했어요.‘그래, 여기서는 회계학이나 잘 가르치자.’학생들을 일대일로 불러서 신앙에 대해서 말하려니 인사말 몇 마디 하고는 말이 안 돼서 포기했어요. 포기하니까 마음이 오히려 후련해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요. 학기를 마치고 방학을 맞이해서 아이들하고 바닷가에 놀러 갔어요. 가족이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어요. 어느 날 아침에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초등학교 2학년짜리 딸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아빠, 우리는 참 웃기는 가족이다.”깜짝 놀랐어요.“무슨 얘기야?”“아빠는 여기 선교사로 왔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날마다 맛있는 것만 먹고 이렇게 놀고 있으니 웃기지 않아요?”너무 당황했어요. 그래서 적당히 둘러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얘야, 여기서는 다 이렇게 그냥 가르치는 거야.”한국에서는 아빠가 많은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봤기 때문에 그 말을 던진 거죠. 그날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도대체 내가 무엇 하러 왔는가. 내가 여기서 아무 쓸모없는 존재가 아닌가.’자책을 하며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때에 선교 훈련을 받을 때 함께 했던 동료가 물었던 물음을 떠올리게 됩니다.“선교사님, 만약에 뜻한 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 선교사님은 돌아오시겠습니까? 아님, 거기 머무시겠습니까?”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분이 다시 얘기합니다.“우리가 선교지에 있는 것은 내가 사역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에 대한 순종만이 열쇠입니다.”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새롭게 다짐합니다.포기는 불순종이지만 기다림은 순종이다. 묵묵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자.’그것이 부름 받은 자의 자세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위로와 소망과 평강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