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10724 무화과 첫 열매같이 (막 11:11-19)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2. 10. 8. 12:40

110724 무화과 첫 열매같이 (막 11:11-19)

성경본문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성경을 읽다 보면 풀기 어려운 난제들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모순이거든요.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침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에 배가 고프셨다 마침 저 멀리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해서 가서 열매를 찾았더니 열매가 없었다.' 그 까닭이 '무화과 열매를 맺는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명을 해놓았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그 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얻지 못하리라' 말씀하셨는데 결국 그 다음날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다 말라 버렸다고 하는 거죠. 열매를 맺지 못할 때에 열매를 찾으시더니 열매가 없다고 저주했다면, 사랑의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모순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너무 배가 고파서 이성을 잃었다"고 합니다. 배고프면 신경질을 내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또 다른 고상한 해석이 있습니다. "지금 상황은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의 월요일인데 목요일에 유월절 만찬을 베푸시고 곧이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다가 붙들려 밤새 재판을 받고 금요일 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 자기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만 이런 실수를 하셨다." 재밌게도 이거는 우리가 잘 아는 슈바이처 박사의 해석이에요. 그는 유명한 의사이면서 동시에 신학자였어요. 인간 예수에 초점을 둔 해석이지요.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모두 이스라엘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빚어진 것들입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나무가 무화과나무 입니다. 무화과나무는 보통 4월부터 10월까지 건기에 다섯 번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절기로 말하면 4월 유월절부터 10월 초막절까지 열매를 맺는 거예요. 그런데 유월절에 맺는 첫 열매는 보잘것없어요. 그게 맺혀졌다가 떨어진 자리에 당도가 높고 탐스러운 열매들이 여러 번 거듭 맺히게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는 무화과 열매를 가리키는 단어가 두 가지에요. 헬라어나 영어나 우리말에는 다 하나 뿐이지만 히브리어에는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어요. 첫 열매를 '파게'라고 하고 뒤에 맺는 본격적인 열매를 '테헤나'라고 말합니다. 첫 열매인 파게는 보잘것없어요. 시장에 내다 팔만한 것은 못돼요. 그걸 일일이 따줘야 되는데 너무 번거로운 일이니까 지나가는 누구라도 맘대로 따먹도록 허락한다는 거지요. 그렇게 해서 농부의 수고를 덜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첫 열매가 보잘것없고 당도가 낮고 상품성이 없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나마 소중한 열매에요. 왜냐하면 오랫동안 열매를 맺지 못하는 우기 내내 가난한 사람들은 열매를 먹을 수가 없거든요. 부자들이야 건기의 열매들을 저장해 놓았다가 꺼내 먹으면 되지만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은 그럴만한 여유가 없거든요. 오랫동안 목마르게 기다리던 열매요, 아주 소중한 열매인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배고프셨을 때에 ‘혹시 파게라도‘하고 다가가셨던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이 본문을 다시 살펴본다면 예수님께서 배가 고프셨을 때 저 멀리 무화과나무가 잎이 무성한 것을 보시고 혹시나 잘 익은 ‘테에나‘를 얻을 수 있을까하고 가서 살펴보니까 열매가 없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더 놀랍게도 '파게'마져도, 비록 보잘것없지만 배고픈 사람에게는 양식이 될 수 있는 파게마저도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제 말씀하신 거예요. '탐스러운 열매는 그만 두고 마땅히 있어야 될 파게, 첫 열매조차 맺지 못하니 너는 앞으로 열매 맺기는 다 틀렸구나' 그런 말씀이 되겠습니다.

무화과의 첫 열매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미가 7장 1절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내 마음에 사모하는 무화과 첫 열매가 없구나' 하나님이 당시 이스라엘을 볼 때 '온전히 하나님을 사모하며 예배하는 자가 없구나' 하는 뜻으로 쓴 거예요. 무화과 첫 열매는 영적 상태를 표현하는 그들의 관용적인 표현이지요.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도 보니까 무화과 이야기를 예루살렘 성전 이야기와 연결시켜 놨어요. 이미 전날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셔서 예루살렘 성전을 다 둘러보셨어요. 그들의 영적상태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거예요. 그 다음날 나가셔서 무화과나무 사건을 겪으시고 곧바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셨어요. 그리고 채찍을 들고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소와 양과 염소, 비둘기들을 다 쫓아내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뒤집어 엎으셨어요. 왜 그랬느냐?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러 올 때 제물을 가지고 오는데, 부자들은 소나 양, 염소를 가난한 사람들은 비둘기를 가지고 오는 거예요. 자기 형편을 따라서 각각 제물을 가지고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당시 성전이 얼마나 타락했던지 백성들이 가지고 나오는 제물을 제사장들이 심사하게 돼 있어요. 흠이 있는 걸 가지고 나오면 안되니까요. 비록 가난해서 비둘기를 가지고 올지라도 흠이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전 밖에서 준비해 온 제물은 다 부정하다고 판정하는 거예요. 성전 안에 마련한 가게에서 제물을 사도록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인들에게 뒷돈을 받고 가게를 열게 했겠죠. 거기서 비싸게 산 제물만 합격 판정을 주는 거예요. 심지어 흠이 있는 짐승까지도 합격 판정을 주었던 거지요. 우리 사회에서 종종 듣던 이야기들이 이천 년 전 유대땅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지요.

또 하나님께 드리는 성전세는 당시 통용되던 이방인의 로마화폐로는 안되고 유대인들의 화폐인 ‘세겔’로만 드려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전에 와서 유대인의 동전으로 환전해야 하는 거예요. 환전 수수료를 비싸게 받는 거지요. 이렇게 제사장들이 장사꾼들과 서로 묵계를 해서 부당한 이득을 나누는 구조가 되어 있는 거지요. 예수님이 그 타락한 모습, 썩어 냄새 나는 것을 견디지 못해서 다 내어 쫓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구약 이사야서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는데 너희는 어찌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느냐'

그때 예수님은 나이가 서른셋밖에 안되었으니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아니, 저 친구가 왜 저래?' 그랬을 거에요. '물론 성전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는 거룩한 곳인데 왜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거야?' 특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분노합니다. 훼방자가 나타났다고 생각하면서 분노하는 거예요. 여기 예수님의 분노가 있고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분노가 있어요. 서로 분노하는 거예요.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요한복음에 보면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성전을 다시 일으키겠노라'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죄목이 성전 모독죄였어요. 예루살렘 성전은 아기 예수를 죽이려 했던 헤롯왕 때부터 시작해서 46년째 계속 확장 공사를 하고 있던 거에요. 아주 화려한 성전이었는데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헐라'했으니 성전 모독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에 어떤 뜻이 있습니까? 사흘 만에 성전을 다시 짓는다는 말은 ‘성전된 자기 몸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자기의 몸을 성전에 비유하셨어요.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을 예고하는 말씀이에요.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잖아요. 어떻게 예배합니까? 구약시대에는 제물을 가지고 나와서 제사를 지냈습니다마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더 이상 제물을 가지고 나오지 않는 거예요. 오직 예수 이름으로 나옵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을 믿으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예배의 비밀이에요. 이것을 놓쳐서는 안돼요.

오늘 말씀에 '하나님을 믿으라' 했어요. 성전에 나와서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겠어요? 아니요. 믿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볼 때에는 그렇게 적당히 제물을 가지고 나와서 적당히 하나님을 만족시키려 하고 자기만족을 얻으려 하는 거짓신앙이에요. 그런 허위와 위선을 깨뜨리고 십자가 아래 엎드려 우리의 원초적인 허물과 연약함을 주님 앞에 고백해야 되죠.

여러분, 다윗 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양치기 였어요. 어느 날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서 그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으셨어요. 왕이 되리라는 약속을 주셨어요. 온갖 고난 속에서 나이 삼십에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됐어요. 인간 드라마로 말하면 이런 놀라운 일이 없어요. 하나님이 도우셨어요. 그러나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어요.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안돼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이렇게 성공했다.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은 맞지만 신앙이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다윗의 신앙은 그 다음부터 진면목을 드러내게 되요. 왕이 되고 보니 이제부터는 신앙의 초점이 자기에게로 모아져요. 왕이 됐다고 모든 일이 다 저절로 풀리지 않아요. 결코 평탄하지 않았어요. 그 집에 많은 어려움이 들이닥쳤는데 놀랍게도 그 많은 환란은 자기로부터 시작되었어요. 왕이 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나아가서 평생의 원수였던 블레셋을 꺾고 수많은 이웃나라들을 꺾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또 승리했을 때 다윗의 마음에 교만이 싹텄어요.

나중에는 온 군대가 나가서 전쟁을 하고 있는 동안에 다윗은 홀로 왕궁에 머물며 낮잠에서 일어났다가 밧세바가 목욕하는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결국 부하의 아내를 빼앗아 취하지 않습니까? 자기의 죄를 숨기려고 충성스런 이방인 부하 우리야를 불러 끝내 그를 죽이지 않습니까? 누구도 모르게 죽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낱낱이 지켜 보시다가 선지자를 보내시고 다윗을 책망하셔요. 그때에 다윗이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마음을 찢으면서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합니다. 시편 51편에 다윗이 회개하는 기도가 나오잖아요. 그때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으시는 것은 그럴듯한 제물이 아니라 우리의 찢기고 상한 마음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일할 때 일 잘하고 못하고 시비할 필요가 없어요. 많은 분들을 만나보면 하나같이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에 대해서 목에 핏대를 올리면서 힘주어 이야기합니다. 구구절절 다 맞아요. 그러나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기 위해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모임에는 나타나지 않아요. 말과 실천이 너무 달라요. 그럼 누가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를 세워야 하는 거예요? 교회의 개혁을 이야기 하려면 그 일에 함께 할 마음이 있는 사람만 얘기해야 돼요. 술 마시면서 안주거리로 이야기하면 안돼요. 안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 할지 몰라도 믿는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돼요. 그런 말을 하려면 책임을 져야 해요.

여러분,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성전을 다시 일으키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놀라운 사랑, 그 사랑을 힘입어 오늘 우리가 사는 거예요. 제 잘난 맛에 사는 세상이라지만 그러나 여러분, 믿는 사람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는 거예요. 그 사랑으로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한 잘했네, 못했네 절대 얘기해선 안돼요. 그런 말할 자격이 없는 거예요. 그거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에요.

성경은 성전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합니다. '온전한 예배가 살아있고 만민이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는 집이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은 구원과 관계없어요. 유대인들은 원래 전도 안하잖아요. 지금도 유대인들은 전도 안해요. 이방인들은 어차피 죽어 썩어질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걸 바로 같은 유대인이었던 예수님이 바꿔 놓으신 거예요. 하나님은 모든 인생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고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다. 이방인들에게 나아가서 이 복음을 증거해야 된다는 거예요. '만민이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는 집이다' 라는 거예요.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터에서 예수 이름을 의지하고 기도해야 하는 거지요. 여러분, 302장 찬송을 아시지 않습니까.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너 곧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저 한가운데 가보라”

콜럼버스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콜럼버스의 <항해록>을 읽어 보면 콜럼버스는 55세 일기로 세상을 떠난 이탈리아 사람이에요. 젊어서부터 배를 탄 사람이에요. 그 당시 새롭게 등장한 '지구는 둥글다'는 이론에 귀기울인 사람이에요. 당시 많은 사람들이 대서양 끝이 사람들이 떨어져서 죽는 낭떠러지라고 생각했지만 분명 서쪽으로 가도 인도에 닿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에요. 포르투칼 왕에게도 가서얘기해 보고 또 에스파냐 여왕에게도 얘기 합니다. 결코 꿈을 버리지 않았어요. "여왕이시여!틀림없이 서쪽으로 나아가도 인도에 갈 수 있습니다. 제가 그 땅을 다 왕에게 드리겠습니다. 모든 금은 보화를 다 왕에게 드리겠습니다. 단 저를 당장 귀족으로 인정해 주시고 함대의 제독으로 임명해 주시고 새로 발견한 인도의 총독으로 지명해 주십시오. 거기서 나오는 모든 수입의 10분의 1을 저에게 주시고 또 나중에 장사해서 버는 이득의 8분의 1을 저에게 주십시오. " 드디어 여왕이 허락했어요.

드디어 나이 사십에 시작해서 결국 죽는 날까지 네 번에 걸쳐서 십여 년간 항해를 시작합니다. 왕의 허락을 받고 처음 세척의 배와 90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대서양으로 출발해요. 고생이란 말 할 수도 없죠. 드디어 섬을 발견합니다. 그는 그게 인도로 가는 섬이라고 생각했어요. 원주민들을 '인디오'라고 불렀어요. 인도 사람들이라는 뜻이지요. 또 근처에 '저팬' 일본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많은 착각 속에 있었지만 꿈을 버리지 않고 나아갔어요. 질병도 있었고 식량이 부족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어요. 모두 네 차례 항해를 하는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 붙었어요. 콜럼버스가 첫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니까 두 번째 항해을 시작할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뛰어 들어가지고 열일곱 척의 배에다가 1,200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신대륙으로 나아갔던 거지요. 반란도 일어납니다. 고소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끝내는 음모에 걸려 들어 해임되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어요. 죽는 날까지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항해록을 읽어보니 그는 신앙인이에요. 콜럼버스의 항해를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반대했어요. "그거는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다. 무서운 재난을 초래하는 일이다. 그를 종교 재판에 회부해야 된다." 라고 주장하기까지 했어요. 그러나 그는 "내가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는 것은 그곳에도 그리스도교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것이다. 이게 궁극적인 목적이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셔서 반드시 황금도 발견하고 안전하게 귀환하게 될 것이다." 때로는 주일이어서 항해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어요. "오늘 내 항해는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이 될 것이다." 참 대단한 도전가이고 모험가에요.

여러분, 우리가 일터에서 기도하는 것, 그것은 교회를 확장하는 거예요. 요즈음 새로 나온 구호가 뭐냐? 여러분의 기업은 ‘하늘에 뿌리 내린 기업’이에요. 그 구호 그림이 너무 맘에 들어요. 나무가 땅에 뿌리박힌 게 아니라 하늘에 뿌리가 박혀 땅으로 무성한 가지를 뻗는 나무. 여러분의 기업은 하늘에 뿌리 내린 기업이에요. 여러분의 기업은 확장된 교회에요. 일터 교회에요. 주일예배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를 새롭게 발견하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서 계속 기도하는 거예요.

이제 우리는 콜럼버스가 미지의 세계로 항해를 하듯이 'WPA 2012 <World Prayer Assembly> 세계기도성회'가 내년 이곳 자카르타에서 열려요. 삼십년 만에 열립니다. 1회 대회는 1984년에 한국에서 있었어요. 한국이 기독교 선교 100년을 기념하는 그해에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과 대학생선교회(CCC) 김준곤 목사님이 함께 뜻을 모아 전 세계 중보기도자들과 한국 성도들이 같이 모여서 전 세계를 위해서 기도하자. 오늘 한국의 무서운 성장과 발전은 삼십 년 전 그때 전 세계에서 모인 수많은 중보기도자들의 기도의 응답이에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응답하신 거예요. 지금 삼십 년 전 한국교회 같이 인도네시아 교회가 뜨겁게 기도하고 무섭게 성장 발전하고 있어요. 여기가 이슬람 선교의 문이에요. 하나님이 역사의 물길을 이쪽으로 돌리시는 거예요. 지금 우리 앞에서 홍해가 갈라지려고 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과 관심, 모든 것을 다 기도로 묶어서 세계기도성회에 같이 참여해야 합니다. 2012년의 행사만 중요한 게 아니라 날마다 새벽마다 기도의 벽돌을 쌓아 올려야 해요.

콜럼버스가 믿음을 가지고 항해했듯이, 새로운 대륙을 발견해서 하나님께 드리려 했듯이 저는 남은 인생을 드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한인공동체를 이뤄가기를 원해요.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뛰어요. 무화과 첫 열매같이. 그거 농부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거예요. "마음대로 와서 먹으시오." 그래야 그걸 일일이 따는 수고를 덜을 테니까. 그러나 한겨울 내내 열매에 굶주렸던 사람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열매에요. 저나 여러분이나 잘난 것 아무것도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 속에 우리를 부르셨어요. 여러분, 내 능력으로 살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계시는 그곳에 함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신앙인이에요.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시기 전에 모세에게 뭐라고 얘기 했습니까? '너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라 너희는 오늘 가만히 서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는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 눈을 열고 귀를 열어 하나님의 이적을 보고 들으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무화과 첫 열매 같은 인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